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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불교설화]‘지극한 염불로 부처가 된 여종 욱면(郁面)’

잠용(潛蓉) 2013. 3. 1. 23:33
 
‘지극한 염불 하나로 부처가 된 여종 욱면(郁面)’
<삼국유사> 권5, 감통편(感通篇) 
욱면비 염불서승조(郁面婢念佛西昇條)




신라 경덕왕 때 아간(阿干: 신라 관등의 제 6위 ) 귀진(貴進)은 친구들 10여명과 함께 염불 만일계(念佛萬日契)를 만들고 마을 인근에 있는 미타사(彌陀寺)에서 10년간 열심히 수행정진(修行精進)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 아간의 어린 여종 욱면(郁面)이도 주인을 따라 함께 열심히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분이 천한 노비라 언제나 법당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추우나 더우나 마당에서 불공을 드리고 염불했다. 귀진은 욱면이가 집안 일은 하지 않고, 자기를 따라다니며 염불에만 몰두하는 것이 마땅치 않아 매일 곡식 두섬을 주고 하루 저녁에 그것을 다 찧어 놓으라고 지시하곤 했다. 욱면이는 초저녁에 그 일을 모두 마치고는 밤에 절에 와서 부지런히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하였다. 그런데 밤이 깊어지자 피곤하고 잠이 몰려오자 욱면이는 불공에 방해가 된다고 절 마당 좌우에 긴 말뚝을 박아놓고 자신의 두 손바닥을 뚫어 그 속으로 노끈을 꿰어 말뚝에 걸어놓고 당길 때 오는 통증으로 잠을 쫓으며 염불에 정진했다.

어느덧 9년이 지난뒤 어느날 밤이었다. 그날도 밤 늦도록 혼자 아미타불을 염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밝아지며 공중에서 “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는 큰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함께 이 소리를 들은 그 절의 다른 스님들이 욱면에게 권하여 법당 안에 들어가서 염불하도록 주선했다. 그뒤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하늘에서 또다시 음악소리가 들려오면서 관음보살이 다른 두 협시보살을 대동하고 법당에 나타나 염불하고 있던 욱면이를 번쩍 들어올려 법당 대들보를 뚫고 서쪽 하늘로 날아갔다. 그들이 동구 밖에 이르자, 욱면이는 육신을 버리고는 어엿한 부처가 되어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몸에서 밝은 빛을  발하면서 천천히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음악소리은 그때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법당 지붕에 뚫린 큰 구멍은 그 크기가 열 아름이나 되었지만 아무리 심한 비가 내려도 젖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 나오는 미타사(彌陀寺)는 실제로 경상북도 영주에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에 해당하는 강주(康州)에 있다고 적었으나, <한국사찰전서>에는 보선(寶璿)의 설 등에 근거하여 지금의 영주시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미타사는 언제 창건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신라 진평왕(579~632) 전후에 활동하던 사문(沙門) 혜숙(惠宿)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때(742~765) 아간(阿干) 귀진(貴珍)을 비롯한 신도 10여명이 극락정토의 왕생을 발원하고 이 절에서 염불 만일계(念佛萬日契)를 조직한 뒤 10년간 수행하였다. 이때 귀진의 여종 욱면(郁面)이가 오래도록 불공을 드리다가 법당의 대들보를 뚫고 하늘로 올라가 극락왕생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뒤 어떤 사람이 금탑 하나를 만들어서 욱면이가 극락왕생했다는 구멍에 맞추어 소란(小欄) 반자 위에 모시고 그때의 기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일연(一然 1206~1289)이 <삼국유사>를 기록할 때에도 그 글씨와 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출처: ‘한국사찰전서’ 권상로 지음)
[묵면이 설화의 줄거리]
(1)
“귀진(貴珍)이, 자네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하세. 통일된지도 근 백년이 되고 세상도 안정되고 했으니 이제 좀더 의미있는 일을 찾아보세. 사나이 한 세상을 이리 무상하게 보내서야 쓰겠나?”
“자네들이 결사를 한다는 얘길 들었더니 그게 정말인가 보이...”
“그럼. 아미타불을 염(念)하는 미타사(彌陀寺)를 짓기로 했다네. 이 강주(剛州, 지금의 영주)는 의상대사가 법을 편 곳이고 인연도 있을 성싶네. 벌써 수십 명의 선남자들이 모여 있지.”
“그럼세. 나도 기꺼이 동참하겠네. 인간은 누구나 한번은 삶을 마치고 이승을 떠나는 법,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고 아미타 부처님이 계신다니 우리 한번 부지런히 염불을 하도록 하세.”
“고마우이. 이렇게 흔쾌히 동참해 주어서...”
“서라벌에 불법이 들어온지도 벌써 수백년이 되었건만 사실 너무 어려워. 우리네처럼 글깨나 배웠다는 사람들도 이러한데 무지한 백성들이야 오죽이나 어렵겠나.”
“그건 그러이. 허나 이제 ‘나무아미타불’만 염하면 극락에 갈 수가 있다니 좀 좋은가? 자칫, 무지한 백성들이 새로운 세상을 그리워하여 미륵불이라든가 미력불이라든가 하는 사설(邪說)에 현혹되어 힘든 세상을 바꿔야 한다니... 그래서는 안되지.
“이제 백성들도 많이 따르겠지.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극락을 갈 수 있다니….”
“그래, 어쨌거나 큰 서원을 세우세. 만일(萬日)을 기약해서일세.”

