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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봉축!! 부처님오신날] 불교국가 신라의 지상 불국토 '경주 남산'

잠용(潛蓉) 2016. 5. 13. 12:30

[커버스토리]

"도처에 부처... 벼랑과 바위도 신라 혼 품다"
중앙일보 | 손민호.최승표.임현동 | 입력 2016.05.13. 00:11 | 수정 2016.05.13. 09:17


경주 남산(慶州 南山)

서울에도 남산이 있고 경북 경주에도 남산이 있다. 아니 어느 동네에나 남산이 있다. 마을 앞에 산이 서 있으면 남산이다. 이 수많은 남산 중에서도 경주 남산은 특별하다. 이를테면 다음의 구절이 있다.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수도 서라벌(옛 경주)을 묘사한 대목이다. ‘절은 하늘의 별처럼 널려 있고, 탑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가는’ 경주에서도 남산(높이 494m)은 중심을 이룬다. 신라 서울 경주에서도 남산처럼 절과 탑, 불상이 많은 곳은 없다.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가파른 벼랑바위에 새겨진 보살의 표정이 친근하고, 다리 한 쪽을 떨군 반가부좌 자세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지난해 경주국립공원 측이 불상 주변에 난간을 설치했다. 예전의 극적인 분위기는 아쉽지만 안전은 강화됐다.해질녘 늠비봉 오층석탑 뒤로 경주시내가 내려다 보인다.‘못난이 부처’로 통하는 삼릉골 선각여래좌상.경주에서는 가정집 마당에도 문화재가 굴러다닌다 (경주 최씨 집 마당에 있는 탑 지붕돌과 석등). 남산은 경주시 보문동의 낭산(높이 104m)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남산은 높지도 넓지도 않은 산이다. 그러나 골짜기가 깊은 산이다. 동서로 4㎞, 남북으로 8㎞가 전부인 산자락 안에 60개가 넘는 골짜기가 주름처럼 새겨져 있다. 이 골마다, 골과 골을 잇는 산마루마다, 산마루를 지탱하는 기슭마다 신라인의 혼과 얼이 배어 있다. 신라인은 남산을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 ‘수미산(須彌山)’ 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신라인은 남산에 들어가 절을 지었고, 절벽 위에는 탑을 쌓고, 바위를 갈아 부처를 새겼다. 그렇게 신라인들은 남산에 찬란한 불국토(佛國土)를 건설했다.

 

↑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가파른 벼랑바위에 새겨진 보살의 표정이 친근하고, 다리 한 쪽을 떨군 반가부좌 자세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지난해 경주국립공원 측이 불상 주변에 난간을 설치했다. 예전의 극적인 분위기는 아쉽지만 안전은 강화됐다.

 

↑ 해질녘 늠비봉 오층석탑 뒤로 경주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 '못난이 부처’로 통하는 삼릉골 선각여래좌상.

 

↑ 경주에서는 가정집 마당에도 문화재가 굴러다닌다. 경주 최씨 집 마당에 있는 탑 지붕돌과 석등.

 

흔히 남산을 ‘노천 박물관’이라고들 한다. 남산에 유적이 빼곡하다는 뜻일 터이다. 실제로 남산 자락에는 절터가 약 150개 소, 불탑은 100여 기, 불상은 100여 체가 넘게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숫자도 여태 발굴된 유적만 헤아린 것이다. 여전히 남산 자락에는 허다한 유적이 묻혀 있거나 방치돼 있다. 아무 계곡이나 오를라치면 번지 수를 알 수 없는 주춧돌이 나뒹굴고, 깨진 불상과 석등 조각, 기와 파편이 발에 차인다. 남산의 불교 유적은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약 400년 세월을 아우른다. 남산에서는 지금도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한도 끝도 없는 유적 덕분에 경주 남산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남산 칠불암에서 만난 비구니 명정스님(50)은 “남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져 있어 기운이 넘친다”고 말했다. 맞다. 남산은 골산(骨山)이다. 그래서 남산의 유적도 죄 돌로 돼 있다. 절벽 위에 올린 탑도 바위를 포개서 쌓았고, 기단을 받치기가 벅차다 싶으면 널따란 바위를 기단으로 삼았다. 평평한 바위에는 부처님을 새겨 넣었고, 전신(全身)을 다 새기기가 버거우면 바위 꼭대기에 부처님 얼굴만 그려 넣기도 했다. 남산의 탑은 바위를 깎아서 올린 석탑이고, 남산의 불상은 바위를 갈아서 빚은 마애불(摩崖佛)이다.

