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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백운화상]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한역]

잠용(潛蓉) 2014. 7. 1. 08:01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 上下 2卷)

 

고려 백운화상 경한(白雲和尙 景閑 1299~1374) 지음

 

(직지 필사본)

 

◇ 공민왕 21년(1372) 승려 경한(景閑:1299~1374)이 부처와 조사(祖師)의 게송(偈頌)·법어(法語)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抄錄) 책. 구분 불서. 수고본(手稿本)에 직접 초록한 것으로 상·하 2권으로 이루어졌다. 정식 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나, 흔히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경 直指心經》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경'은 '부처의 말씀'이나 '불법의 진리'를 담은 책이지만 이 책은 조사들의 법어 등을 모은 책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경'이라 부를 수는 없다.

 

내용은 먼저 상권(上卷)에서는《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 《오등회원 五燈會元》 등의 사전(史傳) 관계 문헌을 섭렵했다.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긴요한 것을 초록하여 편찬하였다. 권상(卷上)에서는 과거칠불(過去七佛)과 석가모니불로부터 불법을 계승한 천축국의 제1조(祖) 마하가섭(摩訶迦葉) 이하 보리달마(菩提達磨)까지의 28존자, 그리고 중국의 5조사 및 그 법통을 이은 후세의 국사 중 안국대사(安國大師)에 이르기까지의 것이 수록되었다. 하권(下卷)에는 아호대의화상(鵝湖大義和尙)부터 대법안선사(大法眼禪師)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대령선사(大嶺禪師)의 것도 초록되어 있다.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는 오도(悟道)의 명구를 줄여 나타낸 것이다.

 

(직지 원본: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판본은 경한이 입적한 3년 뒤인 1377년(우왕 3) 7월 청주목(淸州牧) 교외에 있던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인 주자로 찍어낸 것이 초간본(初刊本)이 된다. 상하 2권 중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하권 1책(첫장은 결락)뿐이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주자본은 활자의 주조술과 조판술이 미숙했던 고려시대에 관서(官署)가 아닌 지방의 사찰이 주성하여 찍은 것이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와 글자의 모양이 고르지 않고, 부족활자를 목활자로 섞어 사용했기 때문에 인쇄상태가 조잡하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만 전해지던 고려 주자본 중 유일하게 전래된 활자본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 되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최초로 금속활자를 창안하고 발전시킨 문화민족임을 실증하여 그 긍지를 세계에 과시한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2001년 9월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두산백과)

 

 

 

[한역] 백운화상 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白雲和尙 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 卷下)

 

◇ 아호대의화상 좌선명
(鵝湖大義和尙 坐禪銘) 

 

참선하며 도를 배우는 데는 몇 가지 모양새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공부하는 사람 자신이 능히 선택해야만 최상이 되는 것이니, 다만 형상(形相)을 잊어먹고 사심(死心=아무 생각도 않는 마음)으로 더불지 말라. 이러한 것은 의원으로도 치료키 어려운 병으로 가장 깊어지게 되나니라. 모름지기 앉아서 참구하며 연원(淵源)을 탐구해야 할지니 이 도(道)는 고금천하(古今天下)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니 정좌(正坐)로 앉아 단연하기를 태산과 같이하고 외외(巍巍=산이 우람한 모습)히 하여 공궐(空闕)을 지키는 따위는 요하지 말지니라.


모름지기 취모리(吹毛利)를 들어 서래제일의(西來第一義=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를 해부해야 할지니 눈을 곧바로 뜨고 눈썹을 파고 일으켜 반복하면서 그 거(渠=참구하는 話頭를 이름)를 간(看=참구한다는 뜻)하라. 그는 이 무엇인고? 돌아서(따라오는 도적을 잡는 형상) 도적을 잡자면 모름지기 적을 발견해야만 할지니 도적이 깊은 곳에 묻혀 숨어있다고 두려워 하지 말라. 지혜가 있으면 찰나경에도 잡을 수 있고 지혜가 없고보면 해를 거듭지내도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느니라.


깊은 장소에 홀연히 앉아 항상 죽은 듯이 하면서 천년만년을 다만 이렇게 하라. 만약 이렇게 하는 것을 가지고 선문종지(禪門宗旨)에 당하게 되면 염화미소(拈花微笑=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꽃을 들었을 때 가섭존자가 미소를 했다는 이심전심의 이치)로서 가풍(家風)을 끝냈으리라.

 

흑산(黑山)에 앉지 말라. 사수(死水)가 침입하나니 대지(大地)에 퍼져가는 것을 어떻게 금할 수 있으랴. 만약, 쇠로 된 눈과 동으로 된 눈동자(鐵眼銅睛=끝없이 정진하는 사람)를 가진 놈이라면 마음머리(心頭)를 부쳐서 능히 판단하게 될 것이니라. 모름지기 착도(着到=공부 성취를 말함)하는 것으로 시기를 삼아야 할찌니 포효로 꾸짖는 한소리의 외침을 내야 사자아(獅子兒=새끼사자)라 하리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할 때 비유로 말하되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때려야 한다는 것을...(마로스님이 앉는 것만 익히고 화두에 참구함이 없을 때 남악스님께서 기왓장을 갈고 있으니 마로가 보고 기왓장을 왜 가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기왓장이 어찌 거울이 됩니까? 그럼 너는 앉아만 있으면 성불이 되느냐? 하고 수레가 안 갈 때 수레를 때려야 하느냐? 소를 때려야 하느냐? 한데서 유래된 말씀) 또 보지 못했는가? 바위 앞에 솟아 고인 물이 한 길이나 맑은데 침침하고 적적해서 끝내 소리가 없다가 일조(一朝)에 고기나 용이 와서 휘져으면 물결이 뒷치고 용솟음치는 것이 거듭된다는 것을...


비유컨대 고요히 앉기만 하고 힘써 공부하지 아니하면 어느 시절에 마음 깨치는 급한 일에 급제(及第 =성취한다는 뜻)하리오? 부질없는 일에는 손을 내리고 눈을 높은 곳에 착안하여 금생(今生=이번 세상)만으로도 하여금 판단을 끝내야 하리라. 만약 묵묵한 것으로 어리석은 것처럼 하여 그대에게 알려주어도 알지 못하는 정도로 공부만 열심히 하라. 정신을 떨쳐 가다듬고 뜻을 붙여 살펴보면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어서 깨치기가 어렵지 않으리라.


이것은 십분(十分)이나 참다운 용의(用意)인 것이나 용맹한 장부라면 모름지기 기억하지 아니하느니 간절히 수참(須參)치 아니함을 말하지 말라. 고성(古聖)은 자자(孜孜=부지런스럽다)히 지남(指南= 지표를 뜻함)을 삼았느리나. 비록 옛날 집의 한가한 전지(田地)나 한번 가득해옴(=화창한 봄기운)을 얻지 못했을까? 좌선(坐禪)에서 부동하는 경지를 알기를 요할 것인데 바람이 불면 풀이 눕는다는 것을 모두 다 논할 것이다. 지금 사해(四海)가 청정(淸淨)한 거울이라 모든 종류의 여러 가지 모양(頭頭物物)이 모두 다 남에게 들림이요. 장단방원(長短方圓)은 스스로 알리라. 그전부터 그 실 같은 머리터럭 일찍이 달라지지 않았으니 만약 참선하는 바탕의 일 이루는 것을 묻는다면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지는 것이라 하리라.


대주선사(大珠禪師)께서 승(僧)이 일체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물음으로 인하여 선사가 이르시되 부처의 용(用)을 지으면 불성(佛性)이요. 도적의 용(用)을 지으면 이것이 적성(賊性)이요. 중생의 용을 지으면 이것이 중생성이니 성(性)은 형상이 없어서 용(用)을 따라 이름을 세우는 것이니 그러기에 경(經)에 이르시기를 일체현성(一切賢聖=현과 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모두 다 무위법(無爲法)으로서 차별을 두고 있는 것이라 하시다. 또 승(僧)이 묻되 법을 가히 설함이 없는 것이 설법(說法)이라 함은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함에 선사의 말씀이 반야체(般若體)이기 때문에 필경은 청정해서 한 물건도 가히 얻음이 없는 것이 이것을 이름하여 무법가설시명설법(無法可說 是名說法)이 되는 것이니라 하시다.  
 
불감화상(佛鑑和尙)께서 대중에 보이심에 승(僧)에게 들어 물으시되 조주(趙州스님)가 왜, 의주(義州)로 옮기지 아니하고 손으로 흐르는 물의 모양을 지었는가 하니 승(僧)이 이에 살핌(깨처짐)이 있게 되었다. 또 승(僧)이 법안(法眼스님)에게 묻되 저 상(相)을 취하지 아니하면 여여(如如)하여 동하지 않는다(금강경에 있는 구절) 하였으니 어떻게 하여야만 저 상을 취하지 아니하고 동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하니 법안이 이르시되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하니 그 승(僧)이 또 살펴감이 있으니 만약 이 두 분 화상(和尙)의 언구(言句)에서 보고 얻는다면 바야흐로 도선 남은악(道旋.嵐偃岳 두 스님의 이름)이 본래 항상 고요한 것을 알리라. 강과 하수(江河)는 본디 다투어 부어지나 원래는 스스로 흐르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것이 여여부동(如如不動)의 뜻이라 하시다.


나산(羅山)스님께서 일찍이 석상(石霜)스님께 묻되 기멸(起滅=번뇌망상)이 그치지 아니하는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석상스님이 이르시되 곧 바로 차가운 재와 마른 나무처럼 하여 일념(一念)을 만년으로 하여라. 온전히 맑게 하여 점을 끊어가라 하시니 나산스님은 계합되지 아니하여 다시 암두 스님 계시는데 가셔서 전과 같이 물으니 암두스님 꾸짖어 이르시되 이 누가 기멸(起滅)한다는 것인가? 하니 말 끝에(言下) 나산스님이 크게 깨치다.


보은측화상(報恩則和尙)이 법안스님께서 일찍이 어떤 사람이 오는 것을 봤는가? 물으시므로 청봉화상(靑峰和尙)이 오는 것을 봤습니다. 하니 법안스님이 이르시되 무슨 언구(言句)가 있었던가 하시니 보은측화상이 제가 묻기를 학인(學人)의 자기(自己)입니까? 하니 병정동자내구화(丙丁童子來求火)라고 했습니다. 하니 법안스님 이르시되 자네는 무엇을 알았는가 하시니 보은측이 말하기를 병정(丙丁)은 불에 속하니 불을 가지고 불을 구하는 것은 자기를 가지고 자기를 구하는 것이라고 알았습니다. 하니 법안스님 이르시되 이는 느낌으로 아는 것 뿐으로 너는 불법(佛法)을 깨쳐 알지 못하여 만약 이와 같이 다다르지 못하면 오늘에 답답함이 문득 일어나 중로(中路)에서 미끄러지리라 하시고 저 선지식의 500인 선지식(善知識)이 되더라도 나에게 말할 때 이게 아니라면 반드시 단처(短處)와 장처(長處)가 있게 되리니 그대로 물어보라 하시다. 보은측이 문득 묻되 어떤 것이 학인의 자기입니까? 하니 법안스님이 이르되 병정동자내구화(丙丁童子來求火)라 하시니 그 말 끝에(言下) 활연히 크게 깨치다.


석양기회선사(昔陽岐會禪師)께서 자명화상(慈明和尙)을 뵈옵고 여러 번 방장(方丈=조실스님방)을 찾아가 이익을 청하니 자명스님 이르시되 네 스스로 알아 가는 것이니 나는 너 양기(陽岐)와 같은 것이 아니니 간절히 마음을 하라(切心) 하시다. 하루는 산중 좁은 길에 이르러 양기가 자명스님을 눌러 앉히며 오늘 스님이 저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시면 스님을 쳐버리겠습니다 하니 스님이 소리를 가다듬어 말씀하기를 네가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니라 네가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지 나는 너 양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니 그 말 끝에 크게 깨치다.


용담화상(龍潭和尙)이 천황(天皇)스님께 묻되 제가 이곳에 옴으로부터 스님께서 심요(心要)를 지시(指示)하심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시니 천황스님 이르시되 네가 이곳에 옴으로부터 일찍이 심요(心要)를 지시하지 아니한 적이 없느니라 하시니 용담이 말하기를 어느 곳이 심요(心要)를 지시하지 아니했단 말이냐? 하니 천황스님께서 이르시되 네가 차를 받들고 오면 나는 너를 위해서 받고 네가 밥을 가지고 오면 너를 위해 받았고 네가 큰 절을 하면 나 또한 문득 머리를 숙였으니 어떤 것이 심요(心要)를 지시하지 아니했단 말이냐? 하시니 용담이 생각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천황스님이 이르시되 보는 것인즉 직하(直下)에 문득 보는 것이니 생각을 비기면(擬思) 곧 틀려진다 하시니 용담이 그 즉시 깨치다.


이에 용담이 다시 묻되 보림(保任=깨친 후에 완전무결한 수행)을 해야 합니까? 천황스님이 이르기를 성품에 맞게 소요(任性逍遙)하여 인연을 따라 널리 놓아라(隨綠放曠). 다만 범부의 마음을 끝내는 것이지 별로 성해가 없느니라(別無聖解)하시다.


한선사(閑禪師)께서 대중에 나타나 이르시되 상념(想念)을 내지 말라 본래 체(體)가 없는 것이니라. 대용(大用)이 현전하는데 시절을 말할게 없느니라. 하시고 후에 천화(遷化=임종)에 다다라 시자(侍者)에게 묻되 앉아서 간 자는 누구인가? 시자가 말하기를 승가(僧伽)입니다. 서서 간 자는 누구인가? 시자가 말하기를 승(僧)입니다. 하니 대중을 모으게 하고 스님은 이에 사방으로 일곱 발짝을 걷고 손을 들고 임종을 하시다.


위산이 하룻날 백장스님 앞에 시립(侍立)하니 백장스님이 묻되 누구인가 하니 영우(靈佑=위산스님의 이름)입니다 함에 백장스님 이르시되 너는 화로의 재를 헤쳐서 불이 있는가 찾아봐라 하시니 영우스님은 재를 헤쳐도 불이 없습니다 하니 백장스님은 몸을 일으켜 화로의 재를 헤쳐 조그마한 불을 찾아들고 보이시며 이르시되 이것이 불이 아니냐 하시니 영우스님이 크게 깨치시다.


남대수화상(南臺守和尙)께서 승(僧)이 적적무의(寂寂無依)할 때에 어떠합니까? 물음으로 인하여 이르시되 적적한 것은 귀신인 것이다 하시고 이에 송(頌)을 읇어 말씀하시되 남대에 조용히 앉았는데 한 화로의 향이(南臺靜坐一爐香) 해종일 엉겨 일만가지 걱정 있으나(終日萬慮忘) 마음을 쉬고 망상을 제하지 못한다면(不是息心除妄想) 도무지 무사함을 반면하여 가히 사랑만을 할 뿐이네(都綠無事可思量).


현사스님께서 경청 학인(鏡淸學人)이 총림(叢林=집단 수도 하는 곳)에 입로(入路)를 알려달라고 걸청(乞請)하므로 인하여 이르시되 너는 지금 시냇물 소리를 듣느냐? 경청이 이르되 듣습니다. 스님이 이르시되 이곳을 따라 들어가라 하시니 경청이 이 말씀 끝에 한날 들어가는 것을 믿었다. (깨침을 의미함). 현사스님께서 당(堂=법문하는 법상)에 올라 이르시되 내가 석가노자(釋迦老子=석자모니불)와 더불어 함께 참여했나니 또 이르라 참여해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때에 승(僧)이 있어 나와 예배하고 물으려고 하는데 스님은 이르되 틀렸다 틀렸다 하고 문득 자리에서 내리시다. 현장스님이 당(堂)에 오르사 제비 우는 소리를 듣고 이르시되 깊히 실상(實相)을 이야기하고 곧잘 법요(法要)를 설하는구나 하시고 자리에서 내려오시다.


