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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유성기 가요] "옛 님을 그리면서" (1934) - 장일타홍 노래

잠용(潛蓉) 2019. 6. 10. 06:03






"옛 님을 그리면서" (1934)
金岸曙 作詞/ 劉一 作編曲/ 노래 張一朶紅

(1934년 7월 리갈 레코드사 발매)


< 1 >
옛날 찾아 東山을

올라 갔노라
잔디밭에 봄빛은

푸르렀건만

님 사시던 마을엔

異蹟도 업고
지는 볕에 살구꽃

그저 하얄 뿐


< 2 >
저고리는 軟粉紅

치마는 紺靑
나풀나풀 바람에

나붓기는 樣

어제련듯 이 눈에

暗暗하건만
이 날에는 모두가

꿈이란 말가?


< 3 >
시집간 지 몇 핸고?

님 볼길 업네
님을 잃고 이 몸은

그저 외로워

반듯반듯 하늘에

빗나는 별을
바라보며 끝없이

한숨 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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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적(異蹟) : 별다른 일. 특이한 기적.
 

('옛 님을 그리면서' 가사지)



<옛 님을 그리면서>는 가수 張一朶紅님이 1934년 7월에 리갈레코드에서 발표한 新民謠입니다. 雜歌 <노래가락; C197/ 張一朶紅 노래>과 같이 발매된 이 노래는, 金岸曙(본명;金熙權,타명;金億,金浦夢) 作詞/ 劉一 作編曲의 작품으로, <가신 님에게/ 외로운 나그네(金貞淑)> 등과 같이 七月新譜로 발매된 곡입니다. 발매 당시 광고지에, "芳年十八歲의 한 떨기 名花 張一朶紅은 前日 全鮮 名唱大會에서 노래가락으로 榮譽의 一等當選이 되여 노래가락 女王이라는 讚辭를 한 몸에 감고 있는 舊歌謠界의 寵姬이다. 이 노래는 특히 作曲歌 劉一氏가 心血을 傾注한 傑作을 孃이 부른 豪華盤이다"라는 평을 받은 <옛 님을 그리면서>, 귀한 작품 잘듣고 갑니다. <雲水衲子>
 

인천권번 출신 여가수 장일타홍
김윤식/ 시인,·인천문협 회장
기호일보ㅣwebmaster@kihoilbo.co.kr 2008년 04월 27일 일요일  제0면 



고(故) 신태범(申兌範) 박사의 저서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 흥미를 끄는 내용이 있다. 1920~30년대 경제 활황으로 인천 미두장(米豆場)이 번창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외지인들이 모여든다. 그에 따라 인천 땅에 외식업과 여관업, 그리고 유흥업이 생겨나 특히 호황을 누리게 된다. 그런 인천 사회의 모습 중에 기생조합이었던 권번(券番)의 풍정을 그린 구절이다.


“목로주점과 방술집도 늘어났지만 격이 높은 유흥업소가 등장했다. 돈을 벌었다고 마시고, 잃었다고도 마시는 것이 술이고, 술에는 으레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씀씀이가 크고 돈 출입이 잦은 미두꾼이 늘면서 요릿집과 기생 권번이 생긴 것이다. 일월관(日月館), 용금루(湧金樓), 조선각(朝鮮閣) 등이 문을 열고 소성권번(邵城券番)이 출현했다. <중략> 장고와 가야금을 가지고 수심가 아니면 남도소리를 하던 연석(宴席)이었는데, 1930년 후반부터는 유행가와 댄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31년에 있던 소성권번의 일본어 선전 광고를 보니 딴 세상 같기만 하다.


‘예도(藝道) 발달의 중임을 맡고 수련을 거듭하기를 몇 성상(星霜)이던가. 이제 예도의 자신이 가슴에 가득 찬 꽃 같은 기생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본문과 함께 초일기(草日記)가 실려 있다. 50여 명의 명단인데 희한한 화명(花名)을 몇 개 골라 적어 본다. 신화중선(申花中仙), 방초선(方楚仙), 이일지연(李一支蓮), 조비봉(趙飛鳳), 조비연(趙飛燕), 장일타홍(張一朶紅), 김경패(金瓊?), 김일점홍(金一点紅), 민금선(閔錦仙), 이채운(李彩雲)”

권번에 대해 다소 길게 인용이 되었는데, 여기서 흥미롭게도 가수 장일타홍의 전직과 함께 당시 서울과 평양, 인천 등지에 생긴 유흥업소의 실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유행가와 댄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신 박사의 기록을 뒷받침하듯, 1935년 8월 1일에 발간된 잡지 『삼천리』의 ‘三千里 機密室’(삼천리 기밀실)이라는 가십 기사에 이미 인천권번의 장일타홍이 서울 콜럼비아 레코드회사 소속 유행가수로 나와 있는 것이다.  
 


