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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민주화

[YS업적] '하나회 척결' '5.16은 쿠데타'부터 '화해와 화합 당부'까지

잠용(潛蓉) 2015. 11. 24. 11:06

담대했던 군부 사조직 ‘하나회’ 척결이 가장 큰 업적
[경향신문] 2015-11-23 22:56:48ㅣ수정 : 2015-11-23 23:07:01

 

[사진] 남재희 | 전 노동부 장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에 추도의 글을 쓰면서 나는 얼마간 착잡한 심정이다. 박정희 대통령 정당의 국회의원을 지낸 나를 장관에 임명하면서 그가 약간은 주저했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 김대중(DJ) 대통령 때 노사정위원장의 제의가 있었으나 나는 그런 점을 생각해서 고맙기는 하지만 사양했다. ‘양김’ 또는 ‘3김’ 시대라고도 한다. YS를 이야기하는 데는 DJ와 대비해서 말해야 설명이 빠르고 정확할 수 있다. 둘 다 대단한 민주투사이다. 언론인 사이에 떠돌던 비유적인 말로 이런 게 있다. YS가 DJ를 평하여 “그는 왜 그리 간단한 이야기를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설명하노” 하고, DJ가 YS를 평하여 “그는 그 복잡한 이야기를 어떻게 그리 간단히 말해버리지” 했다는 것이다. YS가 감을 잘 잡는다면 DJ는 매우 논리적으로 따진다.

 

YS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순풍에 돛 단 듯 정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보수 본류의 정당에 몸을 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정치기반인 영남을 바탕으로 순조롭게 정치를 했다. DJ는 어려운 환경에서 개혁적 정치성향을 갖고 영남에 비해 열세인 호남에서 항상 소수파의 어려움을 견디며 그야말로 악전고투했다. 그렇게 볼 때 YS는 비록 오랜 민주투쟁에 갖은 고생을 했으나 정치행운아였고, 우리나라 보수정치의 프린스였다. 대통령 임기 말에 외환위기를 맞았지만 그는 하나회 척결,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실시 등 대담한 결단을 서슴없이 내렸다. 외환위기는 취약국가들에 연쇄적으로 일어난 국제적 금융위기로 약간 정상을 작량할 점은 있다. 그러나 국제적 둔감은 변명하기 어렵다.

 

하나회 척결은 참 담대했고 현명했다. 참고로 독일의 경우를 보자.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의 다수당이 된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당 대표는 옛 제국군대의 군벌과 협상을 벌여 손을 잡았다. 흔히 융커라고 불리는 동부 프러시아의 지주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군벌과 말이다. 마치 하나회를 연상케 한다. 제국군대의 참모차장 그레나 장군과의 사이에 동맹이 맺어졌기에 에버트-그레나 동맹이라고 하는데, 군이 의회정치를 존중하는 대신 군의 그때까지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후 군은 특권적 지위만 누렸지 히틀러의 집권을 저지하는 데도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만약에 YS가 하나회를 묵인했더라면…. YS의 숙청이 없었더라면 보수적인 YS 정권에서는 그럭저럭 별일없이 넘어갔겠지만, DJ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에서는 혹시라도…. 두려운 생각이 든다. 당시 어느 언론인이 군이 왜 가만히 있느냐고 쿠데타를 부추기는 듯한 언동까지 했으니….

 

오늘날의 정치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자. YS는 우리나라 정치에 있어 정통 본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정치신조가 “항상 주류를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YS의 보수라는 것이 건전한 보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편향되거나 꼬임 없이 정정당당하다. 그동안 보수라고 할 때 그렇지를 못했다. 소견 좁은 일이 있기도 했으며, 극우가 보수인 양 행세하기도 했다. 준파시스트적인 행태를 보수라고도 했다. 요즘 진행되고 있는 공안몰이도 그러한 예이다. 세계 선진국 여러 나라를 살펴볼 때 그들 나라의 보수는 개혁적인 보수이고, 이견을 포용하는 보수이다.

 

YS가 폭이 넓은 보수였다는 점을 입증하는 한 예로 민중당 주요 간부들을 포용, 입당시킨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당시 민중당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진보정당이었다. YS는 민중당의 이재오 사무총장을 비롯해 김문수씨 등 여러 당직자를 받아들였다. 대단히 폭넓은 결단이다. 가령 요즘 종북몰이를 잘하는 새누리당이 통합진보당이나 정의당의 간부를 받아들여 입당시킨다고 상상해 보라.