현사(玄沙)스님께서 설봉스님으로 인하여 이르시되 두타(頭陀=탁발수행 행각)가 갖추었는데 어째서 출령(出嶺=산문 밖으로 나가는 것)해서 방호(方湖)에 노니지 아니하는가 하시니 설봉스님은 겨우 나와 미끄러지면서 다리와 머리와 다섯 손가락이 부딪쳐 아픈 것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하니 그만두라 두만두라, 달마는 동토(東土=동쪽)에 온 적이 없고 이조(二祖=혜가스님) 또한 서천(西天=印度)에 갔거나 돌아온 적이 없다 하시니 설봉스님 마침내 출령(出嶺)치 아니하시다.

문익법안선사(文益法眼禪師)께서 지장(地藏)스님이 상좌(上座=공부하는 최상 수행인)는 어떻게 가야 합니까? 하는 물음으로 인하여 법안스님이 이르시되 이엽행각(弛엽行脚=가만가만 가는 것)이니라 하시니 지장이 말하기를 이러한 행각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하니 법안스님이 이르시되 알지 못한다(不知)하시니 지장이 이르되 알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친절한 것입니까? 하니 도리어 법안스님이 활연히 깨치다.


법안(法眼)스님이 오공(悟空)과 더불어 향불을 향하여 합장한 다음 향수저를 잡고 오공에게 묻되 향수저를 짓지 아니하셨으니 사형(師兄)은 지금 무엇을 합니까? 하니 오공스님이 이르되 향수저를 지은 것입니다 하니 법안스님은 그 뜻을 긍정치 않다가 그뒤 이십일 후에야 그 뜻을 밝혀 아시다.


법안(法眼)스님과 동행(同行)하는 삼인(三人)이 법사승조의 말씀에 천지가 나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일체라는 것을 들어 말하기를 또한 심히 기괴한 것이라 하니 계침선사(桂琛禪師) 묻기를 상좌(上座)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자기와 더불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니 법안스님이 같도다 하니 계침선사 두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두 개다(兩個=다르다는 뜻) 하니 법안스님이 크게 놀라시다.


침선사(琛禪師=계침선사를 이름)께서 문 밖으로 법안과 동행하는 삼인을 보내는 차에 침선사 묻되 상좌여(上座=법안을 지칭함) 자네가 찾는 상도(常道)에 삼계가 오직 마음(三界唯心)이라 했다 하시고 뜰에 있는 돌(石)을 가리켜 이 돌이 마음 안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가 하니 법안이 말하기를 마음 안에 있다 하니 침선사 웃으며 행각인(行脚人:돌아 다니는 사람)이 무엇을 집착해 왔기에 마음 머리에다 괴석(塊石:돌덩어리)을 달고 다닌다는 말인가 하니 법안스님이 그 말끝에(言下)크게 깨치시다.


법안(法眼)스님께서 강남(江南)에 이왕(李王=人名)이 개당(開當:법자리)을 청함에 승록(僧錄=人名)이 말하기를 사부대중이 막 밀려들어 관첨(觀諂=자세히 두드러지게 봄)하는 일시인지라. 먼저 법좌(法座)를 차리기를 모두 끝냈습니다. 하므로 법안스님이 이르시되 다른 모든 대중들도 참다운 선지식(善知識)을 참견(參見)함을 끝냈는가 하니 승록(僧錄)이 그 말 끝에 (言下)크게 깨치시다.


법안(法眼)스님께서 승(僧)이 묻되 어떠한 것이 학인(學人=배워가는 사람)의 한 경권(一經卷)입니까? 하니 스님께서 이르시되 제목이 심히 분명한 것이다 하시다. 법안(法眼)스님께서 승(僧)이 묻되 성색이자(聲色二字)를 어떻게 터득하는 것입니까? 하므로 스님이 이르시되 대중 가운데 만약 승의 묻는 곳을 안다면 성색(聲色)을 터득함이 어렵지 아니하다 하시다.


법안(法眼)스님께서 승(僧)이 묻되 어떻게 한 것이 조계일적수(曹溪一適水=한방울 물)입니까? 하므로 이것이 조계일적수(曹溪一滴水)니라 하시니 그 때에 천태소국사(天台韶國師)가 시칙(時則=곁에 모시고 있음)해 있다가 활연히 크게 깨치다. 법안(法眼)스님께서 승(僧)이 묻되 교를 잇는데(承敎) 말이 있으나(有言) 주본(主本=주착하는 바탕)이 없다 하니 일체법을 세우는데 어떤 것이 주본이 없는 것입니까? 하므로 형체가 일어나도 바탕이 아니라면 이름을 구해도 이름이 못되는 것이니라 하시다. 법안(法眼)스님께서 세속의 한 아이를 찾아 왔으나 물어도 말하지 아니하므로 이에 송(頌)을 두어 이르시되 아이가 여덟살이 되었으나 물어도 말할 줄을 모르니 이것을 말을 아니함이 아니라 대법을 들기가 어렵다(大法難擧)는 거라 하시니 백운단(白雲端)스님께서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을 전부 다 들 수 있다고 하시다.


소수산주(紹修山主)가 세 번째로 영(지장스님이 계신)에 들어가 지장스님에게 참예하고 이에 이르되 이 사람(본인을 지칭함)은 특히 화상(和尙: 지장스님을 지칭하는 말)을 위하여 정주(汀州=地名)로 조차 이렇게 왔습니다. 어려움과 괴로움과 허다한 산령(山領: 수도인이 있는 산중)을 거치며 왔음은 무슨 향해지는 바가 있겠습니까? 하니 지장스님이 이르시되 허다한 산령(山嶺)을 거쳐왔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 하시다. 스님(지장)이 천거치 아니하고(천거=山中 에 있을 것을 허락함) 밤에 이르러 스님의 자리 앞에서 뫼시고 있는 차에 산주 이르기를 제가 백겁천생(百劫千生)에 일찍이 화상으로 더불어 위배(違背)한 것이 이렇게 와서 화상을 또 만나니 불안합니다 하니 지장스님이 몸을 일으켜 주장(住杖: 벌을 알릴 때 잡는 법장)을 잡아 면전(面前)에 세우고 이르시되 다만 이 낱것이 스승을 배반치 아니한 것이니라 하니 산주는 이로 조차 살펴 깨치다.


수산주(修山主)가 승(僧)에 묻되 어디서 오는가? 하시니 승이 이르되 취암(翠岩)스님이 옵니다 하니 스님 이르시되 취암은 어떠한 언구(言句)를 두어 도승(徒僧)에게 보이는가? 하니 승이 이르되 화상(취암을 지칭함)은 심상(보통 때)에 이르시기를 출문(出門)하면 미륵(彌勒)을 만나고 입문(入門)하면 석가(부처님)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시되 무슨 도(道)를 또 찾아 얻었는가 하시니 승이 문득 묻되 화상에서는 또 어떻게 하십니까? 하니 스님이 이르시되 출문(出門)하면 누구를 만나는 것이며 입문(入門)하면 무엇을 보는가 하시는 승이 그 말 끝에(言下) 살펴 깨쳐감이 있었다.


승(僧) 자방(子方)이 법안(法眼)에 묻기를 공(법안을 지칭함)께서는 오래도록 장경(長慶)스님을 뫼시고 지장스님을 이으셨으니 어떠한 뜻입니까? 하시니 이르시되 장경스님이 말씀하신 만상중(萬相中)에 독로신(몸뚱이를 홀로 드러낸다는 뜻)이라고 하신 말씀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하시니 자방이 불자(스님이 손에 들고 법을 보이는 물건)를 들어보이니 법안스님이 말씀하기를 만상(萬相)을 제했고 만상을 제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 자방이 이르되 만상을 제하지 아니했습니다.하니 법안스님 이르시되 독로신(獨露身)이냐? 하시니 자방이 여기에서 깨치고 찬탄해 가로되 나는 거의 그릇되게 차생(此生)을 보냈으므로소이다 하다.


수산주(修山主)가 법안스님과 함께 이야기 하는 차에 법안스님이 묻되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만상중에 독로신(獨露身)이라고 했느니 이것이 만상을 제하지 아니한 것인가? 산주 이르되 만상을 제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니 법안스님 이르시되 무엇을 말해서 제하고 제하지 아니한 것인가? 하니 산주가 몽명(夢明=어리둥절)하여 물러가 지장스님께서 떠나가는 수산주에게 묻되 자네가 가면 오래지 않아 다시 올 것인가? 산주(山主)가 이르되 있는 일을 해결 못했는데 어찌 산천을 다니는 것을 꺼리릿까? 하니 지장스님 말씀하시기를 네가 허다한 산천을 다니는 것은 나쁘지 아니 하니라 하시다.

 

산주는 그 말씀의 뜻을 논(論)하지 않고 이에 묻되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만상지중 독로신(獨露身)이라고 하는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니 지장스님 이르시되 너는 고인(古人)의 발만상 불발만상(撥萬相 不撥萬相)을 이르라 하시니 산주 말하기를 불발(만상을 제하지 아니함)입니다. 하니 지장스님이 이르시되 양개(兩介)라 하시니 산주가 놀라서 생각에 잠기며 물러나 묻되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고인의 발만상과 불발만상입니까? 하니 지장스님이 이르시되 무엇을 불러 만상(萬相)을 짓는 것인가? 하시니 산주(山主)가 바야흐로 크게 깨치고 절하고 하직하다.지장스님이 법안스님을 뵈오니 법안의 어의(語義)가 지장과 더불어 개시(開示)하니 전후가 일여(一如)하니라.

 

거돈선사께서 영남(嶺南)으로부터 오니 암두(巖頭)스님이 물어 가로되 영남일존공덕(嶺南一尊功德)을 성취했는가? 하니 거돈선사 가로되 성취한지가 오래 됐아오나 다만 점안(點眼)이 못됐을 뿐입니다. 점안을 꼭 해야겠느냐? 거돈선사 가로되 머리에서 드리운 일족(一足)을 꼭 해야겠습니다. 하고 예배하니, 암두스님 이르되 너는 무슨 도리를 봤는가? 거돈 이르되 저의 소견에 의거해 볼진대 붉은 화로 위에(紅爐上) 일점잔설(一點殘雪)같습니다. 하니 아두스님 가로되 사자새끼가 잘도 능히 성내어 우는구나 하시다(哮吼). (註=一尊은 부처님 불상 한 분을 말한 것이고 점안(點眼)은 불상조성이 끝나고 마무리하는 법식인데 머리에서 드리워 내린 일족(一足)을 점안해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말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관계 없는 내용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암두스님이 송(頌)하여 이르시되 차생(此生)에 쉬지 못하면 어느 때에 쉬(生)리요. 쉬는 것이 금생(今生)에 있음을 다 같이 알아야만 할찌라. 마음이 쉬어 다만 인연일 뿐 망상(妄想)이 없으면 망(妄)이 제해지고 마음이 쉬면 이것이 쉬는 때인 것이니라 하시다.

 

소를 찾으려면 모름지기 자취를 찾아야 하고 도(道)를 배우려면 무심을 찾아야 할지니 자취가 있으면 소는 도리어 있는 것이고 무심하면 도는 찾기 쉬운 것이라 하시고 또 유념(唯念)하시되 문전(門前)에 있는 나무가 새가 부딪쳐 날아오는 것을 능히 용납하지만 무심(無心)하며 부르면서 몸을 솟아 올라도 돌아가는 것을 생각지 않나니 만약 사람의 마음이 나무와 같다면 도(道)로 더불어 서로 어긋남이 없으리라 하시다.


분양무덕화상(汾陽無德和尙)이 하룻날 대중(大衆)에게 이르되 간밤 꿈에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주육(酒肉)과 지전(紙錢)을 찾으시니 순속(循俗=속계를 떠돌고 있음)을 면치 못한 것이니 제사(祭祀)의 일을 두어 고당(庫堂)에 마련하라 하고 속세간(俗世間)의 위패를 설치해 놓으니 화상이 술잔 올리는 예를 행하고 고기로 전지처럼 만들기를 다하고 지사와 두수(일보는 사람들)를 모아 그 나머지를 소반에다 흩어 고이도록 하고 지사등을 돌려 보내고 무덕 화상이 그 자리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고기를 씹으며 좋아하고 있으니 대중이 모두 주육승(酒肉僧)을 어찌 견디어 스승의 법으로 삼을까 보냐 하고 허리를 안고 모두 가 버리고 오직 자명(慈明)과 대우(大愚)와 천(泉)과 대도(大道) 등 육칠인이 있을 뿐이니라. 무덕화상이 다음날 상당(上堂=법상에 오름)해서 이르시되 허다한 한귀(閑鬼) 야신(野神)이 한 소반의 술과 고기를 먹어 버리고 양편에 있는 지전(紙錢)을 몽땅 가지고 갔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이 대중은 지엽(枝葉)은 없고 오직 모든 진실만 있도다 하고 문득 법좌를 내려오시다.


동사화상(東寺和尙)이 앙산(昻山)에게 묻되 너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하니 광남(廣南)사람입니다 하다.
동사화상이 이르되 광남에 진해명주(鎭海明珠)가 있다함을 들었는데 일찍이 수득한 적이 있습니까? 하니 앙산 이르되 수득(收得)해 왔습니다 하다 동사화상이 명주(明珠)가 어떠한 빛을 내던가 하니 앙산이 말하기를 달이 밝으면 곧 나타나고 달이 어두우면 곧 숨는 것입니다. 하니 화상이 어째서 내가 보도록 보여주지 아니하는가? 하니 앙산이 차수(叉手=손을 모아쥐고 예를 표하는 형식)하고 앞에 가까이 이르러 혜적(스님의 이름)이 어제 도착하며 위산(스님 이름)이 이 명주를 찾아 가고 곧 말로써는 가히 지을 수 없고 이치로는 가히 펼 수 없는 것을 얻었습니다 하다.


원오(圓悟)스님이 불감(佛鑑)스님에게 말씀 하시기를 이 이치는 어떠한 이치인가? 하니 불감스님은 그 때는 말이 없다가 홀연히 하루는 원오스님께 말하기를 앙산이 동사스님을 본 인연을 내가 말하겠습니다. 동사스님이 당시에 한 알의 명주(明珠)를 찾았다면 앙산이 그 즉시 고로(구슬을 담는 그릇)를 내어 놓았을 것입니다 하니 원오(圓悟)스님이 깊이 긍정하시다.


천태덕소국사(天台德韶國師)는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후신(지자대사가 덕소국사로 다시 태어남)인데 나이 열 다섯 살에 범승(인도에서 온 승려)이 보고 출가시키기를 권하므로 당나라 동광(同光=年號) 중에 서주 땅에 가서 투자암주(投子庵主)를 친견하는 차에 용아로는 계합(契合)되지 못하고 임천(臨川) 땅에 이르러 정혜(淨蕙)를 뵈옵고 대중을 따라 지내는 것 뿐 참견(누구를 찾아 보는 일)할 계획이 없이 있는데 어떤 승(僧)이 법안(法眼)에게 묻되 십이시중(十二時中) 동안에 어떻게 만가지 인연을 한꺼번에 쉽니까? 하니 공이 너와 더불어 인연이 된다고 말한다면 색과 심은 둘이 아니(色心不二)라야 할 것이니 과연 어떠한 물건이 너에게 인연이 된다고 하겠는냐? 하는 것을 덕소스님은 듣고 사무치게 이상함을 느끼고 또 하루는 승(僧)이 묻되 어떠한 것이 조원일적수(육조스님의 근본 흐르는 맥을 말함)입니까? 하니 수안(水眼)스님이 이르시되 이것이 조원일적수니라 하니 그 승(僧)이 말뜻을 몰라 어찌할 줄을 모르는 그 곁에서 덕소스님은 활연히 크게 깨치시다.

