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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한시] '감옥에서 벗을 그리며'- 김창숙(金昌淑)

잠용(潛蓉) 2015. 8. 23. 12:15
감옥에서 벗을 그리며

앵두꽃 핀 창가에 서리처럼 흰 달빛이
미치광이로 하여금 감상에 젖게 하는데
벽 너머 벗들은 딴 세상에 있는 듯하니
누구를 향해 이 심정을 토로할까

櫻花窓畔 月如霜
便使狂奴 惹感傷
隔壁故人 如隔世
向誰傾倒 此肝腸

 

-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심산유고(心山遺稿)』 권1 
「옥중에서 함께 갇힌 안창호와 여운형을 생각하다[獄中感憶同囚人安昌浩呂運亨]」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암살’이라는 영화가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930년대 상해(上海)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비밀 요원들의 활약과 민족을 배신한 변절자의 말로(末路)를 박진감 있게 그린 영화이다. 일제 침략기 중국에는 수많은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성균관대학교 설립자로 널리 알려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도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분이셨다.

  선생은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 태어나 남다른 지위와 명망을 누릴 수 있는 처지였지만,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고난의 삶을 선택하여 일생을 조국의 독립이라는 민족적 대의를 위해 바쳤다. 젊은 시절에는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1920년대에는 중국에서 혁명적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의열단원인 나석주(羅錫疇) 의사(義士)가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서울에 잠입한 뒤에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의거(義擧)는 바로 백범(白凡) 김구(金九)와 심산 선생이 계획한 일이었다.

  이 시는 심산 선생이 1932년경 대전 형무소 옥중(獄中)에서 독립운동의 동지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을 그리며 지은 것이다. 앞서 선생은 1927년 상해의 공동조계(共同租界)의 영국인 별원(別園)에서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14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혔다. 도산과 몽양도 선생이 체포된 몇 년 뒤에 상해에서 잡혀 세 분이 같은 형무소에 갇혔던 것이다. 이때 겪은 고문과 수감 생활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된 선생은 자신의 호(號)를 ‘앉은뱅이 늙은이’라는 뜻의 ‘벽옹(躄翁)’이라고 지었다.

  해방이 되자 선생은 우익과 좌익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하여 정계(政界)와는 차츰 멀어졌고, 이후로는 성균관대학교의 설립과 운영에만 매진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심해지는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를 좌시할 수 없었던 선생은 정면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56년에는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결국 병마와 가난 속에 집도 한 칸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 1962년 서울의 어느 병원 병상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다음의 시는 1957년 요양을 위해 고향인 성주(星州)로 내려갔으나 옛집이 허물어져 머물 수 없어 조상의 사당에 임시로 거처하게 되었을 때의 감회를 읊은 시의 일부이다. 조국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독립운동가의 처지가 너무도 처량하여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조국 광복 위해 평생을 몸 바쳐서
넘어지고 쓰러지길 어언 사십 년
뜻한 사업은 이미 어그러지고
몹쓸 병만 공연히 몸에 남았네

거동할 땐 도움이 필요한 처지
숨 헐떡이며 괴이하게 연명하누나
병든 노구를 이끌고 돌아온 고향
동강대는 잿빛 연기에 휩싸였도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찾아든 옛집
무너진 벽과 서까래 몇 개만 남아
병든 이 몸이 돌아갈 곳 없어
선조의 사당 앞을 서성거린다

獻身 光復役
顚沛 四十年
志業 已乖敗
廢疾 徒沈綿

臥起 長須人
喘息 怪尙延
舁疾 歸故山
岡臺 掩灰煙

傴僂 尋故巢
壞壁 餘數椽
病軀 無所歸
徊徨 先廟前

                                     - 이하 략 -

 


 

글쓴이 : 양기정(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