 

내가 노동부에 있을 때, 기관사들의 파업사태에 법적 제재를 가하는 한편 그들의 미흡한 처우의 개선을 명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파업 때 경찰 투입의 요구가 있었으나 자제했고, 그 이후 대기업 파업에 경찰 투입은 사라졌다.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사회도 요구하는 복수노조의 합법화 문제를 두고 연맹체 이상의 복수노조 허용을 건의하자 그는 시점을 염두에 둔 듯했다. 그 후 YS의 임기 말에 정부가 민주노총 등 복수노조의 합법화를 가능케 하는 법률을 마련해 국회에 보내자 오히려 민정당 안의 보수파들이 장난을 쳐서 그것을 몇 년 연기하도록 수정해 이른바 ‘노동대란’이 난 것이 아닌가?

 

YS가 모든 것을 다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한 보수였기에 통이 크고 건전했다. 임기 초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하는 등 대북 메시지도 보내고, 미국의 북한 핵시설 폭격 기도를 저지했으며,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도 합의했다. 김 주석의 사망으로 성사가 안되었지만 만약 그때 정상회담이 열렸더라면 DJ 때의 정상회담과 엇비슷한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요즘 대통령의 각료나 참모 등과의 독대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데 YS의 경우를 한마디 첨언하겠다. 예를 들어, YS는 나를 서울공항에서 그의 차에 동승시키고 청와대까지 가는 동안 독대한 적이 있다. 시간이 길다보니 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이 밖에 중요 현안은 독대나 몇몇 각료의 모임에서 논의했다. 그는 확실히 거산(巨山)이고 거목(巨木)이었다.

 

'5·16 혁명'을 32년 만에 ‘5·16 쿠데타’로 규정…

20여년 지나자 또다시 ‘역사 뒤집기’ 시도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집권기(1993~1998년)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키워드’ 몇 개로 남아있다. 이 키워드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다. 20년 넘도록 진행 중인 것도 있고, 완료된 줄 알았는데 다시 극복해야 할 과제로 드러난 것도 있다.

 

1. 역사 바로 세우기

문민정부 내내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철거됐고 일제식 표현인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5·16은 32년 만에 군사정변·쿠데타라는 본명을 되찾았다.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됐다. 압권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단죄한 것이었다. YS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어느 누구도 총칼로 권력을 찬탈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장관 후보자들은 쿠데타를 “쿠데타”로 부르지 못하고 “다양한 견해가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역사가 뒤집힐까’하고 바라봤지만 박근혜 정권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며 시계를 40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사진] 아내와 찍은 졸업사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부인 손명순 여사와 1951년 9월29일 찍은 서울대 문리대 졸업사진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2. 금융실명제·IMF - 경제민주화도 노동정책도 뒷걸음질

탈세·뇌물·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문민정부의 대표적 경제개혁 정책으로 꼽힌다. 하지만 세계화로 대표되는 시장개방은 급속한 추진과정과 준비 미흡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라는 국가부도 사태로 이어졌다. YS 재임 중 업적이 조명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도 IMF다. 우리 경제는 소득분배 불평등과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경제민주화·지하경제 양성화 공약을 내세웠던 박근혜 대통령은 정작 정부 출범 후 이들 공약 대신 ‘경제활성화’에 매달리는 모습이다. 노동개혁을 외치지만 ‘고용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쉬운 해고를 가능케 하는 ‘노동개악’일 뿐이라는 비판은 IMF 직전인 1996년 말 노동법 날치기 파동을 연상시킨다.

 

3. 사고 공화국 - 삼풍·성수대교…세월호 참사로 반복

수백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사고공화국’이란 불명예도 남겼다. 1993년 10월 서해 페리호 침몰, 1994년 10월 서울 성수대교 붕괴, 1995년 4월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 6월에는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까지 압축성장 과정에서 배태된 안전불감증 문제가 이 시기 폭발했다. ‘사고공화국’이란 이름은 박근혜 정부 들어 다시 등장했다.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이후에도 같은 해 10월 성남 환풍구 붕괴, 지난 9월 돌고래호 전복까지 20년 전에 봤던 ‘이번에도 인재(人災)’라는 신문 1면 제목을 20년 후에도 다시 보고 있다.

