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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추억의 가요] '처녀총각'(1934) - 강홍식 노래

잠용(潛蓉) 2012. 12. 29. 09:06

 

'처녀총각'(處女總角)
작사 범오/ 작곡 김준영/

취입 강홍식,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

(1) 봄-이 왔네 봄이 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 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
산들산들 부는 바람 아리랑 타령이 절로난다
응- 응- 응- 으- - -응- 응으- - - 응

(2) 호-미 들고 밭 가는 저- 총각의 가슴에도
봄은 찾아왔다고 피는 끓어 울렁울렁
콧노래도 구성지다 멋드러지게 들려오네
응- 응- 응- 으- - -응- 응으- - - 응

(3) 봄-아가씨 긴 한숨 꽃-바구니 내던지고
버들가질 꺾으니 양지쪽에 반만 누워
장도 든 손 싹둑싹둑 피릴 맨들어 부는구나
응- 응- 응- 으- - -응- 응으- - - 응

(4) 노-래 실은 봄 바람 은은하게 불어오네
늙은 총각 기맥혀 호미자룰 내던지고
피리소릴 맞춰가며 신세 타령을 하는구나
응- 응- 응- 으- - -응- 응으- - - 응

 

'

('처녀총각' - 강홍식 노래)

(‘처녀총각’ - 현대 가수)  

 


은방울자매-처녀총각

 


지금부터 80여년 전 1934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디스크다. 어느날 국일관 뒤 어느 여관방에서 약주에 얼큰해진 강홍식이 흥타령을 부르자 같은 자리에 있던 김준영이가 그를 변조해서 취입하자고 제의, 즉석에서 작곡한 것이 오늘날의 '처녀총각'이다. 발매 당년에 이미 10만매에 달하는 실적으로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공전(空前)의 히트곡이 되었다. 그때 취입료로 김준영은 피아노를 사고, 강홍식은 마산에 양옥을 한채 사서 전옥과 스위트홈을 꾸몄다나 어쨌다나... (원본: 김해김씨 율은공파)


 

무성영화 배우겸 가수 강홍식(姜弘植)
글: 이근태

 

◇ 강홍식(姜弘植, 1902~1971)과 전옥(全玉, 1911~1969)
한국 연예사에서 최초로 탄생한 부부 연예인은 1926년 <장한몽 長恨夢> 영화에 출연한 강홍식과 눈물의 여왕이며 비극의 주인공인 전옥이 첫 테입을 끊었다. 1920년대 말 극단무대에서 만나게 된 강홍식과 전옥은 1932년 첫 딸 강효실(탈렌트 최민수의 모친)을 낳으면서부터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면서 강홍식은 레코드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봄이 왔네 봄이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

산들산들 부는 바람 아리랑타령이 절로 난다.

흥~~

<처녀총각> 노래가 1934년 초봄의 바람과 더불어 전국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1934년에 대 힛트하였다. 이 노래로 콜럼비아 레코드의 작곡가 김준영은 당시에는 희귀하고 고가인 피아노를 장만하고 노래를 부른 강홍식은 아담한 주택도 새로이 장만하였다. 이 노래는 북한 방송에도 가끔 흘러 나오는데 1991년 8월 16일 KBS <남북의 창>에서도 <처녀총각> 노래가 나오는 북한방송을 방영한 적이 있다.

 

 

강홍식이 <극단연극사>가 단성사에서 연극공연을 할 때에 단성사 부근 여관에서 술을 마시며 타령을 멋들어지게 부르는 것을 본 작곡가 김준영이 타령의 선율에 악상이 떠올라 곡을 만들어 구성진 강홍식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만들었다. 전형적인 엔카의 2박자로 만든 <처녀총각>은 당시의 점잖은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1930년 초의 느리고 서정적인 노래를 주로 듣던 사람들에게는 유성기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2박자의 경쾌한 노래가 특히 젊은 신여성들이 또박또박 걷는 걸음걸이와 비교되어서 무안하게 느껴지고 뒷덜미가 가려울 정도로 신경에 거슬리는 시대상이었다.

<처녀총각> 노래로 1936년에는 가수 채규엽, 김용환에 이어 세 번째 인기가수로 부상하였다. 강홍식이 처음으로 출연한 무성영화 <장한몽>에는 김정숙, 주삼손, 심훈(상록수 저자)이 출연하였었다. 1927년에는 무성영화 <먼동이 틀 때>에 <아리랑>의 여주인공인 신일선과 출연하게 되었는데 촬영 도중에 행방불명이 되어 영화감독 심훈이 수소문 끝에 홍등가인 유곽에 파묻혀 있는 강홍식을 찾아내 촬영을 계속하였다.

1926년에도 무성영화 <산채왕 山寨王>을 촬영하던 중에 행방불명이 된 적 있었다. 조일제 감독의 최초의 활극영화로서 강홍식 대신에 임운학이 출연하여 영화에서 한 인물에 두 사람의 다른 얼굴이 나오는 웃지 못할 초창기의 무성영화가 되고 말았다. 이후 심훈이 이동영화 촬영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일본에 갈 때 동행하여 일본 영화계의 연기 견습을 하고 돌아온 뒤 심훈이 감독한 <먼동이 틀 때>에 출연하면서 또한번 행방불명의 기록을 남긴 것이다. 감독 심훈은 1935년 소설 <상록수>를 집필하면서 문인이 되었다.

