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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념

[역사 교과서] 불쌍한 국민을 속아는 홍보전

잠용(潛蓉) 2015. 10. 29. 08:44

[역사 교과서] 국회 밖 싸움, '현수막 전쟁'
시사INLive | 김동인 기자  | 입력 2015.10.29. 04:01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여론전으로 확대되면서 정당별 ‘현수막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법정 대결로까지 치달을 전망이다. 10월14일 새정치민주연합은 사실 왜곡 논란이 일었던 새누리당의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현수막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새누리당은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하겠다'라고 대응했지만, 당분간 여야 간 현수막 전쟁은 불가피하다.

 

법적 대응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야권은 그동안 여당의 선제 홍보전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기초연금, 공무원연금 등 여야 합의 끝에 주요 법안이 처리될 때마다 새누리당이 ‘우리가 해냈다’는 메시지를 앞서 내걸었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관계자는 '새누리당이 늘 먼저 치고 나오니 우리는 뒤늦게 무언가를 설명해야 하는 구도였다. 대응 현수막을 걸더라도 수세 입장에 있기 때문에 메시지가 밋밋해진다. 의사 결정 과정이 너무 늦다는 불만도 많았다'라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홍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7월6일 손혜원 홍보위원장 영입과 함께 전면에 부각됐다. 손 위원장은 7월25일 자신의 SNS를 통해 '제가 당에 출근하면서 처음 듣는 말이 ‘현수막, 현수막’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손 위원장이 처음 출석한 7월6일 최고위원회에서 당 지도부도 한목소리로 현수막 홍보 대책을 주문했다. 장기적인 홍보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영입한 외부 전문가에게 일제히 단기 처방을 요구한 것이다. 야당은 손 위원장에게 디자인, 메시지,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해 전권을 주면서 ‘여당에 밀리지 않는 홍보전’을 부탁했다. 손 위원장이 취임 직후 언론에 발표한 전략도 현수막의 디자인과 문구를 새로 선보이겠다는 내용이었다.

 

 

↑ ⓒ연합뉴스 : 10월18일 서울 서초구 교보타워 사거리에 길 하나 사이에 두고 걸려 있는 새누리당(위)과 새정치민주연합의 현수막(아래). 목 좋은 길목에서 정당이 내건 현수막을 흔히 볼 수 있다.

 

현수막 홍보전은 비용이 많이 든다. 선거구마다 2~3개씩 건다고 해도 5000만원이 넘게 소요된다. 그런데 체감 효과가 신문 1면 광고보다 크다. 야당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매체 광고보다 현수막이 전달력이나 노출 규모를 따졌을 때 더 효과적이다. 홍보의 새로운 영역이 생긴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 연령대와 불특정 다수에게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올드 미디어’인 현수막이 뉴미디어 시대의 핵심 홍보 전략으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권에서는 최근 중앙당의 현수막 정치가 가능해진 이유로 지역별 인프라 확충을 꼽는다. 각 지역의 홍보 경쟁이 격해지면서, 이른바 ‘효과가 좋은 길목’과 ‘단골 업체와의 협업’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중앙당에서 내부 통신망을 통해 각 지역위원회에 현수막 게재를 요청한다. 지역위원회에서 사진을 찍어 올리면 비용은 나중에 중앙당에서 보전해주는 식이다. 웹하드에 현수막 디자인 파일을 올리면 각 지역에서 알아서 단골 업체에 보낸다. 업체가 목 좋은 곳에 알아서 달아주니까, 일이 쉽게 처리된다'라고 설명했다.

 

2012년 새누리당 창당과 대선 학습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지난 대선부터 새누리당의 현수막 디자인, 메시지, 프로세스가 달라졌다. 당시 프로세스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를 당시 새누리당이 영입한 광고전문가 조동원 전 홍보기획본부장 효과로 본다. 손혜원 위원장을 영입한 것도 당시 새누리당처럼 내부 홍보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손보기 위해서다. 실제로 손 위원장은 취임 직후 새정치민주연합이 그동안 사용한 현수막 디자인, 메시지, 슬로건 등을 문제 삼으며 홍보 전략 부재를 비판했다.

 

현수막으로 상징되는 정당의 거리 여론전에 대해 평가는 엇갈린다. ‘현수막 전쟁’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정당이 홍보에 전문성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당장 국회 내에서 교과서 정국을 풀기 어려운 야당으로서는 여론전이 중요하다. 실제로 야권은 손 위원장 영입 이후 지지층의 호평에 고무된 분위기다. 현수막 대응이 ‘야당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킬 만한 중요한 전략으로 꼽힌다.

 

관련 규정이 모호해 법적 다툼 일 수도

그러나 현수막 정치가 훗날 법적 다툼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재 정치권에서 내걸고 있는 현수막은 대개 정당법과 공직자선거법에 의거한 홍보 활동이다. 정당의 현수막은 상업성 현수막과 달리 제약이 거의 없다. 문제는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은 현수막에 대해 정반대 규정을 내걸고 있다는 점이다. 이 법에 따르면 지자체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현수막은 모두 불법이다. 정당의 홍보 현수막이 사실상 법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셈이다. 관련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각 지역 조직과 지자체 간에 밀고 당기기도 계속되고 있다. 내걸 때는 합법적인 정당 활동이라고 주장하지만, 담당 지자체가 철거해도 무어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 ⓒ연합뉴스 : 새정치민주연합은 7월6일 손혜원 홍보위원장(왼쪽)을 영입했다. 손 홍보위원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제가 당에 출근하면서 처음 듣는 말이 ‘현수막, 현수막’이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관련 규정이 모호하다 보니, 꼼수도 만연하다. 대표적인 예가 ‘투표 독려’ 현수막과 ‘행사 안내’ 현수막이다. 선거법상 투표를 독려하는 선전물과 지역 내 특정 행사를 안내하는 현수막은 합법이다. 그러나 투표 독려 현수막에 정당을 명시하거나 특정 정치인의 ‘예산 확보 의정보고 행사’를 소개하는 경우, 그 자체로 정당과 특정 정치인 홍보의 성격을 띤다. 그렇다 보니 일부 지역에서는 앞으로 몇 개월 뒤에나 열리는 행사를 미리 광고하며 '예산을 이만큼 따냈다'라는 홍보 효과를 노린다.

 

선거관리위원회의 해석도 일관성 없는 경우가 많다. 한 수도권 여당 의원실의 관계자는 '현수막을 걸 때마다 선관위에 선거법 위반 여부를 문의한다. 명확한 기준이 없어서 어느 정도 지침만 내리는 정도다. 상대방(야당)과 경쟁하지만, 서로가 문제 제기를 하지는 않는다. 한번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면 서로 (좋은 홍보 채널을 잃어) 죽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수면 아래 갈등이 쌓여 있음에도, 현수막 정치는 계속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여야 대립이 날로 격화되면서 정치권이 여론에 직접 호소하는 상황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그렇다. 야권은 교과서 이슈를 선거까지 끌고 갈 전략을 세우고 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도 10월23일 '고시가 되더라도 집필 거부 운동에 나서고, 그다음에는 총선 이슈로 삼겠다'라며 장기전에 나설 뜻을 밝혔다. 이를 위해서는 지지층 결집에 나서고, ‘일하는 정당’의 이미지를 굳혀야 한다. 여당 역시 사력을 다해 국정교과서 홍보에 나설 것이다. 거리의 정치 현수막이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동인 기자 / astoria@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