(2)
“아간(阿干)님, 아간님...”
“게 누구더냐?”
“예, 계집종 욱면(郁面)이옵니다. 드릴 말씀이 있사와 뵙고자 하나이다.”
“그래, 무엇이냐?”
“쇤네도 아간님의 미타사 염불결사에 참예코자 하나이다. 허락해 주옵소서.”
“계집종 주제에 염불은 무슨 염불이란 말인가? 더구나 여자에게는 다섯가지 장애가 있으니 곧 범천왕이 될 수 없으며 제석, 마왕, 전륜성왕이 되지도 못하고, 부처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니라. 하물며 미천한 종년의 신분으로 어찌...”
“그러한 다섯 장애의 말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저는 자비스런 부처님의 본의(本意)가 그랬다고는 믿지 못하겠읍니다.”
“말이 많구나. 더 듣기 싫으니 썩 물러가도록 하여라.”
“아간님, 옛적 서라벌 통일을 이룰 무렵 원효대사 같으신 분은 시골 장터의 무지랭이 백성들에게도 '나무아미타불'을 가르쳤다고 들었사옵니다. 이로보면 분명 정토에 가서 태어나는데는 남녀귀천 차별이 없을 터이옵니다. 쇤네도 아간님의 만일결사(萬日結社)에 꼭 참예할 수 있도록 허락하옵소서. 자비스런 아간님...”
“어허 고얀지고. 모름지기 인간은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 가사(家事) 소임만도 많은 아랫것이 또 어느 여가에 미타사에 가서 염불을 한단 말이냐?”
“일이 많사오나 쇤네 그걸 다 끝내놓고 밤에만 가서 염불을 하겠나이다.”
“좋다. 정히 그렇다면 매일 곡식 두 섬씩을 찧도록 하여라. 추호라도 네가 맡은 일에 소홀함이 있을 시에는 예불참예는 고사하고 엄중히 다스리겠으니 명심하도록 하여라.”
“예 고맙습니다. 아간님. 꼭 마음에 새기겠읍니다.”

