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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왕수석' 다산의 근무지 무단 이탈기

잠용(潛蓉) 2019. 12. 20. 19:06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왕수석' 다산의 근무지 무단 이탈기

경향신문ㅣ2012.06.20 09:28 수정 : 2012.06.21 09:56 


 ▲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 /실학박물관 제공

  
1797년 단옷날을 앞둔 초여름 날이었다.
36살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훌쩍 도성을 빠져나갔다. 당시 승정원 좌부승지로 일했던 다산으로서는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다산은 <여유당전서>에 그 전말을 전했다.
“석류가 처음 꽃을 피우고, 보슬비가 깔끔하게 개자 불현듯 초천(苕川)에서 고기잡이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여유당전서> ‘유천진암기’)


초천은 다산의 생가(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앞을 흐르는 실개천이다, 한걸음에 고향으로 달려간 다산은 형제들과 함께 투망으로 고기를 잡았다.
“잡은 물고기가 모두 50여 마리였다. 작은 배가 감당을 못했다.~배를 남자주(濫子洲·두물머리의 작은 섬)에 정박시키고 즐겁게 배불리 먹었다.”


국왕 수석비서관의 근무지 무단이탈

오랜 만의 추억여행에 한껏 들뜬 다산이 ‘낭만파’의 기분을 낸다.

“물고기는 이미 맛을 보았으니, 지금 산나물이 한창 향기로울 때인데 천진암(경기 광주 퇴촌의 암자)에 가서 노는게 어떻습니까.”

“그거 좋지. 맘껏 놀아보세.”


다산 형제들은 천진암에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 씩 지으며(一觴一詠以窮日)’ 지내다 3일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 때 지은 시가 모두 20여 수가 되었다.(<여유당 전서>) 당시의 ‘일탈’은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다산도 그걸 너무도 잘 알았다.
“~법에는 벼슬하는 자는 임금에게 허락을 받고 도성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뵙고 재가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냥 출발했다.”


승정원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이다. 더욱이 좌부승지는 병조의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국방수석’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보고도 없이 근무지를 무단이탈했다? 요즘 같은 언론이 있었다면 ‘국방수석의 무단이탈’로 제목으로 갖가지 해석을 달아 십자포화를 날렸을 것이다. 더욱이 정조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왕수석의 일탈’이라니…. 
정조와 다산은 다산이 22살 때(1783년) 진사과에 합격한 뒤 임금을 알현한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정조는 특별히 “다산에게 얼굴을 들라”면서 다산의 나이를 묻고는 재능을 인정해주었다.



▲ 다산 생가를 가로지르는 초천. 당시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일하던 다산은 초천에서의 고기잡이를 그리며 근무지를 무단이탈했다.


정조가 끔찍히 사랑했던 ‘왕수석’

그 뒤부터 다산을 아끼는 정조의 사랑은 끔찍했다. 24살 때인 1785년 다산은 초시(과거의 1차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본시험에서는 불합격했다. 예비고사 수석을 본고사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하지만 ‘불합격 처리’는 다산을 담금질하려는 정조의 깊은 뜻이었다.

“임금이 다산의 시험답안지를 읽게 하고 무릎을 치며 칭찬하기를 ‘네가 지은 것이 사실은 (과거시험의) 장원에 못지 않다.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암연보>)


정조는 다산의 6촌 처남인 홍인호를 불러 “정 아무개 같은 사람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다산은 모든 시험마다 죄다 수석을 차지했다.

“임금이 춘당대 식당에서 음식을 드시며 식당명(食堂銘)을 짓도록 하자 다산이 수석을 차지했다. 붉은 비점(批點·시문의 잘된 곳을 찍는 점)이 찬란했다. 다음 날 유생들을 성정각으로 불러 비궁당명을 짓도록 했는데 역시 수석이었다. 정조의 격려와 칭찬이 분에 넘칠 지경이었다.”

 


▲ 다산의 열초산수도. 다산이 고향마을 앞을 흐르는 한강(열수)에서 산수를 유람하면서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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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살 때(1789년) 드디어 과거에 급제한 다산은 정조의 끔찍한 사랑으로 승승장구한다.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의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라 한다.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서로 존경하고 믿으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경우를 ‘어수지계(魚水之契)’라 한다. 물고기가 좋은 강물을 만나 활발하게 헤엄칠 수 있는 모습인 것이다.”(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정조와 다산의 관계가 바로 ‘풍운지회’이자 ‘어수지계’라 할 수 있다.
임금은 그런 다산을 지근거리에 놓고 싶어했다. 1년에 3품계씩 뻔질나게 승진시키더니, 승정원(대통령비서실) 동부승지-우부승지에 이어 좌부승지(1796년)에 앉혔다. 다산이 고향의 추억을 잊지 못해 2박3일의 무단 이탈을 감행했을 때의 직책은 좌부승지였다.


