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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역사

[조선왕조실록] 국보 지정서 빠진 60여책 더 찾았다

잠용(潛蓉) 2016. 12. 21. 18:59

<조선왕조실록> ①

국보 지정서 빠진 60여책 더 찾았다
연합뉴스ㅣ2016.12.20 06:11 수정 2016.12.20 08:57 댓글 21개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는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밀랍본은 표지를 쪽빛으로 염색하고 내지는 습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밀랍을 입혔다. /psh59@yna.co.kr

 

서울대 규장각에 밀랍본·춘추관本 추가로 존재
병자호란 직후 정리 과정서 별도 보관.."정밀조사 필요"

<※ 편집자주 =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기록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입니다. 실록은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중요한 역사 콘텐츠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고, 정확히 몇 책이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연합뉴스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새롭게 확인된 실록 현황, 들쭉날쭉한 실록 통계의 문제점, 손상된 실록의 보존처리 방안을 세 꼭지로 나눠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왕조실록 중에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60여 책이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규장각 자료의 보존 관리와 한국학 연구를 담당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이 사실을 지난 2013년 인지하고도 문화재청에 통보하지 않음으로써 문화재 관리의 난맥상을 드러냈다. 특히 문화재청은 국가지정문화재의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20일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조사 결과 국보 제151-1호인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과 국보 제151-4호인 조선왕조실록 기타 산엽본(낙장으로 구성된 책) 외에 밀랍본(종이에 밀랍을 입힌 책) 25책과 춘추관사고본 40여 책이 더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보 미지정 춘추관사고본의 정확한 책수는 아직 조사되지 않은 상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책'(冊)은 물리적인 책을 셀 때 사용하는 단위이며, '권'(卷)은 내용을 분류할 때 쓰는 용어다. 대개 한 권은 한 책으로 돼 있지만, 성종실록은 2∼6권이 한 책으로 묶여 있는 경우도 있다.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제7권'.

 

이번에 새롭게 확인된 실록은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일부가 분실되고 훼손된 전주사고본(밀랍본)을 보수·정리해 완벽한 한 질로 다시 만든 뒤 남은 책으로 추정된다. 이들 책은 훗날 국보로 지정되는 실록들과는 구분되는 별도의 실록궤에 담겨 따로 보관됐다. 당시에 보수된 책들은 1660년 강화도 정족산사고에 봉안돼 지금은 '정족산사고본'으로 불리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전주사고본 중에 빠진 부분은 춘추관사고본이나 적상산사고본을 등사한 책으로 대체했다.

 

실록등출봉안후형지안.

 

조선왕조실록의 피해와 수리 상황을 정리해 1666년에 펴낸 '실록등출봉안후형지안'(實錄謄出奉安後形止安, 형지안)의 '첩권질'(疊卷秩) 항목에는 "양대 이십사책(樣大 二十四冊), 양소 사십사책(樣小 四十四冊), 산장 일백오십이장(散張 一百五十二張)을 세 개의 실록궤에 넣었다(合入三櫃)"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대해 규장각 측은 '양대'와 '양소'가 밀랍본과 춘추관사고본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밀랍본은 춘추관사고본보다 책이 훨씬 크다. 또 '산장'은 낙장으로 잔존한 실록을 뜻한다. '산장'은 대부분 국보 제151-4호로 지정된 기타 산엽본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일차적으로 국보 지정에서 제외된 밀랍본을 조사한 이상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장은 "형지안에는 '양대 이십사책'이라고 돼 있으나 정종실록 제1권 한 책이 더 있다"며 "몇 권이 더 추가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조선왕조실록 밀랍본에 대해 "표지는 비단을 쪽빛으로 염색했고 내지는 습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밀랍을 입혔다"며 "실록은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적상산사고본 등 세 개의 완질이 전하지만, 정족산사고본에만 유일하게 밀랍본이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규장각 수장고. 오른쪽에 있는 함에 국보 미지정 실록이 보관돼 있다.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조선왕조실록 춘추관사고본 성종실록. 표지 상태가제각각이다. 

