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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만리장성 왜곡'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통곡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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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만리장성 왜곡'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통곡할 일

경향신문ㅣ2012.06.13 11:56 수정 : 2012.06.13 12:02

  


▲ 중국의 ‘영원한 총리’로 존경받는 저우언라이. 중국의 역사왜곡을 반성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장(助長)’이라는 단어가 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다. 급한 성격의 농부는 벼를 빨리 자라게 할 요량으로 모를 손으로 잡아뽑아 늘렸다. 깜짝 놀란 식구들이 달려갔지만 이미 모는 말라죽었다.(<맹자> ‘공손추 상’)


‘조장’이란 단어가 나온 고사(故事)이다. 고사로만 끝난 게 아니다.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의 광풍이 중국대륙을 소용돌이 쳤을 때 ‘실제상황’이 벌어졌다. 일부 마을에서 밤새도록 논두렁마다 전등을 밝히고, 다른 논에서 자란 벼들을 뽑아 한 논에 모아놓고 수확량 자랑을 벌였다. 당중앙의 수확할당량을 맞추고, 식량생산량이 크게 증가했음을 과시하려는 ‘현대판 조장’이었다.

물론 이 광풍은 대실패로 끝났다. 기근과 가뭄, 홍수가 겹쳐 2000만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요즘 만리장성의 길이를 엿가락처럼 늘이는 중국을 보면서 ‘조장’이라는 단어가 새삼 떠오른다.


55년 전 저우언라이 총리가 한 말

‘만리장성 공정’을 두고 중국의 초조감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서상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중국과 국경을 맞댄 조선족과 위구르 족 같은 20여 개 소수민족의 통합을 노린 정치공작”이라고 말했다. 각종 국내외 모순에 전전긍긍하면서 역사왜곡에 혈안이 된 요즘 중국의 모습은 딱하기만 하다.
하지만 예전의 중국은 그래도 대국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같은 중국의 혁명 1세대는 소수민족의 역사를 존중하고, 자결권을 인정했다. 특히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저우언라이 총리의 통찰력있는 견해는 지금 이 순간 중국인들이 반드시 곱씹어봐야 하는 금과옥조이다.


1957년, 저우언라이 총리는 전국인민대표회의 민족위원회가 주최한 민족공작좌담회에서 중요한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는 대민족주의-특히 대한족주의-와 지방민족주의에 모두 반대한다. ~반드시 민족 구역의 자치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민족의 역사발전과 경제발전, 혁명발전에 가강 부합하는 정책이다.”



▲ 저우언라이 총리가 서거한 뒤 자금성 입구에 걸린 조화. 조화의 내용은 ‘경애하는 주은래 총리는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는 것과, ‘인민의 총리는 인민을 사랑했고 인민의 수상은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다민족 국가라는 대가정을 강대한 사회주의 국가로 발전시켜야 한다”며 “각 민족들은 완벽한 평등을 누리고 그 어떤 차별을 받아서도 안된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국토가 넓고 역사가 유구한 나라다. 고대에는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민족 간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한족이 다른 민족을 침범했던 경우가 훨씬 많았다.~신중국은 각 민족들이 우애있게 협력하는 대가정이 되어야 한다.” 저우언라이는 이미 55년 전에 중국이 다른 민족을 자주 침범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방 민족주의도 경계해야 하지만 대한족주의도 반대한다”며 “중국 내 각 민족의 공생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통큰 결단’ 내린 저우언라이



▲ 중국이 엿가락처럼 늘린 만리장성. 수많은 부여, 고구려, 발해성을 장성으로 둔갑시켰다. 이제 만리장성은 ‘사만리장성’이 됐다.


1962년 말부터 북한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줄기차게 간청했다.
“제국주의자, 수정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두고 작은 민족이네, 작은 나라네, 역사와 문화가 없는 나라네 하고 멸시해 국제적인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중국 동북지방에서 고고조사 및 발굴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분명히 하고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고 싶습니다.”
아니 남의 나라에서 와서 자국의 원류를 찾겠다고?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외교적인 결례였다.

