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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유성기 가요] '그대 그립다' (1930) - 복혜숙 노래

잠용(潛蓉) 2016. 7. 31. 17:02

 

'그대 그립다' (1930)

일본 번안곡/ 鹽尻精八 작곡/ 노래 복혜숙(1904~1982)

 

< 1 >

새벽녘이 되어 오면 이내 번민 끝이 없네
산란해진 마음 속에 비취는 것 뉘 그림자
그대 그립다 입술은 타는구나
눈물은 흘러서 오늘밤도 새어가네.

 

< 2 >

노래소리 지나가고 발자취 들리지만
어디에서 찾아볼까 마음 속의 그림자를
그대 그립다 이 내 생각 산란하야
괴로운 며칠 밤을 누굴 위해 참으리.

 

< 3 >

지나가는 저  그림자 사라지는 저 그림자
누굴 위해 바치랴 고달픈 이 마음이여
그대 그립다 등불은 희미한데
힘없이 허리띠의 풀어짐도 쓸쓸쿠나.

 


 

복혜숙 (1904~1982) - '그대 그립다' (1930)

우리나라에서 "재즈송" 이라는 용어를 음반상에서 최초로 사용한 노래가 1930년도에 등장하게 됩니다. 즉, 우리나라 사람이 부른 최초의 재즈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배우로 출발, 연극배우로도 또한 방송 아줌마로도 유명했던 복혜숙(卜惠淑)씨가 1930년 2월 콜럼비아 코드사에서 최초의 재즈송을 취입했다고 대 선전을 했습니다. 취입곡은 <종로 행진곡>과 <그대 그립다 君戀し> 였습니다. 바로 다음 3월에는 <목장의 노래>, <여자의 마음>을 취입합니다. 1920년대부터 유성기의 보급으로 인한 여러가지 사건들이 이슈가 되었을 때 가장 많이 보급된 곡중의 하나가 바로 이 곡입니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 이 <기미고이시>라는 곡이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면서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을 <서울에 댄스홀을 許하라> 혹은 <모던보이 京城을 거닐다> 등의 책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노래가 끝나면 일본 원곡이 조금 커플링되어 있습니다. 역시 1929년에 발표되었던 일본 최초의 재즈풍이 가미된 노래라고 선전했던 <기미고이시>라는 노래의 번안가요인 셈이죠. 정확한 한자는 모르지만 작곡자는 '사사 코카', 가수는 '후따모라 데이이찌'라는군요. 한국 레코드계의 초기 취입곡이라고는 하지만 복혜숙의 노래 부르는 음정이 무척 불안한 편이죠.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음계 (단음계)로 구성된 멜로디 소화력이 부족했고, 단조의 노래를 장조의 음정으로 부르려는 흔적이 음정불안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녀가 노래를 배운 과정을 보면 기독교 계통의 장조 노래들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난생 처음 단음계로 구성된 일본곡을 취입하다 보니 생긴 해프닝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쨌든, 최초로 "재즈송"이라는 표기를 음반에 한 곡이 바로 1930년 2월의 이 복혜숙씨의 <그대 그립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송을 어찌 규정할 것인가는 차후에 논의되어야 겠지만, 당시 일제치하였던 우리네 사정을 볼 때 일본의 영향은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당시 일본의 재즈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죠. 지금 일본에서는 그네들의 재즈 역사나 결과물들에 대해서 연구라던가 복원이 꽤 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에 의하면 일본 재즈의 효시는 1912년 무렵에 결성된 "하타노 밴드"라고 합니다. 이제 기억나는데 제가 발레공연에서 들었던 것도 하타노 밴드 음반이었던 것 같네요. 아무튼 그랬기 때문에 20년대 말에 오면 <君戀し>같은 일본 사람들이 작곡한 "재즈송"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곡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1930년대쯤 되면 하타노 밴드 뿐만 아니라 저변이 확대되어 재즈 연주, 학습 모임들이 다수 생기게 되었고, 그를 통해서 배출된 연주자나 작곡가들이 많이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해 지는 것이 있죠.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이기 때문에 과연 재즈라는 자유의 음악이 퍼질 수 있는  분위기였느냐 하는 것이죠.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 것은 실제로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부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재즈를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특별히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대신 전쟁이 격화되어 전시체제가 틀이 잡히고 나서부터, 그리고 미국과 영국이 적대국이 되면서, 적성국가 음악이라고 해서 재즈가 완전히 금지되기도 합니다. 즉, 30년대는 재즈가 그렇게 탄압받던 시기가 아니었을 뿐더러 오사카나 도쿄같은  대도시에는 댄스홀 같이 재즈를 직접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 1938년 동경 / 콜럼비아 레코드 녹음실


