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白 / 七言古詩] <夢遊天姥吟 留別> <몽유천모음 유별>
(이백: 당나라 시인 701~762)
[시 전문] 海客談瀛洲,煙濤微茫信難求。
[전문 번역] 夢遊天姥吟 留別 (全)(몽유천모음 유별 전) (꿈 속에서 노닌 천모산을 읊다)
海客談 瀛洲 (해객담 영주) 영주섬 이야기를 바닷길손에 들으니 煙濤微茫 信難求 (연도미망 신난구) 파도 넘어 아물아물 안개 속이라 찾아가기 어렵다 하네 越人語 天姥 (월인어 천모) 월나라 사람들이 천모산 이야기를 할 때 雲霓明滅 或可睹(운예명멸 혹가도) 구름 속에 홀연히 피였다 시드는 무지개를 간혹 볼 수도 있다네
天姥連天 向天橫 (천모연천 향천횡) 하늘까지 닿은 천모산 하늘을 가로 질러 勢拔五嶽 掩赤城 (세발오악 엄적성) 웅장한 산세는 오악을 압도하고 적성산을 가렸다 하는데 天台四萬八千丈 (천태사만팔천장) 천태산이 사만 팔천장이라도 對此欲倒 東南傾 (대차욕도 동남경) 이로인해 동남쪽으로 기울고저 했다 하느니
我欲因之 夢吳越 (아욕인지 몽오월) 그래서 천모산 보고자 했더니 꿈속에서 오월땅에 노닐게 되였네 一夜飛渡 鏡湖月 (일야비도 경호월) 어느날 밤 달이 잠긴 경호를 날아서 건널제 湖月照 我影 (호월조 아영) 호수에 잠긴 달이 내 그림자를 비추어 送我至 剡溪 (송아지 섬계) 섬계까지 나를 보내 주었네
謝公宿處 今尚在 (사공숙처 금상재) 사공(謝靈運을 이름)이 머물던 거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綠水蕩漾 淸猿啼 (녹수탕양 창원제) 맑고 푸른 시냇물 출렁거리고 잔나비 울음소리 청신하구나 腳著 謝公屐 (각착 사공리) 사공이 나막신을 신고 身登 青雲梯 (신등 청운제) 푸른 구름 층계를 올라 半壁 見海日 (반벽 견해일) 중턱에서 바다에 솟는 해를 바라보니 空中 聞天雞 (공중 문천계) 공중에서 하늘 닭이 새벽을 알리었네
千巖萬轉 路不定 (천암만전 노부정) 무수히 솟은 바위 틈을 돌고돌며 길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迷花倚石 忽已暝 (미화의석 홀이명) 괴이한 바위 틈엔 이름 모를 꽃인데 홀연히 날이 어두워지니 熊咆龍吟 龍殷巖泉 (웅포용음 용은암천) 곰은 포효하고 용이 울부짓는 소리 바위와 계곡을 뒤집는듯 栗深林兮 驚層巔 (율심임혜 경층전) 울창한 검은 숲 소름이 돋고 우뚝솟은 봉우리 나를 놀래키는구나
雲青青兮 欲雨 (운청청혜 욕우) 검은 구름 모여드니 비가 오려하고 水澹澹兮 生煙 (수담담혜 생연) 물이 출렁대니 안개가 서리는구나 列缺霹靂 丘巒崩摧 (열결벽력 구만붕최) 천둥은 요란 번개는 번쩍 벼락치니 산이 무너지는 듯하더니 洞天石扇 訇然中開 (동천석비 굉연중개) 仙界로 들어가는 돌문이 삐거덕 하며 열리는구나
青冥浩蕩 不見底 (청명호탕 불견저) 짙푸른 하늘은 끝없이 넓고 선계의 끝은 어딘지 보이지 않는다 日月照耀 金銀台 (일월조요 금은대) 일월의 밝은 빛이 비취니 금은대가 찬란하게 빛나는누나. 霓為衣兮 風為馬 (예위의혜 풍위마) 은은한 오색 무지개옷 입고(霓=雌虹) 바람 타고 높이 앉아 雲之君兮 紛紛而來下 (운지군혜 면면이래하) 하늘하늘 내려오는 구름 신선들(雲神) 虎鼓瑟兮 鸞回車 (호고슬혜 난회거) 끊일줄 모르는 음악소리에 난새는 오고가며 신선을 태워온다 仙之人兮 列如麻 (선지인혜 열여마) 아! 신선들이 빽빽히 늘어서 있구나
忽魂悸以 魄動 (홀혼계이 백동) 魂이 놀래고 홀연히 魄이 동요하매 恍驚起而 長嗟 (황경기이 장차) 으악! 소리를 지르며 깜짝 놀라서 깨니 惟覺時之 枕蓆 (유각시지 침석) 이부자리 곁에 베개만 나뒹굴고 失向來之 煙霞 (실향래지 연하) 안개 속을 혜매는듯 다시는 찾을 길이 없구나.
