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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개(犬)요리' 뇌물로 출세한 '개고기 주사'

잠용(潛蓉) 2019. 12. 20. 19:07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개(犬)요리' 뇌물로 출세한 '개고기 주사'

경향신문ㅣ2012.07.11 10:24 수정 : 2013.01.30 15:44




▲ 김준근의 <기산풍속도> 중 ‘개도살자(屠漢)’. 끌려가지 않으려는 개의 모습이 안타깝다. 조선시대에는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던 사람도 있었고, 외교관 신분으로 남의 나라(연경)에서 개를 잡아먹은 이도 있었다. /숭실대박물관 제공

  
‘개고기 주사.’
조선조 중종 때의 일이다. 이팽수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사람의 별명이 ‘가장주서(家獐注書)’였다. ‘가장’은 ‘개고기’를 뜻하고, ‘주서’는 정7품의 벼슬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주사(6급·주무관)’? 그러니까 이팽수라는 인물은 개고기 요리를 뇌물로 써서 주사로 승진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내막인가.


‘보신탕 뇌물’로 요지에 등용되다

1534년, 중종은 인사발령을 내면서 문제의 이팽수를 승정원 주서에 임명했다. 그런데 <중종실록>을 쓴 사관이 발령내용의 팩트를 전하면서 슬쩍 논평한다. “이팽수는 승정원 내부의 천거도 없었다. 그런데 김안로가 마음대로 천거한 것이다. 이팽수는 안로와 한마을에 살았고, 이팽수의 아버지가 김안로의 가신이었다. 안로는 팽수를 자제처럼 여겼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고향 선후배라는 지연(地緣)이 작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다음 대목은 웃긴다.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했다. 팽수가 봉상시 참봉으로 있을 때부터, 크고 살찐 개를 골라 사다가 먹여 늘 김안로의 구미를 맞추었다. 김안로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청요직에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팽수를 ‘가장주서’라 불렀다.”


봉상시 참봉(지금의 9급)이었던 이팽수가 온갖 개고기 뇌물로 당대 권력가 김안로(金安老·1481~1537)의 환심을 샀다는 것. 급기야 이팽수는 김안로의 뒷배로 요직 중의 요직인 국왕비서실로 입성한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일은 또 있다.


출세를 가른 ‘개고기 구이’ 맛

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뜬 이가 있었다. 바로 진복창이란 인물이었다. 진복창은 한때 이팽수와 함께 봉상시 주부(정6품)로 근무한 적이 있던 직장동료였다. 진복창 역시 김안로에게 ‘개고기 구이’로 접근했다.(1536년)

“진복창은 봉상시 주부(정6품·요즘의 5급)가 되었음에도 김안로의 뜻에 맞춰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하는가 하면, 매번 좌중에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떠벌였다.”(<중종실록>)

 


▲ 조선 후기 정부인 안동장씨가 말년에 저술한 음식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의 표지이다. 표제는『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이라 쓰여있다. /영양군 제공


문제는 진복창이 이팽수처럼 높이 발탁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개고기 구이 실력이 이팽수보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진복창은 김안로가 그토록 좋아하는 ‘개고기 구이(견적·犬炙)’을 바쳤지만 오히려 크게 쓰여지지 못했다. 진봉창은 스스로 ‘내 견적요리가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김안로로부터 ‘요리 실력이 이팽수보다 못하다’는 질책을 받았다.”(<중종실록>)

상관에게 앞다퉈 개고기 요리를 뇌물로 바치는 행위도 웃긴다. 하지만 김안로야말로 개고기라면 사족을 못쓴 ‘개고기 애호가’였음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 혜경궁 홍씨와 개고기 요리
다산 정약용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개고기 애호가였다. 1811년 다산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 중인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개고기예찬론을 한껏 펼친다. 도무지 유배중이라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형님의 한탄에 답답하다는 듯이….