가요곡이란 것이 원래 Parody적인 속성을 가지게 마련이죠. 외국의 대중가요 역사를 보아도 원곡보다 패러디적인 모방, 번안 노래가 더 인기를 끄는 경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요. 지금같이 통신 매체가 발달하면서 저작권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대중음악의 실효성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볼 때는 예술 이전에 상품이라는 속성을 간과할 수 없는 게죠. 그래서 우리나라의 최초 재즈송이 번안곡인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우리네 가수들의 일본 곡들의 번안에 대해서 그리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복혜숙은 데뷔 초기에는 독만담을 했다고 합니다. <사투리>라는 제목을 가진 레코드를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하였는데 '폭소 만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죠. 저 유명한 신불출의 만담과 같은 시대입니다. 특이한 것은 팔도의 사투리를 다룬 것으로  팔도의 노래를 섭렵하며 재담을 주고받는 형식이랍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복혜숙은 1904년 목사의 딸로 태어나 본명이 복마리(세례명)이고, 이화학당 수학후에 여배우로 활동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스무살에 토월회에 입단하고 '복혜숙'으로 개명하면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사투리를 소재로 한 만담도 특이하거니와 가사집을 통해 대본도 제공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팔도 사투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오늘날 사용되는 사투리 레퍼토리는 이때와 비교할 때 많은 차이가 있고 특히 북쪽 사투리는 어휘나 어조 자체에서 차이가 크다고 하더군요. 열심히 구하고 있는데 꼭 한번 들어보고 싶은 음반입니다. 이화학당 재학 시절에는 합창단에서 알토 파트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스무살에 들어간 토월회에서는 공연 막간 여흥 담당이었는데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중에서 <여자의 마음>을 잘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이 곡은 나중에 레코드 취입을 했다고 기록이 남아있고 이후에도 <숲 속의 미녀> 등 십여곡의 외국 노래를 계속 취입하게 됩니다. <아띠들의 이야기>

 

◆ 한국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전도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 나온 개척기 한국 영화계의 선구
(글 |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한국의 대중문화사에서 초창기에 활동했던 분들은 대개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적어도 두 세 개 이상의 장르에 참가했던 경력들이 보입니다. 그 까닭은 당시 대중예술에 참가했던 인원이 적었던 탓도 있겠지만 장르간 분할과 독립이 확고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일손이 필요해서 부르면 즉시 달려가야 했을 것입니다. 연극배우가 영화에 자연스럽게 출연했었고, 또 가수로서 음반취입에 활용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강홍식, 전옥, 신카나리아, 최승희, 강석연, 김선초, 이경설, 이애리수, 왕평 등이 바로 그러한 표본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분야가 뚜렷하게 있지만 가수로서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고, 또 영화에 출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가요이야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복혜숙(卜惠淑, 1904∼1982)에 관한 내용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복혜숙은 영화배우가 중심이었지요. 그리고 개척기 한국영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았던 대중문화계의 선구자였습니다.
 


복혜숙이 배우가 된 과정은 가히 운명적이라 할 만합니다. 1904년 충남 보령에서 기독교 전도사를 하던 복기업의 딸로 출생한 복혜숙은 어머니가 전도사업 때문에 오해를 받고 체포되어 옥중에서 고생을 할 때 어머니의 뱃속에서 함께 고생을 겪던 끝에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름도 성서에 나오는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복마리(卜馬利)였습니다.
 
나중에 목사가 되었던 아버지는 논산으로 이사를 했고, 병약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계모가 차지하게 된 가정이 점점 싫어졌습니다. 혼자 서울로 올라가서 이화학당을 다녔는데 재학 중에는 학교공부보다도 뜨개질을 비롯한 수예가 너무 좋아서 수예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학원에서 주선을 해주었던 요코하마 수예학원으로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지요. 일본에서는 새로 익힌 수예작품을 팔아 그 돈으로 줄곧 영화관을 다녔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연극공연에서부터 뮤지컬공연에 이르기까지 각종 공연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관람했는데 이것이 복혜숙을 배우의 길로 이끌도록 했던 가장 커다란 힘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한번은 무용공연을 보고 너무 심취해서 무용연구소에 나가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데 고국에서 딸을 찾아온 아버지가 그 현황을 보고 격노해서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버지는 강원도 김화교회의 목사가 되어서 임지로 떠나게 되었고, 복혜숙도 아버지를 따라가 교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며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단조롭고 무료한 생활이 너무도 싫었던 복혜숙은 어느 날 아버지 몰래 짐을 챙겨서 서울로 무작정 올라와 버렸습니다. 서울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단성사를 찾아가서 당시 인기 변사 김덕경을 만나 배우가 되고싶은 자신의 포부를 밝혔습니다.
 
