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시·문학·설화

[영상시] '꽃' - 김춘수 작

잠용(潛蓉) 2015. 9. 4. 19:37

 

'꽃'

김춘수 작 / 낭송 유남희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 '꽃'의 상징적 의미

이 시에서 '꽃'은 구체적 사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시인의 관념을 대변하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꽃이다. 또한 명명 행위를 통해 의미를 부여받은 존재이다. 시인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의미와 관계가 확인되고, 주체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을 '꽃'으로 상징한 것이다. 이 시는 '꽃'을 소재로 하여 사물과 그 이름 및 의미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를 추구하고, 존재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소망하고 있다.

 

1 연에서는 구체적인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에 '그'는 의미 없는 무수한 사물들 중 하나였다. 여기서 '하나의 몸짓'이란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의 막연한 상태를 나타낸다. 2 연에서 내가 대상을 인식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비로소 '그'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나'에게 다가온다.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고 이름을 부를 때, '꽃'이라는 의미 있는 존재로 나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3 연에서는 존재의 본질 구현에 대한 근원적 열망이 나타나 있다. 인식의 주체인 '나'도 대상인 '너'에게로 가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4연에서는 시적 화자의 본질 구현에 대한 소망이 '우리'로 확산되고 있다. '나'와 '그'가 고립된 객체가 아니라 참된 '우리'로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어야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나'와 '그'와의 관계이다. 그 둘의 관계는 처음엔 무의미한 관계였다가 상호 인식의 과정을 통해 서로에게 '꽃'이라는 의미 있는 존재로 변모하고, 마침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나'만 중심이 되거나 '너'만 중심이 되는것이 아니라, '우리'로 합일(合一)되어 서로가 서로의 존재 근거가 되는 상호 주체적인 관계에서 본질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 작가의 말 - 나의 연작시 '꽃'
내가 꽃을 소재로 하여 50년대 연작시를 한동안 쓴 데 대해서는 R. M 릴케 류의 존재론적 경향에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6·25 동란이 아직 그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 나는 마산 중학(6년제)의 교사로 일을 보고 있었다. 교사(校舍)를 군(郡)에 내 주고 판잣집인 임시 교사에서 수업을 하고 사무를 보고 할 때이다. 방과 후에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뭣 때문에 그랬는지 그 판잣집 교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저만치 무슨 꽃일까, 꽃이 두어 송이 유리컵에 담겨 책상머리에 놓여 있었다. 그걸 나는 한참 동안 인상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는 분위기 속에서 꽃들의 빛깔이 더욱 선명해지는 듯했다. 그 빛깔이 눈송이처럼 희다. 이런 일이 있은 지 하룬가 이틀 뒤에 나는 '꽃'이란 시를 쓰게 되었다. 힘들이지 않고 시가 써졌다.

 

◇ 김춘수(金春洙, 1922 ~ 2004) 약력
시인. 경남 충무 출생.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초기에는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사물의 존재와 의미를 추구하는 시를 썼으나, "타령조기타"(1969) 이후 시에서는 모든 설명적 요소와 논리적 요소를 제거시키고 언어의 이미지만을 추구하는 무의미의 시를 썼다. 시집으로 "구름과 장미"(1948), "꽃의 소묘"(1959), "처용단장"(1974), "김춘수 시집"(1986), "쉰한편의 비가"(200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