(3)
“욱면아, 넌 어쩔 작정으로 아간님께 그런 청을 드렸니?”
“그러게 말야. 오히려 혹을 주렁주렁 더 붙인 격이지 뭐니? 무슨 재주로 두 섬씩이나 되는 곡식을 매일 찧는다는 거니?”
“그래도… 달리 길이 없지 않니?”
“그게 무슨 소리야? 길이 없다니?”
“으응. 사람은 다 똑같은데 왜 종은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며... 여자는 또 남자들 발 아래만 있어야 하니? 이렇게 살아서 무슨 희망이 있겠니?”
“그건 그렇지만 염불을 한다고 별 수가 있다던?”
“그래. 서쪽 저어기 멀리에는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없는 오직 기쁨과 즐거움만 넘치는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있는데 거기에는 항시 아미타 부처님이 계셔서, 누구든지 한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 맞이하러 오신단다.”
“극락엔 아무런 고통이 없다고?”
“그래, 우리가 이 현실을 벗어나려면 그 길밖에 없질 않겠니?”
“그렇지만 그로 인해 더욱 핍박받고 더욱 혹사당하고…”
“그럴수록 힘을 내고 오직 아미타불에 염해야 하는 거야. 우리 같이 하자.”
“아냐. 난 바쁜 일이 있어. 극락도 좋지만 이승에서가 당장 더 고생이야.”
“나도 가봐야 돼. 아뭏든 몸조심해라, 욱면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4)
부처님의 감응하심이라도 있었는지 욱면은 초저녁에 이미 곡식 찧는 일을 다 끝내고 미타사로 향한다. 마음 속에는 오직 하나 아미타불을 부르는 일...
그렇게 지극정성 아미타불 염불로 어언 9년이 흐르고...

“욱면아, 욱면이를 데려오너라. 이 고얀 것을 어서 데리고 오도록 해라.”
“예, 예. 곧 대령시키겠나이다.”
“이 괘씸한 것을 어찌 벌하면 좋을고?”
“아간님! 여기 욱면이를 대령했나이다.”
“너 욱면이는 듣거라. 내 그동안 누누히 기회 닿을 때마다 타일렀거늘 어찌 그다지 아망이 센고? 이거 어디 망신스러워서 고개를 들겠느냐? 계집종 하나 단속 못해서 종년을 결사참예에 9년 동안이나 내보낸다는 빈정거림을 받질 않나... 온 고을에 ‘내일 바빠 주인집 방아 서둘러 찧는다’는 소문까지 파다하게 내놓아 인심 사나운 요즘 사람들 손가락질 당하게 만들지 않나? 네 이 발칙한 것을 그냥 두지 않으리라.”
“아간님, 쇤네는 오직 염불한 죄밖에 없옵니다. 털끝만큼도 그런 불경스런 말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시끄럽다. 저 고얀 것을 뜰 좌우에 말뚝을 박고 두 손바닥을 노끈으로 꿰어서 각각 말뚝에 달아 매도록 하여라. 내 다시는 합장을 못하게 할 것이니라.”
“욱면이는 참으로 지독해. 그렇게 손바닥에 노끈을 꿰어 말뚝에 묶어 뒀는데도 글쩨... 태연스레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다니…”

(5)
그런데 그때 갑자기 마른 하늘로부터 큰 울림이 들렸다.
“아간 귀진은 욱면이로 하여금 미타사 법당에 가서 염불케 하여라. 아간 귀진은 욱면이를 미타사 염불결사에 들이도록 하여라.”  이리하여 욱면이는 마침내 미타사 법당에 들어가 불전 앞에서 마음놓고 ‘나무아미타불’을 실컷 염하게 되었다.




“아간님, 아간님 큰일났습니다.”
“웬 소란이더냐? 무슨 일인지 소상히 아뢰어라.”
“예, 욱면이가 법당에서 염불하고 있는데 갑자기 서쪽 하늘에서 고운 음악소리가 들리면서 글쌔, 아미타부처님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님과 함께 내려와서 욱면이을 데리고 갔읍니다요.”
“저도 보았사온데, 염불하던 욱면이가 몸을 솟구쳐 법당 위 대들보를 뚫고 하늘로 올랐습니다요. 그러더니 저~쪽 서쪽 교외에 이르자 서서히 부처의 용모로 변하여 연화대에 앉아 큰 광명을 발하면서사라졌는데 하늘에는 한참동안이나 은은한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았읍니다. 정말입니다요.”

