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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조작된 영웅들] 오인사격 계엄군을 ‘시민에 의해 전사’ 조작

잠용(潛蓉) 2020. 5. 26. 12:00

[5·18 40주년 조작된 영웅]

(1) [단독] 오인사격 사망 5·18계엄군 ‘시민에 의해 전사’로 조작

경향신문ㅣ2020.05.11 06:00 수정 : 2020.05.12 21:49

 

‘전사자’ 된 계엄군 사망자>

 

묘비는 말없이 서있고… 1980년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다 사망해 서울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힌 한 계엄군 묘비에 ‘1980년 5월24일 광주에서 전사’라고 적혀 있다. 이 계엄군은 부대 간 ‘오인사격’으로 숨졌는데도 군 당국은 ‘폭도들과 교전 중 사망’으로 사망확인조서를 조작하고 ‘전사’ 판정을 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됐다 군부대 간 오인사격으로 사망한 계엄군들의 사망 원인이 군 당국에 의해 “광주시민들에 의한 전사”로 조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계엄군들은 훈장을 받고 국가유공자로 등록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경향신문이 10일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작전 중 사망한 계엄군의 ‘사망확인조서’를 확인한 결과 ‘오인사격’이란 명백한 군 기록이 있는 계엄군 10명의 사망 경위가 조작된 것으로 파악됐다. 5·18 직후 계엄군이 작성한 군 사망자 명단을 보면 당시 숨진 계엄군은 모두 23명이다. 계엄군 상황일지에 따르면 5월24일 광주에서는 오전과 오후 2차례나 계엄군 간 교전이 벌어져 군인 13명이 숨졌다. 이날 오전에는 31사단과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기갑학교가 광주인터체인지에서 서로를 시민군으로 오인해 교전을 벌이다 31사단 소속 군인 3명이 사망했다. 오후에는 송암동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던 공수여단과 매복 중이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 사이에 오인사격으로 10명이 숨졌다. 군 측이 조작한 것은 이들 10명의 사망확인조서다.


"당시 ‘사망확인조서’ 10명 확인
“지휘 체계 숨기려 사인 감춘 듯”


군인이 사망하면 해당 부대 군 사법경찰관(헌병대)의 사망 경위 조사와 부대장 확인을 거쳐 사망확인조서가 작성된다. 송암동 사망자 10명은 사망확인조서에 사망 원인이 사실과 다르게 ‘전사’로 기록됐다. 군은 이들이 ‘광주시민과 교전 중 전사’한 것으로 꾸몄다. 11공수 소속 부사관의 경우 “5월24일 오후 1시30분경 인적불상 폭도들에 의해 전사한 사실임”이라고 기록됐다. ‘사망 구분에 대한 소견’은 ‘전사’라고 적었다.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는 1980년 6월 이들에게 수여된 훈장과 국가유공자 등록의 근거로 사용됐다. 경향신문이 오인사격으로 숨진 11공수 부사관의 훈장 공적조서를 확인한 결과 ‘5월24일 폭도의 흉탄에 순직’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인헌 무공훈장을 받았고 1계급 특진했다.


계엄군이 국가유공자로 등록되는 데에도 사망확인조서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군사원호보상법 시행령에는 원호대상자(현 국가유공자)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전공사확인증 또는 전공상확인증’을 제출하도록 규정했다. 이들은 모두 ‘전사자’로 등록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5·18 연구자인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의 과격성을 부각시키고, 공수부대가 전교사의 지휘체계를 벗어나 있었다는 점을 감추기 위해 사망확인조서를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계엄군 사망 경위에 대한 재조사를 하면 당시 공수부대의 지휘체계를 확인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계엄군, 책임회피 위해 조작…

국가유공자 등록도 고려한 듯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진압작전에 참여한 계엄군은 2만317명에 이른다. 7공수, 11공수, 3공수 등 모두 3405명의 국군 최정예 전투부대가 차례로 투입됐고 20사단 4946명도 증원됐다. 광주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와 31사단 병력 1만1966명도 동원됐다. 사망한 광주시민은 356명이나 된다. 165명이 항쟁 기간에 사망했고 113명은 당시 입은 부상과 고문 후유증 등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다 결국 숨졌다. 78명에 이르는 행방불명자는 40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모두 사망한 것으로 봐야 한다.