 

평생응체(평생 엉긴 체증)가 완연히 눈 녹듯 하여 드디어 깨친 바를 법안스님에게 물으니 너는 이 다음에 국왕이 스승을 삼는 바가 되고 조사(祖師)가 되어 그 도광(道光)이 크기가 나와 같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로부터 제방(諸方)에서 다르게 불려지고 도광고금현건(옛과 지금의 현묘한 근기)이 더불어 결택하여 작은 자취에 머물지 아니하라 하시고 상당(법상에 오르심)하여 말씀하시기를 영산(부처님 당시)의 부촉은 분명하니 제상좌(모든 수행 높은 사람)는 일시(一時)에 험취(驗取)하라. 만약 체험하여 취득하면 다시 별다른 이치가 있음이 없음이니 비유하건대 허공에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두운 것과 같으며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일체유위세계(一切有爲世界)가 모두 다 밝게 나타날 것이며 지금에 이르도록 털끝만큼도 차별됨이 없으니 다시 누구에게 부촉할 것이리요. 조사(祖師) 이르되 마음은 본래 마음이요 본심은 법이 있는 것이 아니리. 법이 있고 본심이 있다면 마음도 아니고 본법도 아니리라. 이것이 영산(부처님 당시)의 부촉하는 표방된 모습이니라.


모든 상좌(수행 높은 사람)야 철저히 깨쳐 알아야 하리라. 국왕은 은혜도 갚기 어렵고 제불(諸佛)의 은혜도 갚기 어렵고 부모와 사장(師長)의 은혜도 갚기 어렵고 시주(施主)의 은혜도 갚기 어려우니 만약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철저히 도안(道眼)을 밝혀 반야성해(般若性海)에 들어가야만 옳으리라 하시니 오래 서 있으면서 지중하더라. 

 

설봉(雪峰)스님이 암두스님과 함께 풍주 별산진저(풍주 땅 별산진저)에 이르러 암두스님은 날마다 잠만 자시기에 설봉스님이 평상시 좌선하시다가 하루는 불러 사형(師兄)이여! 사형은 일어나십시요. 하니 암두스님 이르시되 아니 무엇하는가? 행각하는 도처에서 쪼들림만 있게 됩니다. 오늘 사형님과 여기에 오니 사형님은 공부는 아니 하시고 잠만 주무십니다. 하시니 암두스님이 꾸짖어 말하되 잠을 씹는 것이다(잠에 혼몽함이 없고 잠을 먹는다는 뜻). 너희는 매일 상위에 앉아 흡사 칠촌리(폐촌)에 있는 토지와 같아서 타시후일(他時後日)에 도깨비가 들끓는 사람의 집에 남녀가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하신다.


설봉스님이 스스로 가슴을 치며 제가 이 속에 온재(마음이 편안하다는 뜻)한 것이 못되니 감히 자만하지 않겠습니다 하다. 암두스님이 이르시되 내가 장차 이후 고봉정상(高峰頂上)을 향하여 초암(草庵)을 맺고 대교(큰 교화)를 번양하는 때 한낱의 어화(語話)를 지으리라.


설봉스님 이르되 저는 실로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암두스님 이르시되 실로 이와 같을진대 너의 견처(見處=깨친 자리)에 의거하여 낱낱이 통해오라 옳은 곳이면 너와 더불어 증명하고 옳지 못한 곳은 너와 더불어 깎아버리리라. 사(師: 설봉스님) 이르시되 제가 처음 염관(스님 이름)에 이르러 염관스님이 당(堂=법자리)에 올라 색공(色空)의 의(義)를 드는 것을 보고 한낱 입처(入處)를 얻었습니다 하다. 암두스님이 이르시되 여기서 삼십년이 가도록 간절히 거착(이 일을 발설하는 것)하기를 꺼릴 것이다 하시고 또 동산스님의 게송을 빌어 이르되, 간절히 남을 따라 찾는 것을 꺼릴 것이니 멀리 또 멀리 나와 더불어 성겨지니라. 내가 이제 홀로 스스로 가는데 가는 곳마다 그를 만나누나. 그는 지금 내가 아니라도 나는 지금 바로 그 일세 뻑뻑히 모름지기 이렇게 알면 바야흐로 여여함에 계합함을 얻으리 하시다.


암두스님이 이르시되 만약 이같으면 스스로를 구하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하시니 설봉스님 또 말씀하시기를 후(後)에 덕산스님에게 묻되 위로조차 종승 가운데에 일이 학인에게 도리어 분(分)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덕산이 한 방망이로 때리고 이르되 뭐라 하는가? 하시니 당시의 화려함이 칠통을 벗어난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하니 암두스님 꾸짖어 이르시되 네가 문(門)을 쫓아 들어온 것을 듣지 못한 것이니 이는 가진(본분의 보배)이 아니니라 하시다.

 

사(설봉) 이르시되 다음 후로는 어떤 것이 이것입니까? 암두스님 이르시되 물을 줄 아는 것이다 물을 줄 아는 것이다(解問解問) 만약 대교(大敎)를 배양코자 할 때에는 하나하나가 자기의 흉금으로까지 유출하는 것이니 가지고 와서 나와 더불어 개천개지(蓋天蓋地)해 갈지니라 하니 그 말 끝에 크게 깨치고 예를 짓고 일어나 소리를 이어 이르되 오늘에야 비로소 별산에서 도를 이루었습니다 하다. 설봉, 암두, 동산 3인이 상중(湘中)으로부터 강남에 들었다가 신오산(新吳山) 아래 이르러 동산스님이 시냇물 가에서 발을 씻다가 한 나물 잎을 보고 기뻐하며 두 사람에 가르쳐 이르되 이 산에 반드시 도인(道人)이 있으니 흐르는 물따라 내려가 찾으리라 하니 설봉스님이 이르되 너의 지안(智眼)이 크게 탁(濁)하니 다른 날 어떻게 사람을 가려 보리오? 저가 복을 아까와 하지 아니하니 이렇게 산에 머무는 것이 무엇이 이익 되리오? 하다.


설봉스님께서 한 승려가 산중탁암(山中卓菴= 산중에 우뚝한 절)에 오래 살면서 머리를 깎지 아니하고 스스로 한 자루 나무 표주박을 만들어 가지고 시냇물 가에서 물을 떠 마실 때에 승(僧)이 있어 묻되 어떠한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주(스님)가 표주박을 세우고 이르되 시냇물이 깊으면 표주박 자루가 길다 하다. 승이 돌아와 스님에게 보이므로 인하여 설봉스님 이르시되 심히 괴이하다 하시다. 스님이 하루는 시자(侍者)에게 머리 깎는 칼을 가지고 가도록 하는데 서로 보자 물으시되 도(道)를 얻었으면 너의 머리를 깎지 않는 것이냐? 하니 주(主=초암의 암주)가 문득 머리를 씻고 스님 앞에 호궤(毫軌= 스승 앞에 엄숙한 존경의 앉음 표시)하니 문득 그의 머리를 깎아 주시다.


장노화상(長盧和尙)이 이 이야기(시냇물이 깊으면 표주박 자루가 길다)와 아울러 동산(洞山)의 행각(行却)하는 일을 들어 한 암주(庵主)에게 묻되 무슨 도리(道理)를 봤길래 문득 이 산에 머무는가 하시니 암주스님 이르되 저는 두 마리 진흙소가 싸우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껏 소식이 없습니다. 스님(장노화상) 이르시되 모든 인자(仁者)야 문정(門庭)에 시설한 것은 저 동상(洞上)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태고의 진풍이니 모름지기 이 설봉암주시니라 하시다. 설봉스님께서 승(僧)이 묻되 어떠한 것이 촉목보리(觸目菩提=눈에 부딪는 것마다 보리)입니까? 하므로 스님 이르시되 돌이켜 등롱(燈籠)을 보느냐 하시다.


대수법진선사(大隨法眞禪師)께서 승(僧)에게 묻되 겁화(劫火=세계가 파멸할 때 일어나는 큰 불)가 통연(洞然=밝고 환하다)하여 대천(우주)이 함께 무너지는데 알지 못하거늘 이것도(這介法) 무너지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하므로 스님 이르시되 무너진다 하시다(壞) .승(僧)이 이르되 그렇다면 남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다스님 이르시되 남을 따라 감이니라. 또 수산주(修山主)에게 물으니 여전히 닦아가면 무너지지 않느니라 하다. 어떤 것이 무너지지 아니 하는 것인가? 하니 수산주 이르되 대천(大天=삼천 대천 세계 우주)과 같은 것이니라 하다. 대수(大隨)스님께서 승(僧)이 묻되 대수 산속에 도리어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므로 스님 이르시되 있다(有)하시다. 승이 이르되 어떤 것이 대수 산속의 불법(佛法)입니까? 스님이 이르시되 돌머리(石頭)가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으니라 하시다.

 

지통선사(知桶禪師)께서 귀종회하(歸宗會下=귀종스님을 따라 모여 있는 대중 속)에 계실 때 홀연히 한밤에 순찰을 돌다가 울부짖되 나는 이미 크게 깨쳤다 하니 대중은 다 놀란 것이다. 날이 밝자 종사(宗師=귀종스님)께서 법좌에 올라 대중을 모이도록 하고 어젯 밤 크게 깨쳤다는 승(僧)은 나오너라 하니 사(師=智通禪師)가 나와 말하기를 지통입니다 하니 종사께서 이르시되 너는 어떠한 도리를 보았건대 크게 깨쳤다고 말하는가? 말해 일러보라 하니 대해 말하기를 사고(師姑=여승의 별칭)는 원대로 여인이 지은 것입니다 하다.


현정선사(玄挺禪師)가 하룻날 오조(五租)스님께 시립(侍立)하고 있는 차에 화엄(花嚴)이란 승(僧)이 와서 오조에게 묻되 진성중연기(참된 성품 가운데서 연기하는 것)라 함이 그 뜻이 어떠합니까? 하니 오조스님께 묵연(默然)하시다가 이에 말씀하시기를 대덕(大德=묻는 승을 지칭함)이 정히 일념을 일으켜 물어오는 때가 진성중연기인 것이니라 하니 그 승이 말 끝에(言下) 크게 깨치다.


보수화상(寶壽和尙)이 어느 날 시장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니 한 사람이 벽면(壁面)을 붙잡고 한 주먹 갈기니 저가(맞은 사람) 이르되 이렇게 되면 얼굴이 없어지겠다 하는데 보수화상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깨치다. 염해 이르되(云=문제를 다시 들어 이른다는 말임) 도리어 저의 이러한 것을 알았으니 면목(面目)이 없다고 이르리오? 용이 옷소매에 떨쳐 열으니 전체가 나타남이로다.


신안국사(神晏國師)께서 하루는 설봉스님께 참여했는데 설봉스님이 그 인연이 순수함을 아시고 홀연히 뉴쥬(杻住=앉아 있을 때 쓰는 손잡이)를 일으키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니 국사 석연히 깨치고 그 깨친 마음도 잊어버리고 오직 손을 들어 흔들어 이끌고 말 뿐이라. 설봉스님 이르시되 너는 도리(道理)를 지었느냐 하니 국사 이르시되 어떤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다. 설봉스님이 이에 어루만지며 인가(印可=인정)하시다.


영운지근선사(霙雲志勤禪師)가 위산(爲山)스님 회하(會下)에 있을 때 복사꽃(桃花)을 보고 도(道)를 깨침으로 인하여 게(偈)를 두어 가로되,

 

“삼십년 동안 칼을 찾는 나그네가(三十年來尋劍客)

이 몇 번이나 낙엽철이 돌아와 다시 또 가지만 거두었더니(畿廻落葉又抽枝)

한번 복사꽃을 본 후에(自役一見棹花後)

곧 지금에 이르러 또 의심하지 않노라(直至如今更不疑)”

 

위산(爲山)스님에게 이 게(偈)를 보이니 위산스님이 이르시되 연을 따라(복사꽃을 봄으로) 깨쳐 통달했으니 영원히 퇴실치 말고 자기 스스로 보호하여 가지라(善自護持) 하시다.


앙산(仰山)스님이 어느 날 향암(香岩)스님을 뵙고 이에 묻되 요즈음 (近日) 사형(師兄)께서는 견처(見處=깨친 경지)가 어떠하십니까? 한데 향암스님이 이르시되 나의 견처에서 의거하건대 한 물건도 없이 가히 유정(有情= 중생)을 대한다 하니 앙산스님 이르시되 당신이 아는 것은 오히려 경계(境界)에 있다 하시니 향암스님 이르시되 나야 다만 이렇겠거니와 사형(師兄)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하시니 앙산스님 이르시되 그대는 어찌 능히 아는 것이 없고 한 법도 없이 가히 마땅히 유정(有情=일체중생)을 만난다고 하는고 하시다.


경조미호화상(京兆米胡和尙)께서 왕상시(王常侍)를 방문하신 때 상시가 사무(事務)를 보는 차에 붓을 들고 사무를 보거늘 스님(米胡和尙) 가라사대 그대 허공을 판득(判得)했는가? 하니 상시는 이에 붓을 놓고 집에 들어가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기에 스님께서는 그를 의심하고 다음 날 차를 마시는 자리를 베푼 자리에서 꽃 핀 바위에 의지하여 어제 스님이 허공을 판득했느냐는 말귀를 물었을 때 붓을 놓고 집에 들어가 나오지 아니하며 문득 서로 보지 못하게 된 것을 물으시니 상시 이르되 사자는 때린 사람을 물지만 개는 흙덩이를 뭅니다(獅子?人韓?逐塊=흙덩이로 때리면 사자는 때린 사람을 물지만 개는 흙덩이를 문다는 말은 사자는 영리하고 개는 어리석다는 말이다) 하니 겨우 듣자마자 상시(常侍)를 밀쳐 내시면서 밝게 웃고 알았다 하시다. 상시 이르되 알았다 함은 없지 않지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하니 스님 이르시되 그럼 들어보여라 하시다. 상시 이에 한짝의 젓가치(一雙箸)를 들어 일으키니 스님 이르시되 이것은 들 여우의 넋(野狐精)이구나 하니 상시 이르되 이놈이 깨쳤습니다 하다.


미호화상(京兆和尙)이 승(僧)으로 하여금 앙산(仰山)에게 물어 가로되 요즘 사람이 깨친 것이 있습니까? 앙산(仰山) 이르시되 깨친 것은 없지 아니하나 제 이두(第二頭=知解分別)에 떨어져 있음을 어찌 하리요? 하니 미호화상이 깊이 긍정하다. 경산(徑山)스님께서 대종제(代宗帝)가 부르시므로 인하여 궐하(闕下)에 이르러 친히 첨예(瞻禮=처음 뵙는다는 뜻)하고 하루는 스님이 궐내에 있으면서 대종제를 뵙기 위해 일어나니 제(帝) 이르되 스님은 어찌 일어나기까지 하십니까? 하니 스님이 이르시되 단월(檀越=불교의 신도를 말함. 단종제를 신도로 지칭하는 뜻)께서 일상의 기거동작인 네 가지(行住坐臥) 중에서 어찌 빈도(貧道=스님 자신)를 보셨습니까? 하니 제(帝)가 크게 기뻐하다.


