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식 다시보기 (KBS뉴스 4/11 19 :19)
제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낙연 국무총리 기념사 (서울 여의도광장)
해외 동포 여러분, 해외 동포 여러분, <출처/ 대한민국 구무총리실: 제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기념사> |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 오늘 저녁 7시 여의도공원 광장서…
1만명 참가 예정
연합뉴스ㅣ2019. 4. 10.
임정 100주년 기념식 오늘 여의도서…1만명 참가
'제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오늘(11일) 저녁 7시 19분부터 서울 여의도공원 광장에서 열립니다. 국민참여형 축제로 열리는 이번 기념식의 시작 시간은 19시 19분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기리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여의도공원은 1945년 8월 18일 한국광복군 이범석과 장준하 등 4명과 수송기를 타고 착륙한 곳이기도 합니다. 기념식은 정부 주요 인사와 각계 대표, 독립유공자와 유족 등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됩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독립투쟁’ 발자취
KBS뉴스ㅣ2019.04.11 (08:12) 수정 2019.04.11 (08:56) 아침뉴스타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독립 투쟁’ 발자취
[앵커] 100년 전 임시정부가 세워졌던 중국 상하이는 1910년대까지만 해도 독립운동 중심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만주와 연해주에 거점이 집중돼 있었다는데요. 하지만 1920년대 들어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 또 우리가 몰랐던 임시정부에 대한 사실들을 친절한 뉴스에서 알아봅니다. 우정화기자? 먼저, 임시정부에 관한 의미있는 자료가 확보됐다고요?
[기자] 네, 임시정부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진을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저희 KBS가 확보했습니다. 지금 화면으로 보이는 이 단체사진입니다. 바로 임시정부를 세운 주역들입니다. 너무 많아서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는데, 모두 220여 명 정돕니다. 지난 1919년, 일본 군 내부 보고용 사진이었는데요, 현재도 일본에 보관돼 있습니다. 사진을 한 번 확대해볼까요, 남성들 사이로 한 가운데에 손정도 선생이 앉아있습니다. 손 선생은 임시의정원 2대 의장으로 선출된 인물인데요, 학계에선 이 사진을 손 선생 의장 선출 기념 사진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김구, 여운형, 신익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 26명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학계에선 이 사진이 지금까지 이름만 알려졌던 초기 임시의정원 의원들을 포함해 실무진까지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자료로 보고 있습니다.
[앵커] 1920년대 이후 상하이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기자] 사실 1919년 3·1 운동이 벌어질 당시만 해도 상하이 거주 한인은 천 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10년대엔 연해주나 만주에 독립운동 거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상황이 달려졌습니다. 해외로 도피처를 찾던 독립 세력에게 상하이는 일본의 영향력이 적은 지역이었습니다. 아편 전쟁 이후 상하이는 서구 열강의 조계지로 쪼개졌고 그 과정에서 절묘한 세력 간 균형이 조성됐습니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 정신에 따라 정치적 망명자에 관대한 프랑스 조계지는 최적의 장소였던 겁니다. 여기다 상하이 와이탄에 수월하게 전신환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대적 금융 기관이 들어섰거든요. 이를 통해 독립자금을 수혈받을 수 있어서 상하이는 독립운동에 더 없이 좋은 곳이었던 겁니다.
[앵커] 그런데 원래 임시정부를 출범하기 위한 임시의정원이 구성된 날은 4월11일이 아니라 하루 앞선 4월 10일이라던데, 그 날엔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기자] 대한민국 국호와 임시정부 수립은 독립운동가 29명으로 구성된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결정됐습니다. 과정 잠시 살펴보면요, 100년 전, 4월 10일 밤 10시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던, 화면으로 보시는 이 서양식 주택에 독립운동가 29명이 모여들었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 기원이 된 초대 임시의정원 회의 자리였습니다. 회의는 밤을 새워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12시간 마라톤 회의가 벌어졌습니다. 현재 국회의 여야 원내대표단이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서 상하이에 가 있는데요, 전문가의 고증을 토대로 그 날,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봤습니다. 잠시 보겠습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이동녕 의장 역할 :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정부를 대신할 조직을 만들어서 일본이 조선을 양여받았다는 거짓말을 못하게 하고..]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김마리아 의원 역할 : "일제의 만행을 문명국가에 제대로 알려야 합니다. 지금 독립운동에 나서는 여성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날 회의에는 대한민국 국호를 정하고 국가 관제와 국무원 인사를 포함해 우리 나라 최초 헌법인 임시헌장 제정을 끝으로 임시의정원 회의는 마무리됐습니다.