世間行樂 亦如此 (세간행락 역여차) 인간 세상 즐거움도 이와같거늘 古來萬事 東流水 (고래만사 동유수) 옛부터 세상사는 동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물과 같아서 別君去兮 何時還 (별군거혜 하시환) 그대 이별하고 세상을 떠난 뒤 어느 때 다시 돌아 오련가
且放白鹿 青崖間 (차방백록 청애간) 다시 흰 사슴(아끼는 물건)을 푸른 산곡간에 풀어 두었다가 須行即騎 訪名山 (수행즉기 방명산) 수시로 잡아타고 명산으로 신선이나 찾아가볼까 安能摧眉折腰 事權貴 (안능최미절요 사권귀) 어느 겨를에 머리 숙이고 허리 굽혀 부귀권세를 섬기랴 使我不得 開心顏 (사아부득 개심안) 이것은 나로 하여금 심안을 열 수 없게 하리라.
[시구 해설] 留別 = 이별할 때 기념으로 지음 瀛洲 = 신선이 사는 삼신산 (영주산, 봉래산, 방장산) 微茫 = 아물아물, 가물가물,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모양. 天姥山 = 천모산. 절강성 신창현에 있으며 동으로 천태산 서편으로 옥주산에 접해 있고 가장 높은 주봉은 언제나 구름 속에 가리워 있다 함. 五嶽 = 숭산, 태산, 화산, 형산, 항산을 이름 (中嶽嵩山、東嶽泰山、西嶽華山、南嶽衡山、北嶽恆山). 赤城 = 1) 적성산, 절강성 천태현. 2) 西蜀, 사천성 관현서남 (또는 별명으로 青城山) 天台 = 천태산. 높이 일만팔천장 둘레 오백리이고 산 정상을 <상옥청평지천-上玉清平之天>이라 부른다. 옛날 葛仙翁이 이곳에서 신선이 되는 도를 얻었다 함. 謝公屐 = 사령운(謝靈運)은 남북조 시대 宋 나라 시인겸 장군. 사현(謝玄)의 손자로 세습으로 강락공(康樂公)의 작위를 물려 받았다. 山水를 좋아하여 늘 명산대천을 주유하며 시를 지었으며 그의 시는 도연명과 함께 전원 산수 詩의 대가로 유명하다 한다. 그가 일찍이 산을 오를 때에는 앞축과 뒷축에 톱니가 달린 나막신을 신었는데 아마 지금의 등산화로 생각하면 옳을듯 싶다. 오를 때는 앞축에 힘을 주고 내려올 때는 뒷축에 힘을 가하면 각각 미끄러지는 일이 없게 되어 있다. 참고로 나막신 이라하니 무조건 나무로 깎은 신만은 아니고 그 모양새가 비슷하면 가죽으로 만든 신도 종종 나막신(屐)이라 부른다. 青雲梯 = 산세가 험하고 높다, 구름 속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신선은 구름 사다리로 올라 선계로 들어간다고 믿음. 天雞 = <述異志>에 동남에 도도산(桃都山)이 있고 정상에 도도라는 큰 나무가 있는데 이쪽 가지에서 저쪽 가지 끝까지 길이가 무려 삼천리라 한다. 그 위에 천계(天鷄)가 살고 있는데 해가 떠오르면 햇빛이 제일 먼저 이 새의 벼슬에 비췬다. 이때 천계가 크게 한번 울어대면 비로소 천하의 닭들이 따라서 운다고 한다. 熊咆龍吟殷巖泉 = 곰이 으르렁대고 용이 울어 바위가 흔들리고 계곡이 뒤집어지는 듯하다.(殷=震動也) 洞天 = 신선이 사는 곳, 산천이 아름다운 절경. 金銀臺 = 신선이 거처하는 처소 雲之君 = 구름의 신(雲神) 이름은 풍륭((豐隆) 鸞 = 난새, 전설 속에 吉兆를 상징하는 새로 봉황새와 비슷한 뜻을 가졌다. 如麻 = 천계(天界)에 경사가 있을 때는 모든 신선들이 모여들어 삼밭(麻圃에 삼대 같이 빽빽이 많다. 煙霞 = 꿈속에서 본 어렴풋한 모습의 사물. 2) 옛적에는 仙人이나 隱者을 일컬음. 青崖 = 푸른 이끼가 끼여있는 절벽, 산과 계곡. 摧眉折腰 = 노복(奴婢)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다.
