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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일본식 판소리] "백제의 칼" (전 8부) 외 - 최팔근 창

잠용(潛蓉) 2022. 7. 9. 09:27

"百濟의 칼" (전 8부)
李瑞求 원작 각색/ 崔八根 창

(앨범/ 1942년 2월 오케레코드 발매)

"...1943년부터 서울 을지로 4가에 있던 성보(城寶)극장(현 국도극장)에서는 전속단체 성보악극단을 두고 주로 일본말 악극을 상연했다. 심지어 일본시대극(武士劇)을 잘 하는 연기인들이 수두룩했다. 같은 해 가을 서대문에 있는 연극전문극장(東洋劇場)에서는 조선악극단 직속 신생(악)극단에서 「백제의 칼」이라는 고전악극을 상연했는데 일본민속음악의 하나인 나니와부시(浪花節: 한국의 판소리 같은 것)로 해설을 엮어갔다. 

 

일본에서 이 나니와부시를 전공한 崔八根이 특별 출연했다. 이렇게 필요 이상의 일제의 비위를 맞추고 내선일체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연예인들이 속출했어도 그들은 한국인의 얼과 전통적 예술문화를 짓밟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라는 글이 있으나 실제는 1942년 6월30일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악극단 공연에  랑곡극-백제의칼 6결으로 최팔근이 특별 출연을 하였다 이후 1942년 8월10일 동양극장 공연 때도 백제의 칼이 불리워졌고 1943년 1월8일 최팔근 나니와부시 징병제취지보급 겸해 이후 최팔근은 신생극단(1943년 5월창립)에서 활동했다


최팔근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조선에 들어와 방송에 출연한 것은 1940년 6월10일 라디오 방송에서다. 연예인 신체제 1941년 1월1일 자 기사에도 최팔근의 이름이 보이고 1941-10-05 本社主催 一流舞臺人總網羅-在鮮部隊慰問團, 今日壯途에도 이름이 보이고 이후의 일제가 동원한 각종 행사에도 이름을 들어냈더 나니와부시 장렬 이인석 상등병 칠복의 출세등은 음원이 존재한다.

 

『나니와부시』를 力說(역설), 꿈이 덜 깬 崔八根(최팔근)氏의 그 後(후) 1948년 10월 07일 "이요" 데데뎅! 아직 최팔근씨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만치 그는 그야말로 도야지 목따는 소리를 내뽑으면서 "나니와부시"를 통하여 성전 (聖戰)완수에 적극 협력하였던 것이며 이인석 상등병을 찬양하기에 참으로 바빴던 것이다 그는 '가*시모'도 단정하게 입고 '조-리'끌며 팔도강산을 샅샅히 돌아 다녔으며 마이크를 통한 그의 피 눈물 나는 호소는 기이함을 추구하는 일반의 흥미의 대상 이외의 아무것도 안되었다.

지금 그는 시내 五壯洞(오장동)에서 선술집을 경영하고 있다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던 그 옛날이 연상되게 간판도 만세관이라고 내 걸고 대포술 팔고 갈비굽기에 바쁜 것이다 최씨는 아직도 '나니와부시'에 대한 미련을 청산치 못하고 있으며 一陽來復(일양내복)의 호시절을 만나면 이 나라의 역사를 일반에게 알리우기 위하여 무대에 나설 것을 기도하고 있으며 이 즈음에는 안중근 일대기를 탐독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나니와부시'의 원류가 인도에서 나왔으며 그것이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는 타령이 되고 이것이 일본으로 가서 '나니와부시'로 전신했다고 역설하는 최씨는 그의 일제시의 활동을 민족문화 향상의 일보가 되고자 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사진은 최팔근씨) <YouTube Uploader>

최팔근(崔八根)은 일제 강점기의 방송인이고 일본 전통음악 예술인이다. 부산 출신이라는 것 외에 신상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일제 말기에 일본 전통음악인 나니와부시(浪花節)의 1인자로 조선어 나니와부시라는 새 장르를 창시했다. 나니와부시는 서사적 내용을 담은 가창으로 이루어지는 창곡으로, 일본의 전통 현악기인 샤미센이 반주를 담당한다. 한국의 판소리와 유사한 면이 있다.

한일병합조약으로 일본 제국과 대한제국이 한 나라가 된 뒤에도 음악분야에서 일본의 전통문화는 한국에 침투하는 속도가 느렸다. 최팔근은 나니와부시를 한국어로 부름으로써 일본 전통음악을 직접 수용하고 토착화를 이룬 흔치 않은 예가 되었다. 한국어로 부른 나니와부시의 사례는 1930년대 초에도 보이나,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1940년에 최팔근이 귀국해 나니와부시 보급에 나서면서부터였다. 최팔근은 도쿄에 유학하여 나니와부시를 배웠고, 1940년 3월에 조선방송협회와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귀국했다.

귀국 직후에는 조선방송협회 전속으로 활동하며 경성방송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조선어 나니와부시를 소개했으며, 1942년부터 방송에서 소개된 곡을 포함한 음반을 제작해 발매했다. 확인되는 음반은 《백제의 칼》, 《장렬 이인석 상등병》, 《칠복의 출세》, 《설중매》, 《부평초》의 다섯 장이다. 《백제의 칼》은 내선일체 이념이 구현된 음반으로 홍보되었고, 《장렬 이인석 상등병》은 일제 말기에 본받아야 할 인물로 크게 선전되며 여러 예술 작품에 형상화되었던 지원병 이인석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 무렵 방송과 음반 외에 여러 지역을 순회하는 무대공연 활동도 병행하였고, 조선연예협회의 발기인을 맡기도 했다. 한국어로 구현된 일본 전통음악은 그 자체가 내선일체 이념을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접어든 당시의 시국과 맞아떨어져, 최팔근은 장래가 촉망되는 예술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제패망 후에는 1948년 서울에서 선술집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음악부문에 선정하였다.
<위키백과>

 

[희귀곡] 최팔근 백제의 칼 1 (1942년 2월 오케20112, 백제테마 시리즈 82)

[희귀곡] 최팔근 백제의 칼 2 (1942년 2월 오케 20112, 백제테마 시리즈 83)

[희귀곡] 최팔근 백제의 칼 3 (1942년 2월 오케 20113, 백제테마 시리즈 83)

[희귀곡] 최팔근 백제의 칼 4 (1942년 2월 오케 20113, 백제테마 시리즈 85)

[희귀곡] 최팔근 백제의 칼 5 (1942년 2월 오케 20114, 백제테마 시리즈 86)

[희귀곡] 최팔근 백제의 칼 6 (1942년 2월 오케 20115, 백제테마 시리즈 87)

[희귀곡] 최팔근 백제의 칼 7 (1942년 2월 오케 20115, 백제테마 시리즈 87)

[희귀곡] 최팔근 백제의 칼 8 (1942년 2월 오케 20115, 백제테마 시리즈 88)

[레코드창고] 장렬 이인석 상등병 (이서구 원작 각색 최팔근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