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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孤獨死] '내가 죽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잠용(潛蓉) 2016. 9. 11. 21:07

[리포트+] "내가 죽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고독사 실태
SBS | 윤영현 기자 | 입력 2016.09.11. 15:25 | 수정 2016.09.11. 16:55  

 


햇곡식과 햇과일로 먹을거리가 풍성해지고,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추석 명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한가위지만 독거노인, 노숙인 등 추석을 홀로 보내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고령화와 1인 가구 형태가 증가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도 혼자인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죽음’인 ‘고독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폐지를 주우며 살아가는 70대 독거노인입니다.
가족들과 연락이 끊어진 지도 20년이 넘었습니다. 나와 같은 형편의 B와 말동무로 지내며, 외로움을 달래왔죠. 그런데 요즘 통 B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걱정돼 직접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B는 홀로 옥탑방에 삽니다. 건물 옆쪽의 경사가 급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하죠. 무릎이 좋지 않아 계단을 오를 때마다, 땀이 흘러내립니다. 옥탑방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코를 막아야 했습니다. 심한 악취로 숨쉬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문을 열기가 겁이 납니다. B의 유품을 정리하며, 나는 두려워졌습니다.

‘내가 죽으면...’

 


정의도 내려지지 않은 ‘고독사’
고독사는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시행 중인 관련 조례에서 ‘혼자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발견되는 죽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정의가 아닙니다. 고독사는 2000년대 후반부터 많이 거론되고 있는데, 아직 사회적으로 합의되거나 법적으로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고독사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다 보니, 관련된 공식 통계자료도 없습니다.

 

고독사와 유사한 개념인 ‘무연고사’ 현황을 집계해 고독사의 실태를 유추하고 있죠. 시신 인수자가 없어 지방자치단체가 장례를 치르는 무연고사 중 일부가 고독사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2015 무연고자 사망자 현황을 살펴 보면 2015년 무연고 사망자는 1,245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이 통계를 보면 고독사도 증가 추세라는 걸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복지재단이 서울 지역 무연고사 처리한 6716건을 대상으로 세부 조사한 결과, 2013년 한 해 서울 지역에서 발생한 고독사는 확실 162건, 의심 2,181건, 총 2,343건으로 집계됐습니다. 서울시 1인 가구 수 95만 7,390가구의 0.2%에 해당하는 수치로, 서울 지역에서만 하루에 6.4건의 고독사가 발생하는 셈입니다.

 

내가 죽으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우리는 가족이 없습니다.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주세요.”

지난해 9월 속초의 한 오피스텔에서 유언이 적힌 메모지가 발견됐습니다. 오피스텔에 거주하던 노부부의 유서였죠. 우편함에 수북이 쌓인 고지서를 본 경찰이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오피스텔에 들어갔다가 노부부의 시신과 마주한 겁니다. 경찰이 시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노부부가 숨진 지 6개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서 너무 외롭다. 주변에 친구도 없다. 집주인에게는 죄송한 마음이다.” ‘고독사’라고 하면 부양가족이 없는 노년층을 주로 떠올리지만, 최근에는 청년과 중년층의 고독사도 늘고 있습니다. 지난해 2월에는 강남의 원룸에서 29세 여성의 시신이 유서와 함께 발견됐습니다. 지난 6월에는 임대아파트에 홀로 거주하던 25세 남성이 목을 맨 지 사흘 만에 경비원에게 발견되는 사건도 있었죠.


1년여 전인 지난해 6월에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역도 금메달리스트 김병찬 씨(46)의 시신도 이웃 주민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1996년에 당한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역도계를 떠났던 김씨는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거주하다가 고독사를 맞이한 것으로 전해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내 이웃은 어떻게 살고 있나?

고독사는 연령을 불문하고 발생하는 ‘사회 현상’이 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독사를 예방하기 위한 사회 복지 시스템은 아직 미흡한 상황입니다. 주민센터 직원과 생활관리사는 혼자 사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나 독거노인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해 거주지에 방문합니다. 하지만 방문과 전화만으로는 고독사를 대비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주민센터 직원과 생활관리사는 전문 의료 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 상태를 확인할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진을 동반하지 않다 보니, 육안으로 건강 상태를 살피고 불편한 곳이 있는지 묻는 게 사실상 전부입니다.

더욱이 지금 방문하고 있는 비의료 인력마저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관내 저소득층 독거노인은 200세대에 달하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주민센터 직원은 3명에 불과한 지역도 있습니다.


