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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복지

[기초연금] 생계급여에 기초연금 금액만큼 삭감하는 게 문제

잠용(潛蓉) 2019. 3. 26. 07:59

75살 할아버지가 고물 실은 리어카 끌고 청와대로 간 이유
한겨레ㅣ2019.03.25. 16:56 수정 2019.03.25. 20:06 댓글 3559개


기초생활 수급노인 등 100명 청와대 행진
기초연금만큼 생계급여 삭감... "줬다 뺏는 기초연금 해결하라"
"노인 빈곤 심각한데 '포용적 복지국가'라면 방치해선 안돼"
지난해 국회 복지위 4102억 예산 합의됐다가 물거품되기도

“리어카에 골판지 상자며 폐지 아무리 한가득 실어가 봤자, 고물상에서 돈 만 원 받기도 힘들어요.”
10년 남짓 고물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조인형(75)씨는 ‘폐지’가 아니라 ‘고철’만 줍는다. 그렇게 매일 찌그러진 냄비며, 프라이팬, 알루미늄 캔을 닥치는 대로 주워 모아도 손에 쥐는 돈은 많아야 월 10만원 남짓. 젊은 시절, 건설 일용직 하루 일당이던 10만원으로 지금은 한 달 내내 벌어 한 달을 버틴다.


그나마 고철보다 돈이 안 되는 ‘폐지 줍는 노인’의 처지는 조씨만도 못하다. 요즘 고물상에서는 폐지 1㎏당 30~50원씩 쳐준다. ‘폐지노인복지시민연대’는 이런 ‘폐지 줍는 노인’이 전국에 175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전국 고물상 7만곳을 조사해, 거래하는 노인이 평균 25명이라고 어림잡아 계산한 수치다. 전국 고물상 운영자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자원재활용연대’의 정병운 공동의장은 “IMF 경제위기 이전만 하더라도 1㎏당 150원 남짓은 쳐줬는데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폐지 줍는 노인들의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6%(2015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평균 12.5%) 가운데 가장 높다.


25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근처. 조인형씨가 두꺼운 잠바를 단단히 여몄다. 꽃샘추위가 누그러졌다지만 바람이 매서웠다. 조씨가 고물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천천히 끌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다른 리어카 두 대가 뒤따랐다. 노인 10여명은 골판지 상자를 노끈에 매어 질질 끌며 걸었다. 몇몇은 알루미늄 캔이 채워진 비닐봉지를 어깨에 짊어졌다. 아흔살의 박정혁씨는 90도로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고서 조인형씨보다 앞서 걸었다. 그렇게 노인 100여명이 길게 줄지어 걷기 시작했다. 이날 이들이 향한 곳은 고물상이 아니라 청와대였다. 경복궁역에서 청와대 앞까지 1㎞가 조금 넘는 거리. 일반 성인 걸음으로 20분 남짓 걸릴 테지만, 어르신들은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1시간가량 행진했다. 노인들의 행진 맨 앞에는 ‘줬다 뺏는 기초연금, 해결하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함께했다.


▲ 기초생활 수급노인들과 빈곤노인기초연금보장연대 회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 경복궁역에서 기초생활수급 대상 노인의 기초연금 삭감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폐지 리어카를 끌고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기초수급 노인 조인형(75)씨가 맨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폐지 리어카를 끌고 청와대로 행진하는 기초생활 수급노인들과 빈곤노인기초연금보장연대 회원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기초생활 수급노인들과 빈곤노인기초연금연대 회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 경복궁역에서 기초생활수급 대상 노인의 기초연금 박탈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폐지 리어카를 끌고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리어카를 앞장서 이끈 조인형씨는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서 생활하는 기초생활 수급자다. 생계급여와 주거급여를 합쳐 70만원 남짓을 매달 받는다. 이 중 20만원은 월세로 꼬박꼬박 나간다. 기초노령연금이 도입되었을 때, 조씨는 반가웠다. “담뱃값 1원이라도 벌려고” 아등바등했던 고물 줍는 일을 조금 덜 해도 될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매달 25일 기초연금이 통장에 입금되어 기쁜 것도 잠시뿐이다. 다음달 20일 생계급여가 입금될 때에는 기초연금 금액만큼 삭감된 생계급여액이 입금되는 탓이다. 장애수당, 국가유공자 생활조정수당 등과 달리 기초연금은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소득인정액’에 포함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이른바 ‘보충성의 원칙’ 때문이다. 생계급여는 다른 소득, 재산, 근로능력을 활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를 보충·발전시키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한다는 이유다.


다음달부터 소득 하위 20% 노인에게 기초연금이 월 30만원으로 인상된다지만, 조씨는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은 기초수급 노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여서다. 반면 차상위계층 노인들은 기초연금을 받아 기초생활 수급 노인들과의 사이에 ‘역진적 소득 격차’가 나타나기도 한다. 통계청의 지난해 4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소득 하위 20%인 1분위의 가구주 평균연령은 63.4살이었다. 노인들의 빈곤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보건복지부는 다음달부터 기초연금 월 30만원이 지급되는 소득 하위 20% 노인이 154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다만 이 가운데 생계급여를 받는 기초수급자인 37만여명 대부분은 이번에도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로 인해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사는 기초수급자 노인 김호태(86)씨는 “다음달이면 기초연금이 30만원으로 오른다지만, 전에는 25만원 주고 뺏어가다가 다음달부터는 30만원 주고 뺏어가는 것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 임대아파트에 사는 김명호(73)씨도 “기초연금이 처음 도입됐을 때 기초수급 노인들도 ‘생활이 조금 나아지겠구나’ 흥분했다. 하지만 기초연금 제도가 생겼다고 해서 내 생활이 나아진 건 하나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홀몸노인인 김씨는 생계급여 50만원과 주거급여 5만원을 받아 생활한다. “기초생활 수급비가 통장에 들어와도 각종 공과금이며 월세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는 아예 손도 못 대요. 남은 돈으로 겨우겨우 버티는 거죠.”


이날 행사를 주최한 ‘빈곤노인기초연금보장연대’는 “문재인 정부는 우리 사회 최하위 빈곤 노인의 기초연금 박탈을 언제까지 방치할 거냐”며, 정부와 청와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 해결은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공약사항이기도 했다. 지난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기초수급 노인들에게 부가급여 형태로 월 10만원을 추가 지급하는 방안에 합의한 바 있으나, 국회 본회의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러한 보완책을 시행하려면 올해 4102억원의 추가 예산이 필요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은 “국회의원들이 자기 지역구 예산으로 수천억은 뚝딱 떼가면서, 가난한 노인에게 고작 월 10만원씩 주는 예산은 날려버렸다”며 “줬다 뺏는 기초연금을 방치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포용적 복지국가를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을 개정하면, 기초수급 노인들의 기초연금 수급권을 온전히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지난해 국회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부가급여를 얹어주는 방안 등 여러 가지를 두고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 11일 보건복지부 올해 업무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와 관련해) 당연히 기초연금을 전액은 아니라도 (생계급여의) 소득인정액에서 일부 삭감해줌으로써, 실질적으로 기초연금과 생계급여가 노인 빈곤에 같이 도움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날 ‘빈곤노인기초연금보장연대’는 청와대에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황예랑 박현정 기자 yrcom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