 

이번에 새롭게 확인된 실록 밀랍본은 정종실록 1책 외에도 태종실록 1책, 세종실록 1책, 문종실록 1책, 세조실록 2책, 예종실록 3책, 성종실록 7책, 연산군일기 1책, 중종실록 6책, 명종실록 2책이다. 그중 세종실록 제119권, 세조실록 제27권, 성종실록 제63권은 표지가 바뀌었지만 낙장이 없고, 성종 제96∼99권도 낙장이 없으나 화재로 인해 약간 훼손된 상태다. 예종실록 제5권은 푸른색 비단 표지가 남아 있고 낙장이 한 장에 불과하다.

현재 이들 책은 다른 실록과 마찬가지로 항온·항습 기능을 갖춘 오동나무 함에 보관돼 있다. 이 원장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973년 국보를 지정할 때 별도의 실록궤에 있었던 잔질본은 제외됐다"며 "국보에서 빠진 밀랍본과 춘추관사고본의 정확한 수량과 내용을 파악하려면 정밀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올해 서울대로부터 정족산사고본과 기타 산엽본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며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실록이 있다면 조사를 통해 국보 지정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psh59@yna.co.kr]

 

<조선왕조실록> ②

들쭉날쭉한 통계… 정확한 책수는?
연합뉴스 | 2016/12/20 06:10

 

국보 지정 2천124책… 정족산本 1천181책? 1천187책? 의견 분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왕조실록은 총 2천77책으로 이뤄진 기록물입니다." 올해 후반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책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머리말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소개한 첫 문장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역사를 알기 쉽게 설명해 큰 인기를 끌었으나, 조선왕조실록의 책수를 잘못 기재하는 큰 오류를 범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국보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2천124책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는 정족산사고본(제151-1호)과 기타 산엽본(제151-4호)이 각각 1천181책과 21책이고, 부산 국가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태백산사고본(제151-2호)은 848책이다. 여기에 지난 7월 서울대 규장각에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된 오대산사고본(제151-3호)이 있다. 오대산사고본은 본래 27책만 있었으나, 1913년 일본 도쿄대로 넘어갔던 47책이 2006년 돌아오면서 모두 74책으로 늘었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 중인 중종실록.

 
물론 이번에 새롭게 확인된 서울대 규장각 수장고의 밀랍본과 춘추관사고본, 북한에 존재한다는 적상산사고본은 2천124책에 포함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이 조선왕조실록 책수를 2천77책으로 집계한 이유는 무엇일까? 2천77책은 1997년 조선왕조실록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할 때의 수치다. 즉 일본에서 환수한 오대산사고본 47책은 빠져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현 상태를 정리하면 정족산사고본과 태백산사고본은 완질이고, 오대산사고본과 규장각의 국보 미지정 밀랍본·춘추관사고본은 일부만 남아 있다. 기타 산엽본은 낙장들의 묶음이다.

 

그런데 정족산사고본의 전체 책수도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 일부 자료에는 정족산사고본이 1천187책으로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상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장은 "국보 지정 당시 '조사서'에는 1천187책으로 돼 있는데 국보지정서에는 1천181책으로 기록돼 있다"며 "차이가 발생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정족산사고본은 전체 1천187책이 있지만 6책은 지정가치가 없어 국보에서 빠졌고, 기타 산엽본도 모두 22책인데 1책은 상태가 좋지 않아 지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궤.

 

정족산사고본의 책수가 이처럼 들쭉날쭉한 까닭은 여러 차례 이전과 보수를 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는 조선시대 초기에 한양, 전주, 충추, 성주에 있었으나, 1592년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됐다. 이후 조선 왕조는 1606년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한양 병조 건물에 사고를 신설했고, 1614년 무주 적상산에 사고를 추가로 지어 묘향산의 실록을 옮겼다. 이들 사고에 보관한 실록은 모두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17세기에 다시 간행한 책이다.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전주사고의 실록은 해주, 영변 등지를 전전하다 1606년 강화도 사고에 정착했다. 강화사고에는 1624년 이괄의 난 과정에서 한양 병조 건물이 화마를 겪은 뒤 남은 실록(춘추관사고본) 일부가 추가됐다. 그나마 온전했던 전주사고본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상당수가 표지나 내지가 탈락하는 피해를 봤다. 이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완질을 만들기 위해 춘추관사고본 중 일부와 적상산사고본을 등사한 책을 편입시켰고, 이 책들은 1660년 완공된 강화도 적상산사고에 봉안됐다. 이상찬 원장은 "적상산사고본은 원래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책수가 576책이었으나, 1666년에는 612책으로 늘었다"며 "성종실록과 연산군일기는 병자호란 이후 보수 과정에서 2∼3권을 담았던 책을 1권 한 책으로 나눈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보수를 거친 조선왕조실록. 왼쪽 페이지는 목판으로 찍었고, 오른쪽 페이지는 손으로 직접 썼다.

