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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弊淸算

[磨斧作針] 친일파 재산보고서 3~4

잠용(潛蓉) 2017. 8. 21. 18:15

[磨斧作針] 단독공개! 친일파 재산보고서

 적산(敵産)은 아직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SBS뉴스ㅣ박원경 기자ㅣ입력 2017.08.15. 12:15 수정 2017.08.16. 09:35 댓글 2126개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이란 뜻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과 일본기관이 소유했던 동산과 부동산을 광복이 된 이후 사람들은 '적산'이라고 불렀다. 적산은 미 군정법령 제33호에 따라 조선 군정청으로 귀속되기 시작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로 귀속 주체가 이관됐다. 한마디로 적산은 모두 국가로 귀속되는 게 대원칙이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친일파들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친일파 재산은 물론, 적산 환수도 난항을 겪었다. 한국전쟁까지 발발하자 토지대장 상당수는 소실됐고, 귀속돼야할 일본인 명의의 토지, '적산' 가운데 상당수의 땅은 그 소유권이 묘연해졌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과 소셜 동영상 미디어 <비디오머그>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4년간 한시적으로 활동했던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확보했던, 재조일인(在조선일본인,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명단과 대조해 작성된 '적산 의심 리스트'를 단독으로 입수했다. 전국 각지에 산재한 '1만 425필지(1,144만㎡)'의 '적산 의심 토지'가 적힌 리스트를 토대로, 유령처럼 우리 곁을 떠도는 '현재진행형 적산'을 찾아나섰다. 적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역사적 좌절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도 알아봤다.



'나카라 야쓰오'…

"내가 산 땅이 옛날에 일본인의 땅이었다고?"

복숭아로 유명한 충복 옥천. 3년 전,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복숭아 농사를 짓기 시작한 서 모 씨에게 지난해 말 정부가 발송한 문서 한 통이 날아왔다. 서 씨가 갖고 있는 땅이 "과거 일본인 명의의 땅이었으니 어떤 과정으로 땅을 갖게 된 건지 해명하라"는 내용이었다. 해명을 못하면 국고로 환수할 것이란 경고도 덧붙여져 있었다. 2년 전, 진입로 확보 문제로 원래 서 씨가 가지고 있던 땅 일부와 이웃한 땅을 교환한 것이 화근이었다. <마부작침> 취재 결과, 토지 교환으로 현재는 서 씨의 소유가 된 땅은 광복 이전엔 '나카라 야쓰오'라는 일본인의 땅이었다. 정상적이라면 광복 직후 국고로 환수됐어야 할 땅, 즉 적산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땅은 어찌된 일인지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있다가 1970년, 강 모 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고, 2004년, 다시 한 모 씨로 소유자가 바뀌었다. 그 뒤 한 씨와 서 씨가 땅을 교환했던 것이다.



<마부작침>은 수소문 끝에 2년 전 서 씨와 땅을 교환한 한 씨를 만났다. 올해 84살인 한 씨는 문제의 토지에 대해 "4대째 물려받아 농사를 지어온 땅"이라고 주장했다. 2004년 남편이 죽자 땅을 상속받았는데, 한 씨의 남편이 바로 1970년부터 땅 소유자로 등록돼 있던 강 모 씨다. 한 씨는 이 땅이 당초 남편 명의라는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 남편이 죽고 나서야 남편 명의의 땅이 있다는 걸 알게 돼 명의를 자신으로 바꿨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한 씨는 "옛날에 남편이 동네 사람들에게서 서명을 받아 국가기관에 뭔가를 제출한 적이 있는데 그게 이 땅과 관련한 것 아니겠느냐"고 추정했다. 현재 이 땅은 국가가 "국고로 환수하겠다"며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3차례 '부동산 등기 특별조치법'…

'적산'이 의심되는 땅들



땅의 소유권 이력을 추적해봤다. 이 땅은 1970년 강 씨가 매매한 것으로 돼있지만, 이런 사실에 대한 공식적인 접수는 1994년에야 이뤄졌다. 정부는 지금껏 3차례에 걸쳐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별조치법)'을 실시했다. 광복 직후, 적산 청산을 못해 여전히 토지대장상 땅 주인이 일본인으로 돼 있거나, 전쟁으로 인해 토지대장이 멸실됐거나, 시스템 미비 탓에 소유권이 불분명한 경우에, 토지 소유권을 정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별조치법은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시행된 1차 특별조치법, 1993년부터 1994년까지의 2차 특별조치법, 2006년부터 2007년 까지의 3차 특별조치법이 있었다.


