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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흔적의 역사] 마오쩌둥 아들과 밴플리트 아들

잠용(潛蓉) 2019. 12. 21. 21:57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마오쩌둥 아들과 밴플리트 아들

경향신문ㅣ2012.11.07 11:03 수정 : 2012.11.07 19:54  



▲ 마오쩌둥· 마오안잉 부자의 즐거운 한때. 마오안잉은 두번째 부인이자 혁명동지인 양카이후이와 사이에서 낳은 맏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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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蕭何), 그대의 공이 가장 크다. 공신 가운데서도 으뜸에 놓는다.”
기원전 202년, 유방이 처절한 항우와의 초한전을 승리로 이끌고 천하를 평정했다. 한나라를 창업한 것이다. 그런데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다. 논공행상이었다.


신하들은 서로 “내가 1등 공신”이라며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 싸움은 1년이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고조(유방)가 “소하의 공이 최고”라며 치켜세우며 차후(허난성 잉청현현 서북쪽)로 봉하고 식읍도 가장 많이 주었다. 소하가 누구인가.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동진해서 치열한 진·초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소하는 파촉(巴蜀)에 남아 병참기지를 착실하게 다진 인물이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다른 공신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소하가 1등 공신이 된 까닭은
“신들은 갑옷을 입고 창칼을 들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습니다. 많은 자는 100여 차례에 이르는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후방에서) 붓만 잡고 의론만 했을 뿐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은 소하에게 더 많은 상을 내리시다니요?”

“특히 (평양후로 봉한) 조참(曹參)은 무려 70여 곳이나 상처를 입었음에도 번번이 승리를 거뒀습니다. 마땅히 최고의 위계로 조참을 대우해야 합니다.”


고조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대들은 사냥과 사냥개를 아는가?”
신하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압니다만….”


“사냥에서 짐승이나 토끼를 쫓아가 죽이는 것은 사냥개이다. 그러나 사냥개의 줄을 놓아 짐승이 있는 짐승이 있는 곳을 지시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대들은 단지 짐승을 잡아올 수 있을 뿐이니 공로는 마치 사냥개와 같다. 하지만 소하는 개의 줄을 놓아 목표물을 잡아오게 하였으니 공로는 사냥꾼과 같다.”

소하가 후방에 남아 세금을 거두고 지역을 안정시켰고, 잇단 전투에 결손된 병력을 보충해준 공로를 지칭한 것이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진다.


“그대들은 단지 혼자 혹은 많아야 두 세 명이 나를 따랐지만, 소하는 전 가문의 수십명이 모두 나를 따라 참전했다. 이런 공로를 잊어서는 안된다.”

신하들은 ‘찍’ 소리도 하지 못했다.


마오쩌둥과 마오안잉



▲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 마오안잉은 미군의 소이탄 폭격세례에 전사하고 만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들이니까….”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바로 전 해, 그러니까 1949년 대륙을 통일한 중국 공산당 정권은 고민 끝에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위한 참전을 결정했다.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 호파즉당위(戶破則堂危)’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바깥문이 망가지면 안채가 위태롭기 때문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오쩌둥 주석은 맏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 “나도 참전하겠다”는 지원서를 내자 즉각 허락한다. 마오쩌둥의 네번째 부인인 장칭(江靑) 등 고위층이 뜯어 말렸지만 마오쩌둥의 말은 분명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아들이다. 죽음이 무서워 참전을 피한다면 어느 누가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겠는가.”


안잉은 마오쩌둥의 두번째 부인이자 혁명동지였던 양카이후이(楊開慧) 사이에서 낳은 맏이였다. 마오쩌둥은 일생을 통틀어 네번 결혼했다. 첫번째는 15살의 나이에 부모의 강권에 못이겨 결혼한 뤄(羅)가문의 딸(애정없는 결혼)이었다. 두번째가 바로 양카이후이였으며, 세번째가 허쯔전(賀子貞), 네번째가 그 유명한 4인방의 한사람인 장칭이었다.


그 가운데 양카이후이와의 사랑은 너무도 비극적이었다. 양카이후이의 아버지는 마오쩌둥의 스승인 양창지(楊昌濟)였다. 양창지는 젊은 마오쩌둥이 혁명지도자로 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은 역시 공산당에 입당한 양카후이와 사랑을 나누었으며, 맏아들 안잉과 둘째아들 안칭(岸靑)을 낳는다.

그러나 양카이후이는 1930년 10월 홍군의 창사(長沙)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국민당 군벌인 허젠(河鍵)에게 잡히고 만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과 헤어지겠다는 성명서를 내라”는 허젠 측의 집요한 요구를 완강히 거부한다. “남편의 혁명이 속히 성공하기 바란다”는 말만 남기고…. 결국 어린 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 당하고 만다.