 

이 같은 책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조선왕조실록의 전반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계 관계자는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적으로 보관 상황이 복잡하다 보니 책수 통계가 부정확해졌다"며 "조사를 통해 책수를 파악하고 책수와 권수를 병기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sh59@yna.co.kr]

 

<조선왕조실록> ③

손상 밀랍본 어쩌나…15년째 제자리 걸음
연합뉴스 | 2016/12/20 06:10

 

국립문화재硏 "보존처리 기술 개발하고도 적용 못해"
규장각 "훼손 원인 규명이 먼저… 신중하게 접근해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중 손상된 밀랍본의 보존처리는 지난 2002년 훼손 사실이 알려진 뒤 15년째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해묵은 과제다. 밀랍본은 방충, 방습 등을 위해 벌집에서 추출한 밀랍을 한지 표면에 입힌 책을 뜻한다. 실록에 밀랍 처리를 하는 기법은 임진왜란 이전에만 사용됐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지정 정족산사고본 가운데 밀랍본은 475책이다. 이들 책 중 일부는 밀랍이 붙어서 책장을 넘기기 힘들고, 종이가 딱딱하게 굳어 부서지기 쉬운 상태이다.

 

손상 밀랍본.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고, 밀랍이 갈색으로 변한 부분이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06년부터 7년간 '조선왕조실록 밀랍본 복원기술 연구'를 수행하면서 전체 밀랍본 중 21%인 131책을 불량으로 분류했다. 그중에는 세종실록이 86책으로 가장 많고, 성종실록도 11책이 있었다. 당시 연구소는 밀랍본 훼손의 원인이 밀랍 처리 기법 자체에 있고, 밀랍을 종이에 도포한 양이 많을수록 훼손 정도가 심한 것으로 봤다. 밀랍을 바르지 않은 실록은 지금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고온과 고압의 한계를 넘어 액체와 기체 중 한쪽으로 구분할 수 없는 '초임계유체'를 활용해 종이에서 밀랍만 제거하는 '탈랍'(脫蠟) 기술을 개발했다. 그러나 이 보존처리 기술은 아직 한 차례도 적용되지 않았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밀랍본 보존처리에 대해 신중론을 펴고 있다. 밀랍본의 훼손 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고, 복원이 시급한 실록도 세종실록 10여 책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조선 조정이 1654년 실록의 피해 상황을 조사해 발간한 '실록봉안후형지안'(實錄奉安後形止案)에는 부패로 인한 파손(腐破), 진흙 오염(泥汚), 빗물로 인한 부패와 파손(雨漏破腐), 화재 흔적(紙頭火災)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실록봉안후형지안. 세종실록의 훼손 사실이 기록돼 있다.

 

규장각 측은 이 기록을 근거로 1654년 이전에 이미 실록의 부패가 진행됐고, 청나라 군대가 실록을 사고 밖으로 끄집어내 불을 지르고 물을 끼얹은 것이 훼손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장은 "손상된 밀랍본은 대부분 세종실록인데, 형지안에도 세종실록과 명종실록만 부패가 진행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며 "모든 밀랍본이 훼손됐다는 주장은 확대 해석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규장각은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종이에 밀랍을 바른 책에 열을 가하고 물을 뿌린 뒤 변화 양상을 살피는 실험을 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만큼 절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우선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존처리 기술을 밀랍본에서 추출한 시료에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자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문화재 보존처리 전문가는 "실록이 국보여서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훼손된 밀랍본 낱장을 대상으로 탈랍 실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이 결과를 바탕으로 추가 논의를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에 관한 1차 연구를 했고,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2차 연구를 하고 있다"며 "규장각 연구가 끝나면 실록의 보존처리 방향을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psh59@yna.co.kr]

 

"도시 둘러싼 600년 넘는 성벽... 로마에도 없는 자랑거리"
조선일보ㅣ허윤희 기자ㅣ입력 2016.12.22 03:09 수정 2016.12.22 07:54 댓글 91개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다' 펴내
한양 도성 역사·숨은 가치부터 복원 대한 날카로운 시각 담아
"동대문 이간수문은 잘못된 복원...

