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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청곡

[추억의 가요] '서울 노래' (1934) - 채규엽

잠용(潛蓉) 2013. 8. 10. 13:54

일제강점기 서울 태평통 (현재 태평로 네거리) 조선총독부와 광화문이 보인다

(출처: 광신상고 20회)

 

'서울 노래' (1934)
조명암 작사/  안일파 작곡/ 노래 채규엽

 

(1)
漢陽城 옛 터에 종소리 스며들어,
나그네 가슴에도 노래가 서립니다.

 

(2)
漢江 물 푸른 줄기 말없이 흘러가네,
천만년 두고 흐를 서울의 꿈이런가?

 

(3)
밤거리 서울거리 네온이 아름답네,
가로수 푸른 잎에 노래도 '아리랑'

 

(4)
꽃피는 漢陽城 잎 트는 서울거리,
앞 南山 피는 구름 서울의 넋이런가?


'서울 노래' - 채규엽

 


10년, 20년, 30년 그리고 다시 6년 그 기나긴 세월
日帝에 빼앗긴 漢陽을 恨으로 노래불렀을 아! '서울 노래'

 

(사진: 1920년대 서울 노량진 노들나루) 

 

바리톤 가수 채규엽(崔奎燁)의 목소리가 경성제대 출신 안일파(安一波)가 작곡한 애수어린 가락과 함께 차분하게 들려온다. 짤막한 가사가 오히려 단아한 격조를 더하는 이 노래가 바로 1934년 5월 신보로 콜롬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서울 노래'...
그런데, '서울 노래' 가사지를 보면 제목 앞에 '개작'이라는 말이 보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사지 발행일이 5월 20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통상 그 달에 새로 발매하는 음반의 가사지는 바로 전 달 하순에 발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5월 신보로 발표된 '서울노래' 가사지는 4월 말에 나왔어야 하는데, 이것이 5월로 되어 있는 것이다.

 

광복 이전 유행가로는 극히 이례적인 이 '개작'의 이유는 1936년 4월호 <삼천리>잡지에 실려 있는 금지 음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934년 4월 19일자로 '서울 노래'가 발행금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금지 이유는 치안 방해... 목록에 있는 '서울 노래' 음반번호가 40508B인데 반해, 개작 '서울 노래'의 음반번호는 40508A이므로, 가사를 바꾸어 다시 음반을 제작해 5월 말에 새롭게 발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서울 노래'가 금지된 날짜이다. 5월 신보로 발표된 다른 곡들의 가사지 발행일이 4월 20일이고, 당시 일간지에 콜롬비아 5월 신보 첫 광고가 실린 것도 4월 20일인데, 바로 하루 전인 4월 19일에 금지를 당한 것이다. 발매된 지 3년이나 지난 뒤에야 금지된 '아리랑' 같은 곡들과는 달리 '서울 노래'는 거의 발행과 동시에 금지되고 말았다.

 

그러면, 이처럼 사전 검열과 다를 바 없는 신속한 금지조치가 내려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개작 이전 '서울 노래' 가사에 어떤 문제가 있었길래 이러했던 것일까? 비록 음반은 유통될 수 없었지만, 원래 '서울 노래'의 흔적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바로,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신보를 소개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만들어두었던 소책자에서 '서울 노래'의 개작 이전 원래 가사가 실려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1. 한양성 옛 터전에 옛날이 그리워라
무궁화 가지마다 꽃잎이 집니다

 

2. 한강물 푸른 줄기 오백 년 꿈이 자네
앞 남산 봉화불도 꺼진지 오랩니다

 

3. 밤거리 서울거리 네온이 아름답네
가로수 푸른 잎에 노래도 아리랑

 

4. 사롱 레스토랑 술잔에 띄운 꽃잎
옛날도 꿈이어라 추억도 쓰립니다

 

3절은 개작 이후와 같지만, 나머지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옛날이 그립다, 무궁화 꽃이 진다, 오백 년 꿈이 잔다, 봉화불이 꺼졌다, 추억이 쓰리다.., 하나같이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검열 담당자의 신경을 자극했음직한 구절들이다. 조선왕조 오백 년의 중심이었던 한양(서울), 나라의 상징인 무궁화는 지고, 독립국가의 모습을 나타내던 봉화불도 꺼져버린 서울...


'서울 노래'는 그야말로 일제 치하에서 울고 있는 '경성'이 아닌 '서울'을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노래'의 작사자는 이미 여러 차례 소개했던 당대 제일의 작사가 조명암이 아니던가? '서울 노래' 가사지를 보면 '동아일보 당선 가사'라는 문구가 있는데, 실제 1934년 1월 3일자 <동아일보>에 신춘 현상문예에서 가작으로 뽑힌 '서울 노래' 가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아일보>에서는 1933년 말에 신춘 현상문예 공고를 내면서 '서울 노래'라는 제목까지 먼저 정한 뒤 그 제목에 맞는 가사를 모집했고, 그 결과 당선작이 없이 가작으로 선정된 것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서울노래'이다. 신문 지면에 작자로 소개된 사람은 그냥 '명암'이었는데, 그가 바로 조명암이다 (조명암의 본명은 조영출이었다).


당시에는 이처럼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유행가 가사를 공모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작사가 조명암의 첫 작품이 바로 신춘문예를 통해 발표한 '서울 노래'였다는 사실은 기억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위에서 이미 말한대로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원작 '서울노래'는 현재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4절이 아니라 6절로 되어 있었다.

 

(원래 가사)

1. 한양성 옛 터전 옛날이 그리워라
무궁화 가지마다 꽃 잎이 집니다.

 

2. 한강물 푸른 줄기 오백 년 꿈이 자네
앞 남산 봉화불도 꺼진지 오랩니다.

 

3. ㅇㅇㅇ ㅇㅇㅇㅇ ㅇㅇㅇㅇ(不明)
종소리 스러진 밤 나그네가 웁니다.

 

4. 밤거리 서울거리 네온이 아름답네
가로수 푸른 잎에 노래도 아리랑.

 

5. 사롱 레스토랑 술잔에 띄운 꽃잎
옛날도 꿈이어라 추억도 쓰립니다.

 

6. 꽃 피는 삼천리 잎 트는 삼천리
아세아의 바람아 서울의 꿈을 깨(워)라.

 

원작에서 사라진 것은 앞 부분이 생략된 채 나와 있는 3절과 마지막 6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삭제는 유성기 음반의 녹음 시간이 3분 남짓에 불과하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노랫말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불명이 된 3절 앞 부분은 현재까지도 전혀 알아낼 길이 없긴 하지만, 신문사가 자진해서 생략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6절 마지막 구절은 작품 전체 분위기와는 달리 아예 '꿈을 깨(워)라'는 식의 사뭇 선동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이러한 대목을 음반회사가 과감하게 살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서울 노래'는 작자의 원작을 크게 축소하고 왜곡한 뒤에야 음반으로 나올 수 있었던 셈이다. 신문사의 자체 생략, 음반회사의 삭제, 검열에 따른 개작을 거친 뒤에야 어렵게 탄생한 '서울 노래'는 원작의 분위기를 채 반도 살리지 못 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축소되고 왜곡된 사연을 알고 난 뒤라면 '서울 노래'의 애상적 분위기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출처: 노래사랑방]

 


'서울 노래 - 신유 [가요무대 1449회 2016.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