‘조선판 매카시즘’

게다가 당시 다산은 혹독한 종교·사상검증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조선판 매카시즘의 선풍이 불어닥친 때였다. 20대 초반인 1784년부터 광암 이벽(1754~1785) 등의 영향을 받아 서학(천주학)의 서적을 보았던 게 화근이었다. 이 때 나름대로 감명을 받았던 이력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반대파들은 천주교를 서학(西學), 즉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면서, 다산과 이가환 등을 사학도로 지목한다.

 


▲ 다산이 고향 소천의 사계절을 읊은 ‘소천사시첩’, /실학박물관 제공


“‘사학’은 세도(世道)에 해를 끼치는 것이 홍수나 맹수와 같습니다.~ 저 이가환과 정약용의 무리들이 몰래 서로 전하였으니 그들이 마음 속으로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정조실록>)
천주교를 삼강오륜을 범한 강상죄(綱常罪)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한 ‘시역죄(弑逆罪·부모와 임금을 시해하는 행위)’으로 보았다. 1791년 홍낙안이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제사를 거부하는) 사학은 아비도, 임금도 없으며 윤리를 무시하고 어지럽힙니다. ~마땅히 대로변에 목을 매달고~역적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정조는 반대파들이 아우성 칠 때마다 다산을 좌천시키지만 곧바로 불러들인다. 정조는 1796년 12월 정적들의 서슬퍼런 눈초리 속에서 다산을 병조참지-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로 승직시켰다. 1797년 5월(음력) 다산이 2박3일 간의 ‘근무지 무단이탈’을 감행했을 때, 살벌한 사상검증의 칼 끝이 다산을 겨누고 있었다. 다산은 이 ‘하수상한 시절’, 복잡한 심중을 훌훌 털고 형제들과 뛰놀던 고향 땅으로 ‘무작정’ 탈출하고 싶었을 게다. 그가 형제들과 천진암으로 놀러 가면서 남긴 시에서 심경의 일단을 밝힌다.


“~흐르는 물에 발 씻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臨流濯足知何意) 조선 천지 많은 먼지를 밟았기 때문일세.(曾踏東華萬斛塵)”(<여유당전서>)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시름 다 잊고 속된 말로 ‘잠수’를 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다산은 다시 꿀맛 같은 ‘일탈’을 감행한 뒤 속세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슬아슬 칼 끝을 걸어야 하는 정치의 세계였다.


다산의 반성문

다산이 속세로 들어온 지 불과 한 달도 안된 1797년 6월. 정조는 다산을 동부승지로 발령냈다. 반대파들의 아우성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다산은 자신을 ‘무조건’ 지지해준 정조 임금에게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는 먼저 어릴 때 서양서적을 보았고, 한동안 서학의 교리에 마음이 이끌린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신은 약관의 초기에~ 소위 서양의 사설(邪說)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모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설은~ 옛날에 보았던 책에는 없던 것이며, 승냥이나 수달도 놀랍게 여길 것입니다.”(<정조실록>)


당시 서학의 ‘폐제지설(廢祭之說)’, 즉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강상의 죄, 시역의 죄와 같이 인륜을 저버리는 대역무도한 범죄행위로 지탄받고 있었다. 다산 역시 그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자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 때마다 서학에 빠진 자신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양심이 회복되자~ 지난 날 좋아했고 사모했던 것들을 돌이켜 보니 허황되고 괴이하지 않는 게 없었습니다. ~하늘의 거스르고 귀신을 업신여겨서 그 죄가 죽어도 용납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 다산이 강진에서 고향 마재의 주변풍경을 술회하며 성화 이중협에게 준 시 ‘여성화시첩’. /실학박물관 제공

그는 “서학에 ‘물들었던 것(染跡)’은 ‘아이들 장난(兒戱)’이었다”면서 ‘그것은 한낱 과거의 일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이제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서학의) 남은 찌꺼기가 없다”고 결백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사의를 표명했다. 반대파들의 집요한 공세에 더는 버틸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위로는 군부(君父)로부터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꾸지람을 당하니~ 입신한 것이 단 한 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와장처럼 깨졌습니다. 더 살아서 무엇을 하겠으며 죽어서는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다산처럼 ‘일탈의 기분을 맛볼까’

그런데 정조는 다산의 ‘사직의 변’에 또 한 번 감동하면서 사직서를 반려했다..