 
▲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제임스(지미)의 실종사실을 보도한 신문기사.


그랬으니 마오쩌둥으로서는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두 아들을 향한 자식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명에 간 혁명동지이자 가장 사랑했던 부인의 자식들이었으니…. 특히 자신을 쏙 빼닮은 맏아들을 향한 사랑은 각별했다. 1937년 소련 유학을 떠난 뒤 국공전쟁이 한창이던 1946년 공산당의 거점이었던 옌안(延安)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들의 옷에서 소련 군장을 다 떼어버리고 오래된 면옷을 입힌 뒤 “일반병사와 똑같은 식사를 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면서 “노동대학에서 공부하라”면서 농촌으로 보냈다.

“넌 시골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함께 노동하라. 황무지를 개간해서 수확을 거두게 되면 돌아오너라. 그러면 옌안대학에 다시 들어가라. 괜찮지?”


안잉은 시골에서 노새를 끌고 인분 주기, 쟁기 갈기, 당파기, 파종하기 등 농삿일을 죄다 배웠다. 그 해 하반기 농사일을 다 끝내고 옌안에 돌아온 안잉을 본 마오 주석은 웃음을 참지못했다. 수건을 머리에 쓰고, 땀이 밴 회색빛 농민복에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팔과 새까많게 탄 얼굴 등 영락없는 산시성(陝西省) 촌농부가 된 아들이 기특했기 때문이었다. 피망울로 굳어진 손을 꼭 잡으며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장하다! 흰 뚱보가 검은 뚱보가 됐구나! 이것이 바로 노동대학을 졸업했다는 졸업증이다.”


중국군 총사령부에 떨어진 소이탄 세례

그로부터 불과 4년 뒤 그런 아들을 또다시 전쟁터(한국전쟁)로 내보낸 것이었다. 당시 안잉은 베이징 기계 총공장의 총지부 부서기를 맡고 있었다. 게다가 결혼한지 1년 밖에 안된 신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펑더화이(彭德懷) 지원군(중국군)사령관에 인계하면서 “전쟁에 직접 참전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부탁했다. 안잉도 보병지휘관으로 직접 전선에서 싸우겠다며 보병지휘관의 직함을 원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안잉을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배속시켰다. 기밀담당문서를 주석의 아들을 차마 전선에 내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1952년 3월19일, 아들 지미가 밴플리트 장군의 60회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러나 외려 그것이 화를 부를 줄이야.

마오안잉의 마지막날을 다루는 저작물마다 다소간 차이가 있다. 이 가운데 당시 현장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훙쉐즈(洪學智) 지원군 부사령관의 회고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보자.

1950년 11월24일부터 중국 지원군(중공군) 총사령부 상공에 미군 전투기 4대가 정찰비행을 하고 돌아갔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경험상 곧 대규모 공습이 있다는 얘기였다.


다음 날 새벽, 덩화(登華)·훙쉐즈(洪學智)부사령관 등 고위참모가 나서 펑더화이 사령관을 방공호로 피신시키는 등 미군의 대대적인 공습에 대비했다. 이 때 마오안잉도 방공호로 피신했다. 훙쉐즈는 이 대목에서 “왜 안잉이 나중에 사령관 숙소로 다시 돌아갔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회고했다. 사령관 숙소엔 마오안잉과 가오루이신(高瑞欣), 청푸(成普) 등 일부 참모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마오쩌둥 주석의 딸인 리민(李敏)은 이 대목에서 마치 현장을 본듯이 기술한다.

“큰 오빠(마오안잉)는 사령관 숙소에서 급한 전보를 받고 사인하고 있었다.~오빠는 전보를 등기하고 발송했다. 오빠는 담배를 피우지 못했기 때문에 탄약상자에서 큰 사과 하나를 꺼내 먹었다.”


오전 11시 쯤, 미군기 10여 대가 날아와 곧장 팽사령관 숙소 위로 달려들어 100여 발의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휘발유를 응고시켜 만든 폭탄이었다. 소이탄 세례였다. 청푸 만이 잽싸게 뛰쳐나왔다.

다들 방공호 입구에서 800도가 넘는 불바다를 지켜보며 바란 동동 구를 뿐이었다. 공습이 끝난 뒤 잿더미가 된 현장에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시신 2구가 수습됐다. 마오쩌둥 주석의 사랑하는 맏아들 마오안잉과 가오루이신의 시신이었다.


