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음악·애청곡

[유성기 가요] '잘있거라 斷髮嶺' (1940) - 장세정 노래

잠용(潛蓉) 2016. 6. 17. 13:16

麻衣太子와 斷髮嶺

 

'잘있거라 斷髮嶺'(1940)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노래 장세정
 
< 1 >

한많은 단발령에 검은 머리 풀어 쥐고
한없이 울고 간다 한없이 울고 간다
아 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정든 님아 잘 있거라.


< 2 >

두 눈에 피가 끓는 이즈러진 진달래는
한많게 붉었고나 한많게 붉었고나
아 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정든 님아 잘 있거라.


< 3 >

단발령 참나무에 붉은 댕기 풀어 걸고
마즈막 울고 간다 마즈막 울고 간다
아 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정든 님아 잘 있거라.

 

(가사: 한국문화콘텐츠닷컴 참조)

 

 


<잘 있거라 斷髮嶺>은 가수 張世貞님이 1940년 11월에 오케레코드에서 발표한 노래입니다. <눈오는 네온가; OK-31005/ 南仁樹 노래>와 같이 발매된 이 노래는, 趙鳴岩 作詞/ 金海松 作編曲의 작품으로, <연락선은 떠난다(1937.2)>으로 데뷔한 張世貞님이 불렀읍니다. 월북작가 작품이라 후에 작사가 半夜月님이 개사하여 <잘 있거라 추풍령>이라는 제목으로 불려지기도 했던 이 노래는, 張世貞님의 高音을 살린 여운있는 멜로디의 傑作으로, 張世貞님의 淸楚한 목소리와 뛰어난 歌唱이 돋보이는 名作이라는 評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雲水衲子>

 

장세정은 192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생후 2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었으며 항일운동에 참가하고 있던 아버지와도 생이별하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하는 소녀로 알려진 그녀는 오케의 전속가수가 되기 직전인 1936년 11월 평양방송국의 개국기념 무대에 올라 갈채를 받았다. 당시 그녀는 평양의 화신백화점 상신악기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스카우트의 명수인 오케의 이철이 사전에 입사가 내정되어 있었던 콜럼비아에 선수를 재치고 그녀를 데려갔다고 한다. 장세정의 데뷔곡은 <연락선은 떠난다>이며 1937년 2월에 임시 발매되었다. 이 노래는 발매되자마자 크게 히트하여 하룻밤 사이에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불려지게 되었다.

 

[역사] 단발령 (斷髮令)

1895년(고종 32) 백성들에게 머리를 깎게 한 명령.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하였는데, 조선 개국 504년 11월 15일 건양원년(建陽元年) 1월 1일을 기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일본의 강요로 고종이 먼저 서양식으로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內部大臣) 유길준(兪吉濬)은 고시(告示)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였다.

 

한국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것이다.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더구나 김홍집 내각은 이른바 친일내각이라는 소리를 듣는 형편이었으므로, 음력폐지와 단발령 등은 모두 배후에서 일본(日本)이 조종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배일적(排日的)이 된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국민은 더욱 분개하여 단발령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의병을 일으켜서 정부시책에 대항하였다. 정부에서는 친위대(親衛隊)를 파견하여 의병활동을 진압시켰으나,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김홍집도 피살되었다.

 

 [지리] 단발령 (斷髮嶺)
강원도(북한) 금강군 신원리(新院里)와 창도군 장현리(長峴里)의 경계에 있는 고개. 높이 833m이다. 태백산맥의 지맥인 먹포령산맥이 금강천과 장현천의 지류들에 의하여 깎이면서 낮아진 고개이다. 신라 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부왕에게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입산할 때 이 고개에서 불타(佛陀)의 도움을 받고자 멀리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며 스스로 출가(出家)를 다짐하는 뜻으로 삭발하였다 하여 이런 지명이 붙었다. 고개 남서쪽 산록에는 오량동(五兩洞), 북동쪽 산록에는 피목정(皮木亭)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오량은 옛날 고개를 지날 때 산적을 막기 위하여 안내인에게 다섯 냥[五兩]의 돈을 주어 호송을 부탁한 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금강산의 경치가 아름다워 유명한 명소로 알려져 있다. 태백산맥을 넘어 영서지방으로 통하는 주요 고개로서 금강~창도 간 교통로 발전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상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