덕산선감선사(德山宣鑑禪師)께서 처음 용담(龍潭)에 도착하여 묻되 오랫동안 용담을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담도 보이지 아니하고 용도 나타나지 않는구나 하니 용담스님이 이르시되 자네가 직접 용담에 오지 아니했는가? 덕산스님이 예를 올리고 물러나다. 용담(龍潭)스님을 찾아 입실하며(入室=스님방에 들다) 밤이 깊어졌는데 스님께서 말씀하되 자네도 자네 처소로 물러가라 하시니 덕산스님이 정중히 문을 열고 나오니 밖이 어두운지라 밖이 어둡습니다 하니 용담스님이 지촉(紙燭)에다 불을 붙여주시는데 겨우 지촉을 붙잡아 용담스님이 문득 불을 꺼버리니 덕산 스님이 불각(不覺=깜짝할 사이에)에 실성(失聲=허튼 소리처럼 하는 말)으로 이르되 나는 지금으로부터 이후로는 다시 천하노화상(天下老和尙)의 혀끝(舌頭)을 의심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고 드디어 소초(小抄=금강경을 소초한 책)를 가지고 이르되 떡을 그려서 가히 먹는 것을 충당하고 그림을 문득 태우고 나서 이에 스승을 하직함을 예로서 올리다.


동산양개선사(洞山良介禪師)가 운암화상(雲岩和尙)에게 물으시되 백년 후에 홀연히 사람이 있어 스님께서 지금과 똑같은 모양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묻는다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하시니 운암이 양구(良久=한참 있다가)하다가 이르되 다만 이것은 스님이 오래 생각을 두셨던 일입니다 하고 운암이 이르되 승당자(承當者=합당한 자)는 개사(介事=이 일)를 크게 모름지기 자세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시고 스님(운암)이 물을 지나가다 물로 인한 것(因過水都波=百年後還貌得師眞下 백년 후에 홀연히 사람이 있어 지금과 똑같은 모양을 얻을 수 있습니까?)을 깨치고 이에 게(偈)를 두어 가로사대 간절히 남에 의지하여 참은 일을 꺼리나니 멀리 멀리 나와는 성그러지는 까닭이니라. 내가 스스로 가면서 가는 곳마다 그대를 만나서 지나니 그대는 이제 바로 나인 것인데 내가 이제 그대가 아니리요, 뻑뻑히 모름지기 이렇게 알면은 바야흐로 여여(如如)함에 계합됨을 얻으리라 하다.


동산(洞山)스님이 승(僧)에게 묻되 세간(世間)에 어떠한 것이 가장 괴로움인고? 하시니 승(僧)이 이르되 지옥이 가장 괴롭습니다 하니 동산(洞山)스님이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하시고 이 옷을 입고 있으면서 대사(大事=마음을 깨치는 일)를 밝히지 못한 것이 비로소 가장 괴로운 것이니라 하시다.


영준선사(令遵禪師)께서 취미(翠微)스님에게 묻되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西來=달마스님이 東土에 오신 것을 뜻함) 적적(的的)한 뜻(意)인가  하시니 취미스님 이르시되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려 너에게 말을 하리라 선사(禪師)가 잠시 있다가 가로되 사람이 없으면 스님의 말씀을 청하겠습니다 하니 취미스님이 대나무(竹)를 가리키며 말씀하시되 저 대나무 줄기가 얼마나 길게 자라고 얼마나 짧게 자라고 말 것인가 물으시니 선사가 그 말 끝에 크게 깨치다(言下大悟)


고정간선사(高亭簡禪師)께서 처음으로 강 건너에 있는 덕산스님을 보고 멀리 향하여 합장하고 불러 이르되 스님을 찾아 뵙지 못했습니다 하니 덕산스님이 손에 쥐고 있는 부채를 들어 고정간선사를 부르니 선사 홀연히 깨치고 비켜 달려가면서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더라.

 

운암(雲巖)스님이 승(僧)의 사리염(梨念=깊이 생각)하는 것이 무슨 경(經)인가? 대답해 이르되 유마경(維摩經)입니다. 하니 우암스님 이르시되 유마경은 묻지 않는다 염하는 경이 무슨 경인고? 이 승(僧)이 여기에서 득입(得入)하는 것이 있었다. 운암스님께서 동산스님 계시는 삼봉에 머물러 있으면서 암자에 머무는 때 여러 날 당제(堂齊=스님들이 모여 식사하는 곳)에 나가지 아니하기에 동산스님께서 물으시되 너는 어찌하여 당제에 나가지 아니하느냐? 하시니 운암선사 이르시되 매일 천신(天神)이 있어서 밥을 보내옵니다 하시다.

 

동산스님께서 이르시되 장차 이르노니 너는 이러한 사람이었구나 이러한 견해를 지으니 늦게 나에게 오라 하시매 운암선사가 늦게 이르니 동산스님께서 불러 이르시되 사리(思履=생각에 깊이 잠김)하느냐? 하시니 운암선사가 네에! 하니 동산스님께서 이르시되 선(善)도 생각지 말고 악(惡)도 생각지 않는 것이 무엇인고?하시니 사(師=운암스님)는 암중(菴中)에 돌아가 연좌(宴座=심신을 편안히 하여 坐禪함)하는데 천신(天神)들이 여러 날 동안 와서 보이지는 않고 이에 울고 가더라.


천복고(薦福古)가 이 이야기(此話)를 들어 이르되 여러 상좌(上座=수양 높은 사람)야 저 고인(古人)이 신심(身心)이 이러함을 얻었어도 오히려 귀신들이 보게 됨을 입거늘 어찌 하물며 지금의 사람이 하루 종일 밤새도록 자만에만 가득해 있음이리오? 천신(天神) 토지신(土地神)이 낱낱히 너희의 손과 다리(手脚)의 좋고 나쁜 것을 다 보리라. 저 홀연히 식득(識得)하여 너의 이 일념심(一念心)이 불망(不忘)되는 지금 같은 대의(大意)를 위한다면 다만 모든 사람에게 참학하는 마음(參學底心)과 수행하는 마음(修行底心)을 쉬어버리길 요할찌니 한 뭉치의 흙과 돌처럼 되며 찬 재와 꺼진 불처럼 하며 만약 능히 이와 같이 하여 상응(相應)하는 분(分)을 얻을지니 만약 이와 같이 하지 못한다면 비록 네가 육도만행(六道萬行)을 닦고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닦아 다만 한낱 보화불(報化佛)을 얻었더라도 보지 못했는가 보신화신(報身化身)도 참 부처가 아니며 또 설법자(說法者)도 아니라고 이르는 것을...


운거(雲居)스님이 승(僧)이 어떠한 것이 일법(一法)입니까? 물으므로 인하여 말씀하시되 어떤 것이 제법(諸法)이냐? 하시니 승(僧)이 이르되 알지 못하여 어떻게 해야 알겠습니까? 하다. 스님 이르시되 일법(一法)은 너의 본심(本心)이니 마음과 다른 성품은 이것은 하나면서 이것은 둘이니라. 승(僧)이 예배하니 스님이 이에 송을 두어 이르시되 일법은 제법의 근본이요(一法諸法宗) 만법은 일심으로 통하나니 (萬法一心通) 오직 마음은 너의 성품이라(唯心唯汝性) 다르다 같다 말하지 아니한다(不說異兼同). 조산본적선사(曹山本寂禪師)께서 경청(鏡淸)이 청허(淸虛=푸른 허공)의 이치를 물음에 있어 필경 몸이 없을 때 어떻습니까? 물으므로 인하여 말씀하시되 이치는 이와 같거니와 일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니 가로되 여여(如如)한 일입니다 하다(如理如事).


조산(曹山)스님께서 덕상좌(德上座)에게 묻되 부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만물에 응해서 형체를 나타내는 것이 물 속에 있는 달과 같다 했으니 어떻게 해야만 이것에 적응한 도리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니 덕상좌가 이르되 나귀가 우물 속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니 조산스님이 이르시되 도인즉(道則) 크게 죽이는 도이나(大殺道) 도는 다 못 들어가 이름을 얻는다 하시니 덕상좌 이르되 스님은 또 어떻습니까? 하니 스님 말씀하시기를 우물이 나귀를 보는 것과 같느니라 하시다.


경청(鏡淸)스님이 승(僧)에게 묻되 문 밖에 나는 소리는 무엇인고 하니 승(僧)이 이르되 빗방울 소리입니다 하니 스님 가로되 중생이 전도(顚倒)하는 것은 자기를 미(迷)하고 바깥 물건을 쫓는 것이니라 하시다. 또 승에게 묻되 문밖의 이 소리는 무슨 소리인고 하시니 승이 이르되 뱀이 개구리를 씹는 소리입니다 하니 스님 이르시되 중생의 괴로움이 있다고 말하니 중생의 괴로움이 다시 있는 것이구나 하시다.


처진선사(處眞禪師)가 대중에게 보여 이르시되 한 조각 응연한 빛이 찬란한데 헤아리는 마음으로 추구하고자 하면 마침내 보지 못하나니 병연히 빛나면서 집착을 던져 인정(人情)을 활연히 하며 대사가 분명한 것을 (大事分明) 모두 판단함이니 이는 쾌활해서 얽매임이 없으며 만량의 황금으로도 바꾸지 못함이라 천성(千聖)이 나타나 와도 넉넉하여 모두 다 그곳의 그림자를 향하여 나타나는 것이니라 하시다.


신라대령선사(新羅大領禪師)가 승(僧)이 묻되 어떤 것이 일체처청정(一切處淸淨)입니까? 하므로 인하여 스님(대령선사)이 이르시되 경지(瓊枝=붉은 옥의 가지)를 자르면 마디마다 보배인 것이요 전단(栓檀=전단 향나무)을 뽀개면 조각마다 모두 다 향이니라 하시고 송(頌)으로 이르시되 하늘과 땅이 모두 다 황금의 나라요. 만유(萬有=만가지 있는 것)가 온전하고 정묘신(淨妙身=진리의 몸)을 나투는 것이니라 하시다.


계탐선사(桂探禪師)께서 수산주(修山主)에게 물으시되 어디서 왔는고, 하시니 수산주 이르되 남방(南方=남쪽)에서 왔습니다 하니 선사께서 이르시되 남쪽에서는 요즘 불법(佛法)이 어떠한고 하시니 수산주 이르되 상량호호(商量浩浩=깨치지 아니하고 헤아림만 많음)합니다 함에 스님 이르시되 끝내 나는 그 속에서 먹고 마시고 하겠노라. 수산주 가로되 끝내 이 삼계(三界=이 세상)는 어떠하리까? 스님 이르시되 너는 무엇을 불러 삼계라고 하는고? 하니 수산주는 그 말 끝에(言下) 깨침이 있어 송(頌)으로 가로되 밭에 씨앗 심고 밥을 지어 먹는 것은 집의 항상된 일이라도 배부르지 아니한 것은 남이 알지 못하니라 하다.


지장(地藏)스님이 보복(保福)이라는 승(僧)에게 묻되 저 가운데 있는 불법(佛法)이 어떻게 남에게 보이는고? 하니 승(僧=保福) 이르되 너의 눈을 가리고 네가 볼래야 보지 못하게 하고, 너의 귀를 막아 들을래도 듣지 못하게 하며, 너의 뜻을 주저 앉혀 너로 하여금 분별함을 얻지 못하게 하리라 합니다 하니 지장스님이 이르되 내가 너에게 묻노니 나는 너의 눈을 가리우지 않으리니 너는 무엇을 보며 너의 귀를 막지 않으리니 무엇을 들으며 너희 뜻을 주저 앉히지 않으리니 너는 무엇을 분별하느냐 하신데 승(僧)이 이 말(言下)에 크게 깨치다.

 

혜구선사(慧球禪師)께서 대중에게 보여 이르시되 내 요즈음 죽 먹고 밥 먹은 힘으로 형제들을 위하여 거창(擧唱=들어 외친다)하노니 마침내 이 항상치 못하다가도(不常) 만약에 살펴서 요기함을 얻으면 문득 이 산하대지가 너로 더불어 밝음을 발하여지나니 이 도(道)는 항상 옳은 것이며 또한 능히 구경(究竟=마침내 완성)이 되느니라. 만약 문수(文殊보살)의 문을 따라 들어가는 자는 흙과 나무와 기왓장과 자갈 등이 너를 도와 기틀을 발하게 할 것이며, 만약 관음(觀音보살)의 문을 따라 들어오는 자에게는 일체 좋고 나쁜 음향 내지 하루살이 모기 구렁이 같은 것들이 너를 위해 법을 거량할 것이며, 만약 보현문(普賢보살의 문하)을 따라들어오는 자에게는 발걸음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다다르리니 내가 이제 이 세가지 문의 방편으로서 너에게 보이노니 한짝의 저븜(젓가락)을 가지고 큰 바닷물을 휘젓는 것 같이 하며 저 고기와 용으로 하여금 물이 그들의 목숨이 됨을 알도록하라 하겠는가? 만약, 지혜의 눈이 엄히 살펴본다면 네 마음대로 백 가지 선교(善巧=잘 해내는 꾀)를 쓴다고 해도 구경(究竟)은 되지 못하니라 하시다.


파능(巴陵)스님께서 승(僧)이 조사(祖師)의 뜻의 선(禪)과 교의(敎義)의 뜻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물음으로 인하여 이르시되 닭은 추우면 횃대나무에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속으로 들어가니 근원은 같은 것인데 가지가 다르게 된 것이다 하시다.


동산수초선사(洞山守初禪師)가 운문스님께 요즘 어느 곳을 떠나셨는가? 물으시므로 인하여 이르시되 살펴 건너 갑니다 하시다. 운문스님 이르시되 지금 여름이 어느 곳에 있는고? 하심에 선사는 호남(湖南=地名)과 보자(普慈=地名)에 있습니다 하시다. 운문스님 이르시되 너에게 삼돈봉(三頓棒=한꺼번에 세 번 때리는 몽둥이)을 치리라 하시다. 다음 날 선사가 물어 이르시되 어제 스님께서 저에게 삼돈봉을 치리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 허물이 어떤 곳에 있습니까? 하니 운문스님 이르시되 밥주머니가 또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이다 하시니 수초선사가 그 말 끝에 크게 깨치다.


천복(薦福)스님이 대중에게 보여 이르시되 곧 모름지기 공겁시(空劫時=地球등 천체가 이루어지고 머물고 무너진 다음에 없는 상태로 한 동안 가는데 이것을 空劫이라함)를 향하여 자기를 요취(了取=깨쳐서 알아냄)해야 할 것이니 포태(胞胎=어머님 태 속)에서의 자기 모습을 갖추기 이전에는 어떤 것을 인취(認取)하는 것이 공겁시(空劫時)의 자기니라. 본래 명자(名字)가 없건만 방편으로 여래정법안장열반묘심(如來正法眼藏涅槃妙心)으로 부르는 것이니라 하시다.


청활선사(淸豁禪師)께서 처음 공부에 참예하여 암주(菴主)스님께 계여(契如=계합됨이 있는 것)함이 있은 후에 수룡(睡龍)스님을 뵈었는데 하루는 물으시되 어떠한 존숙(尊宿=존경하는 어른)을 뵙고 왔길래 이처럼 깨달았는가 하니 선사 이르시되 일찍이 대장(大章)스님을 찾아 뵙고 뚜렷한 입처(入處]를 믿었습니다. 하니 수룡스님이 이에 상당(上堂=법자리에 오르심)대중을 소집하시곤 청활(淸豁)을 불러 도리(思梨=향을 피우는 층대 형용사로는 깊히 생각한다고 하며 발음을 사리라 하고, 장소는 도리라고 발음함)에 나와 대중을 향하여 향을 사주면서 깨친 자리(悟處)를 말하라 노승(老僧=睡龍스님 자신을 지칭함)은 너와 더불어 증명(證明)하리라 하시니 선사(청활) 문득 나와 향을 잡고 이르되 향은 이미 탓거니와 깨친 것은 깨친 것이 아닙니다(悟卽不悟).하니 수룡스님이 크게 기뻐하시며 깨쳤음을 허락하시다.


