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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역사

[명성황후] "장례식은 시해후 2년후 거행되었다" … 헐버트 참관기

잠용(潛蓉) 2016. 12. 19. 19:07

"명성황후 장례비 100만 달러... 언덕배기는 촛불로 타올랐다"
동아일보ㅣ2016.12.19 03:03 수정 2016.12.19 05:19 댓글 178개

 


1897년 11월 21일 명성황후 장례식 행렬 중 신주를 모신 가마가 지나는 모습. 장례식은 명성황후가 1895년 10월 8일 시해되고 2년여가 지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열렸다. /동아일보DB

 

'고종 측근' 헐버트 박사의 국장 참관기, 최근 美신문서 발견

“도성 밖의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니 모두 9000명쯤 보이는 병사들과 일꾼들의 야영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틀간 초 값만도 6500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언덕배기는 불빛으로 타올랐다. 임시 주방 여러 곳에서 일꾼들과 문상객들에게 음식을 날랐다. 마치 중세의 대회의장이나 군대의 원정을 위한 계파들의 모임 같았다.”

고종의 최측근으로 헤이그 특사증을 우당 이회영 선생에게 전했던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가 1897년 11월 21, 22일 명성황후의 국장에 참석한 뒤 미국 신문에 기고한 글 중 일부다. 최근 발견된 이 기고문은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얼마나 성대하게 열렸는지 보여줘 주목된다. 또 장례식에 참석한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주한 일본공사가 1897년 11월 27일 본국에 보고한 기록을 통해 일본 왕실이 장례식에 향로를 보내왔다는 사실도 새로 확인됐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이 19일 헐버트 내한 13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헐버트의 활약’에 따르면 헐버트 박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 1898년 1월 9일자에 명성황후의 장례식 참관기를 남겼다. “시해된 명성황후의 유해를 엄청난 비용을 들여 장대한 의식으로 매장하는 장례가 시작됐다. 무덤 조성과 장례 의식의 총비용은 100만 달러에 가깝게 추산된다.”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고종이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황제의 위호를 대외적으로 사용한 사실상의 첫 행사인 만큼 성대하게 치러졌다. 명성황후의 죽음을 추적해 온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동해연구실장은 “가토 공사는 ‘장의전모(葬儀典模)는 모두 명제(明製)에 의거해 행렬 등은 극히 장려(壯麗)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장례는 외교관과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특히 배려한 것으로 드러나 대한제국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헐버트 기고문에 따르면 참석한 외국인은 60여 명이었고, 일본공사관 기록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장례식 사흘 전인 18일 각국 공사 영사에게 관원을 대동하고 참석해 달라고 통지하고 당일 새벽 가마(6인교)와 순검 등을 보내왔다고 나온다. 장지인 청량리에서도 외국인들은 후하게 대접받았다. “정부는 (능)언덕 기슭에 1만 달러 정도를 들여 임시 건물을 세웠다. 황실의 수행원들과 고위 관직들, 초청된 외국인들을 위한 숙소였다. … 늦은 밤에 12개 코스가 나오는 과분한 저녁식사가 서울에서는 내로라하는 일류 요리사들에 의해 제공되었다.”(헐버트 기고문)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 박사는 명성황후 시해 직후 고종을 지키기 위해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고, 조선과 조약을 맺었던 나라들이 시해 사건에 침묵함을 비난했다”며 “신문 기고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왕실이 명성황후의 국장에 은제 향로를 보내온 점도 특이하다. “황제 폐하 및 황태자 전하는 상복을 입으신 채로 각국 사신 및 수행원 일동의 알현을 받으셨고, 본관을 비롯하여 공손히 조사(弔詞)를 아뢰었습니다.”(가토 공사 보고)

 

가토 공사는 “폐하께서는 만족한 모습이었고 ‘일본 제실(帝室)에서 미려한 향로를 증견(贈遣)하셨음은 짐이 특히 감사하는 바이다’라고 하셨다”고 보고했다. 일본인들이 시해한 황후의 장례식에서 일본 왕실의 조의품을 받는 고종의 속내가 어땠는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고종은 밤새 장례를 직접 지휘한 것으로 나타났다. “황제는 하관과 봉분 작업을 직접 지휘했다.”(헐버트 기고문) “폐하와 전하 모두 장의 당일 밤은 백관을 독려하여 모든 일을 친히 지휘하시어 거의 침실에 들어가실 틈이 없었던 모양이고….”(일본공사관 기록)

 

당일 한국 의장병은 모두 러시아식이었고, 러시아 하사관이 4명씩 어가의 4위(四圍)를 호위했다. 김영수 동북아재단 실장은 “당시 러시아 재정고문관 초빙을 둘러싼 마찰 등 한-러 관계가 어긋나고 있었다는 게 통설인데, 이 장면은 여전히 긴밀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연구를 통해 세부 과정이 드러났고, 호러스 앨런 미국공사 등이 남긴 글도 있다. 헐버트 박사 내한 기념 학술대회는 19일 오전 10시 반 서울 종로구 YMCA 대강당에서 열린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명성황후 진짜 얼굴 밝혀지나?
중앙일보ㅣ배영대ㅣ입력 2016.12.19 00:56 수정 2016.12.19 06:25 댓글 139개


장례식 전한 118년 전 미 신문 발굴
고종과 친했던 헐버트 박사가 필자
황후 삽화, 궁녀 논란 인물과 닮아
명성황후 사진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이번엔 풀릴까.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피살된 비운의 명성황후. 장례식도 바로 열리지 못하고 2년 후인 1897년 11월 21~22일에야 열렸다. 그 장례식 소식을 전하는 118년 전 신문이 발굴됐다. 1898년 1월 9일자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이다. 장문의 기사와 함께 명성황후의 삽화가 실려 있다.

 

 

명성황후 장례식을 보도한 1898년 1월 9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사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기사를 쓴 이는 바로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존경을 표했던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 박사다. 우리나라 첫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교사로 1886년에 초빙돼 온 인물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추진한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지지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이번 기사를 발굴한 이는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이다. 김 회장은 1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YMCA 대강당에서 ‘헐버트 박사 내한 1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열고 이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명성황후 진짜 얼굴을 알아내려 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이번 삽화는 그중 1893년 프랑스 월간지 ‘피가로 일루스트레’(10월호)에 실린 사진과 유사하다. 여행작가이자 기자인 프랑스인 게르빌이 찍은 것으로 “민, 조선의 황후(Min, Roi de Coree)”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명성황후로 공인받지는 못했다. 조선을 소개하는 당시의 다른 책자들에도 이와 같은 사진이 나오는데 대개 궁녀로 소개되고 있어서다. 그런데 이번 발굴로 상황이 좀 달라졌다.

 

이 삽화에도 “시해된 한국의 황후(The Corean Empress Who Was Murdered)”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특히 헐버트가 고종황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한국말도 잘했기에 명성황후의 얼굴을 분명히 알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헐버트는 궁궐에서부터 동대문 밖 홍릉에 이르는 성대한 장례 행렬을 스케치했다. 헐버트가 이번 삽화를 제공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초상의 진실을 찾는 실마리는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