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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1582 학번의 동기모임

잠용(潛蓉) 2019. 12. 18. 12:10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582 학번의 동기모임

경향신문ㅣ2012.01.04 12:00 수정 : 2012.01.04 12:04


 ▲ 1582학번의 동기모임


48년만에 만난 성균관 1582학번의 동기모임. 품계에 따라 앉아있다. 가운데 4명은 정1품 관직에 있었던 윤방, 오윤겸, 이귀, 김상용 등이다. 오른쪽 2명은 정2품인 이홍주와 정경세이다. 인쪽에는 종2품~정4품까지 6명이 앉아있다.(위 그림) 그런데 4년 뒤 방회도를 보면 달라진다.(아래그림) 4년 전 4명이었던 가운데 상석에 3명이 앉아있다. 이귀가 1년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른쪽에는 정경세가 타계하는 바람에 이홍주만 자리를 지켰다. 왼쪽에는 4명이 앉아있다. 4년전 멤버 가운데 유순익, 윤환, 이배적이 고인이 되었다. 4년 전 멤버 가운데는 이준이 어쩐 일인지 불참했고, 새롭게 박종현과 연사의가 참석했다.


48년만에 만난 성균관 1582학번의 동기모임. 품계에 따라 앉아있다. 가운데 4명은 정1품 관직에 있었던 윤방, 오윤겸, 이귀, 김상용 등이다. 오른쪽 2명은 정2품인 이홍주와 정경세이다. 인쪽에는 종2품~정4품까지 6명이 앉아있다.(위 그림) 그런데 4년 뒤 방회도를 보면 달라진다.(아래그림) 4년 전 4명이었던 가운데 상석에 3명이 앉아있다. 이귀가 1년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른쪽에는 정경세가 타계하는 바람에 이홍주만 자리를 지켰다. 왼쪽에는 4명이 앉아있다. 4년전 멤버 가운데 유순익, 윤환, 이배적이 고인이 되었다. 4년 전 멤버 가운데는 이준이 어쩐 일인지 불참했고, 새롭게 박종현과 연사의가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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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벌써 48년이 흘렀네. 그 때 태어난 자들도 백발이 되었을 텐데….”
1630년 4월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한 노인 12명이 관인방(寬仁坊·관철동) 충훈부(忠勳府) 건물로 속속 모였다. 손에 손에 술 한 병씩 든 채…. 이들은 1582년(임진년) 사마시(생원·진사시)에 합격했던 동기생들.

‘(15)82학번 동기모임’이 열린 것이다. 원래 동기생 수는 200명이었다. 하지만 합격한 지 48년이나 지났으므로 많은 동기들이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재경(在京) 동문들만이 참석대상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12명 만이 모인 것이다. 이날 모임은 삼척부사로 떠나는 동기생 이준(李俊·71)의 송별회를 겸한 자리였다.


‘1582학번’, 48년만에 동기모임 열다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의 글인 ‘만남과 인연의 추억-임오년(1582년) 사마시 입격동기생들의 방회도’(우복 정경세 도록·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나타난 방회첩 서문을 통해 이날 모임을 재구성해보자.

쟁쟁한 동기생들이었다. 이준 뿐 아니라 영의정 오윤겸(72)·돈녕부사 윤방(68)·병조판서 이귀(74)·예조판서 김상용(70)·경기관찰사 이홍주(69)·이조판서 정경세(68)·용양위부호군 윤흔(67)·한성부좌윤 류순익(67)·첨지중추부사 윤환(75)·중추부 경력 이배적(75) 등이 참석했다. 모두 종 4품 이상의 품계를 지닌, 출세한 동기생들이 모인 것이다.


