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뉴스] 필리(필리버스터)와의 4박5일이 바꾼 것들
한국일보ㅣ박상준 기자ㅣ2016.02.27 20:30 수정 2016.02.27 20:30
↑ 27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 입구에 시민들이 야당 의원들의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방청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연합뉴스
23일(화요일) 오후 기사를 쓰기 위해 ‘필리버스터(Filibuster, **네티즌들 사이에 줄여 부르는 ‘필리’라는 단어로 쓰겠습니다)’라는 단어를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입력했습니다. ‘의사방해연설’ ‘무제한 토론’ 등 뜻도 여러 가지인 이 단어가 이토록 많은 관심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필리를 해보자고 아이디어를 냈던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실 관계자들도, 필리를 하겠다고 나선 의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당 의원들이 막으려는 것은 국회 본회의에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 상정한 대테러방지법안의 처리입니다. 이들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법안은 필요하지만 본회의에 올라가 있는 법안은 여러 부분에서 인권 침해 요소가 있고 문제가 많기 때문에 고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필리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서울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이어간 27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김영주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과 의장석을 맡기고 있다. /연합뉴스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필리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냐고요. 법적으로는 두 가지 경우가 가능합니다. 토론을 하겠다는 신청자가 더 이상 없거나 제적 의원의 5분의 3(300명 중 180명)이 찬성을 하면 강제로 토론을 종료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둘 다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27일 오후 5시 현재 18번째로 진선미 더민주 의원이 토론에 나서고 있는데 이후 신청자만 해도 10명이 남아 있습니다. 필리를 반대하고 있는 새누리당이 강제 종료를 하려면 현재 의석 수 157석에 23명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제3당 국민의당이 한 때 더민주가 자신들의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새누리당과 손잡을 수 있다는 식의 움직임을 보였지만, 좀 전에 언급한 10명의 추가 토론 신청자 중에는 권은희, 최원식 두 국민의당 의원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필리에 대해 찬성,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던 입장에서 선회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죠.
필리의 운명은 오히려 선거구 획정안의 앞날에 더 큰 영향을 받을 것 같습니다. 4월 13일 20대 총선의 선거구는 아직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선거구 획정안을 확정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입니다. 만약 이 선거구 획정안이 국회로 넘어오면 이를 담은 선거법 개정안이 안전행정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서 통과돼야 선거구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선거를 치르려면 선거구가 정해져야 하는데 아직까지 정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곳곳에서 사실상 불법 행위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각 당의 후보 공천 등 작업도 차질을 빚고 있구요. 선거법 개정안을 서둘러 통과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본회의에 먼저 올라가 있는 테러방지법의 운명이 결정이 돼야 합니다.
새누리당이 테러방지법을 고치자는 야당의 요구에도 버티는 배경에는 바로 선거구 획정안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야당도 선거구가 급한 것은 마찬가지니 선거구 획정안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죠.
더민주 원내 지도부는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필리에 대한 여론은 분명 좋아진 것이 맞고 국민들에게 테러방지법이 본회의에서 통과될 경우 우려되는 점을 알리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것이 자체 평가 결과입니다. 그러나 과연 테러방지법을 고치거나 없던 일로 만드는 데까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부정적 전망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당의 한 핵심 관계자의 고민은 이렇습니다. “사실 필리가 이렇게 호응을 얻을 것이라는 예상은 많지 않았다. 선거구 문제만 없으면 이 기세를 이어 2월 국회 회기(3월 10일)까지 필리를 이어갈 수 있고 테러방지법도 무산시킬 수 있겠지만 선거구 획정이 걱정이다. 야당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 테러방지법이 그대로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여론이 어떻게 흘러갈 지가 문제다. 전략 회의에서도 더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과 출구 전략을 짜야 한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더민주 원내지도부로서는 선거구 획정안과 테러방지법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진즉에 이런 토론문화가 제대로 있었다면…”
↑ 추미애(오른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7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끝내고서 다음 토론자인 같은당 정청래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52년 만의 필리를 대하는 의원들의 자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의원들 스스로에게도 필리는 낯선 경험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모르고 우왕좌왕 했지만 토론자가 늘어날수록 나름의 요령을 터득하고 이를 서로 공유합니다. “발 아픈 걸 참기 힘들다”는 1번 타자 김광진 의원의 ‘팁’에 운동화를 신고 등장하는 의원들이 늘었습니다. 토론에 참여하기로 한 의원들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어떤 내용을 발언할 지 고민하고 자료를 모읍니다.
법안과 관련 없는 내용을 토론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감시자’ 역할을 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중간중간 이의제기를 하지만 각자가 알아서 이를 지키려 애를 씁니다. 특히나 테러방지법이 국가정보원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 보니 의원들은 국정원 혹은 그 이전의 안전기획부와 인연을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안기부에 고문 받고 안기부 요원들에 미행 당하고 했던 경험이 이렇게 쓰일 줄은 미처 몰랐다”는 말과 함께 쓴웃음을 짓는 의원들도 있습니다.