5·18 직후 계엄군이 작성한 ‘군 사망자 명단’에 따르면 광주에 투입됐다 숨진 계엄군은 모두 23명이다. 계엄군은 사망자별로 ‘사망확인조서’를 발급했다. 이 조서는 사망 경위를 군 사법경찰관(헌병대)이 조사해 기록한 첫 공식 문건이다. 문건에는 조사를 진행한 헌병대 책임자의 계급과 성명, 사망자 소속 부대장의 계급과 성명·서명이 들어간다. 계엄군은 “오인사격으로 사망했다”는 명백한 군 기록이 있는 10명의 계엄군 사망자의 조서를 ‘폭도(광주시민)들과 교전 중 사망’으로 조작해 ‘전사’로 분류했다. 군의 사망확인조서는 민간에서 발생한 ‘사망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경찰 조서와 기본적으로 성격이 같다.


5월24일 오인사격 계엄군 13명 사망


계엄군 사망 원인 1위 ‘오인사격’
23명 중 13명… 모두 24일 발생

5·18 당시 계엄군 사망자는 공수부대에 집중됐다. 11공수에서 11명이 숨져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7공수 3명, 3공수 1명 등 15명의 공수부대원이 숨졌다. 20사단은 2명, 전교사 1명, 31사단 3명, 9전차 부대도 1명이 사망했다. 사망 원인별로 보면, 13명이 계엄군 간 오인사격으로 숨졌다.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무장을 시작한 시민들과 교전을 벌이다 사망한 계엄군은 도청 진압작전을 포함해 5명이었다. 2명은 차량사고, 1명은 오발사고, 2명은 사망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오인사격으로 인한 군 사망자 13명은 모두 5월24일 발생했다. 그날 오전 31사단과 전교사 기갑학교는 광주인터체인지에서 서로를 시민군으로 오인해 교전을 벌였고 31사단 소속 군인 3명이 숨졌다.


공수부대도 오인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계엄군은 이날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있던 3개의 공수부대를 모두 광주비행장에 집결하도록 했다. 공수부대는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광주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를 외부와 고립시켰다. 봉쇄작전은 20사단이 넘겨받았다. 비행장에 모인 공수부대는 특공조를 조직해 5월27일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11공수 1200여명은 그날 오후 1시30분쯤 장갑차와 수송차량 45대에 나눠 타고 광주비행장으로 철수하던 중 송암동 부근에서 매복 중이던 전교사 소속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병력과 교전을 벌였다. 11공수 이동 행렬을 ‘시민군’으로 판단한 보병학교 교도대는 대전차 화기 등을 동원, 기습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11공수 8명과 지원을 나간 7공수 1명, 전교사 1명 등 계엄군 10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2007년 국방부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이었던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는 전교사에 배속됐지만 제대로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5월24일에만 두 차례의 오인사격이 발생했다”면서 “부대 간 소통이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10명 첫 사망확인조서 무더기 조작


10명 사망자 몰린 11공수부대
매복했던 교도대 기습에 타격
“지휘통제 제대로 안 이루어져”


‘송암동 오인사격’으로 숨진 군인들의 사망 원인은 무더기로 조작됐다. 당시 계엄군의 각종 문건에는 ‘광주 송암동에서 계엄군 간 오인사격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군사령부 상황일지 5월24일자에는 “14시5분 계엄군 오인 총격사고”라며 사고 상황이 적혀 있다. 전교사 전투상보에도 “14시15분 11공수 병력 비행장으로 철수 중 봉쇄 부대인 보교와 충돌사고”라고 기록됐다. 계엄사령부 계엄상황일지에도 비교적 당시 상황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오인사격의 당사자였던 11공수도 전투상보에 당시 상황을 기록해뒀다.


하지만 송암동에서 숨진 계엄군 10명의 사망 경위를 처음 기록한 사망확인조서에는 모두 “인적 불상의 폭도들에 의한 전사”로 기록했다. 11공수 박모 상사의 사망확인조서에는 “전남 광주 무장폭도 소요사태 진압차 계엄군으로 출동되어 5월24일 13시30분경 인적 불상 폭도들에 의해 전사한 사실임”이라고 적혀 있다. 이 사망 경위는 특전사 헌병대 김모 대위가 확인했고 최웅 11여단장 확인이 들어가 있다.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는 5·18 직후 군 사망자들에게 추서된 ‘훈장’의 공적으로 기록됐다. 경향신문이 1980년 6월10일 군 당국이 작성한 훈장 추서 관련 문건을 입수해 확인한 결과 사망확인조서의 내용과 일치했다. 인헌무공훈장이 추서됐던 11공수 박 상사의 공적으로 “충정작전에 참가하여 5월24일 폭도의 흉탄에 순직”이라고 적혀 있다.