“아,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내가 눈이 멀어 성인(聖人)이 내 집에 기탁해 계시는 줄도 모르고 그동안 함부로 대하고 그토록 학대를 하였으니…”
“지금이라도 참회하셔야죠.”
“암 그래야지, 나는 이 집을 부처님 도량으로 만들어 법왕사(法王寺)라 하리라. 우리 모두 다함께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도록 하자.”
“예, 성불하는 데는 남녀가 차별 없고, 종이라는 신분도 원래부터 있지 않았다는 욱면이 말이 옳습니다.”
“그래, 나를 용서해 주게나.”
(원본: 월간해인: 새로 엮은 삼국유사 - 김호성)


[삼국유사 원문과 풀이]

‘욱면비 염불서승’(郁面婢 念佛西昇)
<三國遺事>卷五, 感通篇 第七


“여종 욱면이 법당에서 염불하다 대들보를 뚫고 서방정토(극락)로 승천하다”

[역자주] 불교의 평등사상과 고난의 정진과 육신을 가진 인간이 곧바로 부처가 되어 극락왕생하는 신비체험 등 감동의 물결은 끝없이 파도쳐온다. 일연은 감동받은 인물이 있으면 어김없이 칠언절구 찬(讚)으로 전(傳)을 마무리한다. 이런 패턴의 글쓰기는 중국의 <양고승전 梁高僧傳>에서 비롯되어, 각훈의 <해동고승전>을 거치며 승전(僧傳) 쓰기의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나는 우스개소리로, <삼국유사>를 읽을 때 찬이 붙은 작품을 만나면 일연(一然)스님이 감동받은 설화 작품으로 보면 틀림없다고 말한다.

景德王代康州(今晉州, 一作剛州, 則今順安) 善士數十人, 志求西方, 於州境創彌陀寺, 約萬日爲契.

경덕왕 때 강주에 남자 신자 수십명이 서방정토를 정성껏 구하여 고을 경계에 미타사란 절을 세우고 만일(萬日)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時有阿干貴珍家一婢名郁面, 隨其主歸寺, 立中庭, 隨僧念佛, 主憎其不職, 每給穀二碩, 一夕용之.
그때 아간 귀진의 집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욱면이라 불렀다. 욱면은 주인을 모시고 절에 가 마당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했다. 주인은 그녀가 자신의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곡식 두 섬을 하룻밤 동안에 다 찧게 했는데,
婢一更용畢, 歸寺念佛.(俚言‘己事之忙, 大家之용促’, 盖出乎此.) 日夕微怠,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놓고 절에 가서 염불했으며(속담에 “자기일 바빠 큰집 방아찧기 서두른다.”는 말은 대개 여기에서 나왔다.) 밤낮으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庭之左右, 竪立長蹶(木변), 以繩穿貫兩掌, 繫於蹶(木변)上合掌, 左右遊之激勵焉.

그녀는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고는 합장하면서 좌우로 흔들어 자신을 스스로 격려했다.

時有天唱於空 "郁面娘入堂念佛", 寺衆聞之, 勸婢入堂, 隨例精進.

그 때 하늘에서 외치기를,‘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고 했다.절의 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법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정진하게 했다.
未幾, 天樂從西來, 婢湧透屋樑而出, 西行至郊外, 捐骸變現眞身. 坐蓮臺, 放大光明 緩緩而逝,

얼마 안 있어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욱면은 몸이 솟구쳐 절집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 교외로 가더니 유해(遺骸)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에 앉아 큰 빛을 발하면서 천천히 가버렸는데, 음악소리는 오랫동안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樂聲不撤空中. 其堂至今有透穴處云.(已上『鄕傳』.)