“선(善)의 싹이 봄바람에 만물 싹트듯 하는 구나.(善端之萌) 상소문에 열거한 말들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직하지 마라.”

하지만 반대파의 서슬에 너무 시퍼렇자 정조는 다산을 곡산(황해도)부사로 제수했다. 그를 ‘피신’시켜 준 것이다. 그러면서 다산에게 친필편지를 전달했다.

“(자네를) 등용하려 하는데 웬 잡음이 그렇게 많은 지 모르겠다. 1~2년 늦어도 무방하다. 곧 다시 부를 테니 염려하지 마라.”

그야말로 ‘무한사랑’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혹 다산처럼 단옷날 근무지를 무단으로 이탈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생길 지 모르겠다. 호기롭게 ‘낭만’ 운운하면서…. 그러나 스스로 판단해보라. 다산처럼 윗사람으로부터 무한신뢰를 받을 만큼 능력이 있는가. 아니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다산처럼 오로지 백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아서라.’ 근무지 무단이탈죄로 욕을 바가지로 먹거나, 시말서를 쓰거나, 감봉·감호를 당하거나. 사표를 내야 할 테니…. 또 하나 걱정거리가 있다. 혹 온갖 구설에 오르는 측근들을 끝까지 비호하면서, 남들의 비판에 귀를 막을까봐…. 그러면서 ‘정조도 그러지 않았냐’고 변명할까봐…. 그렇다면 ‘아서라!’ 정조 임금과 다산 정도는 되어야 맺을 수 있는 ‘군신관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므로….


‘조장(助長)’이라는 단어가 있다.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농부가 벼를 빨리 자라게 할 요량으로 손으로 모를 잡아뽑아 늘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 1950년대 말 대약진운동이 한창일 때 ‘실제 상황’이 벌어졌다. 일부 농가에서 논두렁마다 밤새도록 전등을 밝히고, 다른 논에서 자란 벼들을 뽑아 한 논에 죄다 모아놓고 수확량 자랑을 벌였다. 당중앙의 수확할당량에 맞춰 식량 생산량이 급증했음을 과시한 ‘현대판 조장’이었다. 지금의 중국은 어떤가. ‘만리장성’을 ‘사만리장성’으로 ‘조장’하고 있다. 예전엔 그래도 대국의 풍모를 풍겼다. 1957년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사진)의 담화를 보자.


“한족이 다른 민족을 침범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 지방민족주의도 경계해야 하지만, 대한족주의도 반대한다.”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관과 역사왜곡을 우려한 것이다. 1962년부터 북한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고 싶다”고 중국에 요청했다.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원류를 찾겠다는 것이니, 중국 입장에서는 ‘무례’한 요구였다. 하지만 저우 총리는 ‘통큰 결단’을 내린다. ‘조·중 합동 발굴대’의 구성을 허락한 것이다. 1963년 6월28일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난 저우언라이는 더욱 깜짝 놀랄 발언을 남긴다.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는 “랴오허(遼河), 쑹화강(松花江) 유역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고까지 한다.

“… 징보호(鏡泊湖) 부근에 발해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상경용천부)였다. … 조선의 지파였다는 사실이다.”

‘발해=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하는 지금의 중국학계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중국은 진·한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복했는데, 이는 분명한 침략이다.” 

  
랴오허 유역을 중국의 ‘침략 대상’, 즉 고조선·고구려의 땅으로 인식한 것은 두고두고 흥미롭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조상들을 대신해서 사과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을 끔찍이 사랑한 중화주의자였다. “중국인과 공산당원 중 하나만 택하라면 중국인을 택하겠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랬지만 한족 중심의 대국주의만큼은 철저하게 반성하고 바로잡으려 했다. 그것이 저우언라이가 중국을 사랑한 방식이었다.


1797년 이맘때, 단옷날을 앞둔 초여름 날이었다. 승정원 좌부승지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훌쩍 도성을 빠져나갔다.
“석류꽃이 피고, 보슬비가 개자 불현듯 고향 초천(苕川·경기 남양주 조안면 앞을 흐르는 실개천)에서의 고기잡이가 생각났기 때문”(<여유당전서> ‘유천진암기’)이었다. 고향(사진)에서 만난 다산의 사형제는 투망으로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잡은 물고기가 모두 50여마리였다. 작은 배가 감당을 못했다. 배를… 정박시키고 배불리 먹었다.”