“전사”로 조작된 사망확인조서
훈장 추서 관련 문건과 일치
지휘부 묵인 속 진행 가능성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는 이들이 국가유공자가 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군사원호보상법은 원호대상자(현 국가유공자)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전공사확인증 또는 전공상확인증’을 제출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 법은 “군인으로서 전투 또는 공무수행 중 사망한 자”를 ‘전몰군경(전사)’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로 계엄군은 ‘폭도(광주시민)와 전투 중 사망’한 것이 됐다.


계엄군의 사망 경위 조작은 당시 최고 지휘부의 묵인 아래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특전사령부는 5월26일 오인사격 사망자들의 사망 원인을 조작해 계엄사령관이던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조작된 사망확인조서는 바로잡히지 않았다.

석연치 않은 사망기록은 또 있다. 전교사 방위병이던 손모씨는 5월22일 오후 출근하다가 광주 서구 화정동에서 사망했다. 그는 광주기독병원으로 옮겨졌다. 인근에서는 당시 시민들을 향한 20사단의 발포가 있었다. 시민 사망자로 분류됐던 그는 이후 신원이 확인되면서 ‘전사자’가 됐다. 5월28일 작성된 전교사의 사망확인조서에는 ‘출근 도중 과격분자가 발사한 총탄에 현장에서 사망’이라고 적혔다.


예비역 대령 출신 ㄱ씨는 “계엄군 간 오인사격 사망자의 사망확인조서를 조작한 것은 최종적으로는 군인들의 국가유공자 등록까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계엄군 최고 지휘부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5·18 당시 계엄군 사망자에 대한 재조사 요청이 있으면 법과 절차에 따라 재심사를 실시할 수 있다”면서도 “지난해 12월 출범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투명하고 객관적인 조사가 진행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5·18 40주년 조작된 영웅]

(2) [단독] 참전 부상병에 주는 ‘상이기장’을 계엄군 97명에 수여
경향신문ㅣ2020.05.13 06:00 수정 : 2020.05.13 09:23

 

▲ 국방부가 수여하는 ‘상이기장’, 1980년 7월 국방부가 5·18에 투입됐다 부상당한 계엄군에게 ‘상이기장’을 수여했다는 문건, 1997년 재향군인회가 발간한 책자에 실린 1980년 6월29일 계엄군 33명에게 육군참모총장 표창이 수여된 기록 (왼쪽부터 순서대로)

 

계엄군의 ‘표창·상이기장’
5·18민주화운동 직후 군 당국이 계엄군 부상자들에게 ‘상이기장(傷痍記章)’을 수여하며 예우한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다. 상이기장은 6·25나 베트남전쟁에 참여해 부상당한 상이자들에게 주로 수여된다. 5·18 직후 계엄군 수십명에게 육군참모총장 표창을 준 사실도 파악됐다. 5·18을 진압한 공로로 계엄군에게 수여된 훈장과 포장, 대통령·국무총리 표창은 모두 치탈됐다. 하지만 5·18 당시 계엄군들에게 수여한 상이기장은 취소 절차를 밟지 않았다. 국방부는 상이기장과 참모총장 표창의 수여와 취소 여부에 대해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무장헬기 조종 장교 등 33명엔
계엄사령관 겸한 참모총장 표창

 

하지만 12일 경향신문이 확보한 1980년 7월24일자 국방부의 ‘상이기장 수여 발령’ 문건을 보면 당시 주영복 국방부 장관 명의로 5·18 진압에 투입됐다 다친 계엄군 97명에게 일반명령 제6호로 ‘상이기장’을 수여했다.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는 국방부의 해명과 달리 상이기장 수여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다. 통상 상이기장은 전투 또는 작전상 필요한 공무수행 중 부상한 자에게 수여한다. 부상 정도에 따라 특별상이기장과 보통상이기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상이기장은 바른편(오른쪽) 가슴에 패용해야 하고 증서를 휴대해야 한다. 당시 계엄군 부상자 27명에게는 특별상이기장, 70명에게는 보통상이기장이 수여됐다. 이들 중 20명은 앞서 6월20일 5·18 진압 공로로 정부의 훈장과 포장을 중복 수여받았다.

