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독대한 김병준, 내치 전권 쥔 책임총리 요구
동아일보 2016-11-03 03:00:00 수정 2016-11-03 03:26:21
김병준은 누구? 3일 어떤 입장 내놓을까?
[동아일보] 박근혜 대통령이 지명한 김병준 신임 국무총리 후보자는 2일 기자들을 만나 극도로 말을 아꼈다. “정국이 빠르게 변해 많은 분의 의견을 듣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 후보자는 3일 정식 기자간담회를 열겠다고 했다. 여기서 ‘깜짝 제안’이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왼쪽)가 대통령정책실장이던 2004년 7월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예방해 노무현 대통령의 축하 난을 전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2일 김 후보자를 총리로 지명하면서 둘의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동아일보DB
○ “지명 수락 유보하고 국회로 공 넘길 수도”
김 후보자는 2일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에서 기자들을 만나 시종 환하게 웃으며 여유를 보였지만 속내는 복잡해 보였다. 당초 오후 2시 기자간담회를 예고했지만 김 후보자는 30분 늦게 나타났다. 이어 기자들의 거의 모든 질문에 “내일(3일) 말씀드리겠다”고만 했다. 다만 이날 오후 자신이 재직 중인 국민대에선 “상당한 권한을 위임하고 국정의 책임을 다할 총리를 지명하면서 단순히 전화로 했겠느냐”며 박 대통령과 독대한 사실을 공개했다. 총리 후보자로 통보받은 시점은 “일요일(지난달 30일)쯤”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대통령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4명, 이재만 안봉근 정호성 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했다. 청와대 인적 쇄신과 함께 곧바로 개각을 구상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야권이 즉각 ‘인사청문회 보이콧’을 내걸고 개각 백지화를 주장하면서 김 후보자의 부담은 커졌다. 김 후보자는 “지금 이 시국에 (야권이) 어떻게 반대를 안 할 수 있겠느냐. 반대가 아니라 분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총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 때문에 저 역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김 후보자는 부총리에 이어 총리도 낙마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김 후보자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7월 교육부총리로 임명됐지만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서 논문 표절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해 13일 만에 물러났다.
이 때문에 김 후보자가 3일 기자간담회에서 총리 지명 수락을 유보하고 여야에 자신의 지명 문제를 협의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 후보자는 지난달 2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거국중립내각이 국정 공백을 메울 유일한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또 전날 개헌토론회에서 “대통령이 지금 상황에서는 2선으로 물러났으면 좋겠다. 안보와 외교만 담당하는 그런 선으로 물러서고, 내정은 책임총리 시스템으로 가면 좋겠다. 개헌에 앞서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를 실험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고 말했다. 김 후보자가 박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박 대통령의 ‘2선 퇴진’과 내치(內治)를 총리가 총괄하는 책임총리제 시행을 요구했고, 이를 다시 한번 확답받기 위해 기자간담회를 3일로 연기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배성례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2선 퇴진이라는 해석이 틀리지 않을 정도로 김 후보자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게 박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 ‘원조 친노’지만 친노와 각 세워
문제는 야권 주류인 친노(친 노무현) 진영이 김 후보자와 좋은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 후보자는 199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특강을 하며 인연을 맺은 ‘원조 친노’이자 노 전대통령의 ‘정책 책사’였다. 하지만 2009년 노 전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친노와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김 후보자는 친노 좌장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대표와도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김 후보자는 2012년 총선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문 전대표를 향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폐쇄적”이라고 지적했다.
또 2015년 11월 동아일보 칼럼에선 “(문 전 대표를) 실제로 잘 모른다. 이를테면 경제·산업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또 그 역량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고 썼다. 국민의당은 안철수 전 대표가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의 후임으로 김 후보자를 영입해 수락 의사까지 받아놓은 상태에서 김 후보자가 총리로 지명되자 떨떠름한 표정이다. 여권에선 “김 후보자가 박 대통령이 이사장을 지낸 영남대를 나온 데다 박 대통령의 본관인 경북 고령 출신인 점도 총리 낙점의 이유가 아니겠느냐?”는 말도 나온다.
[이재명 egija@donga.com·송찬욱·황형준 기자]
[만물상] "대통령 獨對"
조선일보ㅣ2016.11.03 03:10
조선시대 세종은 신하와의 독대(獨對)를 즐겼다. 여럿이 논의하면 준비 없이 왔다가 가는 신하가 많다는 이유였다. 왕조실록은 '나그네처럼 나아갔다가 나그네처럼 물러가는' 신하라고 표현했다. 세종은 게으른 신하가 싫었나 보다. 날마다 고위 관료들을 순번으로 들여 홀로 보고받고 질문했다. 이런 연쇄 독대를 '윤대(輪對)'라고 했다. 덕(德)으로 다스리던 세종대왕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 그 후 왕의 독대는 금지됐다. 궁궐을 나간 신하는 독대를 호가호위의 구실로 삼는다. 조선의 집권자들은 독대의 이익보다 폐해를 훨씬 크게 본 듯하다. 청와대 비서격인 승지(承旨)가 배석하고 사관(史官)이 곁에서 왕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했다. 사관이 붓을 잡으면 왕도 눈치를 살폈다고 한다. 신권(臣權)이 왕권을 견제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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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드물게 예외도 있었다.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北伐)을 논의한 '기해독대(己亥獨對)', 숙종과 이이명이 후계를 논의한 '정유독대(丁酉獨對)'가 대표적이다. 이례적이었기 때문에 독대 순간부터 수많은 소문을 낳았고 훗날 정쟁의 불씨가 됐다. 독대의 '영광'을 누린 송시열과 이이명은 결국 사약(賜藥)을 받았다. 일찍이 후계 문제로 선조와 독대한 유영경 역시 권력에 의해 죽었다. 조선시대 신하에게 독대라는 것은 '독배(毒杯)'가 아니었을까?
▶세종의 경우처럼 독대를 잘 활용하면 통치에 효율적이다. 고도성장 시대 대통령들은 빠른 정책 판단을 위해 실무자를 직접 불러 독대한 경우도 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같은 문제를 두고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5공식 '윤대'라고 할까? 그런데 대통령이 귀가 얇아 결국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 말대로 결정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자연히 윤대의 마지막 순번 경쟁이 치열했다나? 노무현 대통령은 독대를 밀실·가신 정치의 상징처럼 여겼다. 국정원장의 주례 독대까지 없애버렸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독대를 다시 시작하자 야당은 "밀실 정치 부활"이라고 비판했다.
▶그제 조윤선(趙允旋)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독대' 발언이 화제를 모았다.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임하는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한 일이 없었다고 했다. "정무수석이 대통령과 그 정도로 불통(不通)이었느냐?"는 여론의 비판이 있었다. 대통령이 그동안 얼마나 주변과 소통하지 않았으면 독대가 좋은 뜻으로 오르내릴까 싶기도 하다. 물론 지금 국민이 말하는 독대는 밀실 대화라는 부정적 뜻이 아니라 서로 마주 앉아 정책을 논의하는 소통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참모와 소통하지 않으면서 비선(秘線)과는 여일없이 독대한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다. [선우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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