문제는 방식이었다. 1, 2차 특별조치법 당시 정부는 리·동별 보증인 3~6명을 위촉한 뒤, 보증인들이 "이 토지는 A 씨가 과거부터 소유하고 있었거나 돈을 주고 산 것이 맞다"고 증언 형식의 보증만 하면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해 줬다. 대부분 현장 조사조차 실시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소유권이 불분명한 땅을 얼마든지 '내 땅'으로 만들 수 있었던, 허술한 방식이었던 셈이다. 주로 신고 시점에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땅이 타깃이 됐고, 그 중심엔 '적산'이 있었다. 과거 일본인 소유였지만,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여전히 일본인 명의로 남아 있는 땅, 그 정체가 모호한 '적산'들이 정체가 불분명한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곤 했다.


앞서 서 씨가 맞바꾼 문제의 땅이 대표적인 경우다. 1970년 강 씨(한 씨의 남편)가 매수했다는 토지는 2차 특별조치법 시행 기간 동안 등록됐다. 한 씨가 "남편이 동네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한 것도 당시 정부가 지정한 보증인에게 보증 서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 씨는 4대째 물려받은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입증할 서류는 없다. 보증인들도 모두 숨졌다. 친일재산조사위로부터 적산 환수 업무를 인계 받은 조달청은 뒤늦게 "한 씨의 남편 강 씨가 1970년 실제 땅을 매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땅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라며 환수 소송을 낸 것이다.


"돈 주고 샀다"…

증명하기도, 반박하기도 힘든 상황

충북 옥천에서 '적산' 문제로 국가와 소송 중인 다른 사람을 더 찾을 수 있었다. 올해 90살에 가까운 유 모 씨다. 정부는 최근 유 씨 땅에 가처분 등기를 했다. 한 동안 토지를 남에게 팔거나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토지대장에 따르면, 광복 이전 유 씨의 땅의 소유자는 '이리야마 노보루'였다. 그러다 1980년 유 씨 명의가 됐고, 소유권 등기 17년 전인 1963년 유 씨가 이 땅을 샀다는 이유에서다. '이리야마 노보루'와 '유 씨' 사이에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 씨가 이리야마 노보루에게 1963년 이 땅을 매수했다는 의미이고, 이 토지는 1차 특별조치법 기간 등기 신청됐다.




[마부작침] 친일파 토지대장/등기부등본<마부작침>이 유 씨를 찾았을 때, 유 씨는 거동도 힘들었고. 기억도 또렷하지 않았다. 귀가 어두워 의사소통도 쉽지 않았다. 유 씨는 분쟁 중인 땅의 구체적 소유 과정에서 대해 "세월이 너무 흘러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다만 "이 땅을 돈을 주고 산 것 만은 맞다"고 강조했다. 또 "당초 땅 주인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내 땅을 환수해 가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역정을 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서류나, 증언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문제의 땅은 국고로 환수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유 씨가 땅을 실제로 매매한 것이 아니라는 확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광복 70년 만에 시작된 일본인 명의 토지 환수…

구조적 한계

이렇게 된 것은 '적산'에 대한 관리와 환수가 광복 이후 오랜 기간 부실했고, 친일파 재산 환수가 본격화한 2006년 이후에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5년 8월, 조달청은 일본인 명의 은닉 재산, 즉 '적산 의심 토지'의 환수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친일재산조사위가 2010년 활동을 종료하며 마무리하지 하지 못한 작업을 이어서 해나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조달청은 광복 전, 일본식 이름으로 명의가 돼 있는 53만 필지 토지대장을 입수했다. 이 가운데 창씨개명한 한국인이 소유했던 토지는 우선적으로 제외했다. 그리고 친일재산조사위가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한 '일제강점기 재조선 일본인' 약 23만 명의 명단과 일일이 비교했다. 그 결과, 10,479필지의 경우 한국인 명의로 소유권이 변동된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적산'으로 확인된 땅은 환수할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조달청 관계자는 "'몇십 년 동안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땅을 환수하느냐'는 협박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일부 적산에 대한 조사와 환수가 광복 이후 70년이나 지나서, 너무 늦게 진행된 탓이었다. 곳곳이 난관이었다. 오랜 세월이 이미 흐른 터라 진실 규명도 어려웠다. 토지 조사는 매매 계약서 존재 여부, 주변인 진술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소유자가 실제 땅 주인이 맞더라도 이를 확인해 줄 사람이 없거나 계약서가 분실됐다면 국고로 환수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반대로 현 소유자가 실제 땅을 사지 않았더라도 계약서를 위조하거나 주변 사람들과 말을 맞추면 소유권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했다. 현실적 한계가 구조적으로 분명했던 셈이다.


