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오동나무'
< 1 > 이른 봄날에 내리는 해갈성 단비가 목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시고 있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겨울바람이 아직 조금 남아있어 그런지 떨어지는 빗방울은 여전히 차가웠다. 농부 들은 해마다 이때쯤 되면 가뭄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기다리던 봄비가 내리면 농부들은 일을 멈추고, 기쁨에 찬 마음과 얼굴은 하늘을 바라본다.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내리는 빗방울에서 생명을 느끼며 얼굴을, 입술을 적신다. 그리고 다가 올 일년농사를 준비한다. 마음은 이미 풍년이 든 가을부자가 되어 기쁨으로 가득찬다.
산 밑 경사진 곳에 차곡차곡 돌로 쌓아 축대로 만든 황토색 짙은 긴 밭두렁에 처져 늘어진 울타리와 어지럽게 얽혀 있는 개나리능굴도 적시어 연노란 움이 당장이라도 돋아날 것만 같아 보여 봄이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울바람이 소나무 잎새에 실어날라 쌓아놓은 벌판의 뽀얀 먼지도 씻겨내렸고 개울 건너 넓고 꾸불꾸불한 이랑 긴 밭의 보리싹도 매서운 겨울바람의 아픔을 잊은 듯 봄비를 맞으며 신비롭고 윤기 나는 생명의 물감을 칠해가고 있었으며. 보리 밭둑에 홀로 서 있는 키큰 포푸라 나무도 비에 흠뿍 젖어 방금 움이 터질 것 같았다. 가지 위에 앉아있는 여나무 마리 까마귀들만이 보리밭을 번갈아 가며 날아갔다 왔다 하고 있었으며, 인적이 없는 황량한 벌판에 내리는 가는 빗줄기를 타고 간간히 들려오는 "까악 까악" 음흉한 까마귀 울음소리만이 고요한 마을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어머니의 産苦의 진통이 시작되자 아버지는 앞집 웅천댁에 기별을 넣었다. 웅천댁은 육촌 동생의 처로서 이 산골마을에 해산이 있을 때마다 불려다니며 조산 역활을 해주는 경험 많은 여인이였다. 웅천댁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 조금 후 용원댁, 대산댁 그리고 밀양댁이 빠른 걸음걸이로 도착하여 신고 온 신발들이 벗겨져 마당으로 달아난 줄도 모르고 마루를 쿵쿵 울리며 산모방으로 급히 들어갔다. 잠시 후 밀양댁이 밖으로 나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목욕물을 덥히고, 산모가 먹을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 부엌과 우물가를 왔다갔다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나왔다. 비에 젖은 하얀 연기는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녀 아버지의 사랑채까지 찾아와 매케한 냄새를 풍겼다. 진통소리는 더욱더 커저 갔고 조산원이 된 웅천댁과 대산댁 또한 산모의 진통소리 못지않는 큰 소리를 함께 내면서 진땀을 흘렸다. 그 큰 소리는 산모에게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주기 위한 것이였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엄청난 진통소리가 계속되었다. 돌담 사이 이웃과 아버지는 진통소리에 귀를 기울렸다. 첫애를 맞이하는 아버지는 진통소리에 마음이 안절부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 2 > 어머니의 고통이 계속되는 동안 아버지는 5년전 있었던 잊을 수 없는 기막힌 악몽이 되살아났다. 첫 부인 문씨가 해산하는 날에도 이처럼 산고가 오랫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거꾸로 들어선 아이를 해산하지 못하고 산모가 탈진하여 결국 둘다 생명을 놓처버린 어처구니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더욱 더 가슴을 조이며 진통소리가 멈추기를, 그리고 새 생명의 소리가 어서 빨리 들려오기를 기도하며 애타게 기다렸다. 드디어 진통 소리가 사라지고 애기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기울이던 이웃은 물론 아버지와 곁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며 또한 표정들이 갑짜기 밝아져 서로를 바라보며 엷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앞집 웅천댁이 봉창 문을 살며시 열고서 비내리는 텅빈 마당을 향해 조그마한 목소리로 궁금해 하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딸이랍니다”. 웅천 댁의 가라앉은 작은 목소리를 아버지도 들었고, 그 소리는 이웃으로 조용히 퍼져나갔다.
