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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芬皇寺] 善德女王의 숨결이 느껴지는 신라 천년의 고찰

잠용(潛蓉) 2020. 1. 28. 21:03

[삼국유사 발자취를 따라서] 경주 분황사 (1)

善德女王의 숨결이 느껴지는 新羅 千年의 古刹
오마이뉴스ㅣ한정환 입력 2020.01.28. 13:57 댓글 104개

  
[오마이뉴스 한정환 기자] 경주의 동북쪽. 신라 천 년의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고찰이 하나 있다. 바로 분황사다. 분황사는 경주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다. 지금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겉보기엔 조그마한 사찰로 보인다. 그러나 경주 분황사는 신라시대 최고의 사찰로 명성을 날린 황룡사와 견줄 정도로 유명했던 사찰이다. 분황사 하면 선덕여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분황사는 선덕여왕 즉위 3년(63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그리고 신라의 승려 자장과 원효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분황사는 창건 후 현재까지 몸이 불편하고 아픈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절로도 유명하다.   


▲  선덕여왕이 창건한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  ⓒ 한정환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과 씨앗

신라 최초의 여왕의 자리에 오른 선덕여왕. 여왕으로 즉위(632년)해 16년 동안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린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다. 선덕여왕은 재임하는 동안 예지력이 뛰어난 여왕으로 후세에 전해진다.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이 기록돼 있다. 그중 하나가 분황사와 관련한 모란꽃 이야기이다. 당 태종이 선덕여왕 앞으로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꽃씨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이 보낸 그림의 꽃을 보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왕의 말이 무슨 뜻을 내포하는지 모르는 신하들이 의아해하며 여왕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왕은 신하들에게 함께 보내온 꽃씨를 바로 앞 뜰에 심도록 한다. 꽃씨를 심은 후 신하들이 그 꽃이 피고 지는 동안 여러 번 꽃의 냄새를 맡아보니 꽃에 향기가 없다. 과연 여왕이 처음 했던 그 말과 같았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도 나비가 없었으므로 그 꽃이 향기가 없었음을 알았다, 이는 당 황제가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빗댄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여왕의 깊은 뜻과 예지력을 알고 모두 뛰어난 지혜에 감복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보다 136년 뒤에 쓰인 게 <삼국유사>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모란꽃 설화를 새로 썼다. 내용은 같으나 <삼국유사>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로 시기가 바뀌어 있었다. 신라불교를 진흥시키고, 불력으로 외침을 막으려고 했던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은 분황사를 향기로울 분(芬)에, 임금 황(皇)을 넣어 향기가 나는 임금의 절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향기로운 여왕 선덕여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분황사. 해마다 분황사 앞에는 유채꽃, 메밀꽃 등 계절별로 아름다운 꽃을 심어 선덕여왕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  경주 분황사 보광전 모습  ⓒ 한정환

 
분황사의 천수대비가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다

<삼국유사> 탑상 편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경덕왕 때 한기리에 희명(希明)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살고 있었다. 여인의 아이는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시각장애인이 됐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를 찾았다. 분황사 왼쪽 전각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앞으로 갔다. 거기서 아이에게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 꿇고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축원의 말씀 올리나이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셨으니

하나를 내놓아 하나를 덜기를

눈이 둘 다 없는 저에게
하나만 주어 고쳐 주시옵소서,

아아, 저에게 끼쳐 주시면

그 자비심 얼마나 크시나이까." 
 
여기서 한번 아이의 어머니 희명이라는 이름을 풀이해 보자. 바랄 희(希)에, 밝을 명(明)은 자식이 시각장애인이 되자 더 함축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눈을 밝게 해주소서'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희명이라는 이름은 자식이 눈이 먼 아이가 될 걸 알고, 예지력이 풍부한 사람이 지어준 이름 같다. 눈먼 자식이 눈을 뜨자 희명은 분황사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며 기렸다고 한다. 
  
"대나무 말 타고 파피리 불며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 아침에 푸른 두 눈이 멀었네.
보살님이 자비로운 눈을 돌려주지 않았으면

헛되이 버들꽃을 보냄이 몇 번의 봄제사나 될까."


▲  경주 분황사 입구에 세워진 원효성지 분황사 비석 모습  ⓒ 한정환

   
원효는 얽매이지 않는다

원효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스승 없이 혼자 공부를 했다. 원효는 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던 불교를 인간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대중불교로 방향을 전환시킨 대중불교의 선각자다. 원효는 저잣거리로 내려가 <화엄경>을 설파하고 백성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을 하나하나 실현해 나갔다. <삼국유사> 의해편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법을 중히 여기고 숭상하던 대사가 어느 날 이상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 무열왕이 이 말을 듣고는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막대할 것이다"라고 말했단다.

하루는 왕이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불러오게 했다. 궁리는 원효를 찾던 중 남산에서 문천교로 내려오는 원효를 만난다.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하는 수 없이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머물다 가게 했다. 이때 원효대사가 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세속 인연을 맺어서 태어난 아이가 설총이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특하며 민첩했다. 경서와 역사 책에도 널리 통달하여 신라의 10 현(賢)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부터 속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와 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品疏)를 지었다. 원효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찰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소상을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며 예를 표했다. 설총이 매번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고개를 돌리며 계속 돌아보았다고 전해진다. 이 소상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 말까지 분황사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일찍이 원효가 거주하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설총은 다음과 같이 찬양하며 기린다.