"작은아버지 이름도 등장하는데…

"증명할 수 없어 국고로 환수된 땅

전남 영광에서 몇십 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오 모 씨. 지난해 말 오 씨의 임야 6,446㎡가 환수됐다. 과거 일본인 명의, 즉 적산으로 국가 귀속돼야 할 땅을 "오 씨가 불법적으로 취득해 명의를 바꿔놨다"는 이유에서다.

<마부작침>과 만난 오 씨는 잘못된 방법으로 땅을 취득한 사실은 인정했다. 2차 특별조치법 당시 보증인들에게 서명을 받아 일본인에게 땅을 샀다는 내용으로 허위 신고해 땅을 취득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해당 땅은 과거부터 자신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관리해 온 가문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적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일가 중 누군가의 소유로 돼 있어야 하는데, 2차 특별조치법 당시 문제의 땅이 일본인 명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등기 신청을 했노라고 털어놨다.



환수된 땅의 소유주를 역추적했더니 오 씨의 말처럼 토지대장에는 오 씨의 작은아버지 이름이 등장했다. '오산(吳山)'으로 시작되는 네 글자는 "작은아버지가 창씨 개명한 이름"이라고 오 씨는 주장했다. 그리고 그 아래 이름은 오 씨의 고모, 즉 작은아버지의 동생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아래 두 개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오 씨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름은 친인척일 것이라고만 추정했다. 그렇지 않다면 소유권을 이어받은 사람이, 오 씨 아버지가 오랜 기간 동안 문제의 땅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있진 않았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실제로 이 땅을 "오 씨의 아버지가 관리해 왔다"는 건 마을 주민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하지만, 광복 직후 문제의 땅의 소유자로 토지대장에 기재돼 있는 '가와모토 이시이와'가 누군지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고 말한다. 해당 땅이 일본인 명의로 된 사실을 알았던 1994년에는 이미 사정을 알만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등이 모두 사망한 이후였기 때문이다. 오 씨는 "서류를 꾸며 해당 땅을 자신의 이름으로 돌린 것은 잘못됐다"고 인정하면서도, "문제가 된 땅이 원래부터 우리 가문 소유였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고 억울해했다.


"땅을 샀을 리가 없는데…

"서류로 지켜낸 땅

전남에 땅을 가진 A 씨에게도 지난해 말 정부 명의 문서가 배달됐다. 토지대장에 따르면 A 씨가 소유한 땅은 광복 전까진 일본인 명의였고, 1974년  A 씨가 매수한 것으로 돼있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당초 이 땅을 광복 직후 환수 됐어야 하는 '적산 의심 토지'로 분류했다. 다만, 서류상 광복 이후 29년이 지나 A 씨가 일본인에게 매수한 것으로 돼 있었다.


A 씨는 <마부작침>과의 통화에서 해당 땅은 "과거 일본인에게 돈을 주고 산 것"이라며 "1차 특별조치법 당시 계약서를 바탕으로 등기 신청했다"고 말했다. "일본 사람과 만나 돈을 거래 한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는 말을 아꼈지만, "당시 계약 서류를 보냈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부는 계약서를 바탕으로 매매 사실이 확인된다며 최근 소를 취하했다. '적산'이 아니라 A 씨 소유로 인정해준 것이다.