이 잡지 기사는 비록 각 레코드사 소속 가수들이 기혼인지 미혼인지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 위주의 내용이지만, 장일타홍이 당시 콜롬비아 소속 가수 강홍식(姜弘植), 채규엽(蔡奎燁), 조금자(趙錦子) 등과 함께 나란히 기사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여기 기사를 통해 이 무렵 장일타홍이 이미 기혼자로서 가수 활동을 하고 있었던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또 그해 10월호 『삼천리』에는 가수들에 대한 인기투표를 실시해 발표한 기사도 있는데, 장일타홍은 5위까지 입상자에도, 또 아깝게 10위까지의 차점(次點)에도 들지는 못한 채 16명의 등외(等外)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별 볼 일 없는’ 가수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톱클래스 가수 중의 한 명이었다. 조선일보 1935년 2월 14일, 15일자 기사를 보면 “콜롬비아 秘藏(비장) 가수 총출동, 유행가 민요 무용의 밤”에 조금자, 황재경(黃材景), 강홍식 등과 출연하는가 하면, 1938년 3월 1일~2일에는 모리나가제과(森永製菓) 주최 “봄의 봐리에테”에 당시 다른 일류 가수들과 나란히 출연하고 있으며, 이어 5월 3일~4일에도 “전조선향토연예대회 古樂歌舞(고락가무) 대 페젠트 8도여류명창대회”에 출연하고 있다.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다만 그녀의 이런 활동에 관련한 기사는 1940년 3월 “방송예술가 實演(실연)의 밤” 출연 이후 돌연 종적을 감추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병이 있었는지, 가정 문제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그래서 그것이 은퇴로 이어진 것인지, 아무튼 어디에서고 그녀의 동정(動靜)은 확인되지 않는다. 



 
장일타홍의 출생 연대나 가계(家系), 결혼 생활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신 박사가 남긴 기록대로 그가 인천권번 기생이었다가 유행가 가수가 되어 활동했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한국음반학』제6호(1996)에 실린 노재명(盧載明)의 논문 「장일타홍의 유성기 음반에 관한 연구」에서도 그의 생몰 연대나 출생지, 음악 수업 과정 등등에 대해서는 전혀 미상(未詳)함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1934년 9월 조선중앙일보 후원으로 열린 삼남지방 수재민 위문 ‘전조선 순례 음악회’ 참가자 프로필에 장일타홍의 출생과 연예계 진출에 대한 약간의 언급이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문에는 장일타홍이 애초 인천의 한 부요(富饒)한 가정 출신이었는데 돌연한 부친의 병사(病死)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급기야 기적(妓籍)에 몸을 두게 된 애화(哀話)의 주인공으로 기술되고 있다. “장양이 몇 살 되지 않아 부친이 뜻하지 않은 병마에 걸리어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가세가 점점 기울어져 고난과 싸우며 겨우 당시 보통학교를 마치었으나 의지할 한 간의 집조차 없어져 어린 두 자매와 도로에서 방황할 가중(苛重)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구한 운명 속에서” 몇 번이고 죽을 생각을 하다가 결국 “수다(數多)한 가족을 위하여 비로소 기생으로 몸을 팔았으나 설상가상으로 몸 판 돈까지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일타홍은 그러한 고난을 잊고 전심으로 가무에만 힘을 쏟았다고 한다. 결국 타고난 미모와 노래에 대한 재능이 있었던 까닭에 그 얼마 앞서 경성에서 개최된 명창대회에서 영예의 1등을 거머쥐었고, 그것이 곧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장일타홍의 노래로 확인된 곡은 1934~5년에 콜롬비아에서 취입한 20곡으로 음반 10장 분량이다. 특기할 것은 그녀가 부른 노래는 ‘신민요곡’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이 전래 경기민요였다. 아마도 그의 출생지, 성장지가 인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그녀가 부른 곡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민요곡으로 「노래가락」 「양산도」 「이별시」「이팔청춘가」 「신고산타령」 「창부타령」이 있고, 신민요곡으로는 2중창곡 「동구랑타령」 외에 독창곡으로 「사랑타령」 「눈물의 배따라기」 「청풍명월」 「이별의 악수」 「청춘의 비문」 「어허야 나루라오」 「봄놀이타령」 「아리랑 울지 마라」 「남모르는 도라지」 「아리랑의 꿈」 「고향생각」이 있다. 가요곡은 「옛 님을 그리면서」와 「첫사랑」 두 곡이 남아 있다. 일타홍(一朶紅). 그 이름과 같이 그녀는 한 송이 붉은 꽃으로서 웃음을 파는 신세이기는 했지만 인천인으로서 분명 우리나라 가요사를 장식한 인물로 우뚝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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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가운데 ‘三千里 機密室’(삼천리 기밀실)처럼 한자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편집자가 괄호안에 한글을 병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 주  [출처: 김윤식 시인의 인천문화예술인 考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