첫 딸을 얻은 아버지는 몹시 서운해 하셨다. 온 종일 사랑채에서 술만 마시다 저녁 무렵에야 사랑채를 떠나 産母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머니는 한창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담요에 쌓여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딸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슴 깊은 곳에 숨어있던 夫情의 샘물이 터진 것이다. 마음은 서운하였지만 산모의 건강상태가 좋아보여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기도중인 아내를 향해 “여보 수고하셨소. 몸은 좀 어떠하오? 식사는 좀 챙겨 드셨소?” 라고 위로의 말을 안겨주었다. 아버지가 말을 건네자 어머니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딸을 낳은 미안한 마음을 흐느낌으로 대신했다.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어머니는 울먹임을 멈추고 손등으로 젖은 눈을 훔쳤다.
외할아버님은 선비 출신으로서 황해도 오산학교를 설립한 분이시다. 선비집 외동딸로 곱게 자라난 어머니는 학문과 교양을 두루 갖춘 황해도 여인이였다. 흐느낌의 눈물이 마르자 헝클어진 머리칼을 두 손으로 쓰다듬어 내리고 비녀를 다시 꽂았다. 그리고 옷 매무새를 고친 후에야 아랫목 딸 옆에 앉아계시는 아버지를 향하여 살며시 돌아앉았다. “많이 섭섭하셨지요? 실망시켜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아 드리겠소” 라며 아버지를 위로하였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 하지 않소? 심려하지 마오.”
사랑채로 돌아온 아버지는 작명책을 펼쳐놓고 딸 이름을 찾기 시작하였다. 몇 가지 이름을 써 보았다. 그중에 '진숙'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부르기가 좋고 듣기 좋은 이름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먹을 갈았다. 화선지 위에다 한자로 '珍叔'이라 적었다. 화선지를 어머니에게 전해주며 “진숙이라 지었소.”라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진숙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지 적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내가 잘 키워드리리다.”이야기 하면서 그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제단 왼쪽 편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아버지는 광 입구에 걸어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해질 무렵, 두자 남짓한 묘목 한 그루를 구해와 바로 뒤뜰로 향하였다. 뜰 한가운데 쯤 삽질을 깊게 하고서 묘목을 심었다. 발로 꼭꼭 밟은 후 “오동나무야, 네는 내 서운한 마음을 알고 있겠지? 이 곳에서 아무 걱정 말고 잘 자라거라. 네가 내 둘째 딸이니라” 하면서 우물물 한 바가지를 쏟아부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신 아버지는 건너편 산밑 대나무 숲으로 갔다. 어른 엄지손까락 굵기만 한 대나무 서너 개를 베어와 다듬어 묘목 주위에 울타라를 쳤다. 아버지는 딸 시집보낼 때 장롱 만들어 줄 意向으로 오동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딸 놓으면 오동나무를 심는다는 전통을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 3 >
오동나무 곁에도 해마다 매서운 겨울밤이 찾아왔다. 넓은 잎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 사이로 차가운 달이 걸릴 때면 호롱불 빛마저 꺼진 봉창 문에는 살아 움직이는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진다. 추위에 떨고 있는 오동나무가 그려진다. 가끔 먹이를 찾아 날아오는 가지 위의 부엉이 한 쌍도 함께 그려준다.