“(형님이)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고기는 도무지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섬 안에 산개가 천마리도 넘을 텐데 저라면 5일에 한마리씩은 삶아 먹겠습니다. 1년 366일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충분히 고기를 계속 먹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흑산도를 선생의 탕목읍(湯沐邑·천자나 제후의 식읍지)으로 만들어주어 고기를 주고 부귀를 누리게 하였는데 오히려 고달픔과 괴로움을 스스로 택하다니 역시 사정에 어두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1년에 52마리를 먹으라니…. 다산은 ‘지독한 개고기 마니아’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고기 요리 가운데 개고기찜(狗蒸)은 정조임금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식단에도 올라 있었다.


거사를 앞둔 최후의 만찬, ‘개고기 파티’

또 별 일도 다 있었다. 정조가 막 즉위한 1777년(정조 1년),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홍계희 가문은 정조 즉위와 함께 몰락했다.

그러자 ‘정조 시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 해 7월28일(음), 정조의 이복동생 이찬을 추대하는 반역의 무리는 대궐밖 ‘개잡는 집(屠狗家)’에서 개장국을 사먹고(買吃狗醬) 대궐로 잠입했다. 말하자면 거사를 앞두고 보신탕집에서 개고기 파티로 ‘최후의 만찬’을 펼치며 결의를 다진 것이다.

 


▲ 개장찜, 개장국누르미, 누렁이 삶는 법 등 각종 개고기요리의 조리법을 설명한 <음식디미방>의 개고기 요리법. /영양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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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임금이 밤새도록 책을 읽고 있던 존현각 지붕을 뚫고 시해할 작정이었지만 발각되고 만 것이었다.

일당은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미수에 그친 일당이 이튿날 모인 곳도 바로 최후의 개고기 파티로 결의를 다진 개 잡는 집이었다. 일당은 이곳에서 다시금 거사계획을 세웠지만 도중에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짐승’ 취급받은 조선 외교관의 빗나간 개고기 사랑

또 다산 정약용과 같은 시대를 산 문신 심상규(1766~1838) 역시 ‘지나친’ 개고기 애호가였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나온 심상규의 ‘개고기 편력’은 유명하다. 그는 1812년 사신의 명을 받아 연경(베이징)으로 갔다. 그런데 마침 복날이 다가오자 입맛을 쩍쩍 다셨다.

“연경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는 복날에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했는데 연경사람들은 크게 놀라며 이상하게 여겨 팔지 않았다. 심상규는 개의치 않고 그릇을 빌려다 개고기를 삶았다. 연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삶은 그릇을 모두 내다 버렸다.”


한번 상상해보라. 연경 사람들은 조선사신 심상규를 ‘짐승’ 보듯 했을 것이다. 빌려준 그릇마저 팽개쳤으니 말이다. 외교관이 남의 나라 땅에 특사로 가서 혐오식품을 스스로 해먹은 것이니 말이다. 지금 같으면 어땠을까. 말도 안되는 국제망신이라 손가락질 받았을 것이다.


‘복날 개고기’ 풍습은 기원전 675년 중국에서 시작됐다.

사실 복날 개고기를 먹는 풍습을 전한 사람들이 바로 중국인들이었다.

복날의 유래는 진나라 덕공 2년(기원전 6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천의 <사기>에 분명히 나온다.

“덕공 2년, 복일(伏日)을 정해 개를 잡아 열독(熱毒), 즉 사람을 해치는 뜨거운 독기를 제거했다.(以狗禦蠱)”(<사기> ‘진본기’)


<사기>의 주석서인 <사기집해>와 <사기정의>등은 복날의 기원을 흥미롭게 풀어놓았다.

“초복에 제사를 재낼 때 개를 읍(邑)의 4문 앞에 걸어놓았다.(祠社책狗邑四門也) 사람을 해치는 열독과 악한 기운을 물리치려고 개를 걸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책(책)’이다. 고대의 형벌 중에 책형(책刑)이 있다. 기둥에 묶어놓고 찔러 죽이는 형벌이다. 끔찍한 십자가형이다. 그러니까 2675년 전 진나라 사람들은 상 문안 4대문에 개를 못박아 걸어두어 열독과 악기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동물애호가들이 보면 천인공고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1960~70년대만 해도 복날에 개를 잡을 때는 개를 매달아놓고 몽둥이도 때려 죽이는 일이 빈발했다. 2600여 년 전의 중국 풍습이 최근까지 이어진 것이 아닐까.