느슨한 사회 안전망을 촘촘히 정비하는 정부의 대책 마련과 함께 지역 사회 안전망도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이웃 간 작은 관심을 나누는 것이 단절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방치된 죽음을 막는 보완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만큼은 내 이웃이 안녕한지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기획·구성 : 윤영현, 장아람 / 디자인: 정혜연) [윤영현 기자yoon@sbs.co.kr]

  
고독사도 서러운데… 독신 노인들 변고 당해도 아무도 몰라
SBS뉴스ㅣ2016.08.19 05:02|수정 : 2016.08.19 15:41


홀로 지내던 노인들 숨진 지 한참 지나 발견되는 사례 잇따라
자녀·이웃과 단절된 생활환경 때문… 사회 안전망 강화 필요
기록적인 폭염 속에 혼자 사는 노인들이 사고나 질병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몸이 불편한데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방치되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다가 무더위에 지쳐 변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웃과 단절된 홀몸 노인 증가로 변을 당한 뒤 곧바로 발견되지 않는 일도 흔하다. 외롭게 고된 삶을 살던 노인들이 마지막 죽음마저 비극적으로 맞이하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

 

지난 18일 오전 7시 50분께 충북 영동군 용산면의 사과밭에서 혼자 살던 A(78)씨가 경운기에 깔려 숨진 것을 아들(48)이 발견했다. 아들은 경찰에서 "사흘째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친척의 전화를 받고 집 주변을 살펴보던 중 사고 현장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A씨는 자녀들을 출가시킨 뒤 혼자 산골에 남아 농사를 지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장소는 외진 곳이어서 평소 주민 왕래가 거의 없다. 경찰은 "경운기에 후진 기어가 넣어져 있고, 적재함에 풀 등이 실린 점으로 미뤄 제초작업을 하던 A씨가 경운기를 뒤로 빼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져 바퀴에 깔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난 12일 부산 중구 신창동에서도 혼자 살던 B(79)씨가 숨진 상태로 요양보호사에게 발견됐다.고혈압 등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B씨는 35도 가까운 폭염 속에 찜통이나 다름없는 방바닥에 누워 숨져 있었다. 방안에는 꺼져 있는 선풍기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검안 의사는 사망 원인을 폭염으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으로 추정했다. 지난 11일에는 부산 영도구 청학동의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C(59)씨가 숨져 있는 것을 집주인이 발견했다. 집주인은 경찰에서 "김씨가 월세를 내지 않고 문도 잠겨 있어 119를 불러 문을 열었다가 현장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검안 의사는 시신 부패 상태 등을 토대로 C씨가 숨진 지 한 달 정도 지난 것으로 추정했다. C씨는 가족과 떨어져 별다른 직업 없이 외롭게 지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6월 23일 강원도 횡성에서는 숨진 아내의 시신 옆에서 거동 못 하는 남편이 아사 직전에 발견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경찰은 "부모님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현장을 확인했다. 경찰은 "방충망을 뜯고 집에 들어가 보니 할머니(76)는 방바닥에 누운 채 숨져 있고, 그 옆에 기력 잃은 할아버지(77)가 겨우 눈만 뜨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숨진 할머니는 평소 저혈압으로 인한 어지럼증을 앓으면서도 거동을 못하는 남편의 대소변까지 받아내면서 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혼자 사는 노인이 늘면서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는 노인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와 '나 홀로 사는' 1인 가구의 증가 추세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자체도 맞춤형 시책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서울시는 오래 질병을 앓는 저소득 홀몸 노인 6천790명에게 비상호출 기능 등을 가진 '사랑의 안심폰'을 보급하고, 전남도는 고독사 위험군 2천700명을 1대1로 보살필 지킴이단을 발족했다. 부산 해운대구는 홀몸 노인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생활하는 '어르신 그룹홈'을 건립했고, 성남시는 홀몸 노인을 위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조정할 '독거 노인 종합지원센터'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곤경에 처한 이웃이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회복이 더욱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지자체의 방문 보호 사업 등 사회 안전망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목원대 사회복지학과 권중돈 교수는 "1인 가구 증가와 더불어 가족이나 이웃 간 연결 고리가 약화되면서 사회로부터 단절되는 노인이 늘고 있다"며 "지자체가 홀로 사는 노인을 자주 찾아 말벗이 돼 주는 등 사회적 차원의 시스템이 확고하게 구축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연합뉴스]

 

출처 : SBS 뉴스 / 원본 링크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739873&oaid=N1003778615&plink=REL3&cooper=DAUM&plink=COPYPASTE&cooper=SBS
NEWSEND

 

[영화 이야기] 고독사한 이들을 위한 장례식
영혼없는 효율에 대한 조용한 경고, 영화 <스틸 라이프> 후기  


나도 모르게 '장례식은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는 관념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언제 들었는지도 모를,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장례식이 오히려 산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가, 괜히 마음에 남았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나의 여러 번의 장례식 조문 경험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어서일 것이다.