아버지가 장만해 준 오동나무 장롱은 짐꾼에게 지워 보내고 가마채에 매달리며 울부짖는 남동생을 뒤로 하고 누나는 시집을 갔다. 정든 집 남겨두고, 부모형제도 두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슬퍼서 가마 안에서 한없이 울고 울었다. <끝>
배시창 지음
움트는 봄날 뉘 밟을까 울치고 바른 제목 되라고 자르고 다듬어 행여나 쓰러질까 줄로 탄탄 메어두던 어린 오동나무 한 그루
한점 없이 되돌리고 시원한 그늘은 여름날의 安息處
열매 되어 떨어지는 날
그믐달 머물다 지나가는 곳 먹이 찾던 부엉새 울음소리 남아 있는 곳 텅 빈 뒤뜰 그루터기엔 적막한 바람 소리 뿐이네
동구 밖 징검다리 건너기도 전 어머니 소매 적삼 다 젖었구나.
부모 형제 그리워 흐르는 눈물 감추려 뒤돌아 보고 또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져 간다.
약조는 하였지만 안개꽃 시댁 그림자 새색시 발걸음 무거워 보이네.
비탈길 돌아갈 동안 지그시 눈 감고 기도드리는 어머니 흰 머리가 바람결에 날린다.
일생을 접고 말았다. 누나 등에 업혀 자란 형님도 이제는 古稀를 넘겼다. 누나가 세상 떠나던 날 형님은 너무나 슬프게 울었다. 살아오면서 그 지극한 은혜 다 보답하지 못한 죄책감에 젖어서 울었다. 장례식 날 형님은 自作詩 한편을 영전에 바쳤다. 낭송해 갈 동안 두 눈에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는 가족들, 동생들, 친지들까지도 곁에 서서 함께 흐느끼며 울었다.
<추도시> '누나야' 누나 영전에 부쳐- 동생 명창이가
시 엄마 없는 어린 주부로 외로움과 가난 땜에 울었습니다. 눈물을 숨긴 채 울었습니다.
수 삼년 등에 업고 기룬 이 동생 그리워서 밤낮으로 울었습니다.
동생을 기다리며 담궈 둔 감이 눈물에 젖어 식초로 변한 적이 그 몇 차례였나요?
술꾼 낭군 때문에 울었습니다. 가난한 살림 땜에 울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에 울 겨를 없이 딸 하나 아들 셋 기르느라 울었습니다.
꼬박 삼년 하루도 빠짐없이 병든 아들 등에 업고 가파른 판자촌을 오르내렸습니다.
원망할 겨를도 없이 어린 자식들 때문에 울었습니다. 가마채에 매달리며 한없이 울었던 이 동생은 누나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정말 바보처럼 소용없는 눈물만 영전에 흘릴 뿐입니다
우리 누나야 누나와 아우로서 우리 다시 태어나 그때는 진정 눈물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지 않을래? 우리 누나야
[1999. 11. 19]
<註> 이 이야기는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20년 전쯤 일어난 우리 家庭史이다. 口傳으로 들었던 이야기를 꾸며 보았다. 우리 조상들은 오동나무를 집안에 심었던 이유가 있었다. 오동나무는 잎이 넓어 바람을 너무 잘 타기 때문에. 바람 부는 데로 자란다. 그렇게 멋데로 자란 오동나무는 제목으로 쓸 수가 없었다. 또한 野生으로 자라난 오래된 오동나무를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리고 오동나무는 단단하고 가벼운 고급 樹種으로써 조상님들께서는 거문고, 가야금 같은 악기를 만들어 사용해왔다. 오동나무 장롱에 넣어둔 옷은 쉽사리 변질되지 않았다. 하절기에는 수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런 슬기로운 지식을 경험을 통해 터득한 조상님들은 오동나무를 집안에 심어 왔다. 특히 딸을 낳았을 때 심으라고 했다. 집안에 오동나무를 심어 놓으면 살림에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 키우는 정성으로 오동나무를 가꾸게 되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저절로 우러났었다.
<당선 소감>
전하고 싶다./ 배시창
<출처/ 다음카페 안나 할머니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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