현각선사(玄覺禪師)가 산비둘기 우는 소리를 듣고 이에 승(僧)에게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니 승이 이르되 산비둘기 소리입니다 하니 현각스님 이르시되 무간지옥을 초래함을 얻지 않고자 하자면(欲得不招無間業) 부처님의 올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지어다(莫謗如來正法輪) 하시다.


소국사(韶國師)에게 승(僧)이 묻되 나타태자(那咤太子)가 뼈를 꺾어 아버지께 드리고 살을 발라서 어머니께 드린 후에 저 연화대상(蓮花臺上)에 본신(本身)을 나타내어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을 했다 하는데 살피지 못하옵건대 어떤 것이 태자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까? 함으로 인하여 소국사 말씀 하시기를 개집(犬藏)에서 상좌(上座=수행 높은 사람)를 본 것이니라 하시다. 묻던 승(僧)이 이르되 이렇다면 대천(大千=삼천대천세계)이 동일한 진여성(眞如性)입니다 하니 소국사 말씀 하시기를 희사(흡사)한 곡(曲)에 의지하여 듣기는 들었지만 다시 또 바람이 불어 또 다른 곡조(曲調) 가운데 있는구나 하시다.


목암(牧菴禪師)이 대중에게 들어 보이면서 알겠느냐? 뼈와 살을 다 가져다 부모에게 돌리면 분명하게 본래의 몸(本來身)을 보리라 이르되 부모도 나와 친한 바가 아니니 누가 이에 가장 친한 자인가? 다른 모든 사람이 날마다 이 몸으로 하여금 흙을 나르고 나무를 져 나르기를 청하는 것이 있으니 또 다르다. 이것이 본래의 몸(本來身)인가? 부모의 몸(父母身)인가? 만약에 부모의 몸이라고 이르면 본래의 몸을 등지는 것이요. 만약 본래의 몸이라고 한다면 또 부모의 몸을 등지나니 또 이르되 필경은 어떠한 것인가? 홀연히 사람이 와서 두 가지가 다 그렇다 하면 어떻게 대하리오? 하시다.


낭야(瑯惹禪師)가 장수좌주(長水座主)가 청정본연(淸淨本然)컨대 어떻게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云何忽生山河大地) 물으므로 인하여 사(師)께서 소리를 더 크게 높여 가로되 청정본연한데 어째서 산하대지가 생겼는가 하니 장수좌주가 그 언하(言下)에 크게 깨치다.


우적상공(于迪相公)이 약산(藥山=유엄선사)을 방문하여 약산에게 묻기를 어떠한 것이 이 부처입니까? 한데 약산이 상공을 부르니 상공이 네! 하자 약산이 이르되 이는 무엇인가? 하니 상공이 그 말에(言下) 크게 깨치다. 수산(首山)스님에게 승(僧)이 묻기를 일체제불(一切諸佛)이 이 경(經)을 쫓아 나왔다고 하니 어떤 것이 이 경입니까? 하니 수산스님이 말하기를 저성저성(低聲低聲=낮은 소리) 말소리를 낮추라 하시다.


신조여법선사(神照如法禪師)가 법지존자(法智尊者)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내가 어떤 것이 이 경의 왕(經王=경중에 가장 으뜸가는 경)입니까? 존자(尊者) 가라사되 너는 내가 주관하는 삼년 동안의 고사(庫事=책과 중요품을 간직하고 있는 창고를 지키고 다스리는 일)를 위하였으니 도리어 너를 위해 말하리라. 삼년 동안 그 명(命=시키는 일)을 경건히 이어다 마치었는니라, 신조여법선사가 다시 청해 가로되 이제 마땅히 설하여 주옵소서. 존자께서는 큰 소리로 한 번 신조여래법사를 부르시니 법사 홀연히 깨닫고 게(偈)를 지어 가로되 곳곳에서 돌아가는 길을 만나니 (處處逢歸路) 부딪는 곳마다 고향이로다(頭頭是故鄕). 본래 이루어진 일이거니(本來現成事) 어찌 반드시 사양하길 기다리는가 하다.


서천(西天=印度)의 칠현녀(七賢女= 일곱 명의 현명한 여자)가 함께 시다림(屍多林=시체가 많이 있는 수풀)에 가서 노닐다가 사시(死屍=사람 죽은 시체)를 보는 중에 한 현녀가 시체를 가리키며 모든 현녀에게 이르되 시체는 여기에 있으나 사람은 어디를 향하여 갔는가? (여기서는 사람의 넋을 말함) 하니 그 중에 또 한 현녀가 참 그렇네 하니 모든 현녀가 살펴봄이 각각 깨침에 계합(契悟) 되다. 제석(帝釋=제석천이라는 하늘)이 감동하여 꽃을 흩어 공양을 올리며 이르되 오직 원컨대 모든 현녀시여 어떤 수구하는 바가 있사옵니까? 저는 언제나 몸을 마치도록 현녀의 구하는 바를 공급하겠습니다 하니 현녀 이르되 아가(我家=우리집)에는 사사칠보(四事七寶.四事=의복,음식,탕약,와구 七寶=金, 銀, 琉璃, 차거, 마노, 호박, 진주)가 모두 다 구족한데 오직 세 가지 물건만을 필요하고 있나니 첫째는 음지와 양지가 없는 땅 한 조각, 둘째는 뿌리가 없는 나무 한 그루, 셋째는 소리를 질러도 메아리가 나지 아니하는 산골짝 한 곳이노라. 제석이 이르되 구하시는 일체를 제가 다 가지고 있사오니 만약 이 세 가지 물건이라면 저는 진실로 못 가지고 있습니다 하니 현녀가 가로되 네가 이러한 물건이 없이 어찌 사람을 제도할 줄 알으리요? 하니 제석은 할 말이 없었도다.


광효안선사(光孝安禪師)가 산대(山台=산의 중기슭)의 운봉(雲峰=구름이 싸도는 봉우리)에 떼집을 얽어 살면서 장좌불와(長坐不臥=밤낮 앉기만 하고 눕지 아니함)하면서 온 종일 한 끼만 먹고 비단 옷을 입지 아니하고 낡아진 옷과 모자로 춥고 더운 것을 견디고 지내며 사는 차에 소국사(韶國師)를 심방한데 국사께서 물으시되 삼계에 법이 없거니 어느 곳에서 법을 구하며 사대가 본래 공(空)했거늘 부처는 어디에 머물며 자네는 어떤 곳을 향하여 노승(老僧=소국사 자신을 지칭함)을 보는가? 하시니 효광안선사 말하기를 오늘은 스님의 견처(見處=깨달은 경지)를 잡는데 실패했습니다 하니 국사 말씀하시되 이 무엇인가 하니 안선사(安禪師)가 향대(香臺=향불 켜는 화로)를 뒤집어 업고 나가니 국사는 안선사가 그릇(器)이 됨을 인정하시다.

 

안선사가 어느 날 화엄경(華嚴經)을 열람하다가 몸에 취착하는 바가 없어서 저 닦음에 집착됨이 없고 저 법에도 머무름이 없어서 과거는 이미 멸하고 미래는 이르지 아니 했으며 현재는 공적(空寂)하다는 데에 이르러 여기에 미치자 활연히 일순여(一旬餘=십여일 남짓)를 선정(禪定)에 들어 지내고 정(定)으로조차 일어나니 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영리(靈利)해지며 현현(玄玄)한 이치가 나타나고 하루 후에 편안히 앉기를 힘쓰며 대정(大定=큰 선정)에 들었는데 하룻날 정중(定中)에 두명의 승려(僧侶)를 보았으니 전함(殿檻=법당의 난간)에 의지하여 있으면서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천신(天神)이 있어서 이들을 시위(侍衛)하고 경청(傾聽)하고 있으면서 꽤 오래 되자 갑자기 악귀(惡鬼)가 나타나니 꾸짖고 그 발자취를 쓸어 버리고 또 전당의 난간에 의지한 승려에게 법을 묻고 있더라. 이에 처음엔 불법(佛法)을 논(論)하고 후에 세제(世諦=세상의 일들)를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안선사 가로되 한론(閑論=쓸데없는 이야기)도 오히려 저러하거늘 하물며 주법자(主法者)가 북을 울리고 법좌(法座)에 올랐으면 무익한 일을 말함이 있으리요? 안선사는 이로조차 몸을 마치도록 일찌기 하루도 세상 일을 말로 이야기 하지 아니한 고로 안선사는 죽어 사유(門+者維=火葬=茶毘라고도 )함에 이르러 혀가 타지 아니하고 부드럽기가 연한 연꽃 같았느니라.


화엄좌주(華嚴座主=화엄경을 전문으로 강설하는 講主스님)가 대주선사(大珠禪師)에게 묻되 어째서 스님께서는 청청한 푸른 대나무가 모두 다 진여(眞如)이며 누런빛 꿀이 반야가 아님이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아니 하시옵니까? 하니 선사의 대답이 법신(法身)은 상이 없어서(無相) 푸른 대나무도 형상(形相)을 이루기도 하지만 저 황화취죽(黃花翠竹)으로 번신과 반야(般若)가 있는 것은 아니나니 고로 경에 이르되 부처님의 참의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만물에 응하여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물속에 있는 달과 같음이니 황화(黃花)가 만약 반야(般若)라면 반야가 곧 무정물(無情物)과 같은 것이며 취죽(翠竹=푸른 대나무)이 만일 법신이라면 대나무가 능히 응용(應用)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니라 하니 좌주(座主)가 항복하고 그뜻을 깨치니라.


덕산밀선사(德山密禪師)의 회하(會下)에 한 선객(禪客=참선하는 사람)이 있으니 공용(功用)=공부를 사용함)이 심히 날카로운데도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개는 불성이 없다는 話頭=無字話頭)를 오랫동안 들어도 들어감이 없더니 하룻날 홀연히 개의 머리가 햇바퀴처럼(日輪) 큰 개가 입을 벌리고 선객을 먹으려 달려들어서 선객은 자리를 피해서 달아났다. 이웃사람이 그 이유를 물은즉 선객은 그 일을 진술하고 드디어 덕산스님에게 아뢰온즉 덕산스님이 가로되 두려워 할게 아니라 하시며 다만 매우 정신을 가다듬고 그 개의 입을 벌리기를 기다렸다가 부딪치고 완전히 입속으로 들어가 버려라 하신데 선객이 가르친대로 앉아 밤중에 이르러 개가 다시 선객의 앞에 나타나거늘 머리로써 힘을 다해 한번 부딪치니 머리가 궤짝 속에 박히자 이에 확연(廓然)이 깨치니 후에 문수도법(文殊道法=문수보살의 도법)을 내어 크게 떨쳤으니 즉 진선사(眞禪師)인 것이니라.

 

규봉종밀선사(圭峯宗密)께서 이르시되 다만 가히 공적(空寂)으로 자체(自體)를 삼고 색신(色身)을 인정치 말지며 영지(靈知)로서 자심(自心)을 삼고 망념(妄念)을 인정치 말찌니 망념이 일어나면 도무지 따르지 아니한 즉 목숨을 마치는 때에 다달아 자연히 업(業)이 거리끼지 아니하여 천상인간(天上人間)의 뜻에 따라 의탁할 것이니 이곳이 이치를 깨치는 사람의 아침 저녁으로 수행하는 요절(要節=중요한 대목)인 것이니라 하다.

 

장졸상공(張拙相公)이 석상(石霜)스님께 참예(參禮)했는데 스님이 선배(先輩=장졸상공)의 성(姓)은 무엇입니까? 물은즉 말씀하기를 이름은 졸이요 성은 장입니다 하니 스님이 이르되 공교로움(잔꾀)을 참으면 마침내 믿지를 못하는 것이니 졸(拙)은 어디로 쫓아 왔는고? 하니 장(張)이 그 말에서 살펴감이 있어서 이에 송(頌)을 지어 이르시되,

 

“먼저 적조(寂照=깨친 경지서 조명하는 것)가 하사(河沙=많은 세계)에 두루 했음을 밝히니(先明寂照偏河沙) 범부와 성인에게 머금어진 영(靈)이 같은 한 집이로세(凡靈含靈共一家)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하면 전체가 나타나지만(一念不生全體現)

육근이 겨우 움직이기만 하면 구름처럼 막힘을 입나니(六根才動被雲薯)

 

번뇌를 끊으려고 하면 거듭 병이 더하고 (斷除煩惱重增病)

보리도를 취향코져함도 이 삿된 것이로다(趣向菩提亦是邪).

수 많은 인연을 수순하며 가애가 없으면 (隧順衆綠無可碍)

생사열반이 이 허공의 꽃일 것이로다(生死涅槃是空花)” 하다.

 

운문(雲門)스님이 승에게 묻되 먼저 적조가 하사에 두루 밝혔다 함은 (先明寂照遍河沙) 어찌 이 장졸(張拙)의 말이 함이겠느냐 하니 승(僧)이 이르되 스님의 말씀은 말에 떨어진 것입니다 하다(話墮).


향엄선사(香嚴禪師)께서 이르시되 지난해(去年)에 가난한 것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에 가난한 것이 비로소 가난한 것이니 지난해에 송곳을 세운 곳에 금년에도 송곳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니 앙산(仰山)스님이 이르되 여래선(如來禪)은 사형(師兄)님께서 맡겠으나 조사선(祖師禪)은 꿈에 잊지 아니합니다 하니 향암스님 이르시되 나에게 한 기틀(一機)이 있으니 눈 깜짝할 때 저것을 본다(瞬目視伊)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면 따로 사미(沙彌=막 불문에 들어 수행이 아직 미숙한 승려)를 부른다 하시니 앙산(仰山)이 이르되 사형(師兄)께서 조사선(祖師禪)을 아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다.


도오(道吾)스님에게 승(僧)이 묻되 어떻한 것이 조사선(祖師禪)입니까? 하는 물음으로 인하여 이르시되 멀리 강남을 생각하는 속(遙憶江南三月裡)에 자고가 우는 곳에 백 가지 꽃이 향기롭도다(啼處百花香)하다(자고=꿩과에 속하는 메추리 같은 새) 백운단화상(白雲端和尙)이 이르되 깨치고 나면 모름지기 사람을 만나야 옳다(遇人故=사람을 만난다는 말은 중생을 만나 제도함을 뜻함) 만약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한낱 파촉땅의 꼬리없는 원숭이와 같아서 재롱으로 사람의 웃음을 자아낼 뿐이로다. 깊이 이 도리를 믿는 자는 만중에 하나가 없으니 진실로 가히 연민스럽다 진실로 가히 연민스럽도다 하다.


원오근화상(圓悟勤和尙)이 오조연화상(五祖演和尙)에 시립(侍立=뫼시고 있다는 뜻)할새 우연히 제형(提刑=사람의 이름)의 해인환촉과산중(解印還蜀過山中)이라는 글을 펴 놓고 도(道)를 묻는 이야기를 하는 차에 오조연화상(五祖演和尙)이 물어 가라사되 제형이 일찍이 소염시(小炎詩)를 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두 글구(兩句=소염시에 나오는 말씀하고저 하는 글구를 이름)는 자못 선지(禪旨)에 가까운 것이다. 이르되 자주 소옥(小玉)을 찾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단랑(丹郞=소리내는 예쁜 남자)이 소리를 얻기 위한 것이다.

