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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희귀가요] "금강산 절경" (1934) - 이화자 노래

잠용(潛蓉) 2022. 11. 28. 19:32

 

"金鋼山 節景" (1934)

趙鳴岩 작사/ 金玲波 작곡/ 孫牧人 편곡/ 노래 李花子
(앨범/ 1934.09 오케레코드 발매 OK 12223 SP)


< 1 >
얼씨구 절씨구 
江原道 形勢 절씨구
에~ 叢石亭이 개골 달고
海金剛을 돌아드니

溫井里에 저녁 煙氣 
氣高萬丈 빛나고
蓬萊소리 날고 들면 
神溪寺의 念佛소래 

毘盧峯이 어드메냐?
九龍瀑布가 난여로다 
여기가 여기가 仙境이냐?  
仙境이 아니면서난 어디~ 냐?

< 2 >
얼씨구 절씨구 
江原道 金剛山이 절씨구
에~ 斷髮令에 눈물 짓고
內金剛을 돌아드니

長安寺의 쇠북소리
겨울 山에 날 지더라
韓石峯이 구비구비  
寶石峰이 千山이요

兩蓬萊에 노신 仙跡  
天下絶境이 여기로다
여기가 여기가 仙境이냐?  
仙境이 아니면서난 어디~ 냐?

< 3 >
얼씨구 절씨구 
江原道 菩薩 절씨구
에~ 明鏡臺에 얼굴 씻고
郎君臺에 護從하니

麻衣太子 그 옛님이
어디엔들 가려고 
혜화동에 높이 올라 
海金剛을 굽어보니

令郞湖의 神仙들이
춤을 추던 양개로다
여기가 여기가 仙境이냐?  
仙境이 아니면서난 어디~냐?

 



제주에서 만난 그 이름 '조명암'
낯설되, 낯설지 않은 우리고장 출신 문화예술 거장
온양신문ㅣ2018년 08월 06일(월) 13:36  
 

◀ 조명암(조영출) ⓒ 온양신문

올해 여름 폭염은 사상 최악이라고 했다. 지난 8월 1일 서울 종로에서는 39.6도를 기록해 111년 만의 최고기온을 기록했고, 또 같은 날 강원도 홍천에서는 41도까지 올라가는 등 전국이 가마솥 더위를 보였다. 이런 무더위 속에 여름휴가를 맞이한 기자는 더운 바람만 폴폴 풍기는 선풍기 앞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모처럼 큰 마음 먹고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박4일 간 제주도 곳곳을 무던히도 돌아다녔는데, 그곳도 덥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가는 곳곳 마다 사진으로만 보던 명소요, 아름다운 관광지라 무더운 줄 모르고 참 많이도 돌아다닌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20여개 코스에 달한다는 제주올레길 중 가장 인기가 높다는 제7코스(월평마을~월평포구~강정포구~일강정바당올레~외돌개)의 외돌개와 황우지해변이었다. 외돌개는 바닷가에 우뚝 솟은 기암인데 문화재급 명승지로 지정돼 있고, 황우지해변은 폭풍의 언덕을 비롯해 선녀탕 등 제주 특유의 화산암으로 빚어진 언덕과 갯바위 사이 수영장, 해변으로 절경을 자랑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전혀 뜻밖의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해방 전후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의 최고봉이던 조명암 노래비를 발견한 것이다.

 