<梦游天姥吟留别 紹介>
<创作背景>
<作者简介>
[참고자료 1] 이백 (李白, 당나라 시인 701~762)
◆ 청련거사(淸蓮居士), 태백(太白),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당나라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시대에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며 살아간 천재 시인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백(白),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淸蓮居士)라고 한다. ‘시선(詩仙)’이라 불리며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시사의 거성으로 추앙받는다. 자유롭고 장엄한 시풍을 보인 그는 자신의 시와 잘 어울리는 생애를 보냈으나, 중국의 지식인이 그러하듯이 그 또한 정치적 활약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살아서는 천재, 죽어서는 전설이 된 시선 李白一斗詩百篇 이백은 술을 마시면 시상(詩想)이 샘물처럼 솟아올랐고
이백의 후배로 이백과 함께 후세에 ‘이두(李杜)’로 불린 두보는 경애하는 선배 시인을 이렇게 노래했다. 또한 장안의 원로 시인이었던 하지장(賀知章)은 이백을 ‘적선인(謫仙人)’(천상에서 추방당한 신선)이라 평했다. 이렇게 동시대에 형성된 이백의 이미지는 그대로 후세로 이어져 전설화되었다. 이백이라는 이름을 듣고 우리가 술과 여자, 꽃, 달 등을 연상하는 것도 그런 전설 때문이다. 그의 일생 자체가 그런 전설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어 인간 이백의 모습을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과 전설의 경계선에서 뿌연 그림자만 드러내는 모습이야말로 진정 이백답다 할 것이다.
사나이는 세상에 큰 뜻을 품고
그가 말하는 ‘큰 뜻’이란 간단히 말해 조정에 나아가 입신출세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천하를 태평하게 하기 위함이다.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지원이 있었던 듯 이백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각지로 다니며 사람을 사귀었다. 이렇게 하여 이백이라는 이름이 점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윽고 수도 장안에서도 수행을 거친 도사의 신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즉석에서 화려한 시를 읊는 시인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현종 황제의 부름을 받은 장안시대 742년, 곧 이백의 나이 42세에 비로소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처자가 있었지만 아무런 미련 없이 이별을 고하고 수도로 향했다. 이백은 한림공봉(翰林供奉, 문서의 초안을 잡는 관리)이라는 직위에 올라 현종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이백은 당연히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직위가 주어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기대는 허망하게 꺾이고 말았다. 만년에 접어든 현종이 정치에 대한 열정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청평조사 2」 一枝紅艶露凝香 붉은 꽃 이슬 젖어 향기 머금었네.
술에 취해 방금 불려 온 이백이 일필휘지로 작성한 시 한 수가 이 정도였으니 갈채를 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백은 술에 취해 현종의 총신이었던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는데, 그의 시 앞에선 그런 무례함도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백의 가슴은 밝지 못했다. 그럴듯한 정치적 입지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희망은 실현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며 수도 장안의 풍물을 즐기고 술과 여자로 울분을 달랬다.
「소년행(少年行)」 五陵年少金市東 장안의 번화가를 노니는 젊은이들
이때 이백은 벌써 40세의 중년이었다. 이 시의 분위기는 그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페르시아 여인과 유리 술잔, 포도주,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마시는 술 등은 그의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이백은 때로 홀로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술을 마시며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고 보다 자유롭고 진지한 삶을 갈구했다.
「월하독작(月下獨酌) 1」 花間一壺酒 꽃에 묻혀 술 한 병
이백은 달과 그림자와 셋이서 춤을 추고 노닐다가 재회를 약속하고 헤어진다. 이어서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를 노래한 다음, 이백은 그 속내를 드러낸다.
「월하독작 4」 窮愁千萬端 시름은 천만 가지 쌓였는데
이어서 이백은 백이(伯夷) · 숙제(叔齊)와 안회(顔回)의 삶을 비판한 다음 「월하독작」을 이렇게 끝맺는다.
且須飮美酒 모름지기 좋은 술 마시고
천만 가지 시름은 자신의 재능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거기에 걸맞은 정치적 입지를 얻으면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니 시름이 끝도 없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그런 이백의 우울함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백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고력사가 일을 꾸민 것이다. 그는 양귀비에게 이백의 「청평조사」가 그녀를 비방한 것이라고 중상했으니, 이백이 시 속에서 양귀비를 한(漢)나라의 조비연(趙飛燕)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비연은 미인이기는 했으나 음란하다는 평이 나돌아 결국 자살로 일생을 마감한 여인이었다. 그런 여자에게 양귀비를 비유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 고력사의 변이었다. 양귀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현종에게 이백을 쫓아내라고 호소했다.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일화는 궁중에서 이백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백은 그런 음험한 궁중의 분위기에 환멸을 느꼈다. 결국 744년, 44세가 되던 그해 봄에 이백은 장안을 떠났다. 1년 반의 궁중 생활이었다.
