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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어머니 노래] "칠갑산" (七甲山 1989) - 주병선 노래

잠용(潛蓉) 2019. 12. 11. 21:41

 

七甲山" (1989)
조운파 작사 작곡/ 노래 주병선

 

콩밭 매는 아낙네야
赤杉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七甲山 산마루에~


울어 주던 山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간 주>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七甲山 산마루에~


울어 주던 山새 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노래 칠갑산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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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삼 (赤杉)  : 전통시대 윗도리에 입는 홑옷. 모양은 저고리와 같으나, 한겹이며 보통 저고리 대용으로 여름에 입는다.

홀어머니 :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살아가는 어머니. 편모(偏母)

칠갑산 (七甲山) : 충님 청양군에 있는 산, 높이 559.8m이고 일곱줄기가 한데 모여서 칠갑산이라 한다. <충남의 알프스>로 불릴 정도로 산세가 험하여 전사면이 급경사를 이룬다. 동남쪽의 잉화달천, 동북쪽의 잉화천, 서남쪽의 장곡천과 지천천, 서북쪽의 대치천 등이 흘러 금강상류로 유입한다. 명승지와 문화유적 등이 조화를 이루어 이 일대가 1973년 칠갑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천천과 잉화달천의 지류들에 의해 형성된 맑은 계곡이 주위의 기암들과 어울려 지천9곡의 경승지를 이루었다. 경치가 수려한 장곡천 골짜기의 절벽 위에는 청양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장곡사가 있으며, 주변에 도고온천 등이 있다. 한치고개-정상-장곡사-송골에 이르는 6.9㎞ 코스와 율내동-정상-광대리-주정교에 이르는 등산로가 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천장호 일대의 경치가 아름답다. 차령산맥에 속한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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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백제사]
百濟 복원의 마지막 王都, 州柔城과 청양 ‘七甲山’ 豆率城 (1)
천지일보 (newscj@newscj.com)ㅣ승인 2019.10.23 09:00

 

[2017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다시 보는 백제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칠갑산

 

백제 왕도 소부리 최후의 날

660년 7월 12일(음력).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백제국 왕도 소부리는 20만에 가까운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당나라 13만 대군은 해로로 서해를 건너 기벌포를 통해 진군해 왔고, 신라 정병 5만 명은 황산벌을 거쳐 동쪽에서 백제 나성(羅城) 가까이 접근해 왔다. 도성 안의 2만 명에 가까운 백제인들은 결사 항전을 선언한다. 수많은 군기를 펄럭이며 진을 친 소정방의 당나라군은 멀리서 소부리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바빴다. 김유신 장군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결사 부대인 낭당(郎幢)을 선두로 먼저 성벽을 공격했다. 신라군이 도성을 향해 쏜 불화살이 이곳저곳 건물을 태우기 시작했다. 건물들에 불이 붙자 도성 안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부녀자들과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가득했다. 왕도 동편의 낮은 나성(羅城)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신라 기병과 당나라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나당연합 군사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백제군을 도륙했다.

 

불은 왕성 안 대찰 정림사를 태우고 궁궐로 옮겨졌다. 궁 안에서 군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던 의자왕은 피난해야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밖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항전하는 왕자 태를 제외하고 태자 효(孝)를 데리고 궁성을 빠져나왔다. 의자왕은 기병들을 재촉하여 지금의 공주 땅인 웅진(熊津) 고마성으로 피신한다. 궁 안에 있던 많은 비빈, 궁녀들은 나당연합군을 피해 부소산에 올라갔다. 피할 곳은 단 하나 천 길 낭떠러지 백마강. 나당연합군의 함성이 커지자 이들은 결심한다. “아! 백제여~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로구나.”