뿌리만 발굴해 현대 석재 쌓아 그냥 21세기 성벽이 돼버려"
'최대 규모, 최다 인력 동원, 최단 공기(工期)의 3관왕.'

1396년 조선 도읍을 지키는 도성으로 세워진 한양 도성은 국내 축성사(史)에서 경이로운 기록을 갖고 있다. 먼저 전체 둘레 18.63㎞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성(城)이다. 태조 때 1·2차 축성에 19만7470명, 세종 때 고쳐 쌓을 때는 한 달간 32만2400명이 투입돼(합하면 50만명 이상) 단일 성곽 중 가장 많은 장정이 동원됐다. 반면 공사 기간은 가장 짧았다. 1·2차 공사에 걸린 기간을 다 합해도 98일밖에 안 걸렸다. 고구려 평양성이 35년, 남한산성이 2년 걸린 데 비하면 놀라운 속도다. "그만큼 최다 백성을 동원해 국가적 총력을 기울여 쌓은 거죠. 3관왕 기록보다 더 가치 있는 건 도시 성벽으로서 지닌 긴 역사입니다. 한양 도성이라는 600년 넘는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는 건 축복이고 자랑거리예요. 세계적 대도시 중에서 도시의 외곽을 둘러싼 성벽이 이렇게 장구한 기간 유지된 건 서울이 유일합니다. 로마에도 아테네에도 없어요."

 


신희권(46)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가 펼치는 한양 도성 예찬론이다. 최근 펴낸 '한양도성, 서울을 흐르

다' (북촌)에서 그는 한양 도성의 역사와 스토리, 숨은 가치, 고고학자로서 지닌 발굴 경험과 복원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까지 풀어냈다. 한양 도성의 내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심의를 앞두고 국내외 관심이 커지는 시점에서 반가운 책이다. 21일 서울 동대문 이간수문 앞에서 만난 그는 "주말이면 수많은 시민이 한양 도성 따라 산책하는데 그분들이 지나는 곳이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정확히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백악산에서 시작해 낙산을 거쳐 남산 지나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순성(巡城·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함) 구간을 따라 이야기가 펼쳐진다.

 

얼마 전까지 한양 도성은 '서울 성곽'이라 했다. 문화재청이 전국 문화재 명칭을 바꾸면서 2011년 '서울 한양 도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는 "성곽(城郭)이란 왕이 거하는 궁성의 성(城)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외곽 성의 곽(郭)을 합쳐 부르는 말인데 한양을 둘러싼 성벽을 서울 성곽이라 부르는 건 맞지 않았다. 굳이 쓴다면 '서울 곽' 또는 '서울 곽성'이 정확하다"며 "한양 도성으로 이름을 바꾼 건 잘한 일"이라고 했다. 2년 전까지 그는 문화재청 학예연구관이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과 동시에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로 발을 들인 후 20년간 공직 생활을 했다. 10년 넘게 풍납토성을 발굴한 백제 전문가이면서 2007년과 2008년 각각 경복궁 광화문과 한양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 발굴을 이끌었으니 한양 도성과도 인연이 깊다.

 

한양 도성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일부 훼손되고 멸실되는 수난을 겪었다. 전체 구간 18.63㎞ 중 현재 약 13㎞의 성벽이 남아 있다. 그는 "한양 도성 복원을 보면 우리나라 문화재 보존의 문제점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지적했다. 한양 도성은 태조 대에 축조된 후 세종, 숙종, 영조 대에 걸쳐 수차례 수축·정비돼 구간별로 여러 시간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데 최근에 복원된 성벽들은 그런 시간성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복원에 사용된 석재가 기존의 성돌과 전혀 어울리지 않고 이질감을 드러내는 것도 문제다.

 

동대문 이간수문(二間水門·물이 흘러가는 통로가 2개인 수문)이 대표적 사례.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3년간 발굴 조사를 했더니 멸실된 줄 알았던 이간수문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요. 이거야말로 진짜 고대 유적이구나 하고 감동했는데 나중에 복원된 이간수문을 보고 배신감마저 들었습니다. 뿌리만 1~2단 발굴해놓고 상부까지 현대 석재로 복원했으니 이건 그냥 21세기 성벽이 돼버린 거죠." 그는 "제대로 복원할 수 없다면 원상태 그대로 남겨놓고 잘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