나에게 장례식장은, 언제 가도 참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곳이다. 여러 조문객들이 검은색의 우울한 옷을 입은 채로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는 곳. 한편에는 슬퍼하는 이들이 고인을 기억하고, 또 다른 한편에는 남은 이들이 요즘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곳.  눈물과 웃음,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이 함께하는 그 장소와 분위기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어렸을 때 처음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갔던 장례식장에서, 왜 사람들이 그다지 울고 있지 않은 건지, 왜 내가 예상한 만큼 슬퍼하고 있지 않은 건지 많이 궁금해했었는데. 지금도 답은 모르겠다. 예전과 똑같이 고개가 갸우뚱해질 뿐이다. 다만 이제는 뭐든지 '그런가 보다'하고 넘길 수 있는 시기가 와서인지 궁금증은 사라지고 여전한 어색함만 남았다.

 

정말 장례식장은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일까
그래도 되는 걸까//

 

↑ Still(사진)을 통해 고인의 삶을 귀추하는 존 메이

 

영화 주인공 존 메이는 시청에서 고독사 담당 공무원이다. 고독사 한 이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가족을 찾아주며 사망 처리한다. 이런 직업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생각해보면 없어서는 안 되는 공무원이긴 한 듯 싶다. 1인 가구가 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독고사도 늘어갈 테니.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이유에서든 나쁜 이유에서든 홀로 생을 마감하게 된 이들을 '서류 상으로' 사망 처리하는 일이 바로 이 존 메이와 같은 공무원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고인들에게는 최고의 친구이지만,
공무원으로서는 0점짜리 공무원//

 

그리고 존 메이는 고독사 담당 공무원의 소임을 '과할 정도'로 충실히 다하는 성실한 공무원이다. 고독사 한 이들의 집에 찾아가 고인이 남긴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고 고인의 가족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마치 고독사 한 이의 가장 친했던 친구인 것처럼 모았던 기억의 조각들을 끼워 맞춰 추도문을 작성하고, 생전에 고인이 믿었던 종교와 음악들까지 고려해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준다. 그리고 존 메이는 그들 하나하나를 잊지 않으려는 듯, 고인들의 사진 하나하나를 앨범에 꽂아두고 항상 살핀다. 존 메이는 그들의 마지막 친구이고 가족이었으며 유일한 조문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 배부른 이야기인 걸까. 불과 부서에 온 지 2달째인 그의 상사인 프래챗 부장은,  22년을 공무원으로 근무한 존 메이의 이러한 '느리고 비효율적이며 소비적인' 업무 방식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존 메이를 비웃듯이 고인들의 시신을 빨리빨리 화장 처리하고, 화장한 잿더미들은 한 구덩이에 부어버린다. 몇 달을 끌며 고인들의 가족을 찾으려는 존 메이의 헛된 노력을 비웃고, 존 메이만이 참석하는 고인의 외롭지만 정성스러운 장례식을 비용 문제로 추락시킨다. 그리고 결국 존 메이는 프래챗에 의해 부당하게 해고당하며, '빌리 스토크'의 고독사 사건을 마무리짓는 것으로 그의 공무원 생활을 마감해야만 하는 위기에 빠진다.

 

↑ 고인의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 홀로 장례식에 참석하는 존 메이

 

프래챗은 존 메이를 비난한다.
"장례식은 산 자들을 위한 것이에요. 죽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상관할 수도 없죠."
하지만 존 메이는 특유의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반박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그렇다. 존 메이는 분명히 국가라는 시스템의 한 부품으로써는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공무원이었다. 가족도 지인도 없는 이들을 위해 단순 화장이 아닌 장례식을 택했고, 수십 명의 고독사 사건을 종결할 시간에 단 한 명의 고인의 가족과 친구들을 찾기 위해 시간을 보냈다. 그의 업무 속도와 결과물을 가지고 점수를 매기자면, 단연코 0점이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존 메이에게 손가락질할 자격도 권리도 없다. 우리는 누구도 존 메이만큼 인간을 사랑하고 영혼을 알지 못한다. 그는 작은 목걸이와 먼지가 쌓인 앨범에서도 고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위하고, 그리워했다. 산 자들에게서는 조롱을 받을 지라도, 말없는 죽은 이들에게는 최고의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결국 존 메이는 부서의 비용 문제와 그의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으로 인해 해고당하고, 부서는 통합된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그들의 삶이 'CASE CLOSED(사건 종결)'이라는 글자 하나로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만큼 가치 없는 것인가? 홀로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해서, 그들의 삶에 닿는 이름 모를 공무원의 손길조차 쓸데없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걸까? 이렇게 영혼조차 없는 고도의 효율성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추구하던 것인가?