그 법당에는 지금도 뚫어진 구멍자리가 있다고 한다.

按『僧傳』: “棟梁八珍者觀音應現也.

승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동량 팔진은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結徒有一千, 分朋爲二, 一勞力, 一精修, 彼勞力中知事者不獲戒, 墮畜生道, 爲浮石寺牛.

무리들을 모으니 천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노력을 다하고, 한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그 노력하던 무리 중에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를 얻지 못하고 축생도에 떨어져서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嘗汰(馬변)經而行, 賴經力, 轉爲阿干貴珍家婢, 名郁面.

일찍이 소가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아간 귀진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을 욱면이라 했다.
因事至下柯山, 感夢遂發道心. 阿干家距惠宿法師所創彌陀寺 不遠,

욱면은 일이 있어 하가산(지금 학가산 鶴駕山, 882m. 안동, 영주, 예천군의 경계에 있는 산)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마침내 불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사가 세운 미타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阿干每至其寺念佛, 婢隨往, 在庭念佛云云.”

아간은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했으므로 계집종인 욱면도 따라갔고 뜰에서 염불했다고 한다.
如是九年, 歲在乙未正月二十一日, 禮佛撥屋梁而去, 至小伯山, 墮一隻履, 就其地爲菩提寺. 至山下棄其身, 卽其地爲二菩提寺, 榜其殿曰‘郁面登天之殿’.

이와 같이 9년 동안을 했는데, 을미년 정월 21일에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대들보를 뚫고 올라갔다. 소백산에 이르러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그 곳에 보리사란 절을 지었고,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 곳에는 제2 보리사를 지었다. 그 전당에 편액하여 ‘욱면등천지전’이라 했다.
屋脊穴成十許圍, 雖暴雨密雪不霑濕.

대들보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이나 되었지만, 폭우나 세찬 눈에도 전각 안은 젖지 않았다.
後有好事者範金塔一座, 直其穴, 安承塵上, 以誌其異, 今榜塔尙存.

후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금탑 1좌를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 위에 모시고 그 이적(異跡)을 기록했는데, 지금도 그 편액과 탑은 그대로 남아있다.
郁面去後, 貴珍亦以其家異人托生之地, 捨爲寺曰法王, 納田民,

욱면이 간 후에, 귀진도 또한 그의 집이 신이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 하여, 집을 희사해 절을 만들어 이름을 법왕사라 하고, 전민(田民)을 바쳤다.
久後廢爲丘墟. 有大師懷鏡, 與承宣劉碩,小卿李元長, 同願重營之. 鏡躬事土木, 始輸材,

오랜 후 절은 허물어져 쓸쓸한 빈터가 되었다. 이에 대사 희경이 승선, 유석, 소경, 이원장과 함께 발원하여 절을 중건했는데, 이 때 희경이 친히 토목공사를 맡아 재목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夢老父遺麻葛履各一. 又就古神社, 諭以佛理, 斫出祠側材木, 凡五載告畢.

그날 희경의 꿈에 노부가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례씩 주었다. 또 희경은 옛 신사에 나아가 불교의 이치를 깨우치고 신사 옆의 재목을 베어다 5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又加臧獲, 蔚爲東南名藍, 人以鏡爲貴珍後身.

또 노비까지 더하여 이 절은 매우 융성해졌으며 이 후 동남지방의 이름 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희경을 귀진의 후신이라 했다.

議曰: 按鄕中古傳, 郁面乃景德王代事也, 據徵(‘徵’字疑作‘珍’. 下亦同)本傳, 則元和三年戊子, 哀莊王時也.

논평하여 말하되. 고을 안의 고전을 살펴보면 욱면의 일은 경덕왕 시대의 사실이다. 징(徵)의 본전에 따르면 원화 3년 무자(808) 애장왕 때의 일이라 했다.
景德後歷惠恭, 宣德, 元聖, 昭聖. 哀莊等五代, 共六十餘年也. 徵先面後, 與鄕傳乖違, 然兩存之闕疑.

