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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복지

[택배 기사] "장갑 못끼고 난방기도 못켠다"

잠용(潛蓉) 2019. 12. 23. 20:30

"'공짜'로 하는 택배분류, 장갑 못끼고 난방기도 못켠다"
경향신문ㅣ조문희 기자 입력 2019.12.23. 15:08 댓글 323개



▲ 공공운수노조와 라이더유니온이 구성한 ‘택배 배달노동자 캠페인사업단 희망더하기’ 소속 택배노동자들이 23일 오전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혹한기 택배노동자의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조문희 기자



▲ 택배노동자 양영호씨(42)가 23일 오전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혹한기 노동으로 노랗게 변색된 손톱을 보이고 있다. /조문희 기자


[경향신문] 7년차 택배노동자 양영호씨(42)는 하루 5~7시간을 ‘까대기’하는 데 쓴다. 까대기란 화물차가 가져온 택배 물품을 배송구역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일컫는 업계 은어다. 화물차가 들어오는 터미널 야외에서 이뤄진다. 날이 추워졌지만 난방기는 켜지 못한다. 회사는 ‘전력이 달린다’, ‘화재 위험이 있다’는 이유를 댔다. 장갑을 낄 수도 없다. 이론적으론 상자에 붙은 운송장을 스캔하면 구역 분류가 이뤄지지만 현실에선 스캐너가 먹히지 않아 스마트폰에 손으로 타이핑할 때가 많다. 착불인지 선불인지도 확인해야 한다. 양씨의 손톱은 3분의 1 이상 노랗게 변색됐다. 그는 “까대기가 물건 옮기는 일보다 더 힘들다”고 했다.


일일 노동시간인 12~15시간 중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지만 까대기에는 따로 돈이 주어지지 않는다. 회사는 까대기 비용이 건당 700~800원인 택배·운송 수수료에 포함돼 있다고 말한다. 까대기를 빨리 끝내야 돈벌이를 시작하는데 터미널 공간이 좁아 차는 한대씩 밖에 못들어 온다. 함께 까대기하는 동료가 화장실이라도 가면 이따금 그가 미워진다. 언성을 높이며 싸울 때도 많다. 하루 배송 건수는 평균 100건. 일일 수입 7~8만원 중 1~2만원은 기름값과 테이프·운송장 구입 등에 쓴다. 남은 돈으로 양씨는 초등학교 5학년, 1학년, 5살인 슬하의 남매를 기른다.


양씨처럼 추운 겨울 어렵게 일하고도 제 몫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23일 서울 중구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공운수노조와 라이더유니온이 구성한 ‘택배 배달노동자 캠페인사업단 희망더하기’(희망더하기)는 “택배 물량이 쏟아지는 연말연시, 영하의 날씨와 미세먼지가 반복돼도 난로나 먼지 대책을 기대조차 할 수 없다”면서 “혹한기 야외노동과 분류작업에 대해 택배사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화물운송시장정보센터 통계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택배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4.1시간을 분류작업 및 기타 업무에 썼다. 희망더하기가 올해 전국 일반택배업체 소속 택배 노동자를 대상으로 자체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4.8%가 하루 5~6시간 분류노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노동자는 분류노동 중 개인이 구비한 장갑과 핫팩에 의존했다. 개인 돈으로 난방기를 사도 작업장 전력 공급 문제 등을 이유로 제대로 켜지 못했다.


시간을 들여 고생하지만 분류작업은 택배노동자의 수입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택배노동자들은 대부분 자영업자로 분류돼 일하는 시간과 상관없이 배달 건당 수수료를 받는다. 수수료로 벌어들인 돈에서 화물차 기름값은 물론, 택배사 로고가 찍힌 송장, 박스테이프, 택배사 유니폼, 차에 하는 택배사 로고 도색 비용을 부담한다. 희망더하기 측은 “택배사들은 택배노동자가 근로계약을 맺은 근로자가 아니라 운송위탁계약을 맺은 사업자일 뿐이라며 노동자에 대한 책임을 줄곧 부정해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근로계약 관계 여부는 계약의 형식이 아니라 그 실질을 봐야 한다”며 “타인을 이용해 사업을 하고, 그를 통해 이익을 얻는다면 사용자는 그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택배사가 운영하는 물류터미널에서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노동자와의 계약관계를 떠나 택배사의 당연한 책임”이라며 “물류 터미널에도 최소한의 안전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