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流線型 아리랑" (1936)
문예부 편곡/ 노래 이난영·강남향
(1936년 7월 오케 레코드사 발매)
전래민요 / 편곡 문예부 / 반주 오케 패밀리뮤직
<<일본어 취입 ; 오카란코>>
합창)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이난영)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리
이난영) 청청한 하늘에는 잔별도 많고
요 내 가슴에 상실도 많다
강남향) 공연히 마음이 산란하야
달그림 따라서 산보하니
이난영) 명사십리에 해당화야
꽃이 진다고 서러를 마라
이난영)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며
날 버리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 가랴
(일본어 유선형 아리랑)
◆ ‘이난영의 아리랑’
(월간 ‘춤’ 2010년 7월호, ‘국악살롱’ / 윤중강)
한국전쟁 60주년이다. 전쟁과 연관된 인물이 많지만, 이난영(1916~1965)과 주변인물이 줄곧 머리에
맴돈다. 이난영하면 ‘목포의 눈물’(1935)로 대표되는 ‘트로트가수’로 알고 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
이다. 이난영은 이미 그 시절에 여러 장르를 두루 넘나들었다.
1936년 7월, 이난영은 오까랑꼬(岡蘭子)라는 예명으로 일본가요계에 진출한다. 데이고쿠레코드(帝
國畜音器會社)에서 <아리랑(アリランの唄)>을 취입했다. 이에 관해 친일 운운은 당찮다. 이난영이
이 노래를 불렀기에, 일본 엔카(戀歌)가수가 아리랑곡조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아리랑의 가사와 선율에 관련해서, 유성기음반에서 이난영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이난영은 다른 가수와 함께 <신아리랑>과 <도라지타령>(고복수, 강남향, 이난영, 1934)을 불렀다.
이후 <또 도라지>(1936)를 단독으로 노래했다.
역시 그녀가 혼자서 부른 <신(新)강남> (고마부 작사, 오락영 작곡, 1934)은 <그리운 강남>(김석송
작사, 안기영 작곡, 1934)과 대조된다. 후자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에 어서 가세’를
노래하지만, 이난영은 ‘머나먼 강남을 갈 생각을 말고, 이 땅에 강남을 꿈 이여보세. 에헤나 디여라
아라리요, 지화자 강남은 별 곳이런가’라고 현실인식 속에서 이상을 노래한다. 신강남은 곧 조선땅
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리
청청한 하늘에는 잔별도 많고
요 내 가슴엔 상심도 많다
공연히 마음이 산란하야
달그림 따라서 산보간다
명사십리에 해당화야
꽃이 진다고 설워를 마라
서산에 지는해는 지고 싶어지며
날 버리고 가는님은 가고 싶어가랴
<이난영 강남향의 유선아리랑>
<유선형 아리랑>(이난영, 강남향, 1936)에서는 자신의 시김새(장식음)를 살려서 아리랑을 소화해낸
다. 간주의 죽관(竹管, 대금)반주와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아리랑 관련 노래의 백미로 꼽고 싶다.
이른바 ‘대동아전쟁’이란 미명 아래 조선민중이 상심과 비탄에 빠졌을 때, 이난영은 <열일곱 낭낭>(
김다인 작사, 이봉룡 작곡, 1941)을 부른다. ‘아라리 아라리 음~ 무슨 아라리’라는 후렴 속에서, 아리
랑은 넋두리아라리(1절)요 몸부림아리리(2절)라 했다. 해방 후 그녀는 이 곡을 다시 녹음했는데, 첫
사랑 아라리(2절), 꿈꾸는 아라리(3절)로 가사를 바꿔 불렀다.
이난영의 가요 중에서 국악적이고 민요적인 정서를 담긴 노래도 적잖다. 아니, 사실 그 시대에서 민
요와 가요(트로트)를 이분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둘이 습합(襲合)되면서, 그 시대의 노래를 만들어
냈다. <봄맞이>(윤석중 작사, 문호월 작곡), <사랑의 고개>(김능인 작사, 김교성, 1934)에선 이난영
의 풋풋함이 끌린다.
남편이 된 김해송(1911~1950)이 함께 부른 <올팡갈팡>(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 1937)과 <연애
함대>(박영호 작사, 박시춘 작곡, 1937)에선 이난영 특유의 애조(哀調)가 달아났다.
박향림(1921~1946)과는 또 다른 애교(愛嬌)와 적당한 ‘강짜’가 매력적이다. <호이타령>(이난영, 고
복수, 1935)을 들으면, 아직 내가 들어본 바 없는 <녹스른 거문고>(1934)는 어떤 노래일까 더욱 궁
금해진다.
이난영은 일제강점기 그 시대의 여성을 노래했다. 날마다 그 시간에 오는 남정네에 대한 설레는 마
음을 담은 <담배집 처녀>(1939)와, 간주에 피리가 등장을 하는 <돈반 정반 (1939)은 그 시대의 기생
을 대변해주는 노래다. 요즘 대한민국에선 사대강사업으로 시끄럽지만, 나는 이난영의 <오대강타령
>(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 1934)을 들으면서 그 시절의 오대강, 곧 압록강(북), 두만강(동), 대동
강(서), 노들강(한강, 중앙), 낙동강(남)에 빠져든다.
이난영의 삶을 영화로 각색한 <임은 가시고 노래만 남어(남아)>(양명식 감독, 최은희 주연, 1964)에
서 담배를 물고 노래를 하는 이난영을 상상도 해본다. 그 시절 블루스의 명곡인 <다방의 푸른 꿈>(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939)이 자생된 것이 진정 위대한다.
이난영이 남긴 마지막 노래(영상)는 무엇일까? 육이오때 남편을 잃은 이난영은 딸들을 열심히 가리
켜서 미국으로 진출(1959)시켰다. 걸그룹의 원조라 할 김시스터즈(김숙자, 김애자, 이민자). 수차례
에드 설리반쇼에 출연했다. 성공한 김시스터즈는 어머니를 초청(1963)했다.
모녀가 함께 이 쇼에 출연한다. 어머니와 함께 <Michael, Row the Boat Ashore>를 노래했고, 이게
이난영의 마지막 모습이다. 딸들의 하모니를 배경삼아 이난영은 팝송에 이런 우리말 가사로 노래한
다.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 우리 님이 넘던 고개요 / 그 고향 산천고개는 / 우리들이 가고픈 고개
요.”
참, 이상타. 조선 땅에 살다간 최고 소리꾼의 마지막 노래에 ‘아리랑’이 있다. 김소희(1917~1999)는
<봉화아리랑>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박동진(1916~2003)은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젊은
청년(MR-J)이 자신에 노래에 아리랑을 담고자 했을 때 흔쾌히 응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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