김덕경은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 1891∼1921)에게 연결시켜 주었고, 거기서 여러 편의 신파극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활이 점점 곤궁해진 복혜숙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겠다는 뜻을 밝히고 살아갔지만 가슴 속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무대 활동의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또 새로운 목적지를 찾은 곳이 중국의 대련항(大連港)이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연락해 둔 아버지의 신고로 말미암아 경찰에 붙들려 압송되고 말았습니다.
 
1921년 복혜숙은 현철(玄哲, 1891∼1965)이 조선배우학교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 입학했습니다. 이때 배우학교의 동기생들이 왕평, 이경설 등입니다. 한번은 극작가 이서구가 찾아와서 극단 토월회(土月會)의 여배우 자리가 갑자기 비게 되었는데 보충할 만한 배우 하나를 급히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복혜숙은 여기에 지원해 들어가서 열심히 무대 활동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연극배우로서의 생활입니다.
  


이어서 복혜숙이 영화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은 1926년입니다. 이규설(李圭卨) 감독이 제작하고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한 영화 <농중조(籠中鳥)>에 첫 출연을 했습니다. 이 <농중조>는 일본말로 ‘가고노도리’, 즉 ‘새장 속에 갇힌 새’라는 뜻입니다. 이 영화의 제작자는 충무로에서 모자장수를 하던 요도라는 일본인이었습니다. 1927년에는 이구영(李龜永, 1901∼1973) 감독의 <낙화유수>, 1928년에는 <세 동무>, <지나가(支那街)의 비밀> 등에 연이어 출연함으로써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굳건하게 다졌습니다.
 
복혜숙의 생애를 돌이켜 보노라면 만약 그녀가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를 받아들여서 고분고분 순종하고 평범한 현모양처나 학교교사로서만 살아갔다면 결코 이후에 펼쳐간 배우로서의 삶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집을 나간 딸이 두어 차례 이상 아버지의 강압적인 뜻으로 끌려 되돌아오게 되지만 복혜숙은 기어이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부친의 뜻에 거역하고 일탈을 감행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선각자 복혜숙의 위대했던 판단과 선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배우 복혜숙이 첫 음반을 낸 것은 1929년이었는데, 이 음반은 가요가 아니라 영화극이란 장르를 달고 있는 <장한몽>(1∼4)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파적 성격의 영화대본을 대중적 명성이 높은 배우로 하여금 직접 연기로 녹음하도록 해서 음반을 대중들에게 보급하려는 의도를 가진 전달체계였었지요. 이 음반에 이어서 <쌍옥루>(1∼4)를 취입했고, <부활>, <낙화유수>(상하), <숙영낭자전>(1∼4) 등을 발표했습니다. 영화극 음반으로는 이후에도 <불여귀>, <심청전>(상하)과 <하느님 잃은 동리>, 그리고 <춘희>(1∼4) 등을 줄기차게 내놓았습니다.

 

배우로서의 대중적 명성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하던 1930년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는 복혜숙의 가요음반 <그대 그립다>와 <종로 행진곡>을 발매했습니다. 이어서 <목장의 노래>, <애(愛)의 광(光)> 등을 발표하게 됩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이 음반들을 발매할 때 ‘시대요구의 째즈’란 이채로운 문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째즈’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식 재즈라기보다는 그저 새로운 특성의 가요를 뜻하는 말로 보입니다. 복혜숙 노래의 반주를 맡았던 악단도 콜럼비아 째즈밴드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음반의 종류로는 ‘째즈쏭’이란 꼬리표가 붙은 것이 이채로웠습니다. 말하자면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재즈가수였던 셈이지요.
 
새벽녘이 되어 오면 이내 번민 끝이 없네
산란해진 마음 속에 비취는 것 뉘 그림자
그대 그립다 입술은 타는구나
눈물은 흘러서 오늘밤도 새어가네


노래 소리 지나가고 발자취 들리지만
어디에서 찾아볼까 마음 속의 그림자를
그대 그립다 이내 생각 산란하야
괴로운 며칠 밤을 누굴 위해 참으리

-<그대 그립다>

 