하지만 저우언라이 총리는 ‘통큰 결단’을 내린다. 조·중 합동 발굴대를 구성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형구 교수는 “그때만 해도 중국은 대국의 마인드로 소수민족의 역사를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중 합동발굴대는 1963년 8월부터 65년 8월까지 2년에 걸쳐 중국 동북지방의 고구려·발해유적을 대대적으로 조사한다. 조·중의 합의는 재미 있었다. 유물 2점이 나오면 하나씩 나눠갖고, 한 점만 나오면 북한이 가져가서 연구하도록 했으니까. 북한과 중국은 당대 최고의 고고학자들을 총동원해서 공동작업에 매달렸다.


“중국은 대국 쇼비니즘 관점에서 역사를 왜곡됐다”

1963년 6월28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매우 중요한 발언록을 남긴다.(‘외사공작통보’) 이 발언록은 지난 2004년 8월 중국 유학중이던 설훈 국회의원이 입수 공개했다. 번역본이 A4용지로 5장이나 되는 저우언라이의 발언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일단 ‘조선’을 서술한 중국 역사책과 역사관이 ‘대중화(大中華)’의 관점에서 왜곡되고 과장됐음을 인정한 것이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에 살아왔다. 랴오허(遼河), 쑹화강(松花江)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 지난 1963년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언급한 저우언라이 총리의 발언록. 지난 2004년 설훈 의원이 입수 공개했다. 중국이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왜곡을 일삼아왔다는 내용과 그 구체적인 사례까지 제시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그 증거까지 내민다.
“랴오허와 쑹화강, 두만강 유역에서 바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고,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징보호(鏡泊湖) 부근에 대진(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진의 수도(발해 수도 상경용천부)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조선의 지파였다는 사실이다.”


“발해=고구려의 지파”

지금 중국학계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지금 이 순간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하는 판인데…. 아니 중국에서 ‘전당해모(全黨楷模)’ 즉 ‘공산당 전체의 모범’으로 추앙받고 있는 저우언라이 총리가 이미 49년전에 ‘발해=고조선(고구려)의 지파’라고 했으니 말이다.

사실 <구당서>를 보면 “발해말갈의 (시조)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라고 했다.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할 사료는 당대 사람인 신라 최치원이 쓴 글(<여예부배상서찬장·與禮部裴尙書瓚狀>)에서 나온다.


“고구려의 미친 바람이 잠잠해진 뒤 잔여세력이 느닷없이 나타나 남은 찌꺼기를 거두어 모아~느닷없이 나타났으니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다.”(최치원)

최치원이 당나라 예부상서에게 쓴 편지이다. ‘발해를 욕하는’ 내용이지만 발해가 고구려를 이어받았음을 적나라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당대의 기록이므로 후대에 쓴 역사책 보다 훨씬 신뢰할 만 하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었던 것이다.


“랴오허 유역 정복은 명백한 침략전쟁”

저우언라이의 언급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중국이 여러분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 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침략전쟁을 언급한다.


“진·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복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지만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 때 여러분의 훌륭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진(발해)이 일어났다.”

흥미로운 점은 저우언라이가 랴오허 유역을 중국의 ‘침략의 대상’, 즉 조선·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당나라 태종이 침략전쟁을 벌였으나 안시성 싸움에서 패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하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는 더 나아가 “투먼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든가, 심지어는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인 황당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는 만주 일대와 랴오허 유역은 결코 한족의 땅이 아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공동발굴·공동조사의 정신

그러면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역사학자들의 붓 끝에서 나온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면서 “조·중 관계사를 공동으로 연구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가 조·중 발굴단의 공동조사에 응한 ‘통큰 이유’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저우 총리의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다. 2년간에 걸친 공동조사를 막 끝낸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모든 학술조사는 중단됐으며 수정주의자, 주자파로 낙인 찍힌 지식분자들은 줄줄이 숙청됐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발굴보고서를 공동조사단의 이름으로 발간해버린다.(1966년 7월) 그것도 모자라 일본판으로도 펴낸다. 고조선의 기원은 중국 동북이고,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내용으로….