 

남산의 주인공이라면 마애불이다. 남산에 오르는 일은 남산 자락의 수많은 부처님을 만나는 일이다. 역사학자들은 불국사와 석굴암이 화려하고 정교한 불교 미술의 정점을 보여준다면, 남산의 불교 유적에는 소박하고 친근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설명한다. 학자들의 설명처럼 남산 자락의 부처님은 절대 지존의 모습이 아니다. 대신 남산에는 외할머니처럼 푸근한 인상의 부처님이 있고, 심술궂은 표정의 아저씨 같은 부처님이 있고, 해맑게 웃는 부처님이 있다. 생김새만 친숙한 것이 아니다. 남산의 불상은 어찌 보면 엉성하고 조악하기까지 하다.

 

명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예술작품이라기 보다 무명씨의 어설프고 허술한 작업으로 비치는 게 훨씬 더 많다. 냉정히 말하면 보전상태도 불량하다. 머리가 떨어져 나갔거나 손이 잘린 불상도 많다. 남산의 부처님은 꼭 우리네 시민들처럼 생겼다. 잘나지도 못하고 흠도 많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경주 남산을 다녀왔다. 1000년 전 퍽퍽한 삶에 지쳤던 신라인들은 남산에 올라 탑을 쌓았고 부처님을 새겼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버거운 삶을 잠시라도 잊으려 남산을 오른다. 남산의 돌멩이 하나 집어 돌탑을 올려본다.

 

글=손민호·최승표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커버스토리]

칠불암·삼층석탑...

"절이 별처럼, 탑이 기러기 떼처럼 줄을 이어"
중앙일보 | 최승표.임현동 | 입력 2016.05.13. 00:09 | 수정 2016.05.13. 09:17

 

‘불국토’ 경주 남산 탐방 코스 4개

경주 남산 여행은 산행과 답사를 겸한다. 남산(높이 494m)은 남북으로 약 8㎞, 동서로 약 4㎞ 뻗어 있다. 높지도 넓지도 않은 산이다. 그러나 60개가 넘는 골짜기와 겹겹이 이어진 산마루 곳곳에 허다한 유적이 숨어 있어 탐방 코스를 짜는 게 쉽지 않다. 수많은 탐방 코스 중에서 4개 코스만 소개한다. 난이도와 주제, 지역 등을 고려해 코스를 짰다. 물론 4개 코스를 모두 섭렵해도 남산의 불교유산 중에서 극히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 이른 아침 용장사 삼층석탑을 찾아 남산에 올랐다. 산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은 석탑이 초연하게 남산 서쪽 자락을 굽어보고 있다.

 

↑ 들녘 한가운데 서 있는 당간지주. 신라 사찰 ‘남간사’에서 사찰행사 때 깃발을 걸던 용도였다.

 

↑ 남산 북서쪽에 있는 포석정. 신라 왕가의 유희 공간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보리사 여래좌상.

 

↑ 바위 네 면에 다채로운 조각이 새겨진 탑골 마애조상군. 부처바위라고도 부른다.

 

↑ 작은 석굴에 모셔진 다소곳한 모습의 부처. 할매부처라고도 부른다.

 

↑ 삼릉 주변을 에워싼 솔 숲. 사진작가 배병우가 여기서 소나무 사진을 많이 찍었다.

 

↑ 남산에는 훼손된 불상들이 많다. 대부분 지진이나 산사태로 손상됐다.

 

↑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부처의 머리는 입체적으로 다듬었고, 몸은 선으로 바위에 그렸다.

 

↑ 삼층쌍탑. 자세히 보면 생김새가 전혀 다르다.

 

↑ 칠불암 마애불상군. 남산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다.

 