[앵커]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의 서훈문제가 또 쟁점이 됐어요. 특히 약산 김원봉을 두고 논란이라죠?
[기자] 약산 선생은 영화 '암살'을 통해 많이 알려진 인물이죠, 의열단 등을 통해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월북해서 북한 초기 내각 구성에 역할을 했다는 것이 핵심 이윱니다. 김원봉은 북에서 감사, 감찰 기능을 하는 국가검열상을 지냈고, 노동상을 거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도 맡습니다. 그동안 김원봉이 조선노동당 고위당원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현재 보훈처 공식 설명은, 해방 후의 사회주의 경력자들에게까지도 서훈을 개방했지만 김원봉처럼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사람까지 훈장을 주려면 아직은 국민적 공감대가 더 필요하다, 이런 입장입니다. 김원봉 한 명에게 서훈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월북한 독립운동가를 우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친절한뉴스였습니다.
임시정부 100년...'대한민국' 국호의 탄생
YTNㅣ게시일: 2019. 2. 28.
[앵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YTN은 오늘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정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국내에서 3·1 운동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가운데 임시정부는 낯선 땅, 중국 상하이에 첫 뿌리를 내렸습니다. 최민기 기자가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기자] 1919년 4월 11일. 100년 전, 우리 역사상 첫 민주 공화 정부의 탄생을 알리는 임시헌장이 공포했습니다. 상하이의 번화가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는 좁은 주택가에는 당시 독립을 열망했던 우리 임시정부의 자취가 남아있습니다. 상하이에 남은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문을 열면 태극기와 함께 김구 선생의 흉상이 방문객을 맞습니다. 당시 집무실도 밀랍인형과 함께 재현돼 있고, 침실과 부엌도 그때 모습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19세기부터 상하이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 등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열강과 통상하는 동북아 거대 교역항으로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도시는 외국인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행정자치 구역인 조계지로 분할됐는데, 그 가운데 프랑스 조계지는 망명객에게 호의적이었고 일본의 힘도 크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최적의 무대였습니다.
[쑨커즈 / 상하이 푸단대 교수 :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 임시정부가 수립한 후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이 많이 이곳으로 이주했습니다. 프랑스 조계지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이때 탄생했습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 대한제국을 다시 찾는다는 의미에서 '대한'을 따왔지만, 왕이 통치하던 과거는 단절하고 인민이 주인임을 천명하기 위해 제국은 민국으로 고쳐 나라 이름을 짓습니다.
[김희곤 / 안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으로 해서. 모든 국민이 남녀노소 빈부 차별 없이 모두가 참정권을 갖는 사회를 1919년 4월 11일 헌법에 명시하게 됩니다.]
[장석흥 / 국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투쟁적인 관점이 아닌 우리 역사 발전 면에서 놓고 봤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와 근대화의 길을 열어간 그런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독립운동과 함께 근대화, 민주화의 기틀을 닦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목숨 건 투쟁을 이어간 애국지사들 손에 의해 우리 땅이 아닌 상하이에서 태동했습니다. YTN 최민기[choimk@ytn.co.kr]입니다.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 되돌아 본 자취들
[JTBC] 입력 2019-01-01 22:18 수정 2019-03-20 01:57
[앵커]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임시정부 수립이 이 나라의 시작이냐 아니냐를 놓고 어찌보면 소모적인 논쟁이 계속돼왔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늘 등장했던 이 외침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 새겨져있습니다. 현행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1948년을 건국일로 삼자는 일각의 주장과 배치되는 역사적인 사료지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가 시작된 그 곳,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자취를 품고 있는 중국 상하이에서, 김혜미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자] 1919년 4월 11일. 이곳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이날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공포됐습니다. 3·1 독립운동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국내외 인사들이 모여 뜻을 합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조직은 점차 위축됐습니다.
"한때 천여 명이었던 상하이 동립운동자의 수는 임시정부엔 외국인은 고사하고 한인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김구 <백범일지> 중에서 |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궁핍했지만,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이어지며 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었습니다. 탄압은 훨씬 거세졌습니다.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백범 김구 선생은 한 중국 인사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겼습니다.