"각승(角乘)은 처음 삼매경(三昧經)의 축을 열었고/표주박 들고 춤추는 것은 마침내 온 거리의 풍습이 되었네/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이 깊더니/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그림자 비었다."(각승(角乘) ; 삼매경을 풀이한 법사를 말함) 


▲  분황사 바로 앞에 있는 경주 황룡사지 모습. ⓒ 한정환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주차료 : 무료
입장료 : 어른 1,3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800원


* 참고문헌
□ 삼국유사 <최광식·박대재 옮김>
□ 상처 입은 봉황 선덕여왕 <김용희>
□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고운기>
□ 삼국유사 <김원중 옮김>


[오마이뉴스 한정환 기자]



[삼국유사 발자취를 따라서] 경주 분황사 (2)
石塔 破壞할 땐 언제고, 다시 쌓는 건 무슨 이유?

오마이뉴스ㅣ20.01.28 13:59l최종 업데이트 20.01.28 13:59l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고찰이다. 분황사는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사찰은 불타 없어지고 일부는 유실되었다. 현재는 조선시대에 지은 지금의 보광전만 남아 있을 뿐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현재 경내에는 분황사 모전석탑, 화쟁국사비부, 석정이란 우물만 남아있다. 1991년 분황사 터를 발굴한 결과, 고구려 사찰과 같이 품자형 금당 배치를 하고 있었다. 분황사가 한창 번창할 당시 왼쪽 전각 북편에 영험이 있는 천수대비 그림과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기단 위에 서있는 사자상 모습(서쪽편은 사자상, 동쪽 편은 물개상) ⓒ 한정환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은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선시대 분황사 스님이 수리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대로 방치하던 중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다시 일본인 기술자들에 의해 해체 수리되었다. 타국의 문화재이지만 그때 당시에도 국보급 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리에 참여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안산암을 벽돌처럼 깎아서 차곡차곡 쌓아 만든 모전석탑은 높이가 9.3m이다. 국보 제30호로 관리되고 있다. 현재는 3층만 남아있다. 일부 학자와 학계에서는 9층으로 추측하고 있다. 7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히 몇 층인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궁금증만 더한다.


모전석탑 기단 네 모서리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네 마리의 사자상이 앉아있다. 공식적으로는 네 마리 모두 사자상으로 표기하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동물은 누가 보아도 사자가 맞다. 그러나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는 자세히 살펴보면 물개 형상이다. 동해 쪽으로 쳐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선덕여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자는 수호의 기능과 함께, 부처님의 계율을 상징한다. 현재 탑신부 1층 네 면에 감실이 있는데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는 인왕상은 한쪽은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이고, 또 다른 한쪽은 입을 다물고 있다. 현존하는 인왕상 중 가장 이른 것이다. 최고 절정의 인왕상은 석굴암 내부의 인왕상이다. 모전석탑의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다.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 장식이 놓여 있다.


▲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및 사리장엄구 모습.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한정환

 
1915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 은제 가위 등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이라 여성들이 주로 많이 사용하는 물품들이 발견되었다. 모전석탑 안에는 큰 돌과 모래자갈로 가득 채워져 있다. 강력한 지진에도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래와 자갈 등을 채워 놓은 것이다. 몇 해 전 경주 지진 때 첨성대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분황사 석탑은 신라 시대의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다. 분황사 한편에는 벽돌 같은 돌들이 많이 쌓여 있는데, 이 돌은 석탑을 쌓았을 때 사용된 돌들이다.


▲  경주 분황사 보광전 뒤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손과 얼굴이 함몰된 불상 모습 ⓒ 한정환

  
분황사약사여래입상 (芬皇寺藥師如來立像)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신라 35대 경덕왕 때 주조한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조선시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입상이 조선 영조 50년(1774년)에 제작된 것만은 여기서 알 수 있다.


▲  경주 분황사 石井 모습 ⓒ 한정환

  
분황사 석정 (芬皇寺 石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분황사 사찰 내에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팠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만들어 놓은 모습이다.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경주에는 이런 형태의 석정이 3곳 있다. 분황사 석정과 재매정에 있는 김유신 생가터 우물 그리고 경주향교 우물이다. 이 중에서 분황사 석정은 우물과 관련하여 사연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은 삼국유사 원성왕 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년)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주문을 외워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 버린다.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분황사 석정은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찰 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14년 분황사 뒤뜰의 우물 속에서 목이 잘려나간 석불 여럿이 발견되어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뒤뜰(관련기사 : http://omn.kr/s5we)에 진열되어 있다.


▲  경주 분황사 경내에 있는 화쟁국사 비부 모습 ⓒ 한정환

 
분황사화쟁국사비부 (芬皇寺和諍國師碑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고려 시대에 세워진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다. 고려 숙종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원효대사에 대한 비석이나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다. 이에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 쓰여진 김정희의 친필이 어렴풋이 보인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을 파 놓았다.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이라도 보호 덮게를 세워 그나마 조금 보이는 글자만이라도 보호해야겠다. 이대로 방치하면 나중에는 받침돌이 퇴적을 거듭하여 완전히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때는 한낱 바위돌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될까 두렵다. [오마이뉴스 한정환 기자]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주차료 : 무료
입장료 : 어른 1,300원, 청소년 및 군인 1,000원, 어린이 800원


* 참고자료
□ 경주 문화재 길잡이 <경주시>
□ 문화재 정보 <문화재청>



(배경음악: 찬불가 ‘성불’ - 정수년 해금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