 

▲ 밴플리트 장군(왼쪽) 등 미군수뇌부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작전회의를 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미군 현역 장성(將星)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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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니까…”

펑더화이는 이 비극적인 사실을 “마오 주석과 당중앙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당중앙은 저우안라이(周恩來) 총리의 허락을 얻어 그 비극적인 전보를 마오 주석에게 전달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전황을 보고하러 베이징엔 온 펑더화이는 마오 주석에게 용서를 구했다.

“안잉을 보호하지 못한 것은 제 탓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나 마오주석은 이 때 처음 아들의 죽음을 안 것이다. 한참동안 묵묵히 담배만 피우던 마오주석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혁명전쟁은 언제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오.~안잉도 희생된 수많은 혁명열사 중 한사람이며, 보통 전사자들 중 한사람일 뿐입니다. 내 아들이기 때문에 큰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오쩌둥의 마지막 경호실장인 리인차오(李銀橋)의 회고에 따르면 마오주석이 맏아들의 전사소식을 듣자 큰 충격에 빠졌다.

“무표정하게 눈을 껍뻑껍뻑하더니 시선을 테이블 위의 담배케이스로 옮겼다. 담배를 집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마오쩌둥의 눈가는 어느 덧 물기가 촉촉해졌다.”


두번째 담배를 피우고 난 마오쩌둥은 가슴이 터지도록 큰 한숨을 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놈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니까….”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마오주석은 딱 잘라 말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입니다.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십시요.”

그리고는 이렇게 공식발표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희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보통사람들 중에도 자기 자식이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가 아주 많습니다.”

아버지를 빼닮아 총명하고 재기발랄했던 28살 청년은 이렇게 이국의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쳤다. 신중국을 건설한 주석의 맏아들인데도….


밴플리트 아들 지미의 실종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일 줄로 압니다.”

1952년 4월4일 오전 10시30분이었다. 제임스 에베레스트 제5공군 사령관(1892~1992)이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을 찾았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알려주기를….

“지미(밴플리트의 아들)가 새벽 야간임무수행을 나갔는데, 아직 귀환하지 않았다는군요.”

미귀환이라? 그렇다면 실종이라는 얘기인가?


자초지종은 이랬다. 4월4일 새벽 1시5분, 미 공군 중위인 지미는 승무원인 존 맥칼리스터 중위, 랄프 펠프스 일병 등과 함께 출격했다. 암호명은 ‘핀테일 26’. B-26 폭격기로 압록강 남쪽 50마일 지점에 있는 순천을 ‘정찰폭격’하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군의 주보급로를 분쇄하는 이른바 ‘교살작전’, 즉 ‘적의 목을 졸라 숨통을 끊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한마디로 융단폭격으로 철도와 도로를 철저히 파괴하는 작전이었다. 지미의 출격은 4번째였지만 적지 영공에 단독으로 투입되는 비행임무로는 처음이었다.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출격한 지미는 새벽 3시 쯤 김포공항에 있는 레이더 통제를 확인했고, “주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며 ‘대체표적’을 요청했다. 하지만 지미는 그에게 제시된 대체표적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 표적에 도달하기 전에 연료가 바닥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25분 뒤 또 다른 대체표적을 부여받아 다른 관제 레이더의 인도에 따라 표적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의 비행기는 기지로 귀환하지 않았다. 제5공군은 서울 북쪽 한반도 회랑지대를 중심으로 수색작전을 펼쳤다. 지미의 항공기는 아마도 평양 남쪽 상공을 비행하다 해주 섬이나 서울 북서쪽 연안에 추락한 것으로 판단됐다, 아버지는 레이더 계기판에서 항공기 추락으로 추정되는 징조를 포착하자 몹시 초조한 모습으로 그 결과를 기다렸다. 하지만 항공기 잔해나 폭발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무런 성과없이 날이 저물자 밴 플리트는 부인 헬린 등 본토의 가족에게 보내는 통지문을 준비했다.

“나는 전투중 실종된 지미가 곧 발견되어 안전하게 우리 곁으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소. ~서울 북서쪽 진남포와 해주 사이에서 추락한 것으로 판단되오. 이런 상황에서 구출된 경우가 많소. ~공군은 수색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소. ~부디 당신도 의연하게 버텨주기 바라오.”