이백, 술과 노래와 달과 함께 지다 다시 방랑 생활로 돌아온 이백은 북으로 남으로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았다. 그 사이 천하는 큰 변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외적의 침입이 이어지더니, 755년에는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이후 9년에 걸친 전란으로 양귀비는 죽고 현종은 퇴위했다.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朝辭白帝彩雲間 아침 햇살에 물든 구름 아래 백제성을 떠나
20여 년 전, 이백은 청운의 꿈을 품고 그 삼협의 급류를 타고 세상을 향해 화살처럼 내려왔었다. 지금 그의 나이 59세, 기쁨에 넘치는 가슴은 마찬가지였지만 그 기쁨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끝없이 펼쳐져 있던 미래가 이제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도 노경에 접어든 것이다.
「추포가(秋浦歌) 15」 白髮三千丈 흰 머리칼의 길이 삼천 장
무언가를 추구하고 꿈꾸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인생은 벌써 끝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백은 생명력만은 잃지 않았다. 그저 육체적 죽음을 맞이했을 뿐이다. 이백은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병사했다고 하나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해진다. 어느 날 이백은 양자강 채석기(采石磯)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늘 그랬듯이 술에 취해 있다가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백 자신이 만들어 낸 술과 노래와 달의 이미지가 전해지고 중복되면서 늘 새로운 이백의 모습을 만들어 내어 다른 생명으로 숨 쉬며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백(701~762)의 시대는 당나라 현종의 치세(712~755)와 거의 겹친다. 이 시기는 당나라가 최고로 번성하던 시대였다. 시사(詩史)에서도 황금기로 꼽힌다. 율시(律詩)와 절구(絶句) 등 우리가 흔히 한시(漢詩)라 부르는 형식이 완성되었고, 『전당시(全唐詩)』에는 5만 수에 가까운 시가 집성될 정도로 번성했다. 이백은 두보와 함께 당나라 때의 시인의 정점에 선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들은 당시(唐詩)라는 높은산 출중한 두 봉우리였다.
[참고자료 2] 천모산 (天姥山 톈무산)
(천모산 연무/ 출처: 행복의 얼굴)
◆ 天姥山(新昌一邑之主山)“天姥连天向天横,势拔五岳掩赤城,天台四万八千丈,对此欲倒东南倾。”大诗人李白在《梦游天姥吟留别》一诗中倾情歌颂了天姥山的不凡气势。千百年来,随着这首名诗的流传,天姥山给世人留下了神奇的印象;可天姥山在哪里,许多人却并不知晓。
◆ 톈무산(天姥山 천모산) : 중국 저장성(浙江省) 사오싱시(绍兴市, 소흥시) 신창현(新昌县)에 위치한 국가급 명승구로 대불사 분구(大佛寺分区), 천암십구봉 분구, 위저우호 분구(沃洲湖分区)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143㎢이다. 톈무산(天姥山, 천모산) 풍경명승구는 불교문화, 당시(唐诗) 문화, 다도문화(茶道文化) 및 산수문화(山水文化)가 내포되어 있으며 석굴조상(石窟造像), 단하지모(丹霞地貌), 화산암석(火山岩石) 지형을 특색으로 하고 인문경관과 자연산수가 일체가 되어 관광 및 과학연구, 교육 등 여러 방면에 가치를 지니고 있다.
대불사 분구(大佛寺分区)는 신창현(新昌县) 현성에 위치하며 면적은 36.05㎢이다. 대불사(大佛寺)는 전국 중점개방사원으로 1,600여 년 전 동진(東晉) 영화(永和) 초기에 창건되었고 경내에는 남조의 제와 양 연간에 제작되어 강남 제일대불로 칭해지고 있는 불상이 있다. 또한 인근의 천불원(千佛院)에는 1,075존의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어 월국(越國)의 둔황(
천암십구봉(穿岩十九峰) 분구는 현성으로부터 20㎞ 지점에 위치하며 면적은 25.38㎢로 인문 및 자연경관 100여 개소가 있다. 워저우호(沃洲湖) 분구는 현성 동남 12㎞ 지점에 위치하며 면적은 81.7㎢로 중국 산수시(山水詩)의 발상지 워저우호(沃洲湖, 옥주호) 등 5개 경구로 이루어져 있다.
(한오백년 -단소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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