영혼 없는 효율성이 세상을 잠식한다//

 

우리는 누구나 혼자가 될 수 있다. 갑자기 사랑하던 사람과 사별할 수도 있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크게 다투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고 나 자신이 쓸모없고 무의미한 인생을 살았다고는 할 수없다. 존 메이의 앨범에 꽂힌 고독사 한 이들의 사진들은, 모두 웃고 있고 행복해 보인다. 그들 역시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음이 끊이지 않는 꿈같은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사진으로 하나의 흔적을 남겼겠지. 아무리 숫자로 측정되는 것들이 점점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삶의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들은 영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삶에 비하면 전혀 의미가 없다. 물론 효율성은 우리의 영혼을 조금 더 편리하고 안락한 공간으로 이끌 수도 있다. 하지만 삶에 깃든 한 사람의 영혼을 살펴보는 일은,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재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 메이가 프래챗 부장으로부터 받았던 비난과 비웃음들은 결국 '영혼 없는 효율성'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프래챗은 존 메이의 상사였고 아마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이다.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기세 등등하게 아우디를 몰고 다니며, 기차를 타고 다니는 존 메이와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다. 영혼 없는 아우디와 영혼 없는 효율성. 프래챗 같은 사람이 돈, 차, 명예와 같은 영혼 없는 것들을 등에 업고 사람들의 작은 삶 하나하나를 짓밟기 시작하면서, 결국 세상은 그렇게 잠식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

 

↑ 빌리 스토크의 흔적을 찾아 그의 옛 노숙자 친구들을 만난 존 메이

 

존 메이는 결국 해고당한다. 프래챗으로부터, 국가로부터, 시스템으로부터 버림받는다. 영혼이 있고 효율적이지 않은 인물은, 영혼이 없고 효율적이어야 하는 곳에서부터 추방당한다. 하지만 존 메이는, 자신이 담당한 마지막 고독사 사건의 빌리 스토크의 삶과 영혼을 깊게 살펴보며, 그 자신도 모르게 스토크에게 매료된다. 부당한 회사의 처사에 오줌을 갈겼던 스토크처럼, 프래챗의 아우디에 오줌을 갈긴다. 이 장면이야말로 가장 통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영혼 없는 효율성과 무자비한 시스템에 대한, 가장 재치 있는 복수였다. 정적(Still)이었던 존 메이는 빌리 스토크의 영혼을 거꾸로 되짚어가며, 점점 밝고 통쾌하고 산 사람들과도 많은 소통을 하는 인물이 된다.


결국 영혼 없는 효율성은 시스템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자신의 묫자리까지 봐둔 존 메이

 

존 메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홀로 땅에 묻으며, 자신의 묏자리도 미리 봐 두었다. 사실 존 메이 자신도, 고독사 할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지인도 가족도 없고, 마치 이 세상에 몰래 놀러 온 사후 세계의 사람처럼,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정갈하고, 빵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으며, 과일을 깎아도 한 번의 끊김 없이 자르는 인물이다. 그에게, 생전에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의 흔적을 모아 치르는 장례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존 메이는 빌리 스토크의 장례식에 더 많은 이들이 올 수 있도록, 그의 삶에 한 오라기라도 관련됐었던 모든 이들을 찾아 스토크의 이야기를 듣고 장례식에 오기를 부탁한다. 그의 이렇게 무조건적인 관심과 노력은, 스토크를 기억 저편에 두고 잊고 지내던 많은 이들을 결국 장례식장까지 끌어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존 메이는 자신의 묏자리로 미리 봐 두었던 곳을 흔쾌히 빌리 스토크에게 내어준다. 무덤 주인이 누구냐는 관리인의 물음에 존 메이는 '그냥 친구죠'라고 답한다.


존 메이는 '장례식은 산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장례식의 온전한 주인공이 고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을 기억하도록 몸과 마음으로 뛰었다. 그가 고독사 한 이들의 장례식을 그렇게나 정성스럽게 치러준 것은, 장례식의 주인공이었던 그 죽은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고 사랑받는 삶을 살았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소중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살았다는 흔적을 살아있는 이 세계에는 남기지 않았지만, 홀로 죽어간 많은 이들과 진짜 친구의 연을 맺으며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흔적을 남겼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냥 친구'를 위해 영혼을 다했던 존 메이는 영혼 없는 효율성을 거부하고 결국 진짜 '죽은 사람을 위한 장례식'을 치러냈다.

 

그리고 나는 존 메이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장례식이 산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꼭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며 고인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그동안 장례식장에서 느꼈던 그 어색함은, 내가 슬프거나 눈물이 나지 않아서, 혹은 다른 이들이 웃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한 명의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떠나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진정으로 알지도 못했고 그러려는 노력도 딱히 없었음에서 발생한 것이었던 것 같다. 만난 적 한번 없는 외로운 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장례식을 치러줬던 존 메이에 비하면, 나는 한참 멀었다. [예또의 브런치]

 

[출처: https://brunch.co.kr/@netsgo03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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