중국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공동발굴·공동연구·공동보고서 발간 등 저우언라이 총리의 당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양국간 학술교류는 빙점에서 맴돌았다. 이형구 교수는 “북한과 중국은 피를 나눈 혈맹관계지만 고고학 분야 학술교류는 지금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북한도 신의를 저버렸지만, 중국도 이후 대국의 면모를 버리고 갈수록 소아병적인 중화주의로 빠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저우언라이가 중국을 사랑한 방식

저우 총리의 글을 새삼 들춰볼 때마다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견해, 시공을 꿰뚫은 통찰력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하기야 헨리 키신저는 “저우언라이는 ‘철학에 능통하고 역사에 통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걸출한 위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세상이 바뀌고 정세가 바뀌었다지만 저우언라이는 여전히 중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저우언라이는 기본적으로 중국을 끔찍히 사랑한 중화주의자였다. 그는 국공내전 시기 뉴욕타임스 기자로부터 “중국인과 공산당원이라는 신분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분명했다. ‘중국인이라는 신분’이었다. 이렇게 중국을 사랑했고, 중국을 위해 헌신했던 저우언라이였지만 한족 중심의 대국주의만큼은 철저하게 반성하고 바로잡으려 했다. 그것이 저우언라이가 중국을 사랑한 방식이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전문>

(한·중 역사 관계부문만)



금년(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 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시기는 역사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 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 온 생활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이미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완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 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 금족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만주족도 한족에 기여한 바가 크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 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馬援)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000~3000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조장(助長)’이라는 단어가 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농부가 벼를 빨리 자라게 할 요량으로 손으로 모를 잡아뽑아 늘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이 한창일 때 ‘실제 상황’이 벌어졌다. 일부 농가에서 논두렁마다 밤새도록 전등을 밝히고, 다른 논에서 자란 벼들을 뽑아 한 논에 죄다 모아놓고 수확량 자랑을 벌였다. 당중앙의 수확할당량에 맞춰 식량 생산량이 급증했음을 과시한 ‘현대판 조장’이었다. 지금의 중국은 어떤가. ‘만리장성’을 ‘사만리장성’으로 ‘조장’하고 있다. 예전엔 그래도 대국의 풍모를 풍겼다. 1957년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사진)의 담화를 보자.


“한족이 다른 민족을 침범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 지방민족주의도 경계해야 하지만, 대한족주의도 반대한다.” .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관과 역사왜곡을 우려한 것이다. 1962년부터 북한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고 싶다”고 중국에 요청했다.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원류를 찾겠다는 것이니, 중국 입장에서는 ‘무례’한 요구였다. 하지만 저우 총리는 ‘통큰 결단’을 내린다. ‘조·중 합동 발굴대’의 구성을 허락한 것이다. 1963년 6월28일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난 저우언라이는 더욱 깜짝 놀랄 발언을 남긴다.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는 “랴오허(遼河), 쑹화강(松花江) 유역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고까지 한다.

“… 징보호(鏡泊湖) 부근에 발해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상경용천부)였다. … 조선의 지파였다는 사실이다.”

‘발해=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하는 지금의 중국학계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중국은 진·한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복했는데, 이는 분명한 침략이다.”

  
랴오허 유역을 중국의 ‘침략 대상’, 즉 고조선·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한 것은 두고두고 흥미롭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조상들을 대신해서 사과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을 끔찍이 사랑한 중화주의자였다. “중국인과 공산당원 중 하나만 택하라면 중국인을 택하겠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랬지만 한족 중심의 대국주의만큼은 철저하게 반성하고 바로잡으려 했다. 그것이 저우언라이가 중국을 사랑한 방식이었다.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