강홍식은 평양의 거부 아들로 알려진 분방한 성품의 인물로 전해지고 있는데 처음 결혼한 전옥 가족이 일체 언급을 회피하여 지금까지의 상세한 행적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 6.25동란 이후에도 북한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연좌제 등 지난날의 사회여건상 부득이한 현실이었다.

◇ 강홍식의 대표곡
삼수갑산(작사 김안서, 작곡 김교성, 1933년 빅터레코드)
처녀총각(작사 범오, 작곡 김준영,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
개나리고개(작사 유도순, 작곡 전기현,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
조선타령(작서 범오, 작곡 전기현,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
유쾌한 시골영감(작사 범오, 외국곡, 1936년 콜럼비아 레코드) 등이 있다.

1936년 5월에 나온 <유쾌한 시골영감>은 외국곡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본의하토리 이스로(服部逸郞) 편곡으로 되어 있다. 이 노래는 극장무대에서 코믹한 노래로 주로 불려져 왔는데 일제말기에는 코메디언 홀쭉이(양석천)와 뚱뚱이(양훈) 두 사람이 극장무대에서 노래하였고, 1960년 전후에는 코메디안 서영춘의 애창곡으로 인기를 끌었다. 4절로 된 원래 노래가사는 다음과 같다.

‘유쾌한 시골영감’
대사: 시골영감님께서 서울 구경을 떠나시었는데 자못 유쾌한 장면이 많았겠다. (에헴)

(1) 시골영감 처음타는 기차노리라.
차표파는 아가씨와 승강이 하네
이세상에 에누리없는 장사가 어디있나
깎아대자고 졸라대니 운 이런질색이 하하하~

(2) 기차란 놈 띄하고 떠나갑니다.
영감님이 깜짝놀래 돈을 다내며
깍지 않고 다낼테니 날 좀 태워다주
저기 차좀 붙들어요 돈 다낼테니 하하하~

(3) 다음차는 만원이라 자리가 없어
옆에 칸을 슬쩍보니 텅텅비였네
옳다구나 땡이로구나 슬쩍 앉았더니
표검사에 이등이라구 돈을 더물어 하하하~


(4) 이럭저럭 서울에를 도착하여서
인력거를 타시는데 발판에 앉아
우로올라 앉으라니 영감님 말씀
이등타면 돈 더받게 나는 싫고메 하하하~

1925년 12월 16일 <조선일보>에 계림영화협회의 배우 기사에서 강홍식에 관하여 "대정영화에서 배우활동을 하고 또 체조학교에서 얼마간 공부를 하여 독일 가는 길에 무성영화에 출연하기 위하여 귀국한 21세의 강홍식…" 운운의 기사 중 체조학교는 무용학교를 말하는 것으로 무용의 인식부족으로 체조로 표현하였다.

일본의 유명한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당대의 무용가 최승희를 지도한 인물)의 제자로 일시 머문 기록으로 보아 무용에 대한 관심도 있던중 귀국하여 독일행도 포기하고 배우로 활동하였다. 순수연극에도 참여한 적이 있는데 1927년 나운규, 복혜숙 이월화 등과 천도교 회관에서 공연된 러시아 작가 안드레에프의 <뺨 맞은 그 자식> 체홉의 <결혼 신청>에 출연하였다. 이 공연은 일제에 의하여 사흘만에 공연 중지당하였는데 반항적이고 불온 사상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강홍식의 노래는 콜럼비아 레코드 음반으로 계속 발표되었으나 트로트 음악이 가요계를 휩쓸자 구성진 타령조의 강홍식 목소리는 차츰 밀려나고 말았다. 1941년에는 최인규 감독의 영화 <집 없는 천사>에서 김신재, 김일해. 문예봉과 출연하고는 뚜렷한 행적의 기록을 찾아 볼수가 없다. 전옥이 1943년 최일과 <백조> 가극단을 창립하였는데, 최일과 나중에 재혼한 것으로 보아서 강홍식은 이무렵에 딸 강효실과 고향인 평양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8.15 해방이 되자 평양 교외 남형제리에 국립영화 촬영소(현재 조선영화촬영소)가 세워지면서 강홍식이 1947년에 그곳 부소장으로 기용된 기록이 있다.(시네마조선 1999년 2월) 촬영소 소장 주인규는 1925년에 나온 무성영화 <개척자> 주인공의 배우였다. 촬영소 부소장으로 강홍식은 북한의 기록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1949년에는 북한의 극영화 제1호인 <내 고향>을 감독하였다.

<내 고향>의 여주인공인 문예봉은 해방 전 최고의 영화스타로 1948년 3월 극작가 임선규(홍도야 우지 마라, 극작가)를 따라 월북한 배우로 인민배우 칭호를 받고 1999년에 사망하였다. <내 고향>을 감독한 뒤에는 북한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촬영소의 한 모퉁이에서 겨우 연명하며 살았다고 1957년 월남한 이철주(북한 국립출판사 문학예술 부장)가 증언하고 있다.

1960년 다시 기용된 강홍식은 영화 <항쟁의 서곡> 감독으로 연출을 하였다. 4.19 학생의거를 선동하는 내용의 영화로서 남쪽에 있는 전옥과 연극 배우가 된 강효실의 가족관계에서 선전효과가 목적인 것으로 보여지며 이후에는 아무런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출처: 가요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