조명암은 누구인가? 그는 1913년 충남 아산 영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운동가인 부친이 일제의 압제를 피해 다니는 신세였고 어머니 마저 승려가 되는 등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금강산 건봉사로 들어가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재능을 아낀 한용운 선생은 조명암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했고, 뛰어난 성적을 보인 조명암은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때부터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혜성 같이 등장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면서 남·북한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993년 5월 8일 향년 80세로 평양에서 사망했다. 금운탄(金雲灘), 이가실(李嘉實), 김다인, 조영출… 이 모든 이름이 모두 한 사람, 조명암의 예명(藝名)으로, 그는 북한에선 ‘조영출’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 이름도 사연이 있다. 아산 영인(靈仁)이 고향인 그는 고향을 잊지 못해 ‘영인(靈)에서 태어났다(出)’는 의미로 예명을 조영출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예명을 사용한 데에는 작곡가로서 뿐 아니라 시, 회곡 등 다방면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1930년대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극작가 겸 작사가 박영호와 함께 광복 이전 우리나라 대중가요 작사가 중 최고봉으로 꼽힌다. 그가 이 기간 동안 작사한 노래는 무려 500여곡에 달하며 당시 최고의 히트를 친 노래 대부분은 그가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박시춘, 손목인, 전수린 등 당대 최고 작곡가들이 그가 쓴 가사에 곡을 붙였고 이난영, 남인수, 이화자, 황금심, 장세정, 송민도, 고운봉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사 작사 뿐 아니라 정통문학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동방의 태양을 쏘라’가 당선된 바 있고, 등단 이후 순수문학으로 약 150여편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극작가와 연출가로도 그의 존재감은 상당해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한 후 주로 연극활동을 해왔던 그는 꾸준히 다작을 해왔다. 그러나 36세이던 1948년 월북한 뒤로 그의 천재적인 문화예술성은 이념속에 묻혀 사장됐다. 그의 작품 모두가 금지곡이 됐던 것이다. 그는 이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평양가무단 단장, 조선 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그의 노래들에 대한 해금기준은 더욱 엄격히 적용돼 오랫동안 묶여졌다.

 

▲제주도 서귀포 외돌개 폭풍의 언덕에 세워진 조명암 노래비(앞) ⓒ 온양신문


서귀포 외돌개 인근에는 바다쪽으로 돌출한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은 바람이 매우 세차서 ‘폭풍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그곳에 바로 조명암 선생의 노래비가 서 있다. 커다란 바위의 앞·뒤에 금속판을 대고 그곳에 노래가사와 2004년에 이 노래비가 세워진 연유가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서귀포 칠십리’ 노래가사로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는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쌍돛대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물새가 운다

자갯돌이 철썩철썩 물에 젖는 서귀포
머리 빨든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저녁달도 그리워라 저녁별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졌다

모래알이 철썩철썩 소리치는 서귀포
고기 잡든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모래알도 그리워라 자개알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맹서가 컸소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든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뱃노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온다

금비늘이 반짝반짝 물에 뜨는 서귀포
미역 따든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은조개도 그리워라 물 파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 리에 별도 외롭네

진주알이 아롱아롱 꿈을 꾸는 서귀포
전복 따는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물새들도 그리워라 자갯돌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물안개 곱네

 

▲제주도 서귀포 외돌개 폭풍의 언덕에 세워진 조명암 노래비(뒤) ⓒ 온양신문


뒷면에는 ‘‘서귀포 칠십리’란 노래말은 1934년 6월에 서귀포를 다녀간 작가 조명암이 작사를 했으며 1937년에 발표를 했었다. 1930년대 후반만 하여도 한낟 보잘것 없는 촌락에 불과했던 서귀포를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이 서귀포 칠십리라는 노랫말 때문이다. 가사 내용처럼 당시 작가 조명암이 바라본 서귀포는 동쪽으로 정방폭포에서 서쪽으로는 황우지 절벽과 외돌개·신선바위 기암에 이르기까지 절경이 아닌 곳이 없엇던 곳으로 보인다. 또한 ‘동너분덕’ 앞에서 바라본 범섬·새섬·문섬·섶섬이 미려하게 자리잡은 사이로 고깃배가 오고가고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까지 뛰어난 해안풍경이 노랫말에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칠십리 노랫말이 동너분덕 일대를 ‘남주해금강’이라 부리우는 효시가 되었다고 본다. 서귀포의 대표적인 가요인 서귀포칠십리와 작가 조명암을 기리기 위하여 1997년 서귀포시 민선 초대 오광협 시장은 이곳 동너분덕에 조각가 이영학 씨가 제작한 무쇠노래비를 세웠다. 그후 2003년에 불어닥친 태풍 매미로 인하여 노래비가 유실되어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고 새겨져 있다.

