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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명시감상] '菊花 옆에서' - 未堂 서정주 작

잠용(潛蓉) 2015. 10. 30. 17:23

 


 

 

'菊花 옆에서' / 서정주 작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京鄕新聞 1947. 11. 9> 


  



 =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

(명시 '국화 옆에서' 해설)


 

■ 시작 배경
국화(菊花)는 장미처럼 요염하지도, 모란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꽃이다. 우리에게 다정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며 친근하고 수수한 느낌을 주는 누님과 같은 꽃이다. 봄과 여름을 지나 서리가 내릴 무렵에 활짝 피는 국화꽃. 그것은 젊은 시절의 모진 시집살이의 고초를 겪고 40대 갱년기에 원숙한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거울 앞에 선 누님과 같은 꽃이 국화가 아니겠는가?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선비의 지조나 절개를 상징했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여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형상화한 것이 이 작품이다. <국화 옆에서>는 계절의 순환과 인생 역정을 관련시켜 인생과 생명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3음보의 율격과 한시(漢詩)의 ‘기승전결’의 구성법을 채택하여 전통시의 맥락을 잇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누님’도 대가족 제도에서 시련과 인종(忍從)을 겪은 전통적인 한국 여인상을 대표한다. 이 시를 감상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국화꽃’이 핵심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초점을 ‘누님’에 두었을 때 ‘40대 여인의 원숙미’라는 잘못된 주제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님’은 원관념인 ‘국화’의 보조관념으로 쓰였을 뿐이다. 오히려 ‘국화’는 모든 생명을 대표하는 존재로 이 시에서 쓰였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거쳐야 했던 아픔과 어려움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형상화하면서,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꽃의 모습에서 삶의 깊이와 생명의 본질적 모습을 읽어내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담은 시다. 국화꽃이라는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는 인고(忍苦) 속에는 봄의 소쩍새 울음과 여름의 천둥 번개, 그리고 가을의 무서리 등 여러 가지 체험이 융합되어 있다. 생명이 탄생하는 그 과정은 결코 고립되거나 정태적인 과정이 아니다. 여러 체험들이 퇴적됨으로써 그 과정은 시간의 지속 가운데 수많은 과거들이 내포되어 집중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한 통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체험의 순간적 표현이라는 본래의 서정 양식 속에서 체험의 연속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이 시에서 제시된 누님의 모습은 확실히 어떤 성숙하고 은은한 동양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곧 삶의 욕망을 격정적으로 노래했던 시인이 조화로운 삶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적 경지를 확보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작품은 흔하디흔한 사물인 국화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살펴본 결과이며, 한 송이 국화에서 생명이 탄생하기까지의 우주적 질서를 포착한 시다.

 

■ 자작시 해설
"(이 시는) 젊은 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미의 영상…. 내가 어느 해 시로 이해한 정일(靜逸 : 조용하고 심신이 편안함)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이라 하겠다.) [웹 사이트에서]


[사진] 만년의 未堂 徐廷柱 (1915~2000 전북고창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