 

▲ 2001년 옛 전투병과교육사령부(상무대) 부지에 조성된 광주 서구 5·18자유공원에서 관람객들이 복원된 영창을 둘러보고 있다. 군은 당시 5·18을 설명하는 문구가 “군 위상을 저하시킨다”며 교체를 추진했다. /광주시 제공

상이기장은 그동안 6·25나 베트남전에 참전해 부상한 사람들에게 주로 수여됐다. 6·25전쟁 참전자 19만3000명과 베트남전 참전자 7300여명 등 20여만명이 받았다. 보훈급여 등이 지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각종 보훈행사와 해당 부대 초청 행사 등에서 ‘전쟁영웅’의 예우를 받는다.


한 예비역 대령은 “전쟁에 참전해 부상당한 군인들은 국가가 인정한 상이기장을 받은 사실이 자긍심을 대신한다”면서 “5·18 진압군에게 상이기장이 수여된 것은 ‘전쟁영웅’으로 예우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고엽제 후유증으로 투병 중인 이모씨는 2015년 국민권익위원회에 “국방부에 수차례 상이기장 수여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며 구제를 신청했다. 조사를 진행한 권익위는 국방부에 “고엽제 후유증 전상군인에게도 상이기장을 수여하고 관련 규정을 개선하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훈장·포장 등은 모두 박탈됐는데
상이기장은 기록·자료 없다며
국방부 취소 절차 밟지 않고 회피


군은 5·18 진압에 참여한 33명에게 육군참모총장 표창도 줬다. 표창은 ‘육 일반명령 제22호’에 의거해 이뤄졌다. 육군참모총장은 당시 계엄사령관을 겸했다. 국방부는 5·18 진압군에게 정부의 훈장이 수여된 9일 후인 1980년 6월29일 표창을 했다. 표창 대상자는 광주에 투입된 3·7·11공수부대 장병, 전교사, 20사단 장병 등이었다. 계엄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돼 무장헬기 등을 조종한 제1항공여단 소속 장교 8명과 육군본부 장교 5명도 같은 날 5·18 관련으로 참모총장 표창을 받았다.


이 같은 내용은 1997년 5월15일 재향군인회 호국정신선양운동본부가 편찬한 <12·12, 5·18 실록> 부록에 실려 있다. 재향군인회는 5·18 계엄군에게 육군참모총장 표창이 수여된 내용을 “1996년 3월20일 ‘제1문서보존소 문서철’에서 확인했다”고 기록했다. 5·18 진압 공로로 계엄군 79명에게 수여됐던 훈장과 포장, 대통령·국무총리 표창은 1997년과 2006년(훈·포장), 2018년(표창) 모두 치탈됐다. 하지만 그보다 낮은 급의 상이기장과 참모총장 표창에 대해 국방부는 수여 여부조차 파악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상이기장과 육군참모총장 표창 수여자 수와 취소 여부를 알려달라’며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이에 대해 육군본부는 지난 4월20일 “5·18민주화운동 관련 상훈 및 상이기장 수여자 명단은 별도 기록을 유지하지 않기에 해당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통보해왔다. 또 “상이기장은 국방부 장관이 발행하는 사항으로 육군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전했다.

▲ 국방부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 직후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에게 상이기장과 육군참모총장 표창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국방부는 상이기장과 표창 수여 여부에 대해 “관련 자료가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신군부, 군 내부 우호 여론 위해
광주 투입 계엄군에 과다 예우
국방부가 사실관계 바로잡아야

국방부도 관련 자료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방부는 ‘5·18 관련 참모총장 표창과 상이기장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확인해 달라’는 질의에 “관련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고 공식 답변했다. 군 표창은 취소할 수 있다. ‘군표창규정’ 제14조는 ‘표창은 이를 취소할 수 없다. 다만, 표창한 공적이 허위로 판명되었을 때에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방부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군 위상’ 등을 운운하며 5·18 진상규명을 방해해왔다. 경향신문이 확보한 2001년 옛 국군기무사령부 문건에 따르면 국방부는 광주시가 1980년 전투병과사령부 부지에 ‘5·18자유공원’을 만들고 설치한 5·18 안내문에 “대군 불신감을 증폭시킬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됐다”며 대책 마련에 나섰다.

