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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명시감상] '풍장 風葬' - 황동규(黃東奎) 작

잠용(潛蓉) 2012. 10. 24. 15:00
'풍장' (風葬)
(죽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황동규(黃東奎) 작


1.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 연시집 <풍장>에서
□ 배경음악: ‘With You’- Giovanni Marradi


‘풍장(風葬)’ 작품 해설


1. 오독(誤讀)에 대한 변론
한 번씩 죽음에 대해 집착할 때가 있다. 어릴 때 나는 내 어머니가 죽는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그 무서움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더욱 겁을 냈었다. 그러나 죽음은 정확하지 않은 것, 하여 정확한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죽은 자는 이미 현실로부터 봉인된 자다. 닫힌 몸 어디로 들어가 죽음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겠는가. 모든 죽음에 대한 정의는 결국 불확실할 수밖에 없고, 역으로 그 불확실함에 근거하여 완전해지기도 한다. 아무도 죽음을 본 자가 없다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고 살아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살아 있는 자 누구도 죽음에 대해 완전한 정의를 내릴 수 없으며 또한 내려진 정의들에 대하여 실증적인 반론을 제시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여, 나는 죽음이라는 부담스럽고도 오래된 원형의 수수께끼 앞에서 자유로와 지고자 한다. 「風葬 1」에서 내가 본 죽음과 시 밖에서 보게 된 죽음, 그리고 나의 오독을 통해 보여질 또 다른 죽음의 모습이 서로 겹치고 어긋나며 교차하는 지점에서 저마다 각자가 생각하는 죽음을 꺼내놓고 마주하게 될 것이다.

2. 산 자의 문턱, 죽은 자의 문턱
죽음은 한 세계의 끝과 또다른 한 세계의 시작에 존재하는 문턱이다. 그리고 그 문턱은 우리의 삶 어디에나 존재한다. 예전 어른들이 문턱을 밟지 못하게 하는 미신 속에는 섣불리 밟으면 안 되는 죽음의 공간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敬畏)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내 할머니가 느끼던 죽음과 지금의 내가 느끼는 죽음은 같은 것일까? 그것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내 할머니에게는 경외감이 더 컸다면, 내게는 두려움에 무게가 더 실려 있기 때문이다.

내 할머니가 느끼던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현실의 공간 속에서 무수히 있는 문턱과 같은 존재, 그것을 밟지 않는 행위 속에는 죽기 싫은 두려움 보단 죽음에 대한 경건함, 깨끗한 죽음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황동규의 ‘풍장’을 읽으면서, 나는 그 두려움과 경외, 미신처럼 내 할머니를 사로잡았던 깨끗한 죽음을 본다. 그것은 가장 편안한 죽음이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된 죽음이기도 하다.

매일 매일 우리들이 무수히 넘나들던 문턱은, 어느날 갑자기 우리를 현실 밖의 세계로 데려다 놓을 지도 모른다. 내 두려움은 그 ‘느닷없음’에 있고, 내 할머니의 경외감은 그 불확실한 존재의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있다. 할머니가 보면, 단번에 잔망스런 계집애란 소리를 듣겠지만, 나는 지금 할머니가 그토록 금기시 하던 문턱에 올라앉아서 턱을 괴고 길게 숨을 내 쉬며 죽음을 만날 준비를 한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이 산 자의 문턱인지, 아니면 죽은 자의 문턱인지는, 시를 내려놓는 순간까지 아무도 모른다.

3. 풍장(風葬) - 죽음과의 유희

풍장은 사람이 죽으면 우선 나무로 비가 조금 샐 수 있을 정도의 얼기설기한 집을 만들고 그 안에다 시체를 넣고 풀로 덮는 장례 형태이다. 오래 되어시체가 썩고 뼈만 남게 되면 다시 땅에 묻는다. 시인이 대학시절에 보았던 이러한 풍장의 모습은 오랜 기간 그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나이 45살, 바로 이 시를 처음으로 분출하기 시작한다.