 

4. 칼국수 - ‘청렴’ 상징…청문회 때마다 부패 불거져

문민정부 청와대 오찬 메뉴로 나오기 시작한 칼국수는 이전 권위주의 정부 성찬들과 비교되면서 YS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신한국’을 기치에 내걸고 공직자 재산 공개를 제도화했고, 성역 없는 사정으로 정·관계 최고위직 부패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YS는 자신이 임명한 각료들이 낙마하는 것은 물론 차남 현철씨까지 구속수감되는 등 부메랑을 맞기도 했다. 공직자 재산 공개를 법제화한 지 20년이 넘었고 수시로 사정정국이 조성되지만 부패 청산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인사청문회 때마다 볼 수 있는 공직후보자들의 부동산투기·논문표절·위장전입 의혹은 갈수록 지능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5. 북핵 위기 - 남북관계를 국내 정치에 ‘활용’ 되풀이

문민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대통령 취임사처럼 유화 기조로 출발했다. 하지만 집권 첫해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북송 결정으로 쏘아올린 대북 화해·협력의 신호탄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1차 북핵위기에 휩쓸려 날아갔다. 김일성 조문 파동으로 대북 강경론이 득세하자 국내정치에 민감했던 YS는 이내 대북관의 경직성을 드러냈다. 이는 대북 포용정책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던 빌 클린턴 미 행정부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문민정부의 대북·대외정책이 오락가락했던 이유는 남북관계와 외교를 국내 정치의 도구로 인식했던 탓이다. 대외정책을 국내정치에 활용하려는 정권의 속성은 20년이 지난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6. 버르장머리 - 일본에 강경… 위안부 문제 갈등 안 풀려

문민정부는 한·일 간 영토·역사 문제에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자구 조치’를 선언하고 일본에 금전적 보상 대신 반성과 역사교육을 요구한 것은 지금도 올바른 접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이 위안부 동원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와 과거사 반성을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 내놓은 것도 문민정부의 성과로 꼽힌다. 하지만 1995년 “한일합방에 긍정적 요소가 있다”는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당시 총무청 장관 망언에 대해 YS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비외교적으로 대응한 것은 한·일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문민정부의 강경 대일기조는 민주화와 경제발전, 냉전종식 등 국내외 상황변화에 따른 자신감의 표출이었으며 현재 제기되고 있는 ‘한·일관계 재정립 필요성’의 시초이기도 하다.

 

7. 지방자치 - 분권시대 열어…보육예산 등 논란 여전

1995년은 현재와 같은 모습의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원년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중단된 이후 34년 만에 주민들 손으로 도지사·시장·군수, 광역·기초의원을 뽑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반독재투쟁으로 군정은 종식됐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 권력의 중앙 집중 현상은 여전했고 지금까지도 아성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지방분권시대를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당의 동시지방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제 실시 논란을 매듭지었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 또한 제도적 시행만으로 저절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 매년 반복되고 있는 무상보육(누리과정) 예산 편성 논란에서 볼 수 있듯 재정자립이 뒤따라주지 않는 자치의 한계는 주민들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다. [정환보·유신모 기자 botox@kyunghyang.com ]  


“정치인이 부 쌓으면 부덕”

거제 땅 등 52억 원대 기부… 남긴 재산 상도동 자택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남긴 재산은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이 유일하다. 다른 재산은 2011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경남 거제도의 땅은 김영삼민주센터에, 거제도 생가는 거제시에 기부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내가 죽으면 끝난다. 자식에게 일절 물려줄 것도 없다”고 환원 이유를 밝혔다. 상도동 자택도 부인 손명순 여사 사후엔 소유권이 민주센터로 넘어간다. 김 전 대통령이 기부한 재산은 52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 부를 축적하면 부덕하다’는 신념을 자주 피력했다고 한다. 사실 김 전 대통령 자신은 멸치 어장을 운영하는 부친 덕에 정치자금 걱정 없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재산을 쓰기만 할 뿐, 늘리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 측근은 23일 “정치자금이 들어오더라도 모두 주변 정치인들에게 나눠줘 본인에게 남는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94년에 낸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돈 봉투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은 돈 봉투를 주며 이런저런 주문을 한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대통령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 도입을 주장하며, 부친과 자녀까지 총 17억7822만원의 재산을 먼저 공개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 부부의 재산은 상도동 자택과 거제도의 땅, 승용차, 헬스클럽 회원권, 선박 등 6억8601만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2008년 부친상 때도 수많은 조문객을 받으면서 조의금을 일절 받지 않았다.  [조미덥 기자 zorro@kyunghyang.com]

 

[인사가 만사] YS는 ‘인재 발탁의 대가’
[경향신문] 2015-11-23 22:31:15ㅣ수정 : 2015-11-23 23:28:59
   
노무현·이명박·김무성·손학규·이인제·이재오·홍준표
훗날 대통령 2명이나 당선…한국 정치의 거물로 성장
시대 변화 읽고 과감한 외부 수혈 ‘양김 리더십’ 재조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인재 발탁의 대가’였다. ‘인사가 만사’라는 신조대로 수많은 인재를 정치권에 영입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인물들로 뜨고 졌다.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 발탁으로 부산 동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하지만 ‘3당 합당’을 계기로 김 전 대통령과 결별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정계에 들어왔다. 김 전 대통령이 대선 경쟁자였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견제하기 위한 ‘깜짝 발탁’이었다.