 

궁녀들은 통곡하며 백마강 아래로 꽃잎처럼 떨어진다. 그 수가 속설에는 3000명이라고 했다. 더 많은 숫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살아남을 경우 노비가 되어 짐승처럼 능욕을 당할 것을 알기에 죽음을 택한 것이다. 도성은 화염과 나당 연합군의 고함소리, 백제 병사들의 죽어가는 신음 소리가 진동했다. 이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백제 수도 소부리 부여 최후의 날을 상정하여 그린 소설적 상황이다. 지금도 왕궁유적인 부여 관북리를 발굴하면 당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도시의 잔해가 수없이 발견된다. 금방 구운 듯한 회청색의 토기 조각들과 불에 탄 기둥의 잔해들이 드러난다. 백제 최후의 날이 이처럼 처절했다니….

 

▲ 칠갑산 돌로 쌓은 벽

 

백제유민의 저항 운동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에 따르면 공산성(공주)마저 힘없이 무너지고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그리고 대신과 장군 88명, 백성 1만 2800명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여러 지방의 백제성에서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성주들은 백제 멸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왕족인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을 중심으로 이들은 뭉치기 시작했다. 백제의 주력군이었던 서북쪽의 여러 성과 남쪽의 여러 성이 호응했다. 이들의 세력은 순식간에 크게 확대되었다. 복신은 먼저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진 사비성을 공격하여 이를 회복했다. 당시 사비성에는 얼마 안 되는 당군이 진주하여 쉽게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 복국군은 힘을 얻기 시작했다. 복신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豊)을 불러 다시 왕위를 잇게 하고 험준한 주류성을 임시 왕도로 삼아 나당연합군에게 항전하기 시작했다. 백제는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나당연합군에 잃었던 모든 백제성을 회복했다. 신라는 여러 곳에서 백제 복국군과 싸웠으나 패전을 거듭했다. 장창병(長槍兵)과 김유신의 군사들 외에는 승리하지 못했다. 백제 정복의 오랜 염원이 무너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조에 당 황제에게 보낸 글을 보면 당시 복국군의 기세를 짐작할 수 있다.


“(전략) 복신의 도당은 점차 불어나 강 동쪽의 땅을 침범해 차지하는데, 웅진의 당병 1000명이 적도들을 치고자 나갔으나 적에게 패해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패배를 겪고 나서는 웅진에서 병사를 요청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이어지는데, 신라가 많은 질병을 안아 병마를 징발할 수 없었음에도 괴롭게 청하는 것을 뿌리치기도 어려워, 마침내 병사를 내었고 가서 주류성을 포위하게 하였습니다. 복신은 병사가 적은 것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곧장 와서 치니 병마를 크게 잃고 이로움을 잊은 채 돌아왔으며, 남방의 여러 성은 일시에 반역해서 모두 복신에게로 속했습니다.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을 포위하여, 웅진으로 가는 길이 막히고 소금과 장이 끊어지자, 즉시 건아를 징발해 그 곤궁함을 구제했습니다 (하략).”

 

사기가 진작된 백제 복국군들은 일본과 연합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백제 복국군은 이후 3년 동안 신라와 처절한 항쟁을 벌인다. 그런데 백제는 당나라의 증원군으로 복국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당나라는 40만 대군을 보내 백제 복국군을 공격했다. 일본과의 연합에 대한 우려가 컸으며 백제 기세를 꺾지 못한다면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 점령 플랜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풍왕은 일본과 연합전선을 펴며 응원부대를 요청한다. 일본 왕은 전함 수백 척과 전사 수만 명을 파견하도록 했다. (<일본서기> 천지왕조 2년 기록에는 전선 170척과 군사 2만 7000명으로 기록됨)

 

당시 풍왕은 주류성을 거점으로 항전 의지를 키웠다. 이 성은 험준하여 신라군이 감히 공격하지 못한 천혜의 요새였다. 일본 해군의 선단이 도착하는 백강의 어귀에서 나당연합군과 일대 접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선이 포구에 닿기도 전에 해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라군의 포노(砲弩, 불화살)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들은 상륙도 하기 전에 패퇴하고 말았다. 나당 연합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그다음 공격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를 먼저 칠 것이냐. 부여 가림성, 예산 임존성을 치자는 견해가 있었고 정산 두량윤성부터 치자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이들은 백제 우두머리가 있는 주류성을 치자고 결의한다. 그런데 이들은 진군하면서 같은 날 정산 두량윤성을 먼저 정복했다. 이날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하여 쉽게 풍왕을 패퇴시켰다. 풍왕은 백강에서 백제 왜의 연합군이 궤멸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군이 포위해 오자 근신들과 함께 성을 포기, 탈출한 것이다. 3년 백제 복국 의지를 불태웠던 주류성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다시 쓰는 백제사]
百濟 복원의 마지막 王都, 州柔城과 청양 ‘칠갑산’ 豆率城 (2)
천지일보 (newscj@newscj.com)ㅣ승인 2019.10.24 09:00