1 코스> 신라의 시작과 끝

본격적인 남산 탐방에 나서기 전에 신라의 역사를 톺아본다. 신라를 창건한 박혁거세(BC 69∼4)가 태어난 장소가 남산 북서쪽에 있는 나정(蘿井·사적 245호)이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있던 커다란 붉은색 알을 쪼개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아이를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났다. 새와 짐승이 춤추듯 노닐었고,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허무맹랑한 신화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현재 나정에는 박혁거세의 탄생을 알리는 비석 말고 눈에 띄는 유적은 없지만 청동기시대 유물부터 신라시대 왕궁 석재로 추정되는 돌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나정에서 남산 방향으로 약 10분을 걸으니 논 한가운데 어색하게 서 있는 돌기둥 두 개가 보였다.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깃발을 걸던 ‘당간지주’다. 약 3.6m 높이의 이 돌기둥이 보물 제909호라고 했다. 이 일대는 ‘남간사’라는 대형 사찰이 있던 터다. 예전 국사 시간에 배웠던 ‘이차돈의 순교’가 남간사에 전해 내려온다. 남간사 인근에는 또 다른 대형사찰 ‘창림사’와 신라 최초의 왕궁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들녘에 돌만 널브러져 있지만 남산 자락에서 가장 큰 삼층석탑이 우뚝 서서 옛 위용을 드러낸다.

 

창림사 터에서 윤을골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포석정(사적 1호)이 나온다. 포석정은 아담한 석조 구조물인데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물길에 술잔을 띄워서 마시며 게임을 즐긴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현장이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포석정 일대가 사찰이었고, 수로는 기도처였다는 해석도 나왔다. 어쨌든 포석정은 신라 경애왕(877~927)이 후백제 군사에게 잡혀간 굴욕적인 공간이었다.

 

코스 소개 : 천년 왕국 신라의 시작과 끝을 한번에 돌아보는 코스다. 대부분 평지에 있어서 걷기에 부담이 없고, 자동차로 이동해도 된다. 약 2시간 소요.

 

2 코스> 할매처럼 푸근한 불상

남산 북동쪽 기슭의 불상을 찾아다니는 코스다. 가장 먼저 만난 부처는 보리사 여래좌상(보물 136호)이다. 남산 석불 중에서 가장 온전한 모습의 불상이다. 대웅전 왼편에서 마을을 굽어보는 표정이 마냥 자애롭게 느껴졌다. 화려한 광배(光背) 뒷면에는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보리사 바로 북쪽에 있는 탑골로 이동했다. 옥룡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나니 온갖 그림이 새겨진 검붉은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탑골 마애조상군(보물 201호)’이다. 약 10m 높이의 바위 둘레에 모두 35개에 달하는 조각이 새겨져 있어 ‘부처바위’로도 불린다. 다채로운 소재가 등장해 문화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부처와 보살 외에도 승려, 비천(飛天), 사자 등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다. 거대한 탑도 있다. 고려 때 몽골군이 태워버린 황룡사 9층 목탑과도 매우 닮았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부처골에 있는 ‘감실석불좌상(보물 198호)’이다. 계곡을 따라 얕은 오르막을 10분 즈음 걸으니 부처상이 나타났다. 불상은 깊이 60㎝의 감실, 그러니까 작은 석굴 안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제껏 봤던 불상과는 영 딴판이었다. 근엄한 표정도, 화려한 장식도 없었다. 시선도 달랐다. 중생을 내려보는 시선이 아니라 눈을 맞추기가 부끄러웠는지 일부러 낮춘 시선이었다. 친근한 인상 덕분에 이 불상은 흔히 ‘할매부처’라고 불린다. 유홍준(67)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에서 “하숙집 아주머니 같은 부처님”이라고 묘사한 그 불상이다. 1980년대 초 경주에 답사를 온 한 일본 유학생이 달밤에 침낭을 싸들고 감실불상 곁에서 잠을 자고 갔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할머니처럼 따스한 불상의 기운에 단단히 반했던 것이다.

 

코스 소개 : 남산 북동쪽 기슭에 모여 있다. 자동차에서 내려 5~10분 걸으면 포인트마다 방문할 수 있다. 약 2시간 소요.

 