그러나 <마부작침> 취재 결과,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점들은 있었다. 문제의 땅이 있는 마을의 한 주민은 "A 씨가 일본인에게 땅을 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1974년 A 씨가 일본인에게 땅을 매수했다면, 땅을 판 일본인이 1974년에 마을에 있어야 하거나, 적어도 그 땅의 주인이 계속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마을주민이 있어야 되는데, 이걸 알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마을주민은 "당시 마을에 일본인이 온 것을 본 적도 없고, 땅 주인이 일본인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며 "광복 전 이 마을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떠나간 일본인 명의의 땅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는 정황 증거일 뿐이고, 매매계약이 진실 또는 허위라는 걸 명확하게 확인하기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점이다. 실제로 A 씨가 '일본인' 또는 '창씨개명을 했던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는 한국인'으로부터 땅을 매입했을 수도 있다. 입증 책임은 정부에게 있고, A 씨의 매매계약서를 뒤집을 다른 증거를 확보 못한, 현실적으로도 확보하기 어려운 정부 입장에선 환수를 위한 뾰족한 수단은 없는 셈이다. 때문에 '적산 의심 토지'에서 이 땅은 결국 제외됐다.


지연된 정의의 대가…

"대어는 놓치고 피라미만 잡는 격"

구조적 한계 속에서 정부는 지난 2년 간 소유권 반환 소송 88건을 제기해 17건을 승소하거나 소송이 마무리되기 전 자진반환 받았다. 환수된 땅은 13,545㎡ 규모다. 뒤늦게 매매 사실이 확인돼 소를 취하하거나 패소한 경우를 제외한 63건은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이다.



지연된 청산의 후폭풍은 크다. 상당수 '적산 의심 토지'는 그동안 많게는 수십 차례 거래가 이뤄지면서, 최초로 적산을 불법 취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광복 직후 이뤄졌어야 할 적산 환수 실패 탓에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준식 전 친일재산조사위 상임위원은 적산 환수 작업 당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전 위원은 "2009년 즈음 적산 환수 작업을 하는데, 아직도 조선총독부 명의의 토지가 남아있었다"며 "'우리가 아직도 일제 식민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또 그는 불법적으로 적산을 가져간 사람들과 함께 해방직후 이뤄진 '적산불하'를 악용한 이들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적산불하'는 이승만 정부가 일본인 소유였던 공장·집 같은 부동산과 차량·기계와 같은 동산, 즉 대표적 '적산'을 개인 또는 기업에게 나눠준 걸 말한다. 이준식 전 위원은 "광복 직후 적산불하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적산을 가져간 사람이 많은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파"라며 "이렇게 가져간 적산이 친일파와 그 후손에게는 훗날 부의 원천이 됐다"고 덧붙였다.


친일파가 가져간 적산은 귀속 대상도 아니다. 친일재산환수법은 '러·일 전쟁 개전 시부터 광복절까지' 취득한 재산만 환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적산불하'라는 외견상 합법적인 과정을 거쳤다는 이유로 현재진행 중인 적산 조사 대상에도 빠졌다. '어제의 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같다'는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말은 한국 사회에선 현실로 반복되고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단죄를 받기는커녕, 적산불하를 악용해 재산을 증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단죄의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이 절실하다. 그리고 옳지 못한 방법으로 형성된 부를 되돌리는 것이 '단죄'의 한 길이다.


[磨斧作針] 단독공개! 친일파 재산보고서

④ 친일파의 상속자, 반성 대신 '재산만 대물림'
SBS뉴스ㅣ 권지윤 기자ㅣ작성 2017.08.18 14:14 수정 2017.08.18 15:58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한다."

이 말은 사실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이를 ‘뒤집힌 현실’이라고 표현했다. 문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선 "친일부역자와 독립운동가의 처지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더라는 경험이 불의와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었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국가에 헌신하면 3대까지 대접 받는다는 인식을 심겠다"고 공언했다.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랜드 힐튼 호텔'. 사회 유력인사들이 자주 찾고, 국가적 행사가 열리기도 하는 특급호텔이다. 이 호텔의 설립자는 79세 이우영 회장이다.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히 친일파로 규정한 청풍군 이해승(1890~1957?)이 이 회장의 할아버지다.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친일파 재산보고서 ①편, ②편, ③편 기사>에 이어 이우영 회장의 사례를 통해서 "뒤집힌 현실"을 추적했다.


왕족에서 친일파가 된 '이해승'

청풍군 '이해승'. 그는 조선 왕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5세손이다. 한마디로 왕족이었다. 왕족이었지만 그는 1910년 10월, 일제로부터 조선 귀족 중 최고 지위인 '후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엔 일제로부터 은사금 168,000원을 받았고, 1912년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 일제강점기 동안 수십 만㎡의 토지도 불하받았다.