 

▲ 도림사지 가는 길

 

백가쟁명 주류성 여러 설

백제 마지막 왕도인 주류성(周留城) 위치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충남 서천 한산설(故 이병도 박사)이다. 지금까지 한산 건지산성을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또 지금은 작고하신 전 전주박물관장 전영래 박사가 제기한 전북 부안 우금산성, 그리고 故 박성흥 선생이 주장한 홍성설, 재야학자였던 故 김재붕 씨가 주장한 연기설(단재 신채호 설)이 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이 청양 칠갑산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고고학적 성과가 없어 정확히 어디라고 결론이 난 곳은 없다. 필자는 약 40년 동안 백제 복국운동을 연구하면서 주류성으로 비정 되는 곳을 모두 답사했다. 그중 청양 칠갑산 두솔성이 3년 백제 복국군의 항쟁 중심지로 여러 기록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주류성은 고기에 두솔성(豆率城), 주유성(州柔城)이라고 기록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와 <당서(唐書)>에는 ‘주류성(周留城)’으로 기록됐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두량이(豆良伊)’로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쓰누(州柔)’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조의 기록을 보자.

 

“유인궤는 말하기를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그 무리가 모여 있으므로 만약 이를 이기면 제성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 이 때 손인사와 유인원은 신라왕 김법민과 더불어 육군을 거느리고 진격하고 유인궤 별장 두상과 부여융은 수군을 거느리고 배에 군량을 싣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향하였는데…(하략). (仁軟曰 周留城百濟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是於仁師 仁願及羅王 金法敏水陸軍進 劉仁軌 及別將杜爽 夫餘 隆帥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趨周留城 云云).”

 

여러 기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류성은 우선 험준한 산악지형에 있었고 금강과 가까우며 하루에도 사비성 공격이 가능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특히 복국군의 내분과 복신의 죽음으로 상당수가 당군의 회유에 항복하면서 주류성이 힘없이 무너질 때 ‘당군에 항복하는 것은 돌아가신 복신장군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며 임존성으로 피신하여 마지막까지 항거하였다는 지수신(遲受信)의 기록을 감안한다면, 주류성은 임존성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기록에도 주류성은 산간의 험지에 있음이 나타난다. 천지(天智) 원년조에 ‘주유(州柔)는 험지에 있고 장기간 주둔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산이 가파르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좋은 지형이나 복신은 피성(避城)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국문학자들은 주류성의 음운변화를 주류성→두류성→두루성→두솔성→도솔성으로 해석한다. 그중에서 두솔성의 솔(率)자는 발음이 ‘율’ 또는 ‘루’로도 읽는 다는 것이다. 즉 최초 두솔성을 두루성으로 표기한 것인데, 이 한자 발음을 솔로 읽어 두솔성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충남대 교수였던 고(故) 지헌영 박사는 한 논문에서 주(周)를 우리말 두루, 두류로 해석하며 청양 정산의 두량윤성을 주목한 바 있다. 

 

▲ 도림사지 터

 

두솔산 칠갑산과 주류성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누나

 

홀어미 두고 시집가는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을 태웠소…

 

