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의 ‘민생입법 온라인 서명’ 기자가 해보니
같은 기기에서 무한정 서명도 가능
이모티콘·숫자를 써도 '승인'
[경향신문] 2016.01.22 22:07:34 수정 2016.01.22 23:26:41
상의 “16만명 돌파” 자랑… 신뢰성 의문
시스템 허점 꼬집는 패러디도 등장
대한상공회의소·전국경제인연합회 등 38개 경제단체가 주도하는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1000만 서명운동’에 불이 붙고 있다. 서울 광화문역 등 주요 도심부와 대기업 사옥 등에 서명 부스가 마련돼 보수성향 시민단체 등이 서명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거리 서명 동참 이후 서명운동 열기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뜨겁다고 한다. 대한상의는 서명운동 5일째인 22일 “온라인 서명자가 16만명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주요 포털 사이트 첫 화면에도 서명운동 광고가 걸렸다. 기자가 오후 2시쯤 이 배너를 통해 대한상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온라인 서명운동에 직접 참여해봤다.
■ 무한 중복투표도 가능
개인용 컴퓨터로 해당 홈페이지에 들어가자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1000만 서명운동’ 팝업 창이 떴다. ‘한국경제, 국민의 손에 달렸습니다. 경제활성화 법안을 하루빨리 통과시켜 주십시오’란 문구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정부·여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각종 ‘경제살리기 법안’들과 그 효과를 적어놨다. ‘서비스산업발전법안’은 ‘일자리 69만개’를 창출한다는 식이다. 대한상의는 “우리 경제가 선진경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현재 국회에 상정돼 있는 경제활성화 관련 법안의 조속한 입법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에서 서명 방식은 간단했다. 이름과 주소만 채우면 참여가 가능했다. 소속을 기재하는 것은 자율이다. 주소도 시·도, 구·군 단위까지만 선택하게 돼 있다. 기자의 이름과 소속, 주소를 넣고 파란색 ‘서명하기’ 표시를 누르자 바로 ‘서명이 되었습니다’라고 확인해 줬다. 불과 1분도 안 걸려 ‘1000만 서명운동’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서명을 여러 번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넣은 정보를 그대로 넣자 ‘이미 서명되었습니다’란 알림이 떴다. 이번에는 소속을 제외하고 이름과 주소만 똑같이 넣어봤다. 그래도 서명이 됐다. 같은 정보를 그대로 넣어 20여차례 반복 시도했다. 모두 서명이 승인됐다. 20번 서명을 하는 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동일 기기나 동일 IP(인터넷주소), 동일한 입력어를 전혀 걸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한 사람이 1000만개의 서명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스마트폰으로 다시 시도해봤다. 개인용 컴퓨터에서 서명할 때와 달리 스마트폰에서는 같은 정보로 반복해 서명하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름과 주소만 바꾸면 서명이 가능했다. 동일 기기를 이용한 서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셈이다. 스마트폰에서도 한 사람이 자기 이름 뒤에 숫자나 특수기호를 붙이면 무한정 서명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여러 면에서 대한상의의 온라인 서명 시스템은 허술했다. 스마트폰에서는 이름에 숫자와 이모티콘을 넣어도 서명이 가능했고 개인용 컴퓨터에서는 숫자만 불가능하고 이모티콘으로는 서명이 됐다. 영어 이름을 사용할 경우엔 스마트폰에선 서명이 됐지만 개인용 컴퓨터에서는 거부됐다. 서명 시스템이 일관적이지 못하고 불안정했다. 무엇보다 중복 서명을 무한하게 허용한다는 것은 ‘5일 만에 16만명 서명’이란 기록에 불신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 박근혜 이름으로 서명하는 패러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온라인 1000만 서명운동의 허점을 꼬집는 패러디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터무니없는 이름과 소속을 넣은 ‘서명 인증샷 놀이’가 한창이다. 이름에는 ‘박근혜’, 소속에는 ‘청와대’, 주소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를 넣은 화면을 캡처해 올리는 식이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다른 온라인 서명운동을 참고해 시스템을 설계했고, 중복 서명을 엄격하게 걸러내기 위해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면 개인정보보호법 등에 위배될 소지가 있어 도입하지 않았다”며 “전산 담당 직원들이 실시간으로 비정상적인 이름이나 동일 IP를 이용한 반복 서명을 걸러내고 있다”고 했다. 또 그는 “‘박근혜’란 이름으로 입력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경우를 비롯해 비정상적인 이름은 걸러서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사설] 쉬운 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은 '노동재앙'이다
경향신문 | 입력 2016.01.22. 20:59
[경향신문] 고용노동부가 어제 기어이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 완화를 위한 양대지침을 발표했다. 이번 조치는 무엇보다 노동법을 통하지 않고 행정지침만으로 해고와 임금을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 심각성이 있다. 노동부가 일개 행정지침으로 헌법과 근로기준법을 기초로 한 노동법의 기본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것이다.
헌법 32조는 모든 노동조건은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근로기준법 4조에 모든 노동조건은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결정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정부는 근로기준법에도 없는 저성과자 해고요건과 절차를 규정함으로써 헌법 32조를 무시했고 노동자 동의 없이 임금체계를 바꿀 수 있도록 해 노동조건 대등결정 원칙도 무력화시켰다.
물론 정부는 일반해고 지침은 쉬운 해고를 위해 새로이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종전 판례에 나타난 해고요건을 명확히 해 부당해고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징계해고 사유와 중복이 된 경우를 제외하고 단순히 성과부진을 이유로 해고의 정당성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는 아직 단 한건도 없다. 정부 설명과 달리 노동자 입장에서는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저성과자 해고까지 추가 도입됨으로써 고용불안정만 가중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저성과자 해고 지침을 ‘부당해고 방지의 안전판’이라는 부르는 것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정부가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내세워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을 대폭 완화시킨 지침을 ‘정년 60세 고용나침판’으로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통념상 합리성은 집단적 동의절차가 법에 명시되지 않은 일본 판례에서 비롯된 것으로 국내 판례는 극히 예외적으로만 인정하고 있다. 일본과 달리 우리는 근로기준법 94조에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시 집단적 동의를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인정돼온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임금체계 개편 때 ‘전가의 보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일반적 원칙으로 격상시켰다. 사실상 사용자가 마음만 먹으면 노동자의 집단의사를 무시한 채 취업규칙 변경을 통해 노동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민주노총은 물론 한국노총까지 9·15 노사정 합의를 파기하면서 양대지침의 일방적인 추진에 반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부는 노동계를 배제한 ‘관제 토론회’를 거쳐 양대지침을 일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노동자들을 노동법의 사각지대로 내몰았다. 정부는 양대지침이 노동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시켜 기업들의 투자를 활성화하고 아들·딸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새로운 고용문화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쉬운 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이 오히려 노사 간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켜 노동시장의 혼란과 불확실성을 증폭시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특히 쉬운 해고는 정규직마저 고용불안으로 내몰고 손쉬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은 노조가 없이 90%의 미조직·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 그 피해가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양대지침은 노동개혁이 아니라 노동재앙의 시작일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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