3 코스> 산 전체가 떠받친 탑

삼릉∼금오봉(468m) 코스는 남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등산로다. 5분마다 돌부처를 만날 정도로 계곡에 불상이 가득하다. 삼릉은 소나무숲에 있는 고분 3기를 이른다. 그러나 고분보다 소나무가 더 유명하다. 배병우(65) 사진작가의 소나무 작품 대부분이 이 숲에서 탄생했다. 소나무숲을 지나니 얕은 오르막 계곡길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마주친 건 머리가 떨어져나간 불상이었다. 등산객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 저게 다 왜놈들 짓이지.” 남산에는 목이 잘렸거나 코가 깨진 불상이 많았다. 하나 일제의 만행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송득곤(58) 문화해설사는 “산사태나 지진으로 인한 손상이 대부분이고, 조선시대 억불 정책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릉골에는 바위에 선으로 음각(陰刻)한 불상도 많았다. ‘못난이 부처’로 통하는 ‘선각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159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주먹코와 두툼한 입술 덕분에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상선암을 지나 남산에서 가장 큰 불상에 다가섰다. 마애여래좌상(경북 유형문화재 158호)이다. 한데 불상 바로 앞까지 이어진 길이 막혀 있었다. 불상 주변 바위에 균열이 생기면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난해부터 출입을 통제했다. 금오봉으로 가는 능선에서 멀찍이 바라봤는데도 산 아래를 굽어보는 부처의 표정에서 생동감이 넘쳤다. 1시간 30분 만에 금오봉에 올랐다. 남쪽 능선을 타고 용장사 터를 찾아갔다. 절벽에 아찔하게 서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186호)을 보기 위해서였다. 신라 탑은 하층 기단을 2층으로 쌓는데 이 탑은 하층기단이 하나였다. 산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용장골까지 내려가서 올려다봤을 때 훨씬 돋보였다. 절벽 끝에서 기도하는 수도자 같았다.

 

코스 소개 : 등산 난이도는 초중 정도. 용장사 3층석탑에서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다. 약 4.5㎞, 3시간 소요.

 

4 코스> 신라인의 부처

남산 유일의 국보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 312호)’을 보고 최고봉 고위봉(494m)을 거쳐 관음사로 내려오는 코스다. 산을 오르기 전에 염불사지 삼층쌍탑(보물 124호)부터 찾아갔다. 멀리서 봤을 때는 일란성 쌍둥이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서니 삼층 높이 말고는 닮은 구석이 없었다. 동탑은 중국식 전탑을 모방해 돌 8개로 하층기단을 쌓은 반면에 서탑은 하층기단에 음악의 신 ‘건달바’, 싸움에 능한 ‘아수라’ 등 인도에서 숭배하는 8부 신을 새겼다.

 

천동골로 접어든 뒤 1시간쯤 걸어 칠불암에 도착했다. 이름 그대로 칠불암은 일곱 부처를 모신 암자다. 법당 오른쪽에 불상을 새긴 큰 바위 두 개가 보였다. 5m 높이의 큰 바위에는 삼존불이 다정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고, 바로 앞에는 3m 높이 바위 네 면에 부처가 새겨져 있다. 돋을새김 방식으로 바위를 깎아내고 일곱 부처를 개성 넘치게 묘사한 신라인의 정성이 대단해 보였다. 부처의 표정과 자세에서 여유와 기품이 느껴졌다. 국보로 지정된 이유를 알 만했다.


법당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차 좀 마시고 가이소. 과일도 드시라예.” 비구니 명정스님(50·사진)이 정성껏 차를 내려줬다. 법당 안에서 내다본 풍경은 또 달랐다. 산은 연둣빛으로 싱그러웠고, 바위 속 부처의 미소는 더욱 신비했다. 10분을 더 걸어오르니 아찔한 벼랑바위에서 불상이 나타났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199호)이었다. 불상이 들어선 자리는 극적이었지만 보살의 표정은 심각하거나 근엄하지 않았다. 구름 위에 반가부좌를 튼 자세가 엉성해보이기도 했다. 정숙희(47) 문화해설사는 “신라 후기 불교가 토착화하면서 신라인 각자가 느낀 부처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코스 소개 : 등산 난이도는 초중 정도. 칠불암과 신선암 주변의 벼랑과 바위만 조심하면 된다. 약 4㎞, 2시간 30분 소요.  

 

 


여행정보= 서울시청에서 경주 남산까지는 355㎞다. 자동차로 약 4시간 30분 걸린다. KTX를 타고 가면 신경주역이 가깝다. 등산로는 경주 국립공원 홈페이지(gyeongju.knps.or.kr)나 ㈔신라문화원 홈페이지(silla.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한 유적지 중에서 포석정만 입장료가 있다. 어른 1000원, 주차료 2000원. 1박2일 여정으로 여행한다면, 남산 주변 고택에서 묵어보시라 권한다. 월암재가 가장 가깝고, 도봉서당·서악서원도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2인실 4만원부터. 보다 저렴한 한옥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gjgotaek.kr), 054-775-1950. 남산 주변 식당은 두부전골(8000원)이 맛있는 삼미정(054-745-8761), 추어탕(8000원)으로 유명한 칠불암식당(054-620-0707)을 추천한다.

 

글=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신라 천년의 예술혼, 경주 남산' <경주시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