개고기 를 먹는 이유
물론 ‘개고기 애호’의 이유에 몸보신을 빠뜨릴 수는 없다.
“개고기는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고, 오장을 편하게 한다.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한다. 골수를 충족시켜 허리·무릎을 따뜻하게 하고 양도(陽道)를 일으켜 기력을 증진시킨다.”(<동의보감>)

요컨대 정력에 좋다는 뜻이다. 그러니 ‘정력’에 목을 맨 이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온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개고기’, 좋은 말로 ‘보신탕’은 수 천 년을 이어온 ‘음식문화’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동물애호가들의 끊임없는 비난과 야유, 조롱 속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앞의 여러 사례처럼 정도를 벗어난 ‘탐익’의 수준이라면 ‘몬도가네’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몬도가네(Mondo cane)’는 이탈리아어로 ‘개 같은 세상’을 의미한단다. 아! 초복이 다가온다. 불쌍한 견공들이여!

1534년 중종은 이팽수를 ‘승정원 주서(정7품)’로 승진시켰다. 지금이라면 ‘대통령 비서실 주사(6급 주무관)’? <중종실록>을 쓴 사관이 슬쩍 논평한다.


“참봉 시절부터 이팽수는 김안로에게 크고 살찐 개고기 요리를 바쳐 환심을 산 뒤 갑자기 청요직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했다.”
‘가장’은 ‘개고기 요리’를 뜻한다. 참봉(지금의 9급)이었던 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실력가 김안로(1481~1537)의 환심을 사서 출세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 치면 ‘개고기 주사’라는 비아냥을 들은 것이다. 진복창이라는 인물 역시 ‘개고기구이’로 김안로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발탁되지 못했다. 도리어 ‘개고기구이(犬炙)’ 실력이 이팽수만 못해서 매양 김안로에게 핀잔을 들었다(<중종실록>). 다산 정약용은 흑산도 유배 중이던 형(약전)에게 ‘개고기 예찬론’을 편다.

  
“섬 안에 들개가 1000마리도 넘을 텐데 저라면 5일에 한 마리씩 삶아 먹겠습니다. 1년에 52마리의 개를 삶으면….”
1년에 52마리? 다산은 지독한 개고기 마니아였던 것이다. 정조 1년(1777) 7월 ‘정조시해미수사건’이 벌어진다. 반역의 무리들은 ‘개 잡는 집(屠狗家)’에 모여 ‘개장국을 사먹고’ 대궐로 잠입했다. 아니 그래, 쿠데타 세력이 거사를 앞둔 ‘최후의 만찬’으로 ‘개고기’를 선택했다니….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1812년 심상규는 사절단을 이끌고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는 개고기 애호가였다. 마침 연경(베이징)에서 복날을 맞이하자 개고기 요리를 올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줄 정도로 개를 사랑했던 연경 사람들은 그를 ‘짐승’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심상규는 개의치 않고 그릇을 빌려 개고기를 삶았다. 질색한 연경 사람들은 개고기 삶은 그릇을 모두 내다버렸다(<임하필기>). 조선의 외교관을 얼마나 짐승처럼 취급했으면 빌려준 그릇마저 팽개쳤을까. 사실 복날 개고기를 먹는 풍습을 전한 것은 바로 중국인들이었다.


“진 덕공 2년(675), 복일(伏日)에 개를 잡아 열독(熱毒)을 제거했다. 개를 성 안의 4대문에 묶어놓고 찔러 죽였다(책狗邑四門也).”(<사기> ‘진본기’)       
하기야 1970년대까지도 개를 매달아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일이 빈발했다. 2600년 전의 풍습이 지겹도록 이어진 것이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또 초복이 다가온다. 불쌍한 견공들이여!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