 

기무사는 ‘5·18자유공원 전시판넬(패널) 내용 순화 요망’이라는 문건을 국방부에 보내 “(자유공원) 전시관에 전시할 내용에 군 위상 저하 및 대군 불신감을 조장할 수 있는 표현이 포함돼 있어 순화를 위한 조치가 요망된다”고 했다. ‘무차별 살육작전 전개’를 ‘진압작전 시작’으로, ‘공수부대 일제히 발포’를 ‘일부 인원 사격 시작’ 등으로 교체해 달라는 대체문안도 작성했다. 이 같은 내용은 당시 국방장관에게도 주요 첩보로 보고된 것으로 나온다.

 

또 다른 문건에는 1998년 전남도교육청이 학생들이 쓴 5·18 글을 모아 <빛나는 오월의 햇살>을 발간하자 군이 “학생들에게 군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고착시켜 군에 반감을 갖게 할 우려가 있다”며 내용 삭제 등을 교육청에 요구한 것으로 나온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5·18 직후 전두환 등 신군부는 군 내부 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해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들에게 과다한 예우를 해줬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5·18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정의가 세워졌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방향으로 사실관계 등이 바로잡혀야 한다”면서 “국방부가 자체적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해 바로잡을 수 있는데도 자꾸 회피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5·18 40주년 조작된 영웅]

(3) 계엄군 출신들, 장관·차관 ‘승승장구’…

군 관여한 ‘511연구위’의 조작활동 여부 규명 필요

경향신문ㅣ2020.05.13 06:00 수정 : 2020.05.13 06:01

 

‘신군부 단죄’ 김영삼 정부서도 광주 투입 김동진, 국방장관 영전
노태우 정부 때 국회 ‘511연구위’…당시 국방부 권영해·한민구 참여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들은 승승장구했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계엄군 중에서 3명이 국방부 장관에 올랐고 1명은 차관을 지냈다. 1988년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5·18 왜곡에 관여한 인물 중에서도 2명은 국방장관, 1명은 차관이 됐다. 제일 먼저 국방장관에 오른 이는 5·18 당시 특전사령관 정호용이다. 그는 전두환 정권에서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장관(1987년 2월∼1988년 2월)이 됐다. 3공수여단장이었던 최세창은 노태우 정권 마지막 국방장관(1991년 12월∼1993년 2월)을 지냈다. 20사단 61연대장으로 광주에 투입된 당시 김동진 대령도 국방장관을 지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법’을 제정해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을 단죄한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국방장관(1996년 10월∼1998년 3월)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8월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된 유효일 차관도 20사단 대대장으로 광주에 투입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5·18 왜곡에 관여한 인물도 있다. 1988년 5월 노태우 정권이 ‘제13대 국회 광주사태 대비’ 목적으로 설치한 국회대책특별위원회에 관여한 인물들이 국방장관이 됐다. 국방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한 국회대책위원회는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됐고 실무위원회로 ‘511연구위원회’를 편성해 운영했다. ‘국방부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대기 관련 특별조사위원회’는 2018년 발표한 결과보고서를 통해 “511연구위원회 조직 편제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국회대책위 활동을) 국방부 정책기획실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특조위는 “관계자 진술에 의하면 당시 국방부 정책기획실에는 실장 권영해를 비롯하여 한민구 중령 등이 근무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권영해 실장은 제30대 국방장관(1993년 2∼12월)을 지냈고, 한민구 중령은 박근혜 정부 시절 제36대 국방장관(2014년 6월∼2017년 7월)이 됐다. 특조위는 511연구위원회에 참여한 관계자 45명의 명단도 확인했다. 이 명단에는 당시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원 신분으로 전담실무위원을 맡은 서주석 전 국방부 차관이 포함됐다. 특조위는 조사보고서에 “511연구위원회 명단을 확보했지만 조사기간과 권한의 한계로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를 원활하게 진행하지 못했다”면서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며 향후 조사는 5·18 진상규명 과제의 하나로 남겨둔다”고 밝혔다. 12일 개시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 범위에는 “1988년 국회 청문회를 대비하여 군 보안사와 국방부 등 관계기관들이 구성한 ‘511연구위원회’의 조직 경위와 활동사항 및 진실왜곡·조작 의혹 사건”이 포함돼 있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

 

[단독] “누가 형이 광주시민과 교전 중 사망했다고 조작했나?…

명예 더럽히지 말라”
경향신문ㅣ2020.05.11 06:00 수정 : 2020.05.11 06:01

 

▲ 5·18 당시 계엄군 간 오인 사격으로 숨진 고 이병택 중사의 전북 고창 고향집. 이 중사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소속으로 11공수를 수송하던 중 사망했다.