경덕왕 이후에 혜공왕,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년이나 된다. 귀징이 먼저가 되고 욱면이 뒤가 되므로 그 차례가 향전과 어긋난다. 여기에다 이 두 가지를 다 실어 세인의 의심을 없애려고 한다.

讚曰:
西隣古寺佛燈明,
용罷歸來夜二更.
自許一聲成一佛,
掌穿繩子直忘形.

찬을 지어 이르되,
“서쪽 마을 옛절에 불등은 밝은데
방아 찧고 갔다 오면 밤은 깊어 이경일세.
한 마디 염불마다 부처가 되어가니
노끈으로 손바닥 꿰어 그 몸뚱이를 잊었기 때문일세.”



*용- 방아 찧을 용(春자에서 日 대신에 臼)
(원본: http://blog.paran.com/kydong)

[이 설화가 주는 메시지]
미천(微賤)한 여종(婢)의 신분으로 부처님이 되어 극락왕생(極樂往生)했다는 이 설화는 당시 신라사회에 널리 퍼진 “누구든지 지극정성으로 아미타불을 염하고 섬기면 반드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정토사상, 즉 불국토사상과 흔구정토(欣求淨土)에 의해 신분을 뛰어넘으려는, 다시 말해서 천민의 신분을 깨뜨리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和衆生; 위로는 진리를 구하여 아래로 중생에게 베푼다)’의 부처님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설화는 경덕왕대(742~764), 강두(康州 혹은 剛州)의 설화로 기록되어 있지만, 연대나 장소의 고증에 의해 애장왕대(哀莊王代; 800~808) 혹은 헌덕왕대(憲德王代; 809~825) 때에 강주(剛州, 지금의 영주)에서 일어난 설화로 추정되고 있다.

먼저 아간 귀진(阿干 貴珍)이 신도 십여 명을 모아 만일기도계회(萬日祈禱契會)를 조직했다는 것이 주목된다. 여기에는 ‘다섯 비구 설화’에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결사(結社)가 표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애장왕(혹은 헌덕왕) 때에는 극락왕생을 기구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그리고 또하나 주인공 욱면(郁面)이는 비록 여종(婢)의 신분이지만,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여 생신(生身) 그대로 성불 극락왕생하고 있다.

여자이고 더구나 천민의 신분인 욱면이가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원효(元曉)의 여인·근결(女人·根缺) 및 일천제(一闡提)의 왕생을 인정하는 사상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당시의 미타불 신앙이 대중의 생활 가운데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현상이라 할 것이다. 어쨌든 상하의 계급제도가 엄격했던 신라사회에서 이처럼 천인왕생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신앙의 평등성을 의미함과 동시에 신라의 하층계급의 소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욱면이가 승천하는 모습도 "법당의 들보를 뚫고 나가 서쪽 교외에 이르자 육신을 버리고 진신(眞身)으로 변신하여,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대광명을 발하면서 사라져갔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성불(成佛)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광경은 신분이 종(婢)이었기 때문에 남의 눈을 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자로서 최대의 기쁨인 극락왕생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적 슬픔을 암시하고 있다.

≪승전 僧傳≫에 의하면 욱면이는 하가산(下柯山; 지금 경북 영주의 학가산)에 갔다가 이상한 꿈을 꾼 뒤 수도의 발심(發心)을 하였으며, 9년 동안 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욱면의 왕생은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현신(現身)으로 극락에 간다는 신라의 정토사상의 특징을 극적으로 보여준 설화로 평가되고 있다. (원본: 新羅 彌陀信仰의 고찰- 章輝玉, 동국대강사)




(배경음악: 찬불가 ‘성불’ - 정수년 해금독주)


영주 학가산 - 욱면이가 성불했던 미타사의 절터는 찾을 길 없다-

(사진: http://blog.naver.com/tyhan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