 

 

[사진]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나 서청원 최고위원 같은 여권 인사들 외에 노무현(왼쪽 사진)·이명박(오른쪽) 전 대통령,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전 상임고문도 김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정치에 입문했다.

 

세 차례 대선에 도전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김 전 대통령이 발탁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김 전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도 1988년 13대 총선 때 김 전 대통령이 이끌던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했다. 이 최고위원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 전 대통령이 ‘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라고 지목하면서 일약 대선주자로 도약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 인사’를 보수 진영에 수혈하기도 했다. 1993년 경기 광명을 보궐선거에 진보개혁 성향의 교수였던 손학규 전 고문을 발탁했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엔 보건복지부 장관에 입각시켰다.

 

 

[사진] 유명한 청와대 ‘칼국수 오찬’ 김영삼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두번째)이 1993년 2월27일 집권 후 첫 국무회의에서 각료들과 칼국수 오찬을 함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는 민중당을 결성해 좌파노선을 걷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을 과감히 영입했다. 15대 총선 때는 특히 현재 정치권의 중추로 자리 잡은 인물들이 대거 들어왔다. 영원한 맞수였던 김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인재 수혈에 적극 나선 영향이었다. 여권에선 차기 대선주자군인 김무성 대표와 김문수 전 지사, 홍준표 경남지사, 남경필 경기지사가 15대 국회를 통해 국회에 진출했다. 정의화 국회의장,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안상수 경남 창원시장 등도 ‘YS 키즈’로 국회에 입성했다. 야권에선 김근태 전 의원과 정세균·김한길 전 당 대표, 추미애 최고위원 등이 DJ의 발탁으로 정치권에 입문했고,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그룹도 15대 출신이다.

 

이 같은 ‘양김(兩金)’의 인재 수혈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과 이후 총선·대선을 겨냥한 리더십 경쟁에서 기인했다. 이들의 ‘인재 수혈 리더십’은 과거 노선이나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정치 인재들을 등용하는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양김 이후’ 한국 정치는 눈에 띄는 인재를 배출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시대 변화를 읽고 과감하게 외부 인재를 수혈하는 ‘양김식 리더십’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양김’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사라진 탓도 있지만, 여야 모두 계파의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하고 배타적으로 변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상도동계 핵심이었던 김덕룡 전 의원은 23일 KBS라디오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은 정치라는 건 결국 사람이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결국 좋은 사람을 모아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며 “꼭 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삼고초려’라도 하는 끈질김 같은 것을 사람을 찾는 데 쓰셨다”고 말했다. [김진우 기자 jwkim@kyunghyang.com]

[양김 유지] ‘화해와 이념통합’… 분열 극복할 ‘새 리더십’ 절실
[경향신문] 2015-11-23 22:57:04ㅣ수정 : 2015-11-23 23:08:39 


김영삼(YS)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저문 ‘양김 시대’는 우리 시대 민주주의에 대한 과제를 던져놓았다. 민주화의 거목인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이 6년 차이로 세상을 등졌지만 두 전직 대통령의 메시지인 ‘화해와 통합’은 민주주의 성숙, 새로운 통합의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야당사 양대 산맥인 ‘양김’은 민주화 투쟁에선 ‘동지’였지만 1987년 대선 단일화 실패, 1990년 YS의 3당 합당 이후에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YS의 민주자유당·신민주공화당과의 ‘정치적 야합’은 현재까지 한국 사회에 커다란 그늘이 되고 있다. 부산·경남(PK)을 대표한 YS가 여권에 합류하면서 DJ의 호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켰다. 이는 지역갈등을 증폭시키고 지역구도 고착화라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문제로 연결됐다.