필리를 접한 의원들이나 국회 관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국회에서는 소리 크고 밀어붙이는 거 잘하면 무조건 이기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본회의장이나 국회에서 차분함과 고즈넉함이 주는 힘을 느꼈다는 점입니다. 한 야당 의원은 “필리를 최대한 오래 하기 위해서는 마냥 목소리를 키우면 안 되고 차분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며 “늘 본회의장에서 여야 의원들이 삿대질하고 소리지르고 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라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지만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싶다”라고 전했습니다.
비록 상대 없이 혼자 말하는 ‘독백 토론’이지만 토론의 중요성이나 무게감을 새삼 느끼게 됐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한 때 ‘물리적 충돌’에 연루됐던 강기정 더민주 의원은 “진즉 이런 토론 문화가 제대로 있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텐데…”라며 아쉬워했습니다. 또 다른 의원은 “새누리당 의원들이 ‘시간 경쟁밖에 모른다’ ‘총선 앞두고 선거 운동’ 한다고 자극하는데 예전 같으면 집단으로 흥분하고 맞설 테지만 처음에 잠깐 그랬던 것 빼고는 필리를 겪으면 의원들 사이에 ‘그러지 맙시다’ ‘그래서 뭐 해’ 하는 반응들이 나왔다”고 전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의 마음도 조금씩 키우게 됐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앞서 은수미 의원이 세웠던 최장 기록(10시간 18분)을 깰 수 있었지만 9시간 29분 만에 단상을 내려오면서 “은수미 의원은 국정원의 전신 안기부에서 고문 피해를 입은 분이다. 피해자의 기록으로 남았으면 했다”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평소 ‘친절한 석현씨’라 불리는 더민주 소속의 이석현 국회부의장은 서기호 정의당 의원에게 “3분 안에 화장실을 다녀와도 된다”는 말로 본회의장의 의원들에게 잠깐의 미소를 선사했습니다. 더민주 당직자들은 속기사, 청경 등 필리 때문에 고생하는 국회 사무국 직원들과 기자들을 위해 감사 글과 함께 주전부리를 담은 ‘깜짝 선물 봉투’를 나눠주기도 했구요.
↑ 더민주 당직자들이 26일 국회 사무처 직원들에게 작은 간식 봉투와 함께 건넨 감사 글
야당 출입 기자로서 필리를 만난 이후
이 글을 쓰는 순간(27일 오후)까지 필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4박5일 동안 100시간 넘게 필리를 국회 안에서 혹은 국회 밖에서(요즘은 스마트폰 앱만 깔면 본회의장 상황을 생중계로 볼 수 있죠) 살피며 야당을 담당하는 저 또한 많은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특히 평소 오다가다 밥 같이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농담도 하고 진지한 얘기도 했던 그 야당 국회의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막연한 인상과 몇 마디 대화로 그들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했던 제 자신을 반성도 해보고 필리를 통해 그들의 삶과 고민을 조금이나마 보고 듣게 되면서 정치부 기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다시 한 번 고민해 봅니다.
여당과 야당 혹은 야당과 야당 사이에 싸움을 붙여야 기사를 잘 쓰고 취재를 잘 하는 것이라는 습성이 얼마나 무섭게 제 머릿속에 자리 잡아 버렸나도 반성해 봅니다. 4월 총선에서 공천을 받으려 몇 년을 애썼음에도 공천 탈락의 아픔을 겪은 의원들조차도 필리를 위해 단상에 섰습니다. 공천은 곧 모든 국회의원들 그리고 국회의원 배지를 달려는 사람들의 지상 목표인데 그 목표가 사라졌는데도 필리를 하겠다는 것이죠.
필리에 대한 기사를 쓸 때조차도 어떻게 해서든 읽는 사람의 눈을 자극하기 위해 ‘누가 더 길게 했나’ 하는 ‘경주식 보도’에 집착한 것 같기도 해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록 ‘어쩌다 보니’ 시작된 필리지만 하나의 정치적 절차가 국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밖에 있는 국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느낌과 생각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놀라기도 합니다. 오늘 국회 본회의장 방청객 석에는 수 백 명의 시민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필리를 하는 의원들을 응원하고 도대체 필리가 무엇인지 보기 위해 찾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 함께 온 부모들도 많았습니다.
다음주 월요일이면 필리가 더 이어질 수도 멈출 수도 있습니다. 많은 여론조사 기관에서 정당 지지도나 필리에 대한 찬반 여론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통해 필리가 정치적으로 효과가 있었구나 표에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판단을 하게 되겠죠. 그걸 탓할 이유는 없지만 그러기 이전에 왜 그 수 많은 야당 의원들이 100시간에 육박하는 시간 동안 필리를 붙잡고 있는지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했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필리를 했던 야당의원들이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대하는 여당의원들이나 모두 다음에는 서로 입장이 바뀔 수 있음을 염두에 뒀으면 합니다. 비록 필리라는 것이 야당 의원들이 합법적으로 반대를 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평소에도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사당 안에서 필리를 할 때 그 마음으로 본연의 업무에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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