이들은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며, 밤늦도록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셨다. ‘밴드(악사·樂師)’나 도우미(무녀·舞女)는 부르지 않은 간소한 술자리였다. 이들은 이윽고 헤어질 때가 되자 장탄식 했다. “이제 세상에 남아있는 동기생들이 얼마 없네 그려. 새벽 하늘의 별 같이 사라지네.(落落如曙天星矣) 다행히 서울에 살아있어도 종일 바쁘니…. 오늘과 같은 날이 백년 가운데 얼마나 되겠는가.”


조선시대 기념사진 “찰칵”

동기생들은 이날의 모임을 기념하는 방회첩(榜會帖)을 만들었다. 이것이 30일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주최로 열리는 ‘우복 정경세 특별전’(031-709-8111)에 출품된 <임오사마방회도>이다. 방회도엔 모임 장면을 그린 그림과 각자의 시문, 참석자들의 명단을 적어 넣었다. 또한 모임의 과정을 기록한 서·발문도 포함됐다. 지금으로 치면 기념사진 등을 담은 ‘동기회 홈페이지’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1582학번’들은 4년 뒤(1634년)에도 동기모임을 열고, 또 하나의 방회첩을 만들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두번째 동기모임은 병조의 옛 관아에서 열렸다. 모임에는 8명이 참석했다. 4년 전 모임멤버였던 이귀·정경세·류순익·윤환·이배적 등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동기들이 장탄식했다. 방회첩 서문에 이날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정리돼있다.

“모두 호호백발이네. 200명 가운데 살아남은 이가 10분의 1도 안되고….”

“그나마 서울에 있는 이는 고작 8명이야.”

“그나저나 이 여덟 사람이라도 이렇게 한 방에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 창안백발(蒼顔白髮)의 모습으로 하룻밤의 환락을 마음껏 즐기다니…. 노경에 보기드문 일이 아닌가.”


잘 나가는 ‘학번’

‘1582동기회’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모인 8명 가운데 3명이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정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4년전 돈녕부사와 예조판서였던 윤방과 김상용이 영의정과 우의정에 올랐으니 말이다. 4년 전 영의정이던 오윤겸은 좌의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학번’에서 3정승을 동시에 배출했으니 동기회의 위세는 다단했을 것이다. 방회첩 서문을 보자.
“같이 합격한 이들 가운데 정승이 하나 나오기도 힘든데…. 우리는 셋이나 동시에 정승이 되어 지금 이 모임에서 자리를 나란히 하고 있네 그려.”
“그렇지 아마도 전무후무한 희한한 사건일 것이야.”
“그래. 나라의 3정승이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 가운데 똑같이 나와 지금 한 방에서 회동하고…. 또 모두들 높은 수명을 누리고들 있으니….”
“아!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지. 우리 동기들은 가히 인재의 복록(福祿)이야. 아니 그런가?”
“아무렴 아무렴.”

 


▲ 우복 정경세가 작성한 1630년 방회첩 서문.<출처/{만남과 인연의 추억-임오년(1582년) 사마시 입격동기생들의 방회도},한국학 중앙연구원 장서각 발행 \"우복 정경세전\" 도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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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영의정)와 9급 공무원(참봉)이 함께 술 마시다

아무리 동기모임이었지만 술자리의 서열은 철저했다. 품계에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졌다. 하지만 술잔을 기울일 때는 격의가 없었다. 이날 모임에는 4년 전 모임에 불참했던 박종현과 연사의가 새로이 참석했다. 그런데 연사의의 직책은 가장 말직인 ‘참봉’(9급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윤방) 등 고관대작 동기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술잔을 나눴다. 첫 모임에 불참한 이유가 혹 말단공무원이라는 신분을 스스로 의식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랬다가 두번째 모임에는 “꼭 나오라”는 동기회장의 권유 덕분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52년 전 ‘합격동기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분의 차이를 넘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사마시(소과)에 합격한다고 해서 관직에 나서지는 못했다. 다만 ‘성균관 입학’이라는 자격을 받는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입동기생’이라면 맞는 표현일까. 이들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뒤 대과인 문과(文科·지금의 행정고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사마시는 벼슬길(대과 합격)의 첫 관문인 셈이다.