주병선의 가요 칠갑산은 시골 아낙네의 한을 그린 노래다. 마티 터널이 뚫리기 전엔 가장 오지였던 칠갑산. 가요보다 더한 슬픈 역사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 지18, 정산현 산천 편에 “七甲山 左縣 西十六里有古城其號慈悲城: 又見 靑陽縣 - 七甲山은 현 서쪽 16里에 있으며 옛 성의 터가 있는데 자비성(慈悲城)이라 부른다”고 기록됐다. 백제는 칠갑산(七甲山)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삼아 신성시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인 七甲山이라 불러 왔다. 즉 漆자를 ‘七’로 쓴 것은 일곱 칠이 천지 만물이 생성한다는 ‘七元星君’ 또는 ‘七星’과도 같은 風, 水, 和, 火, 見, 識에서 나온 것이다. ‘甲’자는 천체 운행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으뜸인 ‘甲’자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法王)조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출가시켰으며, 가뭄이 들자 ‘칠악사(漆岳寺)’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二年 春正月 創 王興寺度僧 三十人 大旱 王幸 漆岳寺祈雨). 칠악사는 다름 아닌 칠갑산이다. 백제 법왕의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으로 수서(隋書)에는 여선(餘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 사찰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오합사(烏合寺), 천왕사(天王寺), 도양사(道讓寺), 미륵사(彌勒寺), 보광사(普光寺), 호암사(虎灸寺), 백석사(白石寺), 오금사(五金寺), 사자사(獅子寺), 북부수덕사(北部修德寺) 등이 있다. 많지 않은 백제 사찰 이름 중에 칠갑산에 있던 칠악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악사 위치는 지금의 어디일까?

 

자비성을 일명 ‘도솔성(兜率城)’이라고 했다. ‘도솔’이란 불가에서 ‘도솔천(兜率天)’을 지칭하는 용어다.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40리 거리)이 되는 곳에 있는 칠보(七寶)로 장식한 화려한 궁전이 있으며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또 도솔천을 ‘만족시키다’는 뜻으로 지족천(知足天), 묘족천(妙足天), 희족천(喜足天) 또는 희락천(喜樂天) 등으로 해석한다. 도솔천에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원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머물고 외원에는 천인들이 오욕(五欲)을 만족하며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 도림사지 삼층석탑

 

미륵보살은 내원궁에서 설법하며 인간이 사는 세상인 남섬부주(南贍部洲)에 하생(下生)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 때 미륵이 내려온 인간 세상은 이상적인 세상이 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교화시켜 성인이 되게 하고 열반에 든다고 한다. 따라서 도솔천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로서, 정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미륵보살 신앙은 전쟁이 그치지 않는 삼국시대에 크게 융성하였다. 백제 무왕과 좌평적덕 따님은 미륵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미륵사(彌勒寺, 익산)를 세웠다. 신라 고승 원효는 도솔천에서 왕생할 수행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칠갑산 도솔성의 풍왕은 바로 미륵보살이며 이들이 백제 구토를 회복하고 하생하겠다는 의지에서 붙여진 것인가. 그렇다면 칠갑산 주류성은 불교 사상적으로도 타당하다는 결론을 얻는다.

 

[다시 쓰는 백제사]
百濟 복원의 마지막 王都, 州柔城 청양 ‘칠갑산’ 豆率城 (3)

천지일보 (newscj@newscj.com)| 2019.10.25 17:51

 

▲ 칠갑산에서 찾은 와편

 

임시로 옮긴 수도 피성은 어디

<일본서기> 천지(天智) 원년 조에는 ‘주유(州柔)는 험지에 있고 장기간 주둔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산이 가파르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좋은 지형이나 복신은 피성(避城)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이 바로 <삼국사기>에 나타나지 않는 부분을 보충해 주는 주류성의 위치를 비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백제 복국군의 피성(避城) 이도(移都)에 대한 기사(662년 12월 1일)는 다음과 같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 풍장, 그 신하 좌평 복신 등은 치노타쿠츠(朴市田來津)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연단경(古連旦涇)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뜨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치노타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필자는 칠갑산과 가까운 청양읍내에 있는 백제치소 ‘우산성(237m)’을 상정해 보기도 했다. 청양 읍내에 있는 진산인 우산(牛山)은 ‘비산(雨山)’ 또는 ‘피산’으로 읽을 수도 있다. 우산성은 청양읍을 우회하는 지천이 자연적 해자(垓字)를 이루며 그 규모가 크며 평지와 연결되어 있어 난중의 임시수도가 될 만한 곳이다. 특히 성내서는 많은 양의 백제 토기편과 와편이 산란한다.

