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렁" (아리랑 1930) 작사 작곡 경기민요/ 노레 金蓮實 < 1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十里도 못 가서 발병 나요 < 2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豊年이 온다네 豊年이 온데요 이 江山 우리도 豊年 온다네 < 3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날도 저물면 젊어가건만 우리네 人生은 늙어지네 < 4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晴天 하늘은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 (아르렁 - 김연실) ◆ 1930년 영화주제가 아르렁 - 노래: 김연실 (1930년 Victor 49071-A SP음반) 영화소패(일본어로 주제가) 아르렁(아리랑)입니다.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 개봉 이후, 1929년 출반의 영화설명 아리랑(본채널 A10 참조)과 A14로 실은 채동원의 유행가 아리랑(1930년 1월)을 제외하면 제대로 처음 소개되는 영화음악 아리랑(1930년 3월)입니다. 1926년 나운규 아리랑의 본 모습니다. 독창 김연실, 반주 일본빅타악단입니다. 본 음원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진원교수의 음반으로 2013년에 한국고음반연구회가 출판한 '한국음반학'의 부록, ‘아리랑, 음반으로 꽃피다’ 14트랙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음반정보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 <정창관의 아리랑 게시일: 2018. 5. 28> ◆ [희귀음반] 김연실의 유행소패(流行小唄) <아르렁> (1928) 1928년 일본 빅터 레코드에서 발매된, 유행소패(流行小唄), 아리랑입니다. 현재 확인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녹음된 신조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음반이죠. 레코드의 음반 구분에는 아래 라벨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유행소패', 즉 유행하는 짧은 노래라고 쓰여있는데, 대개 이런 구분은 창가 부류에 붙이던 이름인 만큼,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흔히 '민요'로 이 곡을 분류하는것은 잘못이라 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원래의 라벨에는 보시다시피 '아리랑'이 아닌 '아르렁'으로 쓰여있는데, 이것은 한국말을 잘 몰랐던 일본 빅터사의 일본인 직원들이 노래를 듣기만 하고 곡목을 받아적은 탓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노래를 부른 김연실(金蓮實)은 일제시대에 문예봉, 신일선과 함께 최고의 스타덤에 올랐던 여배우 중 한사람입니다.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그녀의 이력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자료가 존재합니다. 아래는 제가 나름 정리해본 김연실의 일생입니다. 그녀는 1910년 2월 9일, 경기도 수원군 고장면 내탄리(*당시 행정구역)에서, 대한제국 시절 황해도 해주 군수를 역임한 김연식(金蓮植)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1935년 11월 21일자 조선중앙일보 기사에 근거) 그녀는 어린시절을 아버지의 새로운 부임지였던 함경북도 학성군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13살이 되던 1922년, 김연식이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타계하고, 2년뒤에 어머니도 타계하자, 그녀는 위의 두 오빠들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친척의 집에 머물며 지냈습니다. ▲ 1931년 영화 '僧房悲曲'에 출연한 金蓮實 ▲ 流行小唄 <아르렁> 음반 1926년 근화여학교 (지금의 근화여자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뒤, 생활고 때문에 전전하던 중, 우연히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나운규를 만나게 되고, 그가 막 구상중이던 작품인 "잘 있거라"의 주연배우로 캐스팅 되면서 하루아침에 벼락 스타덤에 올라가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굵직굵직한 당시 최고의 영화들 - '승방비곡', '종로', '임자없는 나룻배', '홍길동전', '춘향전' 등 - 에 출연하면서 엄청나게 치솟는 인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당시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동아일보 1932년 1월 4일자 기사) 그녀의 '매력 포인트'는, "해맑은 얼굴이 둥글납작하게 귀엽고, 살바탕(피부색)이 맑고 하얗고, 비단옷을 입어도 항상 모시적삼만치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평론가 심훈은('상록수'의 작가이기 이전에 그는 1930년대 영화계의 최고 평론가 중 하나였습니다) 김연실에 대해 "곡선, 더구나 각선미가 없어 모던 껄로서 아까운 일이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한창 인기가 치솟을 무렵이던 1935년, 그녀는 돌연히 이기승(李箕承)이라는 한살 연상의 남자와 결혼을 선언하고, 같은해 11월 13일 그와 결혼한뒤 영화계에 은퇴선언을 하고 한동안 모습을 감춥니다. 위에 언급한 조선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연실과 이기승은 1931년에 처음 만난 뒤 '첫눈에 반해서', 한동안 아주 격정적인 로맨스를 나누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기승의 집안에서는 김연실을 가리켜 '천한 여배우년'이라고 부르며 아주 악담을 퍼붓고 둘의 결합을 끝까지 막았다고 합니다. 그 사이 이기승은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사우스 캘리포니아 대학교(남가주대학)에 입학하여 농장일꾼으로 고학을 하여 마침내 1935년 2월,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옵니다. (미국 유학 동안 이기승과 김연실은 무려 680통이 넘는 러브레터를 서로 영어로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양평에 농장을 하나 산 뒤 그곳에서 결혼선언 직전까지 김연실과 동거를 합니다. 그후 1936년 4월, 그들의 첫 아이가 태어난 뒤, 그녀는 서울 조선호텔 부근에 있던 카페 낙랑파라(樂浪Parlor)를 인수하여 경영합니다. 낙랑파라는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평판 높은 카페 가운데 하나로, 이곳의 단골로는 당시 최고의 문화계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박태원, 이상, 이희승, 이태준, 최정희, 정지용, 김상용, 김광섭, 이광수, 모윤숙, 노천명, 이기채, 나운규 등등....) 김연실은 이곳에서 가끔 연주회나 레코드감상회 같은 것을 자주 열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의 단속규제로 인해 영업에 심각한 제약이 들어오게 되자 김연실은 1938년 말 낙랑파라를 폐업하고 남편과 아이를 따라 만주국으로 갑니다. 그후 3년 간에 걸쳐 김연실은 당시 만주국의 수도였던 신경(新京, 지금의 길림성 장춘)에서 고급 바를 경영하다, 마침내 1941년, 서울로 돌아와 '복지만리'에 출연하여 영화계에 컴백했습니다. 그러나 남편 이기승이 태평양전쟁 도중에 강제로 징용당하고, 아이 역시 심한 질병에 시달리게 되자 생활고에 시달린 김연실은 영화계에서 나와 이번에는 약 2년간에 걸쳐 (1941년 - 43년) 북선지방과 만주국 일대의 '황군위문공연'을 하며 돈을 벌었고, 이를 통해 친일 경력을 남기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녀는 본명이 아닌 창씨 이름, 金井實千代를 사용했습니다. 해방후 그녀는 '새로운 맹서'(1947)와 '돌아온 어머니' (1949) 등에 출연하다가, 1950년 6.25 발발 직후 남편을 따라 월북했고, 1980년대까지 북한에서 인민배우 칭호를 받으며 활발히 활동하다가 1987년경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희귀음반) 김연실 - 유행소패 아리랑 (1928)|작성자 레스트렝 <주발월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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