 

제형이 이 뜻을 알았느니라 조사(五祖) 가라사대 이 뜻을 또 자세하게 살피라 원오를 물어 가로되 제형이 화상(조사스님)이 말씀하는 소염시를 듣고 알았겠습니까? 조사 가라시대 그는 다만 소리를 듣고 간 것이니라. 원오(圓悟) 가라사대 본문(本文)에 이르되 다만 단랑(丹郞) 소리를 알아 얻었다면 또 무엇을 한다 함은 옳지 못하옵니다. 조사님께 승(僧)이 묻되 어떤 것이 조사님(祖師=달마대사)이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입니까? 하니 조사(祖師=趙州스님) 답하시되 뜰 앞에 잣나무니라 하시었느니라 이것을 들어 깨침을 알려주니 홀연히 크게 깨닫고 바삐 나가 제비가 난간 위를 날으다가 나래로 북을 치며 우는 것을 보고 스스로 이르되 이것이 어찌 이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향을 소매에 묻혀 방에 든 듯하며 온통히 깨친 바입니다 하니 조사 가라사대 불조대사는 조그마한 근기(根器)와 열등한 지혜로 능히 지어서 되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희 기쁨을 도우리라 하시고 조사께서 산중기구(山中耆舊=산중에 계시는 老스님)를 청해놓고 이르시되 내 시자(侍子: 스님을 뫼시는 사람)가 조사선(祖師禪)을 참득(參得)했다 하시다 깨친 것을 인가(認可)했음인 것입니다.

 

응암화화상(應는岩華和尙)이 이르시되 옛날의 노숙(老宿=오래 공부한 스님)이 심안이 밝지 못하여 황급히 유도(有道=도를 생각함)에 나가다가 바로(正) 하루 아침에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본원력(本願力=자신의 원력)으로써 자취를 산림에 감추고 혹 20년 30년을 누생(累生)의 헤아림을 판단하고 심식(心識)을 문지르고 갈아서 하여금 깨끗하므로 들어남에 미치면 터럭 끝 만큼도 과환(過患)이 없고 경계를 만나고 인연에 부딪쳐도 담벽처럼 기와나 돌 자갈처럼 보여서 절대로 세간(世間=세상의 속된 일)에 대한 것은 일념(一念)도 없는 것이 마음은 마치 큰 허공 같아서 담연응적(湛然凝寂)하나니 금강(金剛)이라 이르니라. 정체(正體)는 드러나게 깨끗하고 둥글고 아름다운 연후에 공용이 없는 마음을 쓰는 것이니 비록 무심(無心)으로 세상에 응하는 마음이 항상 빈틈이 없으며 비록 무심으로 중생을 제도하나 중생을 제도하는 마음이 패연(覇然:살아넘친다는 뜻)하여 끝이 없나니 옛날 노숙(上古 老宿)이 유도(有道=도에 뜻을 둠)에 나가 분별함에 계증(契證)되는 묘(妙)가 교결(皎潔)하기가 나타난 해와 같이 빼어나 굳세게 비침과 같으니 어찌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리요?
 

고령선사(古靈禪師)께서 행각(行脚)하시는 때에 백장조사(百丈祖師)를 만나고 복주(福州)에 있는 대중사(大中寺)에 돌아와 수업을 할 때 사(師=여기는 고령스님의 은사인 계현선사를 이름)께서 묻되 너는 그동안 나를 여의고 밖에 있으면서 어떠한 일의 업을 얻었느냐? 하시매 대답해 이르되 저는 그동안 다니면서 절에서 일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대답하고 어느 날 스님이 고령으로 하여금 목욕탕에서 때를 밀라고 하신바 고령이 스님의 등을 밀다가 하는 말이 불전(佛展=부처님 뫼신 法堂)은 근사한테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하는 것이다. 스님이 괴이한 생각이 들어 머리를 돌려 돌아보니 고령이 또 말하되 부처는 비록 영험이 없으나 또한 능히 방광(放光=빛을 낸다)을 하는구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날 스님이 밝은 창문 밑에서 경을 보시는데 벌(蜂)이 열린 문을 두고 창문의 종이를 뚫고 나가려고 애를 쓰는데 고령이 이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이 이렇게 넓고 문이 열렸는데 나가지 아니하고 장지(窓紙)만 뚫고 있느니 무엇을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때 스님은 경을 접고 묻되 네가 행각(行脚)할 때에 어떠한 삶을 만났었는가? 먼저와 그 다음의 너의 하는 말을 들으니 이상한 일이다. 나를 위해 법을 설하라.이때 고령이 법좌(法座)에 올라 백장문풍(百丈文風=백장스님의 가문의 법풍)을 말로써 이르니 영광은 홀로 빛나 멀리 근진을 벗어나고 진상은 몸체 드러났으니 문자에 구애 받지 아니하며 심성은 본래 물들지 아니하여 본래부터 원성한 것이로다. 다만 망연만 여읜다면 곧 여여한 부처인 곳이니라 하다.


현소화상(玄素和尙)이 어느날 도자(屠者=소 잡는 백정)가 와서 예로소 뵈옵고 그들의 거처에 가서 공양(供養=식사) 드시기를 원하니 스님은 기꺼이 따라가시어 대중이 모두 다 의아해하니 화상이 말씀하시되 불성(佛性)은 평등하며 현우(賢愚)가 일치함이라 다만 가히 제도할 자는 곧 제도해야 할 것인데 다시 무슨 차별을 둘 것이리요? 하시다.


대진화상이 처음으로 석두(石頭)스님 회상에 참여했을 때 석두스님이 화상에게 묻되 어떤 것이 너의 마음인고 하시니 화상이 답하되 말하는 것이 저인 것입니다 하고 문득 꾸중을 듣고 쫓겨났다가 순일(旬日=10일 정도)이 지나고 나서 화상이 석두스님께 되묻되 먼저 제가 말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것이 저의 마음입니까? 하니 석두스님이 이르되 눈썹을 흔들고 눈을 껌벅이는 것을 제하고 네 마음을 가지고 와 보아라. 화상이 대답하되 마음은 가히 가지고 올 곳이 없습니다. 하니 석두스님 이르되 원래 유심(有心)인데 무심(無心)을 말하는 것인가?(마음을 가지고 올 수 없다는 말) 무심이라면 다 스승을 비방하는 것이니라 한데 그 말 아래 크게 깨치다.(大悟)

 

조산탐장선사(曹山耽章禪師)께서 승려가 있어 종이로 옷을 만들어 입고 종이 옷이라 이름하고 이러는 자신은 동산(洞山=동산양개스님이 계신 산이름)으로부터 왔다고 하니 조산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지의(紙衣)에 관한 일인고? 하니 승려 가로되 한 뭉치(一朶=종이)옷 한 벌 겨우 들면 만 가지 일이 모두 다 그렇게 됩니다 하니 스님 이르되 어떤 것이 지의(紙衣)에 관한 씀(用)이냐고 하시니 그 승려가 앞에 나와 손을 팔장 끼고 말하되 씀을 말하면 옷이 벗어집니다 하니 스님이 웃으며 말씀하시되 너는 이렇게 오는 것을 알았는데 이렇게 가는 도리는 모르는구나. 이때 홀연히 승려가 법의 눈을 뜨게 되고 이르되 일령진성(一靈眞性)이 보모의 포태에 들기 전에는 어떠합니까? 하니 스님 말씀하시되 이것은 묘(妙)하지 아니한 것이다 하다.

 

승려 이르되 그럼 어떤 것이 묘한 것입니까? 스님 이르되 불차차(不借借=더 말할 것이 아니라는 뜻)니라 하니 그 승려는 당중(堂中)으로 퇴좌하여 가버리니 조사스님은 게(偈)를 지어 이르시되 각성(覺性)은 원명(圓明)하며 상(相)이 없는 몸이니 지견을 가지고 망령되이 친소를 하지 말찌니라. 염(念)이 달라지면 현체 또한 달라지나니 마음이 잘못되면 도와 더불어 이웃할 수 없는 것이니라. 정으로 만법을 나누면 앞의 경계에 침착 되는 것이요 여러 가지를 알아서 살피자면 본진(本眞)을 상실하게 됨이니 만약 법구중(法句中)을 향하여 전체를 알려고 하거든 일이 본래 없던 그 옛날 사람을 알아야 하리라. 스님이 이 같은 상근(上根)을 계발(啓發)하신 일은 일찍이 그 법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던 것이로다.


몽산화상(蒙山和尙)이 이르시되 발명(지혜의 빛을 찾은 것을 말함)한 연후에 항상 진공삼매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진습(塵習)을 세제(洗除)하여 진습이 가볍고 맑아지면 능히 금생(今生)의 어머님 태에서 나올적 일과 전생의 일세(一世) 이세(二世)로부터 십세사(十世事)를 염지(念知)할 수 있나니 만약에 진습이 청정하기를 다한 자는 다생사명(多生事名)과 숙명지신통(宿命智神通)을 차례로 하여 이근(耳根) 안근(眼根) 육근(六根)이 청정함을 얻을 것이니 능히 척탕(滌蕩)하여 일체근진(一切根塵.根=眼耳鼻舌身意. 塵=色聲香味觸法)이 청정함을 얻는 자는 모두가 모든 삼매(三昧)를 통하여 대지혜(大智慧)와 대변재(大辯才)와 대신통(大神通)이 모두가 스스로 진공(眞空)인 것이니 실상중(實相中)에 발현(發現)하는 것이니라.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이르되 마음을 돌이키고 뜻을 세우는 것은 존비(尊卑)를 따지는 것이 아니거늘, 성(聖)에 들어가고 범부를 초월하는 것이 어찌 승속(僧俗)에 구애가 되리요? 온당한 근기(根機)가 물론 깨친다면 일보(一步)로 집에 도착하거니와 사량(思量)으로 의논코져 한다면 흰구름의 만리길과 같으리라. 어찌 보지 못했던가? 세존(世尊=석가모니불을 경칭하는 존호)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심에 가섭(迦葉=석가모니의 上首되는 제자)이 얼굴을 펴고 미소하거늘 이르시되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어 마하가섭(摩詞迦葉)에게 부촉하노니 교외별전(敎外別傳=부처님 설한 교법 밖에 따로 전한다)이니 하여금 단절함이 없이 하라 하셨으니 모든 인자(仁者=대중)는 보았느냐? 노구담(老瞿曇=석가모니)이 대사섭으로부터 더불어 정법안장 열반묘심을 통명(洞明)한 것을 안다면 이미 입문(入門)함을 얻었으니 다시 마땅히 진보하여 승당(承當=법을 잇는다)하여 입실(入室=법자리에 들어감)하라. 혹 그렇지 못한다면 세존이 꽃을 드신 뜻은 어떠한 것이며 가섭이 미소한 것은 필경 어떠한고? 자세히 참구하라. 함구하면 홀연히 크게 깨치리라. 일도(一道)에 법을 얻으면 마땅히 너에게 영리남아(靈利男兒)임을 허락해 주리라.


또 산승(山僧=몽산스님 자신)이 수일 전에 거리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장방(將坊=상점)에 이르니 한 여인이 있어 교화(敎化=시주)를 하며 따라오더니 거리에 이르러 예배하면서 이르기를 제가 십년 동안을 교화하여 적취(積聚)한 지폐(돈)가 오십이관인데 상주(常住=스님들의 공동생활 재산)에 희사하여 불전(佛殿=법당)을 짓고저 하여 세 번씩이나 암중(庵中)에 왔었으나 큰 스님(長老)을 뵙지 못하고 나의 인연이 얕고 복이 박하다고 여겨 통심(痛心)하기를 마지 않더니 이제 큰 스님 뵙고 바라옵건대 거두어 주시고 저에게 나무와 돌과 기와 등을 사시사 불전을 원만히 이룩하시와 삼보연(三寶緣=佛法僧의 인연. 불법승은 불교의 三位一體로서 신앙대상임)을 맺게 해 주옵소서. 노승(老僧=몽산스님)이 이르되 네가 십년을 교화해서 얻은 바 초양(화폐 즉 돈)을 그대로 모아 쓰지 아니했으니 어찌하여 옷을 사서 입지 않고 밥을 사먹지 아니 했는고? 여인이 이르되 저는 이러한 뜻에 발심(發心)한지가 십년이 되기 때문입니다. 산승이 물어 이르되 너의 성(姓)은 어찌 쓰며 어느 곳에 살며 무엇으로 인하여 발심하였는고? 여인이 이르되 저의 성명은 묻지 마소서. 제가 양육원(養育院=고아원 같은 곳)에 있어 머무는 때 저의 이십년 전에 큰 부귀한 집에 교화(敎化=시주 및 얻어 먹는 일)하기 위하여 갔었는데 문앞(門首)에 서니 오래 된 문을 지키는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 따라오더니 오수(惡水=폐수나 오물)를 가지고 저에게 뿌린 자가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원한을 가졌으며 나의 운명이 좋지 못한 것은 전 세상에 일찍이 닦아오지 못했으므로 고뇌가 이와 같구나 하고 통곡을 참지 못하며 오다가 용흥사(龍興寺)가 이르러 한 강주(講主)스님을 만났는데 설경(說經=경을 설하는 말씀)에 이르되 만약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면 일찍이 부처님께 공양했음이라 하심을 내가 듣기를 다하고 마음을 살피고 살펴 이를 쫓아 발심하여 십년을 교화하여 초양(금전 지폐)을 적취하고 서원(誓願)하되 옷을 사서 입지 않고 밥을 사서 먹지 않고 삼보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하다.

 

또 지원 18년에 채제영(蔡提領)이 장로(長老)스님을 청하여 설법을 할 때에 생로병사의 괴로움이 모두 다 있는 것인데 남녀와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태어날 때에 온 곳을 모르니 이것은 생대(生大=태어남의 가장 큰 일)요, 죽을 때는 가는 곳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사대(死大=죽음의 가장 큰 일)요, 호흡만 멎으면 죽는 것이니 이것은 무상신속(無常迅速=걷잡지 못하게 변함)이니 사람이 능히 여기에 성찰하여 발심회도(發心回道)하는 자는 다만 화두(話頭)를 들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는 것은 어떤 것이 이 낱의 나의 성품인고? 하여 (이 멋고와 유사함) 다만 이렇게 참구하여 참구해 오고 참구해 가다가 홀연히 본 자리의 밝음을 깨치면 태어나 온 것과 죽어서 가는 것을 문득 알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으며 십이시중(十二時中= 지금의 24시)에 스스로 주재(主宰)함이 있어 생사의 안두(生死岸頭) 가히 써 업(業)을 바꾸되 내가 이로 좇아 계(戒)를 지키고 참구하는 이 날은 어떤이 나의 성품인고? 하라 함을 듣고 지금 20년이 지나도록 이 듣고 본 것을 잊지 아니하며 또 장로께서 도(道)를 견문각지(見聞覺知=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것)에 속하지 아니하고 견문각지를 떠난 것도 아니 한다 함을 들으니 지금 의심이 생깁니다. 어떠한 것이 이 낱 도(道)입니까? 오늘 바라옵건대 스님께서는 인하여 저에게 가르쳐 주옵소서 하기에 산승이 이르되 바로 잘 참구하자면 이 의심의 어떠한 것이고? 함을 가히 놓아 버리지 말찌니 크게 의심하는 데에 반드시 크게 깨침이 있느니라 대답하고 산승이 또 물어 이르되 지난 날 네가 초양을 보시하겠다 함에는 어떤 원이 있지 않겠느냐? 하니 여인이 이르되 저의 원은 삼보(三寶)와 인연을 맺어 한꺼번에 묘도(妙道=佛道)를 깨달아 일찍이 여신(女身)을 버리고 서방(西方)의 안락세계(극락)에 태어나서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친히 보리묘기(菩提妙記=부처님의 정법의 受記)를 받아 영원토록 빈궁한 고뇌를 여의고 다시 돌아와 큰 시주가 되어서 널리 중생을 제도코저 하옵니다 하니 산승이 그에게 이러한 지기(志氣)가 있고 이러한 행원(行願)이 있음을 보시고 드디어 희사하는 초양을 받아 절에 돌아와 그를 위하여 일장오척(一丈五尺)의 들보와 기둥과 돌 하나와 오백편의 기와와 통기와 오십편을 사서 그의 원하는 마음을 채워주었음이니 모든 대중은 이 여인의 희사한 바 초양을 통연히 알았을 터이니 어떠한 공덕을 갖추어졌을 것인가 하나하나 보고 얻었음이 있으면 분명하게 이르라 분명하고 맞게 알았다면 너에 정안(正眼)이 밝아졌음을 인허(認許)하리라. 산승이 감히 희사한 바 초양에 대한 것을 이르노니 단바라밀(檀波羅密 =보살의 육바라밀 중에 보시바라밀)을 갖추면 시방제불(十方諸佛)이 동시에 무상보리기(無上菩提記)를 수기(授記)하시니라 하다. 