이해승은 1941년, 황국신민화 운동을 위해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조선귀족회 회장이 된 이해승은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거액의 국방 헌금을 일제에 냈다. 조선총독을 찬양하는 담화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공히 조선 왕족으로서 조선을 버린 그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파산 위기 이해승…

동양척식주식회사에게 돈 빌려 호화 생활

이해승은 여느 친일파와 다른 '특별한 친일파'였다. 왕족이라는 이유로 특별 관리를 받으며 각종 위기를 겪을 때도 일제는 그를 구원해줬다. 그는 일제시대 파산 위기를 겪었다. 파산 위기가 도리어 후손에게 부를 대물림할 기회가 될 줄, 그 역시 당시에는 몰랐을 것이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한시적으로 활동한 대통령 직속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해승은 조선 왕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의 보증을 섰다. 윤택영이 1920년 채무를 갚지 않고 중국으로 도피하면서 보증을 선 이해승은 파산 위기에 처했다. 38만 원을 상환하지 못하면 파산하게 될 이해승에게 일제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왕족이 파산하면 협력자를 잃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마부작침] 특별관리받은 이해승이해승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이왕직’(왕가의 사무를 담당하던 일제 기구)이 나섰다. 이왕직 장관 등의 보증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로부터 자금을 빌렸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다 알다시피 일제의 수탈기구였다. 이해승이 보유했던 부동산을 이왕직 명의로 이전하고, 이왕직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보증을 서주는 방식으로 이해승은 38만 원을 빌렸다.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받은 자금을 채무 변제에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에 걸쳐 약정서를 작성한 것으로 친일재산조사위는 파악했다. 1929년 2월 작성된 '명의신탁 약정서'가 대표적이다. “이해승이 동척에 변제기간인 15년 동안 채무를 전부 갚으면, 이왕직 장관 명의로 이전된 이해승의 부동산을, 무조건 또는 무상으로 다시 이해승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이었다. 쉽게 말해 이해승이 채무변제를 위해 본인 부동산을 이왕직에 신탁한 뒤, 되돌려 받기로 한 것이다.


조사위는 이런 식으로 이해승이 신탁한 부동산을 약 812필지, 339만 4,216평으로 추산했다. 1,122만 548㎡, 여의도의 3.9배 규모로, 그가 실제 보유한 부동산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친일파 재산보고서① 친일파 이완용 재산 전모 최초 확인>기사에서 보도했던 대표적 친일파 이완용과 견줄 만한 부동산 부자였던 셈이다. 이해승이 부동산을 신탁한 이후에도, 일제는 그에게 국유지는 물론 광업권을 제공해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줬다. 파산 위기도 손쉽게 극복한 이해승. 하지만, 광복은 그가 피할 수 없는 역사였다.



친일파 재기의 기회 '반민특위 해산'…

이해승은 위기를 넘겼다

1945년 광복은 해방을 뜻하는 동시에 친일파 청산의 시작을 의미했다. 친일파를 단죄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만들어졌다. 제헌의회에서 3번째로 만든 법이 '반민법'이었다. 정부조직법, 사면법 다음 만들어진 법으로, 당시 친일파 단죄는 시대적 당위였다. 친일파 사형, 무기징역, 재산 몰수 등 강력한 처벌 조항이 포함돼 있었던 그 법으로부터 이해승은 자유롭지 않은 처지였다. 일제 때 작성한 신탁협정서에 재산 목록까지 적혀있어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다.



반민특위는 이해승을 체포해 기소했지만, 단죄도 재산 몰수도 무위에 그쳤다. 반민특위가 설치 1년 2개월 만인 1951년 2월 와해되면서 그는 풀려났다. 그런데, 이해승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 그의 아들 이완주는 광복 이전인 1941년 숨졌기 때문에 이해승의 직계 후손은 어린 손자 이우영이었다. 소송 기록에 따르면 1957년 8월 20일, 이우영 회장은 이해승의 법정 상속인이 됐다. 할아버지 이해승에 대한 실종 신고로 상속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1957년 법정 상속인이 된 직후부터 이우영 회장은 공격적으로 조부의 재산 찾기에 나섰다. 반민법이 사라져 걸림돌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해승이 일제 때 작성한 신탁협정은 후손의 재산 찾기 과정에서 유용한 자료가 됐고,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헌법은 재산 찾기의 주요한 도구가 됐다. 헌법상 보장된 소송 청구권, 재산권이 그의 무기가 됐다.