 

또 보령군 오천면 소성리 일대를 주목했다. 이곳은 칠갑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피성 기록 환경과 비슷하다.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연단경(古連旦涇)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뜨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또는 학성(鶴城,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산 24-1)을 피성 후보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학성산성은 속칭 ‘두루미산성’으로 불리며 전장 1.2㎞의 큰 성으로 인근에 사시량(沙尸良) 명문와편이 나온 장곡산성(1.3㎞)이 있다.

 

▲ 성재봉이 보이는 적곡리

 

두솔성 안에 있는 폐사 도림사지

칠갑산 두솔성 안에는 도림사지(道林寺址)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정산현 불우조(定山縣 佛于條)에 ‘도림 묘봉사 구재 칠갑산(道林 妙峯寺 俱在 七甲山)’이라 하여 조선 전기까지도 칠갑산에 도림사, 묘봉사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림’이란 이름은 불가의 이상세계인 ‘도리천(忉利天)’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도림이 혹 백제복국군의 리더였던 도침(道琛)과 연관되는 것은 아닐까. 도침은 승려출신으로 복신을 도와 백제 복국군을 이끌던 인물이다. 이 두솔성 칠갑산이 백제 주류성이라면 도침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절터는 지난 1973년 지표조사에서 ‘도림(道林)’이란 명문 기와를 수습하여 이곳이 도림사임이 확인되었다. 절터는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능선사면에 대지를 조성하여 가람을 세운 층단형 가람배치를 보인다. 절터에는 고려 시대에 조성된 단아한 3층 석탑이 현존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3층 기단 위에 3층 탑신과 상륜부로 구성된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탱주와 양우주가 있으며, 갑석은 얇고 평평한 4장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매우 균형 잡힌 형태이다. 1973년 해체 때 발견된 사리구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재현돼 있는 관현리 등 다섯 지역의 발굴 당시 가마터의 모습

 

글마루 취재단은 도림사지를 답사해 현장에서 고려 시대 이전의 와편을 찾기도 했다. 이 와편은 방격자문(方格子紋)으로 고운 태토를 보여 사찰의 창건연대를 올려 보아야 할 듯하다. 특히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앞에 발굴로 드러난 여러 개의 석재에서도 고식의 것을 확인했다. 정연한 모양의 원형주좌, 몰딩이 있는 단계석의 파편은 고려 시기 이전의 역사다. 아름다운 백제 연화문을 조식한 석주(石柱)도 보인다. 한편 취재단은 백제 와당과 토기를 굽던 장평면 관현리 가마터와 적곡리, 분향리 등지를 답사했다. 적곡리에서는 성재봉에 축조된 두솔성 성지를 멀리서 확인하기도 했다. 왕이 직접 행하여 천신에게 제사 지낸 백제 가람 칠악사지(漆岳寺址)는 어디일까. 취재반은 절터가 있을 것으로 상정되는 여러 곳을 답사하기도 했으나 유적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관현리 등 다섯 지역의 가마터는 발굴 당시 모양대로 백제문화체험박물관(관장 이광열, 대치면 장곡리 153-5)에 모두 재현되어 있다. 그중 사비시대 연화문 와당이 눈길을 끈다. 백제 왕도 궁전 건축과 사찰, 칠악사, 주류성에서도 이 기와를 사용했을 것이다. 박물관 뜰에 전시된 목면 본의리 가마 출토 백제 토제 불상 대좌는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백제 전성기의 국력과 영화로움을 입증하고 있다. 칠갑산 아래 여러 유적에서 1천 400여년 전 나라를 다시 찾으려 했던 백제 유민들의 항성이 들리는 듯하다. 부여에 이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추가 등재되는 염원을 안고 아쉬운 마음으로 차를 돌렸다. <끝>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주병선 - 칠갑산


주병선 - 칠갑산


주병선 - 칠갑산


장태희 - 칠갑산


나훈아 - 칠갑산


유지나 - 칠갑산 (2011년 10월 10일 진주공연)


이호연(李鎬演) - 칠갑산(七甲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