“모든 부모의 심정이 다 그렇습니다”

지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참모들이 “수색작전을 펴서 시신을 찾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밴플리트는 “다른 작전이 내 아들을 찾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집무실 벽에 걸린 한반도 지도에서 서울 북서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일이 많았다. 300통이 넘는 위로편지가 사령부에 쇄도했다. 밴 플리트는 이 가운데 200여통의 편지에 손수 답장을 보냈다. 가망이 사라지자 밴 플리트는 부활절을 기해 한국전에서 실종된 모든 부모들에게 위로전문을 보낸다.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와 같이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공군 보다는 육군 보병이 되기를 바랐다. 밴 플리트는 <성조지>에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지미가 보병들과 함께 성장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미가 육군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하늘을 동경한다.”

여느 젊은이들처럼 창공을 나는 꿈을 이룬 지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참전을 자원했다. 아버지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지미는 참전명령을 받자 어머니 헬렌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님은 모든 사람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읍니다.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됐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대신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가 있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보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전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나라면…"
1952년 3월19일 지미는 아버지의 60세 생신을 축하하려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울 북쪽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이따끔 사냥을 함께 했던 아마도 이곳은 지금의 일산과 파주 사이의 한강하구 갯벌이었을 것이다. 사냥을 특히 좋아했던 부자….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초원을 함께 누빈 부자의 마지막 나들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4월2일, 밴 플래트 장군은 아들과 전화통화를 했다.

“아버지, 제가 북한 지역으로 출격할 겁니다.”


그것이 부자간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비단 밴 플리트 뿐이 아니었다. 그 밖의 많은 지도층 자식들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모두 합해 미군 현역 장성(將星)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이 가운데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2차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 존 소령은 미3사단 대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아들 샘 대위는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유엔군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의 아들 빌 대위는 미9군단장 무어 장군의 부관이었다. 그러나 일선 소총 중대장으로 자원하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부상을 입고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하지만 빌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끝내 사망하고 만다. 미 해병 제1항공 사단장인 해리스 소장의 아들인 해리스 해병 소령도 장진호 철수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거울을 나에게 비춰본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한번 스스로의 가슴에 거울을 비춰보기 바란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까?

마오쩌둥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그 놈은 마오쩌둥내 자식이나까.”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소하(蕭何), 그대의 공이 가장 크다.”


기원전 202년, 초·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한 고조(유방)는 논공행상의 최고 공신으로 소하를 꼽았다. 소하는 직접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후방에서 병참을 관리한 인물이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이 아우성쳤다. 하지만 고조가 그들의 입을 막았다.
“소하는 전 일가를 통틀어 수십명이 전쟁에 참전했다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맏이인 마오안잉(毛岸英


1950년, 중국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맏이인 마오안잉(毛岸英·사진)이 자원입대했다. 새어머니인 장칭(江靑) 등이 만류하자 마오쩌둥이 일축했다.

“마오의 아들이 죽음을 무서워한다면 어느 누가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겠는가?”


마오안잉은 두번째 부인인 양카이후이(楊開慧)가 낳은 아들이었다. 양카이후이는 1930년 국민당 군벌에게 붙잡혀 총살당한다. “남편을 배반하라”는 집요한 설득을 뿌리치고…. 그런 양카이후이가 낳은 자식이었으니 얼마나 끔찍이 여겼을까. 1950년 11월25일 아침, 중국군 총사령부 막사에 소이탄 100여발이 떨어진다. 마오안잉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뒤늦게 아들의 전사소식을 들은 마오 주석은 줄담배를 피우다 한마디 던졌다. “그 놈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니까….”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마오 주석은 딱 잘라 말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이니,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라”고. 그러면서….

“자기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는 아주 많습니다.”

1952년 4월4일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의 아들(지미 중위)이 B-26 전폭기를 몰고 출격했다가 실종된다. 지미 역시 한국전 참전을 자원한 보라매였다. 밴플리트는 말했다.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일 겁니다.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한국전엔 미군 현역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했고, 그 가운데 35명이 죽거나 다쳤다.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의 아들 빌 대위는 일선 소총중대장을 자원,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3차례나 부상을 입었다. 그는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해리스 해병 제1항공사단장의 아들인 해리스 소령도 장진호 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그러고보면 지도자 노릇 하기도, 지도자의 자식 노릇을 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 그럴 깜냥이 안되면 처음부터 포기하든지….



<참고자료>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중국군의 한국전쟁사>, 오규열·박동구 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국가보훈처, <6.25 전쟁 미군참전사>, 2005
폴 F 브래임, <위대한 장군 밴 프리트>, 육군교육사령부 번역실, 2001
국방부 전사편찬연구회, <중공군의 한국전쟁>, 1989
서상문, <모택동과 6.25전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6
국방군사연구소, <유엔군 지원사>, 1999
김강녕,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국가안보>, ‘군사연구’ 122집, 2006
이기환, <분단의 섬 민통선>, 책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