"내가 바로 후작 이해승의 상속자다"

이우영 회장은 1957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국가를 상대로 할아버지 이해승의 땅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잇따라 제기했다. 친일파 이해승이 일제 기관인 이왕직에 신탁했던 땅들을 하나 하나 되찾아간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소송들은 대부분 별다른 쟁점 없이 끝났다. <마부작침>이 확보한 소송 기록들에 따르면, 당시 사법부는 친일파 청산이나 친일재산 환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우영 회장이 1998년 정부를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 소송'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우영 회장은 할아버지 이해승이 일제시대 때 작성된 신탁약정을 근거로 땅을 돌려달라고 주장했다. 당시 재판부는 "이해승이 이왕직 장관의 보증 하에 동척으로부터 금원을 차용했고, 이를 모두 변제하면 부동산을 돌려받기로 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어 "1936년 이해승이 변제를 완료했기 때문에 이해승의 권리를 상속받은 이우영에게 땅을 돌려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친일의 대가로 형성된 재산, 일제시대 때 이뤄진 계약이라는 점에 대한 법적인 고민도, 헌법 정신에 대한 고찰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 달 만에 끝난 1심 재판 이후 정부는 항소조차 하지 않았고, 이우영 회장은 승리했다. 친일파 이해승 소유였던 부동산이 하나 둘 손자 이우영 회장에게 넘어갔다.



무관심한 국회, 무기력한 정부, 소극적인 사법부…

이우영 회장이 되찾은 땅만 약 269만 평

사법부의 이런 판단은 예견된 일이었다. 이해승만 아니라 이완용 등 다른 친일파 후손의 소송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내려졌다. 이완용의 증손자 이 모 씨가 제기한 토지 반환 소송에서 서울고등법원은 1997년, "친일파의 재산권을 박탈 또는 제한하는 법률이 국회에서 제정된 일이 없다"며 "과거의 일을 정의 관념만 내세워 문제 삼는 건 오히려 사회 질서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그렇게 땅을 돌려줬다. 국회가 친일 재산 관련 법률도 제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법부가 나설 수 없다는 취지였다.



사법부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는 있었다. 친일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진 못할지언정, 적어도 사법부가 나서 돌려주는 건 국가의 '정통성'과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해승과 마찬가지로 왕족이면서 친일파였던 이재극 후손이 낸 토지 환수 소송에서 당시 1심 재판부는 건국이념을 강조하며 "법원은 헌법정신을 수호하는 기관"이라며 "친일 행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얻은 재산에 대해 법의 보호를 구하는 건 정의에 현저히 어긋난다"고 각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친일 재산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를 권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항소심인 서울고법 민사20부(당시 재판장 민일영 부장판사)은 2003년, "법적인 장치 없이 국민 감정을 내세워 재산권을 박탈하는 건,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1심을 뒤집었다. 친일파 후손들의 친일 재산 찾기는 그렇게 '당연한 권리'라는 외피를 두르게 됐다.



친일재산조사위는 이우영 회장이 1957년부터 1998년까지 소송을 통해 약 269만 평, 890만㎡에 달하는 땅을 되찾은 것으로 파악했다. 여의도 면적의 약 3배 크기로, 친일파 이해승이 신탁한 부동산의 79% 정도를 받아간 셈이다. 1988년, 이 회장은 반환받은 서울 홍은동 땅 위에 호텔을 세웠다. 바로 '스위스 그랜드 호텔(현 그랜드 힐튼 호텔)'이다.


[마부작침] 친일파 재산환수토지


해산된 친일재산조사위…

끝나지 않은 친일 재산 전쟁

'뒤집힌 현실'을 다시 뒤집기 위해 2006년 친일재산조사위가 출범했지만, 때를 놓친 청산 작업의 한계는 뚜렷했다. 광복 이후 61년이 흘러 친일파는 사라졌고, 친일 재산은 복잡하고 은밀하게 대물림된 뒤였다. 게다가 후손들의 재산 찾기 소송으로 반환된 토지의 상당수도 제3자에게 매각된 상황이었다. 조사위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해승을 포함한 친일파 168명으로부터 1,300만㎡, 2,457필지를 환수 결정했다. <친일파 재산보고서① 친일파 이완용 재산 전모 최초 확인>기사에 보도했듯 이완용 친일파 1명 소유 부동산의 0.05%에도 못 미치는 규모였다. 친일파 이해승과 관련해 친일 재산 197만여㎡를 환수 결정하고, 그의 손자 이우영 회장이 제3자에게 판 땅 181만여㎡의 매매 대금에 대해선 부당 이득 환수 결정을 내렸다. 이 역시 이우영 회장이 되찾아간 땅의 절반도 안 되는 수치였다.