 

 

[사진] 양김 ‘활짝’ 김영삼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두번째)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세번째)이 1985년 3월6일 전면 해금조치 후 서울 동교동에서 만나 반가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던 YS의 ‘후예’들은 이후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 차별을 부추기고,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이념갈등 조장에도 거침이 없다. PK는 현 여권의 강력한 지지기반으로 기능하고 있다. 야권 내에서도 호남 민심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 활용하려는 세력들이 있다. 2009년 8월 DJ 서거를 계기로 ‘화해와 통합’이 화두로 떠올랐다. DJ에게 사형을 선고한 전두환 전 대통령과 평생 라이벌인 YS가 빈소를 찾으면서 정치권에선 “화합, 소통, 국민통합을 이루자”는 자성이 잇달았다. YS가 2013년 입원 중에 밝힌 ‘화해와 통합’은 그의 정치적 유지(遺志)가 됐다.

 

6년의 시차를 거쳐 다시 던져진 ‘화해와 통합’은 우리 사회가 이에 역행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한편으론 양김 분열로 야권이 패배한 1987년 이후, 현재까지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성되지 못하고 국민통합도 멀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민주주의 후퇴는 가속화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제1 공약으로 내건 ‘국민 대통합’ 정신은 잊혀진 지 오래다. 그 자리를 영남 출신 요직 기용 등 편중 인사, 남북관계 경색,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통한 과거 회귀 등이 대신했다. 화합과 통합을 위한 사회경제적 정책은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는 이미 폐기된 대선 공약이고, 비정규직 확산 속에 서민경제 위기는 커지고 있다. 국회의 정치개혁 논의도 지역구도 타파, 민의 반영 등 근본적 문제는 뒷전에 밀리고 있다.

 

정치권을 보면 ‘화해와 통합’은 여전히 지난한 과제일 수 있다. 김무성 대표는 2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생 최우선’이야말로 화합과 통합을 마지막 메시지로 남긴 김 전 대통령(YS)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이자 정치권 모두가 지켜야 할 도리”라며 ‘개혁’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정부의 시위 강경진압, 국정교과서, 노동법 강행처리 시도 등을 거론하며 “집권여당의 당 대표가 독재와 맞섰던 김 전 대통령(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는 이율배반을 보고 있다”고 직격했다. [안홍욱 기자 ahn@kyunghyang.com]


[양김 이후] '이념 통합'과 '역사 바로세우기' 다시 과제로
경향신문 |2015.11.23. 23:17 | 수정 2015.11.24. 09:46 

 

'화해와 화합' DJ 서거 때도 화두
현재 한국사회 분열 현상 심화
'국정화'로 역사는 과거 회귀

김영삼 전 대통령(YS) 서거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화해’와 ‘통합’이 부각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 재임 중 치적으로 꼽히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현재적 의미도 부활하고 있다. 경제적·지역적·이념적 분열상이 심화하고, 역사 문제가 이런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2013년 입원 중 ‘통합’과 ‘화합’이라는 두 단어를 쓰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차남인 현철씨가 전했다. 이는 별도 유언을 남기지 않은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메시지가 됐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DJ) 서거 당시에도 ‘화해’와 ‘통합’이 화두가 됐다.

 

 

[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YS의 공과는 뚜렷하다. ‘민주화 투사’가 1990년 ‘3당 야합’을 감행해 한국 정치의 후퇴를 초래한 것이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부른 것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서거를 계기로 ‘화해’와 ‘통합’이 다시 거론되는 것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 완성의 마지막 퍼즐이 ‘국민 통합’이라는 진단 때문이다. YS는 1993년 ‘문민정부’ 출범 후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12·12 군사반란과 5·18 유혈 진압 책임자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켜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돼야 한다’는 국민의 상식을 환기시켰다. 정권 초 지지율이 90%에 이르는 등 국민 통합에도 기여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균열이 일어나지 않은 분야를 찾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치권에도 지역구도 타파, 민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정치 체계 개편 등 통합 문화를 만들기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DJ가 서거 전 “민주주의가 반석에 섰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2009년 1월20일)고 탄식하던 상황이 지금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훼손되고 서민경제는 더욱 깊은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점에서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역사의 시곗바늘을 1970년대로 회귀시키려 하고 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는 “박 대통령 행보는 국민을 통합하는 게 아니라 갈라치는 것”이라며 “복합적인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시민의 에너지가 결집해 폭발해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화합과 통합”이라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23일 전국 분향소에서 시민들 추모 행렬이 이어지는 것도 ‘양김’이 남긴 ‘화해와 통합’에 대한 갈망과 연관돼 있다는 말이 나온다.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이날 9300여명을 포함해 1만2000명 이상 다녀갔다. 국회의사당과 서울광장 등 전국 시·도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시민들의 조문이 잇따르고 있다. <안홍욱·심혜리 기자 ah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