◇ 낙보화상 부구가(樂普和尙 浮球歌)

구름 낀 하늘에서 비가 뜰 가운데 연못에 떨어지니 물 위에 떠도는 물거품을 보겠구나. 먼저 거품이 없어지면 다음 거품이 일어나서 먼저 것과 다음 것이 상속하여 다함이 없음이니 근본을 빗방울로 인하여 물이 거품이 되고 다시 바람에 부딪쳐 물거품은 물이 되는 것이니 거품과 물이 다른 성질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면 타(他)의 전변(轉變)을 따라 차차 경계를 삼는 것이니라. 밖이 밝고 안은 허(虛=막힘이 없다는 뜻)를 머금어 안과 밖이 영롱하면 보주(寶珠)와 같은 것이니 정히 맑은 물결에 있을 때는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막상 부딪쳐 보면 물결은 없는 것과 같이 되느니 있고 없고 움직이고 조용한 것은 그 일을 밝히기 어렵도다. 상(相)이 없는 가운데 상형(相形)이 있음이니 다만 거품은 물속을 향하여 나온다함을 알지요. 어찌 물 또한 거품에서 나옴을 알으리? 일부러 거품과 물을 갖다가 내 몸에 비유하노니 오온(五蘊=色受想行識)의 헛된 것을 엮어 사람이라 만들어 세웠음이로다 오온이 공(空)하고 물거품이 실질이 없는 것을 해달(解達)한다면 바야흐로 능히 본래 참인 것을(本來眞=본래부터 있는 참의 이치)밝게 보리라.

 

◇ 등등화상 요원가(騰騰和尙了元歌)

도(道)를 닦는다 함은 가히 닦을 것이 없는 것이요. 법을 묻는다 함은 가히 물을 것이 없는 것이니라. 미(迷)한 사람은 색(色)이 공(空)한 것을 알지 못하고 오자(悟者="깨친 자)는 본래 역순(逆順)이 없는 것이니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에 지극한 이치는 방촌(方寸=자기 마음의 테두리)을 여의지 아니한 것이니 자기집의 성곽(城郭)을 알아서 취할 것이요. 다른 남의 향군(鄕郡)을 찾지 말며 속아서 말하지 말 것이니 널리 배우고 많이 듣기를 하지 말고 변재 총명도 요하지 말찌니 달수(月曆)가 크니 작으니를 말하지도 말며 햇수(年曆)가 윤달(潤月)이 있고 없고도 상관하지 아니해야 하느니라. 번뇌가 곧 보리이며 깨끗한 꽃(淨花=연꽃)이 시궁창에 나서 피나니 사람이 와서 내게 물음에 만약 그와 함께 담론(談論)할 수가 없겠거던 아침에 죽으로 주림을 채우고 낮 재(齊)시에는 다시 한 그릇의 밥만을 먹으면서 오늘에 이렇게 저렇게 지내며 내일도 저렇게 이렇게 하며 마음 속으로 요요(了了=똑똑히, 분명히)하게 모두 다 알며 다음으로 어리석고 둔박한 것처럼 사는 것이니라.

 

◇ 양보지화상 대승찬송십수
(梁寶誌和尙 大乘讚訟十首)

 

대도(大道)는 항상 목전(目前)에 있나니 비록 목전에 있어도 보기는 어려운 것이니라. 만약 도(道)의 진체(眞體)를 깨치고저 하면 색성언어(色聲言語)를 제하지 말아야 할지니 언어가 곧 대도(大道)이기 때문에 가히 번뇌를 단제(斷除)하지 않아야 하리라. 번뇌가 본래 공적(空寂)한 것이건만 망정(妄情)이 서로 얽어매고 있음이로다. 일체가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곳이니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쁜 것이리오. 마음을 두고 상(相)을 취하여 실다움을 삼는다면 결정코 견성(見性)의 일을 끝맺지 못하리라. 만약에 업(業)을 지어 부처됨을 구한다면 업이 생사의 큰 징조이니 생사업(生死業)이 항상 몸을 따라 다니는 것이 흑암지옥(黑暗地獄)이니라. 깨친 이치를 알지 못해도 본래는 다른 것이 없음이니 깨친 뒤에야 누가 더디고 누가 빠름이 있으리요? 법계는 그 양(量)이 허공과 같으나 중생의 심지(心智)가 스스로 적은 것이니 다만 능히 나라는(悟我) 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열반법식(涅槃法食)이 항상 배부르리라.


망신(妄身=우리의 허무한 육체)이 거울에 비치면 거울 속에 그림자가 나타는데 몸과 그림자는 똑같은 것인데 만약 거울 속 그림자를 제하고 몸을 머물도록 한다면 몸이 본래 허(虛)하고 몸이 본래 그림자와 더불어 다른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일인 것이니 하나는 있고 하나는 없는 것은 얻지 못하는 것이니라. 만약 하나를 버리고저 한다면 영원히 진리와 더불어 틀려져서 다시 성인을 사랑하고 범부를 미워하는 것 같으면 생사의 바다 속에서 부침(浮沈)하고 말 것이니라. 번뇌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니 마음이 없다면(無心) 번뇌가 어디에 거(居)하리요?


분별하고 버리고 취하는데 수고롭게 하지 아니하면 자연히 도(道)를 얻음도 수유(須臾)에 되리라. 꿈 꿀 때는 꿈속에서 조작(造作)을 하다가 깨고 보면 꿈의 경계를 찾아도 도무지 없으나 생각을 뒤집어 보면 깨었을 때나 다못 꿈의 전도(顚倒)되는 이견(二見= 두 가지 보이는 것)이 다른 것이 다르지 아니하나니 미를 고치고 각을 구하는(改迷求覺) 것이 판매하는 장사치와의 이익을 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동과 정(動靜)을 함께 잊으면 항상 적정(寂靜)하며 자연히 진여(眞如)에 계합하리라. 만약 부처가 중생과 다르다는 말을 한다면 초초히 부처와 더불어 다를 것이니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어서 자연히 구경(究竟)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 것이다. 앞으로 법성(法性)은 본래 상적(常寂)하여 탕탕(蕩蕩)하므로 변반(邊畔)이 있지 아니하건만 편안한 마음을 버리고 취하는 사이에 저 두 가지 경계가 바뀌는데 끄달리고 있으니 모습을 거두어 정(定)에 들고 좌선(坐禪)하여 경계를 섭(攝)하고 마음을 편히 해서 기관목인(機關木人=본래 있는 면목=本來面目)을 관(觀)한다 한들 어느 때에 피안(彼岸)에 도달함을 얻으리요? 제법(諸法)은 본래 공하여 집착이 없음이니 진실로 뜬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과 같음일세. 홀연히 본성이 원래 공한 것을 깨친다면 열병에 땀냄을 얻은 것과 흡사하리라(상쾌함). 지혜가 없는 사람 앞에 이런 말을 하지 말라. 저의 색신(色身)처럼 별이 흩어지듯 흩으리라.


너희 중생(衆生)에게 알리느니 곧 이르라. 비유(非有)는 즉시 비무(非無)이니 비유비무는 둘이 아니거늘 어찌 모름지기 유를 대하여 허(虛)를 논하리요? 유와 무는 망심(妄心)이 이름을 세운 것이니 한 번 파하여 한 개가 되면 두 가지 이름이 있지 않으리라. 너의 정(情)으로 말미암아 무(無)를 지으니 정이 곧 진여(眞如)인 것이나 만약에 정에 집착해 두고 부처를 찾는다면 그물을 가지고 산에서 고기를 잡자는 것과 같아서 도무지 수고롭기만 하고 공부에 이익이 없는 것이어서 얼마 동안을 그릇된 공부만 하리니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하면 진실로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것과 같으리라. 일체에 미워하고 사랑함이 없이 하자면 여기에 번뇌를 모름지기 제해야 함이니 제하자면 몸에 집착을 제하면 부처도 없고 인(因)도 없음이니 부처도 없고 인(因)도 없으면 자연히 무법무인(無法無人)한 도리를 가히 얻으리라.


대도(大道)는 행(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아니니 설행(說行=말하고 행하는 일)은 권(權=人爲)으로 된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가 진리를 깨치고 돌이켜 행을 살펴보면 바로 잘못했던 공부를 알게 됨이니라. 원통(圓通)한 대리(大理)를 깨치지 못했으면 언행상법(言行相法)을 수구(須究)하기를 요하는 것이나 시러금 남의 지해(知解)에 집착하지 말고 회광반본(回光反本=자기를 돌이켜서 근본을 살피는 법)해야 할 것이다. 전혀 타의 지해에 집착함이 없는데 누가 있어 알음아리로 앎이 있으리요. 이 설한 교(敎)로서 만약 자기를 향하여 추구하면 스스로 옛날의 죄과(罪過)를 보게 되고 오욕창우(五欲瘡尤=오욕으로 된 헛된 혹)를 제거하고 소요자재하여 자재롭게 방호따라 풍류를 싸게 팔 것이다. 누가 발심한 것일까? 풍류를 사는 자도 또한 나와 같이 근심 없음을 얻으리로다(여기의 풍류는 깨친 法風)


내견(內見)과 외견(外見)이 전부 잘못되고 불도(佛道)와 마도(魔道)가 함께 그릇친 것임에 이 두 큰 파순(波旬=불교의 불출세의 마왕의 이름)이 문득 고(苦)를 싫어 하면서도 죽고 사는 일(生死)을 즐겨 구하는 것이나니 근본체(根本體)가 공(空)한 것을 깨친다면 부처와 마군이 어느 곳에 안착하리요? 다만 망정(妄情)으로 말미암아 전신후신(前身後身=전 세상의 출생과 전생을 받아 난 금생의 출생)을 분별하여 떠돌며 윤회(輪廻)하는 육도(六途)가 그치지 아니하는 것을 업(業)을 맺는 것으로 제각(除却)될 수가 없음이니 쓴 바 생사에 유랑하는 것은 모두 횡생(橫生)에 말미암은 것이니라. 몸은 본래 허무하여 실이 없으니 근본을 살핀다 함을 누구인가 유무(有無)를 짐작한다면 나 스스로 할 이이요. 망심(妄心)을 가지고 복탁(卜度=점 치듯 헤아리는 일)하는데 수고할 것이 아니로다. 중생의 몸이 허공과 같이 크거늘 어느 곳에 번뇌가 안착하리요? 다만 일체것을 구하지 아니하면 번뇌가 자연 소락(消洛=사라진다)할 것이니라.


가히 우습다. 중생들은 각각 한 가지씩 다른 소견을 집착하고 있음이라. 소쿠리에 있는 떡을 갖자는 생각으로 근본을 살피는 일은 잊어 버리고 눈 앞에 있는 음식에만 팔려 있으니 이 사와 정(邪正)의 근본이라 함도 사람으로 말미암아 조작된 것이로다. 백 번을 변하며 수구하는 바 뜻대로 종횡하더라도 애연(愛戀)에 편침되지 아니하면 곧 이 해탈인 것이나 구함이 있으면 또 얽힘을 만나는 것이로다. 자심(慈心)이 일체평등(一切平等)하면 진여보리(眞如菩提)가 저절로 나타남인데 만약 피아(彼我)의 두 가지 마음을 품는다면 대면(對面)을 한다 해도 부처님의 얼굴(佛面)을 보지 못할 것이로다.


세간(世間)에 몇 명이나 말 잘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도(道)를 가지고 도를 구하고저 하는고? 모든 뜻을 널리 설하노라고 분분하여도 자기 스스로의 몸도 구제하지 못하나니 온전히 타문(他文=남의 글)만을 찾아 어지럽게 말하면서 자칭 지극한 이치가 묘하고 좋다고 하면서 한갓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영겁토록 생사에 침윤하며 탁한 애착을 버리지 아니하며 청정한 지혜 마음을 스스로 괴롭히고 진여법계(眞如法界)의 총림(叢林)으로 하여금 가시밭의 거친 풀길을 걷게 하니 다만 황엽(黃葉=단풍입세를 金으로 착각한다는 비유)을 집착하며 금을 삼을 줄만 알지 삼베(麻)를 버리고 금을 구할 줄은 깨치지 못하니 쓴 바(所以) 생각을 잃고 미치게 달리며 바깥 모습만을 갖추어 가지려 하니 입으로는 경(經)을 외우고 논(論)을 외우지만 마음 속은 항상 바짝 마른 것이어서 일조(一朝)에 본심(本心)이 공(空)한 것을 깨쳐도 구족진여(具足眞如)가 부족한 것이니라.


성문(聲聞=소승)은 마음에마다 미혹을 끊으나 능히 끊는다고 하는 마음이 이것이 도적(賊=근본을 해치는 것)이니 도적과 도적이 서로 얽히어 미혹을 제거한다 하니 어느 때에 근본을 깨쳐 알으리요? 어묵(語默)간에 입으로는 천권(千卷)의 경을 읽어도 본체상(本體上)에서 경(經)을 물으면 불법의 원통(佛法圓通)을 전혀 알리지 못하니 한갓 경의 글줄이나 찾고 검은 글씨나 세고 있나니 청정하고 고요한 고행(苦行)을 희망하고 후신공덕(後身功德=미래세계의 공덕)을 희망하나 곧 이것은 성인대도(聖人大道)를 막은 것이니 무슨 수로 가이 얻으리요? 비유컨대 꿈 속에 하수(河水)를 건너는 배의 사공(沙工)이 한참 하수의 북쪽을 지나가다 문득 침대 위에 편한 잠을 깨면 꿈 속의 일이요 사공도 아닌지라 배를 몰로 건너는 법도 모르는 처지다. 사공과 꿈에 배를 탔던 사람도 본래 없으므로 서로 알 수가 없음이니 중생의 미혹한 전도에 얽혀 삼계가 가고 오는 것이 이토록 피곤함이로다.

 

죽고 삶이 꿈과 같은 것을 깨친다면 일체 구하는 마음이 스스로 쉬리라. 깨쳐 아는 것이 곧 이 보리(菩提)며 근본을 알면 계제(階梯=차례의 사다리)가 있지 아니하건만 한탄스럽다. 굽어진 범부들이여 팔십이 되어도 발목을 빼어나지 못하는구나 한갓 일생을 수고롭게 헛되이 지나면서 해와 달이 옮겨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위를 향해 남의 입만 살피는 정도니 흡사 어미 잃은 아이와 같구나. 도속(道俗=수도하는 스님과 일반 世人)이 불쑥불쑥 모여들어 종일토록 듣기만 하는구나.