오랜만의 추억여행에 들뜬 다산이 ‘낭만파’의 기분을 더 낸다.

“산나물이 한창 향기로울 때인데 천진암에서 노는 게 어떻습니까.”
형제들은 천진암에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 짓다’(一觴一詠以窮日)가 3일 후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다산도 잘 알았다.

“…법에는 벼슬하는 자는 임금에게 허락을 받고 도성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뵙고 재가를 얻을 수 없어 그냥 출발했다.”


승정원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이다. 좌부승지는 ‘병조’의 일을 맡았으니 굳이 말하자면 ‘국방수석’?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보고도 없이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것인다. 게다가 다산은 종교·사상 검증을 받고 있었다. 20대 초반 서학(천주교)의 교리에 한때나마 기울어졌던 게 화근이었다. 반대파들은 다산을 사학(邪學)의 무리로 지목한다. 그들은 천주교를 강상죄(綱常罪·삼강오륜을 저버린 범죄)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시역죄(弑逆罪·부모와 임금을 시해하는 행위)’로 보았다. 가히 ‘조선판 매카시즘의 선풍’이었다. 반대파의 공세가 얼마나 집요했던지 다산도 훗날 “한때 서학에 ‘물들었던 것(染跡)’은 ‘아이들 장난(兒戱)’이었다”고 반성문을 써야 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시절에 근무지를 2박3일이나 무단이탈하다니…. 강심장이 아닐 수 없다.


“…흐르는 물에 발 씻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臨流濯足知何意). 조선 천지 많은 먼지를 밟았기 때문일세(曾踏東華萬斛塵).”(<여유당전서>)

요즘 같았으면 어땠을까. 아마 ‘왕수석의 근무지 무단이탈’은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희대의 사건으로 대서특필됐을 것이다.
“옛날 고려 배신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는….”


1394년(조선 태조 2),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위해 가져온 축문의 내용이 해괴했다. 이인임은 고려말 대표적인 친원파였고, 다름 아닌 이성계가 축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아버지=이인임’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조선은 즉각 명나라에 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이것이 200년 가까이 조선의 속을 까맣게 태우는 외교현안이 될 줄은 몰랐다.


1402년(태종 3), 조선 사신 조온은 명 태조의 유훈인 <황명조훈(皇明條訓)>을 보았다. 경악했다. ‘이방원의 종계(宗系)가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내용이 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이 또 발칵 뒤집혀졌다. 그로부터 110여년이 지난 1518년(중종 13), 조선 사신 이계맹은 명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사진·서울대도서관 제공)을 보고 억장이 무너진다. “이인임·이성계 부자가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 등) 고려왕 4명을 시해하고 나라를 찬탈했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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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왜곡이다. 충효를 내세운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명나라의 의도는 신생국인 조선의 ‘길들이기’였다. 불안했던 요동(遼東)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안전막이었던 것이다. 졸지에 ‘을’이 된 조선은 ‘갑’(명나라)을 상대로 힘겨운 외교전을 벌여야 했다.

명나라는 어지간히 조선의 애간장을 녹였다. 예컨대 ‘종계’의 개정만 허락하고 ‘4왕 시해’는 의도적으로 개정에서 누락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1588년, 조선의 주장을 담은 <대명회전> 개정판의 반포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선조는 “완성된 책을 가져오라”며 사신 유홍을 보냈다. 명나라는 “황제가 아직 책을 보지 않았으므로 줄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유홍은 ‘피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애원’(泣血궤請)해 겨우 책을 받아냈다. 그러나 명나라는 끝내 <대명회전>의 본문은 손대지 않았다. ‘명태조의 유훈’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본문’이 아닌 ‘부록’에 조선의 주장을 상술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200년 가까운 처절한 외교전은 ‘절반의 성과’로 끝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 정도로도 “이제야 금수(禽獸)의 지역이 예의(禮義)의 나라로 변했다”고 기뻐했다. 과연 ‘저자세, 굴욕외교’로 점철된 194년간의 외교전이었다고 돌팔매질을 던져야 할까. 아니 주변국의 집요한 역사왜곡에 속수무책인 작금의 외교와 견주면 그래도 노력은 가상했다 할 수 있을까?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