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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역사

[KBS 역사스페셜] 신라 문무대왕 해중 해중릉 '대왕암' 최초 발굴

잠용(潛蓉) 2021. 12. 15. 18:37

KBS 역사스페셜 – 최초 발굴, 신라 대왕암 

KBSㅣ2019. 10. 14. (조회수 3,202,179회)

 


□ 경주 동쪽바다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왕암은 오래전부터 신라 30대왕인 문무왕의 능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수중릉이라는 점에서 대왕암이 진짜 문무왕의 릉이 맞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됐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秋七月一日 王薨諡曰 君臣以遺言葬東海口 大石上 이라고 하여 문무왕의 장례를 동해어구 큰 바위에서 치렀다는 정확한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를 보면 陵在感恩寺東海中 이라 하여 감은사 동해에 문무왕릉이 있다고 그 위치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을 무슨 연유로 1400여 년 전 동해에 만들었을까? 

최초 실측 탐사, 문무왕의 유골은 있는가?
 대왕암이 진짜 문무왕릉이냐는 의문과 함께 지속적으로 제기된 의문은 그 장례 방법이다. 먼저 문무왕의 유골을 대왕암 아래 묻었다는 가정하에 대왕암의 외부를 살펴보았다. 만약 돌아래 문무왕의 유골을 묻었다면 인공적인 흔적이 남아있을 텐데 50여 곳을 조사한 결과 돌이 갈라진 전리방향은 북동방향으로 모두 동일했다. 이것은 경상도 지역에 나타난 전리방향과 동일한 것으로 인공적으로 돌을 깎아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대왕암주변에 인공적인 흔적이 없다면 물속에 잠긴 부분은 어떨까? 수로를 막고 대왕암의 물을 뺀 결과 중앙의 거대한 돌이 그 전체를 드러냈는데, 그 위치가 정확하게 북쪽을 향하고 있고 정중앙에 있어 인공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수로부분에서 인위적으로 돌을 다듬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돌 아래 문무왕을 묻었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는데 보다 정확한 결과를 위해 부장품검사와 돌아래 지반구조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대왕암의 거대한 바위 밑에는 아무것도 묻혀있지 않았고 무엇을 묻을 수도 없는 구조였다.

문무왕의 유골, 화장돼 대왕암에 뿌려졌다
문무왕 유골이 대왕암 아래 묻힌 게 아니라면 유골을 화장하여 대왕암 위에 뿌렸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삼국사기를 보면 後十日... 以火燒葬이라고하여 죽으면 10일 뒤에 화장하라는 유언이 있다. 그리고 고문외정이라는 화장터도 유언에 남겼는데 이곳은 지금의 능지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유는 능지탑 조사 결과 화장터의 흔적이 나왔을 뿐 아니라 비석에 기록된 대로 사천왕사 자리에 위치했던 문무왕릉 비석이 서쪽 귀부에 꽂혀있었다고 가정하면 지금의 능지탑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무왕의 유언대로 능지탑에서 유골을 화장했다면 그 이후 문무왕의 유골은 어떻게 되었을까? 문무왕의 비석을 보면 粉骨鯨津이라는 기록이 있다. 즉 뼈를 가루로 내어 바다에 뿌렸다는 것이다. 결국 문무왕의 장례는 뼈를 묻는 장골이 아니라 화장하여 뼛가루를 뿌리는 산골이었던 것이다.

시신 없는 무덤, 문무왕은 호국룡이 되었다 
문무왕의 유골을 화장하여 대왕암 위에 뿌렸다는 결론을 내리면 서 대왕암을 조사했을 때 발견된 인공적인 흔적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중앙의 돌을 보면 주변의 돌과 구성성분이 같은 것으로 보아 원래 대왕암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중앙에 위치한 것이나 정북방향을 향하는 것은 인위적인 흔적이 강하다. 더욱 확실한 인공의 흔적은 동서방향의 수로가 배수를 고려하여 서쪽의 높이가 동쪽보다 15cm낮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대왕암은 유골을 뿌린 장소일 뿐인데 왜 이 같은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일까? 삼국유사를 보면 문무왕이 죽은 뒤 호국룡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감은사에는 금당의 섬돌 아래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데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구멍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이 대왕암을 향하고 있다. 감은사의 용이 드나들게 만들었다는 구멍은 대왕암을 향하고 대왕암의 배수는 감은사를 향한다. 이를 종합하면 대왕암은 호국룡이 된 문무왕의 처소가 된다.

대왕암, 강력한 왕권의 상징
문무왕은 무슨 연유로 바다에 장사지내길 바랐을까? 왜의 침입을 막고자하는 염원에서 그랬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지만 삼국사기를 보면 왜의 세력이 미미해서 단독으로 침입할 수준이 되지 못했고 백강구전투에서도 왜는 신라에게 참패했다. 왜의 침임을 막고자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문무왕의 본뜻은 무엇이었을까? 


삼국통일 후 문무왕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는 개혁을 단행한다. 그리고 이 같은 개혁에 문무왕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그가 겪었던 시대적 상황과도 맞물린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 치뤘던 16년간의 기나긴 전쟁을 마치고 그 후 백제와 고구려유민을 융화시키기 위해 여념이 없었던 문무왕은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가 안정되기를 바랐다. 그러던 중 병을 얻는 문무왕은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문무왕이 서거하고 이듬해 감은사가 완공된 뒤 용이 된 문무왕이 나타나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줬다는 설화가 있다. 이 피리는 마른 땅에 비를 오게 하고 외적을 무찌른다는 신비의 피리로 문무왕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한다. 
이는 문무왕이 호국룡이 되었다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호국룡이 된 문무왕의 처소인 대왕암은 만파식적과 더불어 문무왕의 강력한 왕권의 상징인 것이다.

□ 역사스페셜 112회 최초 발굴, 신라 대왕암 (2001.4.28.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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