‘고시동기’(대과)보다 더 각별했던 ‘대학동기(사마시)’

하지만 ‘소과 합격자’는 국가고시를 통해 사족(士族)의 지위를 공인받는 신분이었다. 벼슬길에는 올라가지 못해도 평생을 ‘생원’ 혹은 ‘진사’의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었다. 양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바로 생원·진사였던 것이다. 또한 별다른 배경이 없는 이들에게 ‘사마시 동기’는 관직생활을 위한 든든한 인맥이었다. 동기생들은 형제관계에 비유될 만큼 굳건한 결속력을 다졌다.


하수일(1553~1612)의 ‘삼청동방회서(三淸洞榜會書)’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 부탁할 친구도, 받아들여 줄 사람도 없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급제하면 한평생을 벼슬길에서 형제 사이처럼 지낼 사람들이다. 금세 만났지만 그 정은 마치 오래 사귄 친구 같고, 처음 모였는 데도 모든 이의 각오는 쇠를 자를만큼 굳고 든든하다.”
그런데 대과, 즉 33명을 뽑는 과거급제자들의 동기회보다는 사마시 동기회의 결속력이 더 끈끈했다.  
아무래도 ‘대과동기’는 출세경쟁를 위한 ‘연줄’의 의식이 강했을 것이다. 반면 관직으로 나가는 첫 관문을 함께 통과한 ‘사마시동기’들의 인연은 더 각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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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벌써 48년이 흘렀네. 그때 태어난 이들도 백발이 되었을 텐데….”
1630년 4월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관인방(寬仁坊·관철동)에 속속 모였다. 손에 손에 술 한 병씩 든 채…. 1582년(임오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른바 ‘1582학번 동기모임’이었다. 삼척부사로 떠나는 동기생 이준(71)의 송별회를 겸한 자리였다. 영의정 오윤겸(72)과 이조판서 정경세(68) 등 동기생 12명이 모였다. 이들은 옛 추억에 잠겨 밤늦도록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셨다. 동기생들은 모임을 기념하는 방회첩(榜會帖)을 만들었다. 이것이 31일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주최로 열리는 ‘우복 정경세 특별전’(031-709-8111)에 출품된 <임오사마방회도>(사진)이다. 지금으로 치면 기념사진 등을 ‘동기회 홈페이지’에 올린 것이다. ‘1582학번’들은 4년 뒤(1634년)에도 동기모임을 열고, 또 하나의 방회첩을 만들었다. 두번째 모임에는 8명이 참석했다. 4년 전 멤버 가운데 4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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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생(200명) 가운데 살아있는 자가 10분의 1도 안되고…. 그나마 서울에 있는 이는 고작 8명이야.”

“어쨌든 호호백발(호호白髮)로 하룻밤의 환락을 마음껏 즐기는 것 아닌가.”

‘1582 동기회’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8명 가운데 영의정(윤방)·좌의정(오윤겸)·우의정(김상용) 등 현역 3정승이 이날 동기회에 모였으니…. 다들 술기운에 젖어 동기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라의 3정승이 나와 지금 한방에서 만나고…. 또 모두들 높은 수명을 누리고들 있으니….”

“아! 역시 우리 동기들은 인재의 복록(福祿)이야. 아니 그런가?”


동기모임이었지만 품계에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퇴직 9급 공무원(참봉)인 연사의 등도 말석에 앉았다. 하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윤방)와도 스스럼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사실 사마시(소과)에 합격한다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성균관 입학’의 자격을 받은 ‘대입 동기생’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소과 합격자’는 평생 ‘생원’ 혹은 ‘진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 ‘빽’이 없는 이들에게는 든든한 인맥이었다. 아무래도 출세경쟁을 벌여야 했던 대과(고시) 동기생들보다는 사마시 동기회의 결속력이 더 끈끈했다.


<이기환/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겸 문화·체육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