친일재산환수특별법이 시행한 이후인 2006년까지도 친일파 후손이 직접 보유하고 있거나, 그 즈음 매각한 땅만 귀속할 수 있었기에 국가 귀속은 제한적이었다. 장완익 전 친일재산조사위 사무처장은 이를 두고 "잘못된 역사를 완벽하게 바로잡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흐른 상태였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귀속 결정한 재산을 두고도 전쟁 같은 소송전이 벌어졌다.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 귀속 결정에 반발하며 줄소송을 낸 것이다. 친일재산조사위가 귀속 결정한 재산의 60%가 분쟁에 휘말릴 만큼 친일파 후손들은 격렬하고 집요하게 대응했다. 근거법(친일재산환수특별법)을 두고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조사위 출범 이후 헌법소원 및 민사·행정 소송만 124건(가처분 제외)으로 파악됐다.



대부분 친일파 후손들이 원고로서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들이었다. 환수 대상자가 된 168명 중 62명 친일파의 후손들이 환수 결정에 불복하며 반발했다. 장완익 전 조사위사무처장은 "후손들은 '연좌제다, 재산권 침해다'라고 반발했는데, 반민특위법이 제대로 시행됐다면 광복 직후에 몰수했을 재산들이었다"며 "후손들 입장에서 억울해 할 일이 결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부작침> 분석결과, 124건 중 친일파 재산 관련 민사 행정 소송은 모두 115건으로, 국가(친일재산조사위 포함)는 5건을 제외한 모든 분쟁에서 승소했다. 패소 5건 중 1건이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 회장이 제기한 '국가 귀속 결정 취소 소송'이었다. "귀속 결정된 경기 포천시 등 부동산 192필지, 192만㎡(시가 318억 원 대) 환수를 취소하라"는 것으로, 국가는 최종 패소했다.


남은 소송 단 1건…

'망각과의 전쟁'

친일재산조사위가 해산한 지도 벌써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소송은 끝나지 않았다. 친일재산조사위와 관련해 남은 소송은 단 1건. 국가가 이우영 회장을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 소송'이다. 앞서 패소한 192필지 환수를 두고 이번엔 정부가 원고가 돼 다시 소송을 낸 것이다. 같은 사안을 두고 대법원의 최종 패소 판결이 있었기에 국가 입장에선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남은 한 건의 소송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여전히 어디선가 대물림 되고 있을 친일 재산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에 언급한 "불의와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단절하기 위해서도 친일 청산은 여전히 필요하다.


<친일파 재산보고서① ② ③편>기사에서 연속 보도했듯 새롭게 발견된 이완용의 친일재산, 환수 가능성이 열린 단종태실지, 숨어있는 적국의 재산, 즉 적산(敵産) 등 친일 잔재는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런 친일 재산이 드러나도 국가 귀속을 주도할 정부 부처 한 곳이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단 한 건의 소송 못지 않게 추가 소송을 통한 지속적인 국가 귀속이 필요하다. 장완익 전 친일재산조사위 사무처장은 "친일재산조사위가 활동을 종료하면서, 정부 관련 부처에서 업무를 나눠 맡아주길 바랐지만 현실은 달랐다"며 "새로운 친일 재산을 확인해도 국가 귀속 업무를 수행할 팀조차 없다"고 말했다. 조사위 종료와 함께 친일재산 환수도 사실상 끝난 셈이다.


이준식 전 친일재산조사위 상임위원은 "선조의 잘못을 대신해 속죄는커녕 재산 되찾기에만 급급한 후손들의 모습을 보면서 친일 청산을 위해서 아직도 갈 길이 너무도 멀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광복 72주년. 우리는 '망각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에서 우리는 역사를 '망각'해 '뒤집힌 현실'을 깨닫고 있다. <끝>

[친일가요 바로가기] 血書 志願歌(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