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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민족가요] '나그네 설움' (1940) - 백년설(白年雪) 노래

잠용(潛蓉) 2013. 8. 5. 16:31




'나그네 설움' (1940)
(작사 조경환/ 작곡 이재호/ 노래 백년설)


< 1 >
오늘도 걷는다마는 定處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다.
船窓 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限이 없어라.

< 2 >
他官 땅 밟아서 돈지 十年 넘어 半平生
사나이 가슴 속엔 恨이 서린다.
黃昏이 찾아들면 故鄕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 3 >
낯익은 거리다마는 異國보다 차워라
가야 할 地平線엔 太陽도 없어.
새벽 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갈소냐 ?



 

= 日帝 强占期 民族의 설움을 노래로 달래준

歌手 白年雪 =

 

백년설(白年雪, 1915~1980)은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의 가수이다. 본명은 이갑용(李甲龍) 또는 이창민(李昌民)이다. 1915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여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1938년 일본에서 ‘유랑극단’을 취입하여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두견화 사랑’, ‘마도로스 수기’ 등을 연속 유행시켰다. 대표곡은 1940년 발표되어 이후 오랫동안 널리 불린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이며, 이 밖에도 ‘삼각산 손님’, ‘고향길 부모길’, ‘남포불 역사’, ‘눈물의 백년화’, ‘산팔자 물팔자’, ‘천리정처’, ‘아주까리 수첩’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겨 놓았다.

1940년대를 대표하는 남자 가수로 활동했으며 뚜렷한 친일 행적을 남겼다.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모은 남인수, 김정구, 진방남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편이라면, 백년설은 음정을 흔들어 구수하게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친근한 맛을 주는 백년설의 창법은 서민적인 취향의 노래와 잘 어울려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했다. 1941년 지원병제가 실시되면서 ‘아들의 혈서’, ‘혈서지원’, ‘위문편지’, ‘지원병의 어머니’, ‘즐거운 상처’ 등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친일 가요를 다수 불렀다. 이 가운데 조명암이 작사한 ‘혈서지원’은 혈서를 쓰면서까지 지원병이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며 후렴구에는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라는 가사를 담고 있어 군국가요 가운데서도 친일성이 농후하다.그는 남인수, 박향림과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이는 백년설이 일제 강점기 말기에 군국가요를 부르는 등 일제의 태평양 전쟁 지원에 당시 유명 가수로서 일익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지냈으며 1961년에는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3년에 은퇴했다. 가수인 심연옥과 결혼한 뒤 1979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함께 이민을 갔으나 약 1년뒤 1980년 12월 6일그곳에서 사망했다.

고향 성주에 생가가 남아있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군민노래자랑 성격의 백년설가요제 추진이 백년설의 친일 경력으로 인해 논란이 이는 가운데, 2009년 10월에 모교인 성주고등학교 교정에 백년설의 흉상이 건립되었는데불과 두달 뒤, 누군가 흉상의 얼굴을 날카로운 무언가로 난자, 여러 곳에 긁힘 자국이 생기는 훼손사건이 발생했다. (위키백과) [사진: 성주군 성밖 숲에 세워진 노래비. 영남일보]

(대표곡)
두견화 사랑(1939)
나그네 설움(1940)
번지 없는 주막(1940)
산팔자 물팔자(1940)
대지의 항구(1941)
고향설(1942) 등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에서 태어난 가수 백년설의 본명은 이창민(李昌民)입니다. 성주농업보습학교를 마치고 은행원 등의 경험을 거쳤지만, 이창민의 마음 속에는 오직 한 가지 목표, 즉 작가가 되려는 꿈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한 시골청년에게 너무나 벅차고 힘겨운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오히려 가수로서의 재능이 꽃필 수 있는 계기가 다가왔으니 그것은 1930년대 태평레코드 운영진과의 운명적 만남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명을 백년설로 결정한 이창민은 가요작품 '유랑극단' 한 곡으로 단번에 인기가수 반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식민통치의 압제를 이기지 못하고 유랑민의 신세로 전락한 1930년대 당시 한국인의 처지와 슬픈 존재성을 상징적으로 잘 담아낸 명작입니다.

“한 많은 군악소리 우리들은 흐른다
쓸쓸한 가설극장 울고 새는 화톳불
낯설은 타국 땅에 뻐꾹새도 울기전
가리라 지향 없이 가리라 가리라”


이후로 가수 백년설은 태평레코드사의 간판격 가수로 자리를 잡고 잇따라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게 됩니다. 우선 떠오르는 백년설의 대표곡 목록을 손꼽아 보더라도 다음 작품이 당장 떠오릅니다. 하나같이 슬픈 아름다움을 지닌 주옥같은 가요작품이지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일자일루' '대지의 항구' '삼각산 손님' '고향 길 부모길' '고향설' '어머님 사랑' '남포불 역사' '눈물의 백년화' '두견화 사랑' '북방여로' '비오는 해관' '산 팔자 물 팔자' '상사월야' '석유등 길손' '신라제 길손'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에서 우리는 내 나라 내 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자 일본의 종살이로 전락해버렸던 식민지 시대 한국인의 내면 풍경을 감지합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로 시작되는 '번지 없는 주막'도 마찬가지로,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적막한 처지와 방황심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인 검열 당국자들도 '주막에 번지가 없다고 말한 속뜻이 무엇인가'를 따지며 생트집을 잡았다고 합니다. 위의 목록에 모두 담아내지 못했지만 백년설은 유난히 고향과 어머니를 다룬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살려 가사 제작에 백년설이 직접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광복이 되고, 전 국토는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살길을 찾아 쫓기듯 휘몰려 다니는 극도의 피로 속에서 백년설의 마음 속은 항시 좌절과 허무의식으로 휩싸였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삶이며, 무엇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 와중에서 목재소와 고아원을 경영해 보기도 했고, 친한 벗들과 더불어 레코드회사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어느 것에서도 마음의 충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백년설은 어느 종교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동안 가졌던 모든 것을 과감히 버렸습니다. 과거와의 결연한 단절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미국으로 떠나간 가수 백년설은 낯선 땅 어느 모퉁이에서 그의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식민지 시절, 과도한 심적 부담 속에서 고달프게 한 세상을 살아갔던 가수 백년설의 존재성을 다시금 차분하고 냉철하게, 또 한편으로는 따뜻한 손길로 더듬고 의미를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출처: (영남일보)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2: ‘가수 백년설의 발자취에 관한 사색’]


백년설 - 나그네 설움 (1940)


나그네 설움/전미경


현철 - 나그네 설움


배일호 - ‘나그네 설움’ (KBS 가요무대)


전미경 - ‘나그네 설움’(KBS 가요무대)


나그네 설음 보천보전자악단 제174집 (계몽기가요곡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