[추정위안/추푸청(백범 김구 조력자)의 손자 :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요인인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딱 네 명밖에 없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피난처에서도 눈을 피해 호수 위 선상에서 생활하며 회의를 하기도 했었고요.]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인 1932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이곳 항저우로 옮겨왔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전장-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계속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1945년 광복까지, 27년간 임시정부는 가혹했던 우리 민족의 시간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일제가 영토를 빼앗고 민족을 탄압했어도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공화제는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100년 전, 임시정부 요인들이 외롭게 걸었던 그 길의 오늘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장예나 : 암울한 현실 속에 희망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졸업을 하는데 앞길이 막막하거든요.]
[신은희 : 옳은 일, 의로운 일에 대해서 우리 국민이 전부 다 하나됐으면 좋겠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역사를 마주한 사람들은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이어갑니다.
(자료제공 : 독립기념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영상디자인 : 신재훈·이정회)
4천 km 떠돈 임시정부… 독립 위한 고난의 27년, 그 발자취
SBS뉴스ㅣ2019.01.01 21:04 수정 2019.02.19 15:39 조회 2,042
3·1 운동-임시정부 100주년
<편상욱 특파원>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침략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일제는 발악적으로 보복해왔지만, 임시정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중국 전역을 옮겨 다니며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그 고난의 여정을 정성엽 특파원이 따라가 봤습니다.
<정성엽 특파원>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자신이라고 스스로 밝힌 김구는 임시정부를 항저우로 옮깁니다. 자신은 중국 국민당 요인 추푸청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 근처 자싱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추정위안/추푸청 선생 손자 : (윤봉길 의거는) 중국 국민들에게 항일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모든 중국이 흥분했습니다.] 김구는 일제와 밀정의 집요한 추적 속에 침실 아래 호수로 연결된 탈출구와 나룻배로 위기의 순간들을 넘겼습니다. 김구 선생은 당시 낮에는 배를 타고 이 호수를 돌고 밤이 돼야 땅에 머무는 생활로 일제의 추적을 피해 왔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민당 정부와 원활한 협조가 필요했던 임시정부는 당시 중국 수도가 있는 난징 근처 전장으로 이동합니다.
김구가 장제스 총통을 만나 한인 군사 간부 양성을 시작했지만, 일제의 포탄이 난징에 쏟아지자 다시 피란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목선 한 척에 운명을 맡긴 채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 터 잡은 창사에서 임시정부는 최대 위기를 맞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이 살았던 이곳에서 김구, 지청천은 독립운동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일제의 밀정이 회의실에 침입해 권총을 난사했습니다.
총탄이 심장 앞에서 기적적으로 멈춰 김구는 소생했지만, 코앞까지 밀고 들어온 일제를 피해 임시정부는 광저우와 류저우를 거쳐 치장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동 거리만 4,000km에 달하는 떠돌이 생활 끝에 도착한 충칭에서도 100여 명의 임정 인사들은 안도할 수 없었습니다. 충칭에서도 일제의 폭격으로 네 차례나 청사를 옮긴 끝에 마지막으로 정착한 롄화츠 청사가 바로 이곳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남아 있습니다. 충칭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해 군사 기반을 마련했고 국내 진공 작전을 미군과 함께 준비했습니다.
[한시준/단국대 사학과 교수 : 연합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워서 일본이 패망하면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것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전략이었습니다.]
국내 진공을 불과 며칠 앞두고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을 맞이한 임정 인사들의 표정에는 그래서 기쁨과 허탈함이 함께 묻어 있습니다. 이국땅에서 모진 풍찬노숙을 견뎌낸 임시정부 27년의 역사는 조국의 독립과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를 향한 민주주의 대장정이었습니다. [정성엽 기자 jsy@sbs.co.kr]
□ 영상취재 : 이국진, 영상편집 : 이승진,
□ 자료제공 : 독립기념관·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전우용의 3분특강]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게시일/ 2019. 4. 3.
국가보훈처와 KTV국민방송이 20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진행하고 있는 온라인 OX퀴즈 이벤트 참고 영상입니다. 대한민국의 시작이 된 임시정부 10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모두와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
게시일/ 2019. 4. 4.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속에서 어떻게 독립운동과 3.1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될 수 있었을까요? 뇌를 채워주는 은덩어리 지식들 은근한 잡다한 지식입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돌] 1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박광일 작가
게시일/ 2019. 4. 9.
오는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발자취를 쫓는 탐방기,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저자 박광일 작가가 임시정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드립니다
▲ '아리랑 환상곡' (1936년 안익태 작곡) Lorin Maazel 지휘,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북한 동평양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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