이 노래를 음반으로 들어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나는 곡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바로 일본가수 후랑크 나가이가 불렀던 <君恋し(기미고이시)>입니다. 이 노래는 1929년 일본에서 크게 히트했던 노래입니다. 이것을 번안해서 복혜숙이 불렀는데, 사실 원래는 콜럼비아사에서 윤심덕(尹心悳, 1897∼1926)에게 부탁을 했었는데 거절당하고 이어서 복혜숙에게 취입제의를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복혜숙이 부른 노래를 들어보면 미숙한 아마추어 가수의 느낌이 풍겨납니다. 음정도 불안하고 박자도 갈팡질팡합니다. 복혜숙이 생존했을 때 가요평론가 황문평에게 했던 말에 의하면 이화학당 시절에 합창단에서 알토파트를 맡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가창의 수준은 매우 엉성하고 불안한 느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콜럼비아레코드사는 어찌하여 이런 복혜숙에게 재즈음반 취입을 제의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녀가 이름난 배우로서 대중적 명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코드회사는 복혜숙이 비록 가창능력은 부족하지만 배우로서의 대중적 명성이 있었으므로 거기에 의존해서 일본레코드자본의 식민지조선 연착륙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같은 음반의 다른 면에 수록된 <종로행진곡>도 앞의 곡과 마찬가지로 일본 번안곡입니다.
 
붉은 등불 파란 등불 사월 파일 밤에
거리거리 흩어진 사랑의 붉은 등
등불 타는 등불 좀이나 좋으냐
 
마음대로 주정해라 고운이 만나면

음전한 맵시 보소 선술집 각시
종로 네거리를 어떻다 이르료
 
안타깝다 우리 님이 거의 오실 이 때
흐늘거려 놀잔다 노래도 부르고
서울 밤 그리운 밤 종로의 네거리

-<종로 행진곡>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도톤보리 행진곡(道頓堀 行進曲)>입니다. 일본 오사카의 중심가에 있는 명소 도톤보리와 그 일대를 예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노래는 이후 도쿄의 번화가 아사쿠사(淺草)를 예찬하는 <아사쿠사 행진곡>으로 개사되어 불렸는데, 식민지 조선에서 음반을 낼 때 <종로 행진곡>으로 바뀐 것입니다.
 
악곡의 전개방식도 전형적인 일본음계 미야코부시(都節)였습니다. 가요평론가 황문평도 이 음반에 대해서 1930년대 초기 레코드를 통한 왜색가요 침투의 첫 번째 희생양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음반을 발매한 뒤에 복혜숙은 경성방송국의 조선어 방송이 본격화되었을 때 방송드라마에 연속 출연해서 여주인공 역할을 담당합니다.

또 다른 가요음반 <목장의 노래>는 전형적 세 박자 왈츠풍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도 틀림없이 일본가요의 번안곡으로 추정이 됩니다. 자연 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태환경 묘사가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보리나무 숲 그림 그늘 푸르고
찔레꽃 봉오리에 이슬 맺힐 때에
아가씨의 노니는 사랑을 따라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뽀풀나무 숲 그늘 끝없는 저쪽
불그레한 저녁놀 넘어갈 때에
아가씨의 즐기는 바다 푸르니
오늘에도 어느 뉘 찾아오려나
-<목장의 노래>

 

복혜숙의 활동과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928년 그녀가 서울의 종로 인사동 입구에 ‘비너스’라는 다방을 열어서 8년 동안이나 운영했다는 사실입니다. 드나드는 손님들은 대부분 영화인들 중심이었는데, 연극인, 언론인, 문단 인사들까지도 단골로 출입했다고 합니다. 다방 운영으로 얻은 수입은 모조리 영화인들을 위한 일에 썼다고 하니 복혜숙의 포부 또한 대단한 바가 있습니다.

 
복혜숙의 비너스 다방을 자주 찾아오던 경성의과대학 출신의 김성진이 복혜숙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라 두 사람의 사랑은 불륜으로 무려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결국 비밀스러운 신접살림을 차렸고, 마침내 세월이 흘러서 안방마나님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962년 영화계의 원로가 된 복혜숙은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 위원장직에 선출되어 10년 동안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일평생 300여 편이 훨씬 넘는 영화에 출연했던 한국영화사의 개척자 복혜숙! 그녀가 배우로서 출연했던 마지막 작품은 1973년 <서울의 연가>란 제목의 영화입니다.
 
복혜숙의 나이 고희가 되던 그해에 방송인, 영화인들은 정성을 모아서 조촐한 칠순잔치를 차려주었습니다. 복혜숙은 말년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면서 후배들이 차려준 이 날의 잔치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시절, 복혜숙의 노년기 삶에서 가장 즐겁고 흐뭇한 일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던 낙선재(樂善齋)로 가서 칠보장식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두 할머니는 각자 살아온 세월을 흐뭇하게 회고하며 친구처럼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1982년 배우 복혜숙은 서울에서 78세를 일기로 이승에서의 장엄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