풍장은 해안이나 섬 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봉분을 만들 땅의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고기잡이를 나가면 보통 보름 이상씩 걸리는 그들의 생활 형태에서 그 사이 부모가 죽는 경우 땅에 묻으면 얼굴마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생긴 풍속으로 보여진다. 온전히 드러낸 죽음의 형태, 시인은 풍장을 통해 완전한 죽음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의 1연에서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란 구절을 읽어 내려가면 시인이 꿈꾸는 죽음이 삶과의 분리 형태로 존재하는 일반적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떠한 극적인 형태도 아닌, 다만 자연스러운 죽음, 지치고 오래된 몸을 위해 휴식을 취하듯이 맞이하는 그러한 죽음의 형태는 시속에서 바람을 통해 가벼워지고 마냥 스스럼 없어진다.

“가방 속에서 다리를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와 같은 모순적인 일상어가 환기시키는 죽음의 무게가 얼마나 가볍고도 사소한 지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죽음에 대해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폼 잡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가방 속에서 다리를 오그리고 있는 자는 죽은 자이기에,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산 동안 빌어 쓰던 몸은 이제 몸에게 돌려주고, 영혼은 웅크린 몸에 편안히 기대어 “선유도를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통, 배 지나가는 소리”마저 지나갈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선유도와 무인도를 지나는 것이 몸이라면 영혼은 통통통, 울리는 뱃고동 소리마저 지나가고 있다. 소리를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이 시 속의 죽음은 이미 가벼워져 있다. 무엇이 시인에게 이토록 죽음을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게 했을까? 나는 잠시 궁금해진다.


작년, 이맘 때 쯤이었다, <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라는 일본 영화를 본 것이. ‘나라야마’란 나이가 70이 넘은 노인들을 버리고 오는 산으로 일종의 우리나라 고려장(高麗葬)과 비슷한 일본의 옛 풍속이다. 잘 계산된 죽음에 대한 각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나는 감동하고 말았는데, 아들의 등에 업혀 나라야마를 오르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내려와야 하는 아들 사이에 적용되는 금기, 결코 나라야마에 오르기까지는 아무말도 해선 안 된다는 설정에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침묵이 들려주는 장엄한 음성, 관객들은 자신의 가슴 속에 키우고 있던 죽음을 슬며시 꺼내어 화면 속에서 아무런 배경 음악도 깔지 않고 진행되는 두 사람의 의식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나라야마에 오르는 길고도 어려운 과정을 통해 이미 어머니와 아들은 죽음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황동규의 ‘풍장’은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영화가 들려준 침묵의 오케스트라와는 또 다른, 마치 휘파람처럼 귀를 간지럽히는 죽음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영화와 시 속의 죽음이 어딘가에서 맞물려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거창한 해석 이전, 온전히 죽음의 형태로 드러나는 ‘알몸의 죽음’을 만나게 한다는 점이다. 시(詩) 속의 화자도, 영화 속 주인공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냥 매일 계속되던 일상 속의 또다른 하루를 맞이하듯이 죽음은 시속을 천천히 걸어다닌다.

영혼은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몸은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눕혀진다. 영혼은, 잠시 잃었던 정신을 차리며 온전히 세상 앞에 제 몸을 드러내고 있는 자신의 죽음을 본다. 그 동안 자신을 담았던 몸이 거기 누워 있다. 죽음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빌어 쓰던 몸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영혼은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하여 죽음과의 동거, 썪어가는 육체 속에 기꺼이 함께 하며 “살이 말라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손목시계가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린다. 이제야 몸의 죽음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 이르러 나즉한 탄성을 지른다. 행여, 몰래 떨어트린 그의 시간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영혼이 육체와 함께 바람에 날리는 것을 지켜본다.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씨들이 튕겨져 나오고 그것을 무연히 바라보는 나와 안 보이듯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짧게 교차한다. 죽음은 어금니에다 백금 조각을 박고 차가운 겨울 볕 아래 빛나고 있다. 이불 덮듯 바람을 덮고서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고 싶은 죽음의 유희. “화장도 해탈도 없는”, 미화되지 않은 죽음이 보여주는 담백한 아름다움, 시인은 그런 정직한 죽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시를 빠져 나오면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쩌면 없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면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너무 지나치게 무거워진 것이 아닐까? 풍장은 아직까지도 시인이 집착하는 화두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담백한 죽음의 모습을 나는 풍장을 통해 볼 수 있었다. 호들갑스럽지도 않고, 거창하거나 심오한 단어들을 끌어오지도 않고, 시인은 평범한 일상어들을 조합하여 죽음이라는 단단한 관념의 세계를 현실 속에 펼쳐 놓았다.