 

조명암의 노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신라의 달밤’, ‘낙화유수’, ‘바다의 교향시’, ‘꿈꾸는 백마강’, ‘진주라 천리길’, ‘서귀포 칠십리’, ‘울며 헤어진 부산항’ 등 무수하다. 이렇듯 유명한 문화예술가가 정작 아산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은 월북작가라는 특수한 환경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념과 문화예술은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의 대부분 노래들은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해금(解禁)된 상태다. 1992년 61곡이 해금되고 1996년 저작권이 회복되면서 CD로도 제작·출반됐다. 이렇듯 불러도 좋다고 풀어놓고 정작 그 노래를 지은 사람은 묶어 놓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일례로 얼마 전 아산에서는 아산예총이 설화예술제를 진행하면서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를 개최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선까지 치른 이 대회를 이웃지역의 한 언론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틀어졌다. 아산시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치르는 행사인데 친일·월북인사의 이름을 딴 가요제는 안 어울린다고 주장, 결국은 대회 명칭을 ‘시민가요제’로 바꿔 얼렁뚱땅 치렀던 것이다.

우리나라 가요사의 큰 거목이었던 그의 노래비는 현재 금강산 건봉사 입구를 비롯해 예산군 덕산면(고운봉의 노래 '선창') 등 전국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서귀초 폭풍의언덕에 세워져 있는 노래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고향이자 그가 생전에 애타게 그리워 했던 아산에는 눈을 씻고 봐도 그의 자취를 찾을길이 없다. 친일·월북 작가라는 굴레가 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의 딱한 사정에 대해 아산지역의 김종욱 씨는 지역언론에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특히 그에게 씌워진 칭닐 논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선생의 친일 행적은 1942-1943년 발표 된 가요시에 나타나는데 이때는 전체 노랫말 3절의 형식 중 한절은 반드시 일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강제규정이 있어 본인의 의사와는 다르게 친일 형태로 표현된 것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비록 지나친 표현으로 인해 단순한 강요의 범주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체제 옹호를 한 것 아니냐는 비난도 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가요 시에는 일부 친일의 표현을 하고 따로 쓴 시에는 나라 잃은 젊은이의 울분과 한탄, 미래의 희망 등을 나타낸 표현들이 많음을 볼 수 있다’면서 작가의 특정 시기가 아닌 ‘삶의 전체를 바라보는 지혜가 아쉽다’고 토로했다.

 

▲ 제주도 서귀포 외돌개 폭풍의 언덕에 세워진 조명암 노래비 배경인 황우지 해변 ⓒ 온양신문


이 점은 필자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월북작가라는 굴레 이전에 그의 작품 상당수가 해금에서 풀려난 것만 봐도 예술성을 인정 받았다는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전향작인 자세로 그의 예술성과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충남 보령의 개화예술공원에는 전국의 시인들로부터 시를 받아서 세운 시비(詩碑)들이 즐비하다. 그 자체가 하나의 관광자원으로 손색이 없다. 아산에서도 이 지역 출신 문화예술계의 거장이 남긴 수많은 주옥 같은 노래가사 중 국민들로부터 가장 인기 있는 노래가사를 추천 받아 비에 새겨 비림(碑林)을 세우면 어떨까 싶다. 바로 그의 고향 영인, 영인산자연휴양림 산책로변에 말이다. 타향에서 본, 낯설되 낯설지 않은 고향의 문화예술가를 만난 뒤 가져본 생각이다.
[임재룡 기자  skyblue6262@naver.com]


 

금강산 절경 1934 이화자

 

#이화자 - 금강산 절경 (가사첨부) 1934년작

 

금강산 절경 - 이화자 - SP돌판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