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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한시감상] '송인' (送人: 정든 님 보내며) - 고려 정지상(鄭知常)

잠용(潛蓉) 2012. 10. 29. 21:18


“정든 님을 보내며”/ 送人
(高麗 때 鄭知常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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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漏年年添綠波(별루연년첨록파)

비 그친 긴 강둑에
풀빛은 고운데
님 보내는 남포에는
슬픈 노래만 들리네.


아, 대동강 물은
그 언제나 다 마르려나?
이별 눈물은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데


(한시 번역: 잠용)
(사진: 1950년대 대동강 모습 kimdh229)



(배경음악: ‘With You’- Giovanni Marradi)

작품 해설 ‘송인(送人)’
남포의 비밀 送人 - 정지상 -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고운데 (雨歇長堤草色多)
남포에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大同江水何時盡)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물을 보태나니. (別淚年年添綠波)


너무나도 유명한 정지상의 〈송인(送人)〉이란 작품이다. 대동강 가에는 연광정(練光亭)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이곳을 찾은 유명한 시인묵객들이 지은 시가 어지럽게 많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중국 사신이 오면 모두 떼어 내고 정지상의 이 작품만을 남겨 두었다고 한다. 다른 것은 중국사람에게는 보이기가 마땅치 않았지만, 이 작품만은 중국 사람 앞에 내 놔도 손색이 없겠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 시를 본 중국 사신들은 하나 같이 귀신 같은 솜씨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정지상의 〈송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는 작품이다. 떠난 이를 그리며 흘리는 눈물로 대동강 물이 마를 날 없다는 엄살은 허풍스럽기는 커녕 그 곡진한 마음새가 콧날을 찡하게 한다. 이 섬세한 시심(詩心)만으로도 과연 중국사신의 감탄은 있음직 하다. 그러나 중국 사신들이 결정적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2구의 ‘송군남포(送君南浦)’라는 표현에 있었다. 이 구절은 흔히 님을 남포로 떠나 보내며 슬픈 노래를 부른다고 해석하여, 남포를 대동강이 황해와 서로 만나는 진남포 쯤으로 생각하기도 하나, 그런 것이 아니라 남포는 현재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소이다.

남포란 단어에는 유장한 연원이 있다. 중국의 유명한 시인 굴원(屈原)이 일찍이 〈구가(九歌)〉라는 작품 속에서 “그대의 손을 잡고 동으로 가서, 사랑하는 님을 남포에서 보내네.(子交手兮東行, 送美人兮南浦)”라고 노래한 바 있다. 이 뒤로 많은 시인들이 실제 헤어지는 포구가 동포이든 서포이든 북포이든 간에 남포라고 말하곤 했으므로, 굴원의 이 노래가 있은 뒤로 ‘남포’란 말은 중국 시인들에게 으레 ‘이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뉘앙스가 담긴 말이 되었다.

이렇게 하나의 단어가 특별한 뉘앙스를 담게 될 때, 한시에서는 그것을 정운의(情韻義)라고 말한다. 이후로 많은 시인들이 실제로 남포라는 단어 위에 이별의 정운을 담아 노래하였다. 강엄(江淹)은 〈이별의 노래(別賦)〉에서 “봄 풀은 푸른 빛, 봄 물은 초록 물결, 남포에서 그대 보내니, 슬픔을 어이 하나.(春草碧色, 春水綠波, 送君南浦, 傷如之何)”라고 노래한 바 있고, 무원형(武元衡)이란 시인도 〈악수 물가에서 벗을 보내며(鄂渚送友)〉란 시에서 “강 위 매화는 무수히 떠지는데, 남포서 그대 보내니 안타까워라.(江上梅花無數落, 送君南浦不勝情)”라고 노래하였다.

두 작품 모두에서 ‘송군남포’라는 넉 자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로 보면 정지상의 ‘송군남포’라는 표현이 중국 사신들에게 일으켰을 정서적 환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성 두보는 일찍이 〈고상시에게 올림(奉寄高常侍)〉이란 작품에서, “하늘 가 봄 빛은 저물기를 재촉는데, 이별 눈물 아득히 비단 물결에 보태지네.(天涯春色催遲暮, 別淚遙添錦水波)”라고 노래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지네.(別淚年年添綠波)’라고 한 〈송인〉의 4구도 또한 두보의 구절을 환골탈태한 것이다.

다시 시로 돌아가 보자. 1구에서는 비가 개이자 긴 둑에 풀빛이 곱다고 했다. 겨우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긴 둑에 봄비가 내리자, 그 아래 어느 새 파릇파릇 돋아난 봄 풀이 마치 갑자기 땅을 헤집고 나온 것처럼 제 빛을 찾았던 것이다. 지루했던 겨울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내리는 봄비를 맞는 마음은 설레이는 흥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춥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이제 막 생명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면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있으니, 그 서글픈 심정이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대동강 물이 어느 때 마르겠느냐는 3구는 좀 엉뚱하다. 슬픈 노래를 부르다 말고 왜 갑자기 강물 마르는 이야기냐 말이다. 한시의 기승전결 구성이 갖는 묘미가 바로 이 대목에서 한껏 드러난다. ‘기(起)’는 글자 그대로 대상을 보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 ‘승(承)’은 이를 이어 받아 보충하는 것이다. ‘전(轉)’에서는 시상을 틀어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1.2구와 3구 사이에는 단절이 온다. 그 단절에 독자들이 의아해 할 때, 4구 ‘결(結)’에 가서 그 단절을 메워 묶어줌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이루게 된다.

3구에서 강물 타령으로 화제를 돌려 놓고, 4구에 가서 설사 강물이 자연적 조건의 변화로 다 마를지라도, 강가에서 이별하며 흘리는 눈물이 마르기 전에는 강물은 결코 바닥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눈물을 제 아무리 많이 흘린다 한들 도대체 그것이 대동강의 유량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그렇기는 하나, 이를 두고 허풍 좀 그만 떨라고 타박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과장은 시인의 슬픔이 그만큼 엄청난 것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이니 말이다.

보통 한시에는 운자라는 것이 있는데, 7언절구의 경우에는 1구와 2구, 그리고 4구의 끝에 같은 운자를 써야만 한다. 이 시는 하평성(下平聲)인 가운(歌韻)을 쓰고 있다. 이 운목(韻目)에는 ‘가(歌)‧다(多)‧라(羅)‧하(河)‧과(戈)‧파(波)‧하(荷)‧과(過)’ 등 시에서 자주 쓰이는 운자가 많이 포진하고 있어, 고금의 시인 치고 이 운으로 시를 짓지 않은 이가 거의 없으니, 이를 가지고 새로운 표현을 얻어 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이 작품 뒤로도 아예 ‘다(多)‧가(歌)‧파(波)’의 운을 1.2.4구의 끝에 그대로 달아 차운한 시가 적지 않으나,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작품은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얻기 어렵다. 이제 와서 운자는 한시 감상에 있어 고려의 대상이 안되게 되었지만, 중국 사신의 찬탄 속에는 앞서 남포가 주는 정운의 위에, 이러한 운자 사용의 산뜻함도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출처: 정민선생님 홈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