고 이병택 중사 동생 이동하씨, 철저한 진상규명 요구
“계엄군 사망자들 명예 위해 ‘작전 잘못으로 사고’ 밝혀야”
“누가 형이 광주에서 시민들과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고 기록한 겁니까? 이는 형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5·18 당시 사망 경위가 조작된 것으로 확인된 한 계엄군의 유가족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지난 6일 전북 고창군의 한 마을에서 만난 이동하씨(58)는 형의 사망 경위가 기록된 오래된 군 문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건은 5·18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6월 군이 이씨의 형인 고(故) 이병택 중사(당시 24세)의 훈장 추서를 위해 쓴 공적서였다. 공적조서에는 “충정작전에 참가하여 11공수 대대장과 장갑차에 동승하여 작전임무 수행 중 광주시 송암동에서 폭도들을 제압 전진 중 90미리 무반동총에 직격당해 장열히(장렬히) 전사”라고 기록돼 있다.


이 중사는 5·18 당시 광주에 있었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군수지원단 수송근무대 소속 부사관(하사)이었다. 그는 5월24일 ‘충정작전 80-2’호 명령으로 광주 동구 주남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11공수부대를 광주비행장으로 수송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차량소대 대열의 맨 앞에서 공수부대 대대장이 탄 장갑차를 운전하다 계엄군으로 동원됐던 또 다른 부대인 전교사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와의 교전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이 중사의 사망확인조서와 공적조서는 모두 광주시민들과 교전하다 사망한 것처럼 적혀 있다. 사망 당일 작성된 ‘사망확인조서’에는 “11공수 대대장과 함께 노상(도로) 안내 중 광주시 송암동에 도착했을 때 폭도들로 추정되는 5~6명이 전방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제압하면서 앞으로 전진 중 폭격당했다”고 적혀 있다. 사망 구분은 ‘전사’로 기록됐다.


전교사 헌병대와 소속 부대장이었던 군수지원단장의 확인이 들어 있는 사망확인조서와 훈장의 공적조서 모두 ‘계엄군 간 오인교전’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당시 가족들이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갔지만 군에서는 자세한 사망 경위는 설명해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동료들이 ‘군인끼리 교전이 있었다’고만 전해줘 가족들은 그렇게만 알았다. 이씨는 형이 사망한 지역과 시간, 교전을 벌인 부대가 전교사 소속이었다는 것도 경향신문을 통해 40년 만에 처음 접했다고 했다. 4형제 중 장남이었던 이 중사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군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서울의 한 공업계 고교 자동차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1976년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1980년 5월은 의무 복무기간 5년을 몇 달 남겨두지 않은 때였다. 전역하면 자동차수리점을 열 계획도 세워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형이 부사관으로 입대해 집안을 모두 책임졌다. 당시 나는 전주에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형이 하숙비와 학비를 모두 댔다”면서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집안이 끝장났다. 어머니는 때때로 방바닥이나 벽에 머리를 찧으며 괴로워하셨다”고 말했다. 이씨는 고향집에서 파킨슨병으로 거동조차 못하는 92세의 노모를 곁에서 돌보고 있다. 200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거동이 힘들어지면서 서울현충원의 묘역도 몇 년째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형의 사망 경위를 재조사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형이 만약 선량한 광주시민들과 교전하다가 사망했다면 유족 입장에서는 더욱더 견디기 힘든 일이다. 광주시민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씨는 “형이 작전 중 사망했으니 ‘전사’는 맞다고 생각한다”면서 “계엄군 사망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정확하게 조사해 ‘작전 잘못으로 인한 군인들 간 우발적 사고로 숨졌다’는 사실을 공표해야 한다”며 국방부 등 관계기관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이어 “광주시민이나 계엄군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결국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와 신군부 인사들”이라면서 “계엄군의 사망 경위가 있는 그대로 밝혀져야 광주시민과 사망한 계엄군 유가족이 화해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군인들의 사망 경위를 조작했는데,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진실을 바탕으로만 정리될 수 있습니다.” [고창 | 글·사진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