또 다른 시에서 시인은 “죽음 앞에서 파괴되지 않는 것은 아름답다”고 노래했다. 모든 인간적인 것이 죽음 앞에서 파괴되고 소멸될 수 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을 통해, 시인은 그런 깨달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아름다움이 역으로 죽음마저 초월하고 있음을, 나는 이 시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내가 밟고 있는 문턱은 결국 산자의 문턱인지 아니면 죽은 자의 문턱인지”. 여전히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이제는 문턱에서 내려와야 할 뿐, 발을 디디는 순간 또다시 일상 속을 걷고 있는 나를 마주하기를 희망할 뿐이다. 아직도 나는 죽음이 두려운 것을 보니 내 죽음에 대한 준비는 한참 덜 된 듯하다. 어쩌겠는가, 아직도 나는 시인처럼 담담해 질 수 없는 것을. 하여 무수히 많은 문턱마다 혹시 디딜세라 성큼 뛰어 넘는 것을.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 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 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보며
한 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낄대기 위해
지니고 가리.

- 풍장 28 전문.
(2000년 가을, sun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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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분(草墳) : 지방에 따라 초빈(草殯), 소골장(掃骨葬), 초장(草葬), 또는 ‘손님떡갈’이라 부르는데, 사체를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관을 땅이나 돌축대, 떠 있는 평상 위에 놓고 이엉을 덮어서 1∼3년 동안 그대로 두는 매장법의 하나이다. 가족은 제삿날이나 명절이면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살이 썩으면 뼈만을 추려서 다시 땅에 묻는다. 따라서 초분이란 이름도 ‘관을 풀이나 짚으로 덮어 만든 무덤’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교식 장례가 단 한 번의 매장으로 끝나는 단장제(單葬制)임에 비하여 초분은 두 번의 매장 절차를 거치는 복장제(復葬制)의 하나다.

조선말까지는 내륙에서도 흔하게 시행되었으나 현재는 서남 해안의 도서 지방에서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선사 시대의 지석묘와 옹관묘도 이런 복장제이다. 초분은 뼈를 중시 여기는 사상으로 뼈를 깨끗이 씻거나 찧어서 살을 모두 떼어낸 다음에 매장함으로 세골장(洗骨葬), 증골장(烝骨葬)이라고 부른다. 이런 점으로 초분은 유골을 처리하기에 앞서 먼저 육신을 처리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이 풍습은 육신은 더러운 것으로 땅 속에 매장함으로써 땅을 더럽힌다고 생각하고, 뼈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대동풍수지리학회)

* <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이 1982년 제작. 오가타 켄, 사카모토 스미코, 히다리 톤페이가 출연한 일본 영화다. 우리 말로 하면 ‘나라야마 타령’이라는 뜻이다. 중세의 일본, 가난한 산속 사람들에게 겨울은 고통의 계절이다. 그들에게 겨울은 최악의 굶주림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겨울에 태어난 남자아이는 논바닥에 버려지고 계집아이는 겨우 몇 줌의 소금 값에 팔려가던 시절. 남의 음식을 훔치는 건 최대의 죄악이며, 그 가족은 마을주민들에 의해 산 채로 매장된다. 특히 노인은 70세가 되면 반드시 나라야마 산(楢山)에 버리고 와야 하는데... 자기가 죽음으로써 식량을 줄이고 아들 손자가 먹고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추운 겨울날 할머니는 주먹밥 몇 덩이를 싸들고 기꺼이 나라야마산으로 올라간다. 옛날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고려장 풍습이 일본에서 먼저 영화화 되어 세계에 알려진 것이 좀 안타깝다.

* 황동규(黃東奎 1938~): 황동규 시인은 1938년 4월 9일 평안남도 숙천에서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남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957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영어영문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1967년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1970~ 1971년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연구원으로 수학했으며, 1987~1988년 미국 뉴욕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초기에는 대표적인 연시 <즐거운 편지>를 비롯해 첫 시집 《어떤 개인 날》(1961)에 실린 연작시 <소곡>과 <엽서> 등 사랑에 관한 서정시가 주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사랑과 미움으로 정형화 되어온 전통적 연애시의 정서와는 달리 신선한 정념의 분위기를 형상화 한 시인 특유의 독특한 연가를 발표해 주목받았다. 그후 세련된 감수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견고한 서정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체제 비판의 목소리와 죽음에 대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쉼 없고 경계 없이 시를 쓰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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