사어(死語=죽은 말)를 가지고 있음이라. 자기의 몸이 무상(無常=헛되다)한 것을 알지 못하고 마음으로 탐(貪=분수없는 욕심)을 행함이 호랑이와 같으니 심히 슬프구나. 이승(二乘=小乘과 같은 뜻)의 협소하고 저열함이여 육부(六府=오장육부라는 비유로서 욕심과 삿된 기능을 담은 육신)를 최복(催伏=꺾어서 복종케 함)을 받고자 할 때엔 술과 고기와 오신(五辛=파,마늘,정구지,달래,양파)을 먹지 아니해야 할 것이니 삿된 눈(邪眼)으로 남의 그런 것을 마시고 먹는 것을 보면 다시 사행(邪行)이 창광(猖狂=미친)해 지리라. 기(氣)를 닦기 위해서는 장절임을 먹으며 술 권하기를 하지 말 것이다. 만약에 상승지진(上乘至眞=제일 높은 지극한 진리)을 깨치고자 한다면 남녀를 분별하는 것을 빌려서 하지 말지니라 (假=가져가는 것은 남의 소견을 빌려 판단하는 일).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님(菩提煩惱不二)

중생(衆生)은 도(道) 닦기를 알지 못하고 문득 번뇌만을 단제(斷除)하고자 하니 번뇌는 본래 공적(空寂)하거늘 도(道)를 가지고 다시 또 도를 찾는 것이 아니리요? 일념(一念)의 마음이 바로 이것인데 어찌 별처(別處=딴곳)에서 찾아 내기를 수구할 것이리요. (須求=그렇게 아니하면 안된다는 식의 추구) 대도(大道)는 목전(目前)에 교백(皎白=분명함)하게 있는데도 미도(迷倒=미하고 안정이 없는 것)한 우인(愚人=미천한 사람)이 불성(佛性)을 요달하지 못함이로다. 천진자연(天眞自然)하여 또한 인연으로 닦고 만들고 하는 것이 없거늘 삼독(三毒=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이 헛된 가짜임을 알지 못하고 망녕되게 뜨고 잠기는 생로(生老=태어나서 늙는 일)에 집착함인가? 옛적의 미(迷)한 날이 너무나 오래고 늦었으니 오늘날 비로소 깨친 일은 이른 것이 아니로다.


지키고 범하는 것이 둘이 아님(持犯不二)

없어서 장부(丈夫=대장부-깨친 사람)의 운용(運用)이 무애하여 계율(戒律)에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것은 지범(持犯=계를 가지고 범하는 것)이 본래 자체가 생겨남이 없거늘 미련한 사람이 금계(禁戒)의 얽매임을 입는 것이로다. 지혜(智慧)한 자는 조작이 개공(皆空)인 것을 알며 성문(聲聞=소승)은 부딪치는 경계에서 따라서 막히며 대사(大士=득력한 사람)는 육안원통(肉眼圓通)함이요. 이승(二乘)은 걸림이 있어서 공중(空中)에서 유무(有無)에 망집(妄執)하나니 색(色)과 심(心)에 통달하지 아님이 없는 무애보살(無碍菩薩)이 되어서야만이 속(俗)과 더불어 동거해도 청정하여 일찍이 염착함이 없음이니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涅槃)에 탐착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생사(生死)가 그대로인 것이니(생사가 곧 열반이라는 뜻) 법성(法性)자리는 공(空)해서 언설(言說)이 없는 것이 연기(緣起)를 요약하여 이 게(揭)를 삼나니 백세(百歲)라도 앎이 없으면 소아(小兒)인 거이요 소아라도 지혜가 있으면 백세인 것이니라.

 

부처와 중생이 둘이 없음(佛與衆生無二)

중생(衆生)은 부처와 더불어 다를 게 없고 어리석음과 다를 게 없음이니 어찌 모름지기 밖을 향하여 보배를 구할 것이리요? 몸밭(身田)에 스스로 명주(明珠)가 있는 정도(正道)와 사도(邪道)가 둘이 아닌 것을 알면 범부와 성인의 길이 같음이니 깨치고 미(迷)한 것이 본시 차별이 없는 것이며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일여(一如)함이로다. 마침내 공적(空寂)에 반연하여 의상(意想)이 청정함을 추구하면 일법(一法)도 가히 믿음이 있지 아니하며 소연하게 스스로 함이 없는데서 무위(無爲)로 들어가리라.

 

이치와 일이 둘이 아님(理事不二)

심왕(心王)은 자재(自在)하여 소연(篠然: 연하다)하고 법성(法性)은 본래 십전(十纏: 탐진치에 따른 열가지 번뇌)이 없으니 일체 것이 부처님 아님이 없음이다. 어찌 모름지기 섭념좌선(攝念坐禪=생각을 고르고 앉아 참선함)하리오? 망상(妄想)이 본래 공적한 것이니 반연을 끊으려고 하지 말지니라. 지혜한 자는 무심(無心)을 가히 얻으면 자연히 다툴 것도 없고 시끄러움도 없음이니 불식무위(不識無爲)가 대도(大道)거늘 어느 때에 유현(幽玄)을 증득한다 함이뇨? 부처와 중생은 같은 종자인지라 중생이 곧 이 세존(世尊=부처님의 존호)이거늘 범부가 망녕되이 분별을 내어 없는 가운데서 있는 것을 집착하여 미분(迷奔)하고 있으니 요달(了達)하면 탐진(貪嗔=욕심내고 성질냄)이 고정함이니 어느 곳이 진문(眞門)이 아니리요?

 

고요하고 산란함이 둘이 아님(靜亂不二)

성문(聲聞=소승)은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마치 반죽을 만들지 아니하고 떡을 구하는 것과 같나니 떡은 본래 가루로 반죽을 지어 만드는 것이므로 사람에 따라 백가지로 모양을 변할 수 있는 것이니 번뇌는 곧 보리요 무심(無心)하면 곧 무경(無境)이다. 생사(生死)가 열반(涅槃)과 다른 것이 아니요, 탐과 진도(貪嗔) 불꽃 같고 그림자와 같을 뿐이니 지혜한 자는 무심으로 부처를 구하고 미련한 자는 밖을 향하여 치달리면서 부질없이 헛되이 지나면서 여래(如來)와 묘정(妙頂=극구달성처)을 보지 못하나니 깨쳐서 알면 음노(淫怒=음심과 진노)한 성질이 공해져서 솥에서 끓는 물과 화로에서 타는 숯이 저절로 차가와 지리라.

 

선과 악이 둘이 아님(善惡不二)

나 스스로 몸과 마음이 쾌락하여 소연하게 선도 없고 악도 없으니 법신은 자재해서 별다른 방호가 없음이라 눈에 부딛치는데 정각(正覺=올바르게 깨침) 아님이 없으며 육진(六塵=眼耳鼻舌身意)이 본래 공적(空寂)한데 범부들이 집착을 망녕되이 냄이로다. 생사가 평등한 사해(四海)이거니 누가 얇고 누가 두터운 것이겠는가? 대도(大道)는 자연스러워 마음을 가지고 헤아림을 쓰는 것이 아니로다. 살은 나고 흩어지는데서 영금하게 통하며 짓는 바에서 항상 묘각(妙覺=깨쳐진 경지)을 머금은 것이니 성문은 법에 집하여 좌선(坐禪)하는 것이 누에가 실을 뱉어서 집을 짓고 얽매임과 같음이로다. 법성(法性)은 본래 원명(圓明)한 것이거늘 병이 고쳐지면 어찌 약을 집착하리요? 깨쳐 알면 모든 법이 평등하여 소연하여 청허(淸虛)하고 쾌락하리라.

 

색과 공이 둘이 아님(色空不二)

법성(法性)에는 본래부터 청황(靑黃)이 없는데 중생이 부질없는 문장(文章)을 지어서 나는 남을 말하고 제 마음대로 고치고 보고 분노하고 미치고 어지러워서 원통(圓通)한 묘리(妙理)를 알지 못하나니 어느 때에 진상(眞常=참되고 항상함)을 깨쳐 알리요? 스스로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타인의 약방문은 물리쳐야 하리라. 밖으로 보는 것은 이를 선(善)이라고 할 수 있으나 마음 안은 사랑(獅狼: 모진 짐승의 마음) 같으니 어리석은 사람은 지옥을 겁내지만 지혜한 자에게는 천당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경계(境界)를 대해도 마음이 항상해서 일어나지 아니하면 발을 들어 걷는 곳이 모두 다 도량(道場)이니라.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데 중생 스스로가 분장(分張)을 내고 있으니 만약 삼독(三毒=貪嗔痴)을 제하고저 할진대 멀리멀리 하더라도 재앙은 따로 여임이 아닌 것이다. 지혜한 자는 마음이 부처인 것을 아는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낙(樂)이 서방(西方=극락세계가 있는 곳)에 있다고 여기느니라.

 

나고 죽음이 둘이 아님(生死不二)

세간(世間)의 모든 법이 환(幻)과 같으며 생과 사도 마치 번개불과 같음이니 법신은 자재원통(自在圓通)하여 산하(山河)에 출입해도 간격이 없으며 전도망상(顚倒妄想)이 본래 공하여 반야(般若)는 미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으며 삼독 자체가 스스로 해탈된 것인데 어찌 모름지기 생각을 거두어 선(禪)을 할 것이 있으리요? 다만 미련한 사람이 알지 못하고 남의 계율을 쫓아서 결단코 적멸진여(寂滅眞如=망상이 없어진 본바탕자리)를 알지 못함이니 어느 때에나 저 언덕(彼岸)에 오름을 얻으리요? 지혜한 자는 악을 막을 것 없이 운용(運用=움직여 쓰는 일)에 마음 따라 합하기도 하고 흩기도 함이다. 법성은 본래 공적하여 생사에 얽혀 매임이 되지 않는 것이니 만약에 번뇌를 단절코저 한다면 이것은 이 무명치한(無名痴漢=어둡고 미련한 놈)이니라. 번뇌가 곧 보리이거니 어찌 별다르게 구함을 쓰리요? 선관(禪觀)하는 실제에는 부처도 없고 마음도 없음이라. 마음의 체에는 형체도 없고 끊을 것도 없느니라.

 

끊어지고 항상함이 둘이 아님(斷常不二)

장부(丈夫=깨친 사람)는 운용(運用=움직여 씀)이 당당하여 소요자재(逍遙自在)하며 방해로움이 없고 일체가 능히 해치지 못하는 것이니 견고함이 마치 금강(金剛) 같고 이변(二邊=有와 無)에 집착하지 아니하여 중도(中道)가 소연함이니 끊는 것도 아니요 두는 것도 아니어서 오욕(五欲=食色名財睡) 탐진 자체가 부처요 지옥 천당과 다른 바 없는데 미련한 사람은 망영되이 분별을 내어서 생사(生死)에 유랑하여 심히 미쳐서 있는 것이요. 지혜한 자는 모든 색상(色相)에 통달하여 걸림이 없음이니 성문(聲聞=소승)은 깨치지 못하고 두려워 할 뿐일지니라.


법성은 본래 하예(瑕穢 :때끼어 가리움이 있다)가 없거늘 중생은 망령되게 청황(靑黃)에 집착하니 여래(如來)께서 미한 중생들을 인접하시사 혹 지옥과 천당을 설함이니 미륵(彌勒=미래세의 교화불로 중생을 구제할 부처님의 이름)이 몸 가운데 스스로 있음이니 어찌 모름지기 별처(別處)를 사량(思量)하리요? 진여(眞如)와 불상(佛像)을 함께 물리치는 것은 이 사람은 곧 전도되고 미친 것이니라. 성문은 마음 가운데서 깨치지 못하고 오직 다만 언장(言章=글이나 말)만을 따르는 것이 본래 진도(眞道=참길)가 아님이라. 전전히 투쟁만 더할 것이다. 굳고 아주 굳은 마음 속이라도 사원복갈(뱀,구렁이,독사나 나쁜 독충)이 부딪치면 문득 곧 다칠 것이리라. 글 가운데(文中) 뜻을 취(取)할 줄 모른다면 어느 때라야 진상(眞常) 앎을 얻으리요? 죽으면 무간지옥(無間地獄=벗어날 기약이 없는 지옥)에 들어가서 신식(神識=정신과 의식)이 미친 듯 재앙을 받으리라.

 

진과 속이 둘이 아님(眞俗不二)

법사(法師)가 설법을 지극히 잘도 하는데 마음 속에는 번뇌를 여의지 못하여 입으로는 문자(文字)를 설하여 남을 교화한다고는 하나 전전히 다시 남의 나고 늙는 일만 더하고 있음이니 참과 거짓은 본래 둘이 아닌 것이라 범부(凡夫)가 망(妄)을 버리고 도(道)를 찾자는 데는 사부대중(四部大衆=男僧,女僧,男信徒,女信徒)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청강을 하는데 고좌(高座)는 논의가 호호(浩浩=크고 넓다)하니 남좌 북좌(南座 北座)가 서로 다툼에 사부중이 말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니 비록 입으로 하는 말이 감로(甘露=달콤한 이슬)같으나 마음 속은 항상 마르고 목타는 것이니 자기에게 일푼의 돈도 없이 남의 보배만 세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 것일세.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는 진금(眞金)을 버리고 풀섶을 지는 것과 같으니 마음 속에 삼독(三毒)을 버리지 못하면 알지 못하니라. 어느 때에 도(道)를 얻으리요?

 

풀고 얽는 것이 둘이 아님(解結不二)

율사(律師=계율을 지키고 남을 가르치는 스님)가 계율을 가지고 자기를 얽어매고 자기를 얽어매기에 또한 남을 얽어매는 것이니 밖으로 위의(威儀)를 지어 편하고 고요해 보이나 마음 속은 큰 물결이 출렁이는 것과 흡사하여 생사를 구해내는 선벌(船筏)을 타지 못하니 어떻게 애하(愛河)를 건너가리요? 진종정리(眞宗正理=참뜻과 바른 이치)를 모르면 사견(邪見)의 말이 번다하게 많으리라. 두 비구(二比丘=두 명의 비구승)가 우파(優波=부처님 十六弟子 中 계율을 으뜸으로 지키는 존자의 이름)에게 묻는데 우파는 계율에 의지하여 죄를 논함이 전전히 더하거늘 비구는 얽어매어지는 판에 방장실중(方丈室中=도를 지도하는 큰 스님이 머무는 방)에 거사유마(居士維摩=부처님 당시 때 유명한 在家信徒)가 문득 와서 꾸짖으니 우파가 묵연하여 말하지 아니하니 정명(淨明=유마거사의 일명)이 말씀하시기를 설법은 허물이 없다 하시고 저 계율의 성품은 허공과 같아서 안이나 밖이나 사바에 있지 아니하니 권컨대 생멸(生滅)을 제하고도 자긍(自肯)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면 홀연히 깨침이 석가(釋迦)와 똑같아 지리라.

 

경계와 비치는 것이 둘이 아님(境照不二)

선사(禪師=참선하는 스님)가 몸소 무명(無明)을 여의면 번뇌가 어디로 쫓아 올 것이리요? 지옥과 천당이 한 모습이며 생사와 열반이 이름만이 있는 것이니 또한 탐진치(貪嗔痴)를 가히 끊을 것도 없고 또한 불도(佛道)를 가히 이룰 것도 없음이다. 중생과 다못 부처가 평등하며 자연과 성지(聖智)가 성성(惺惺)하여 육진(六塵=色聲香味觸法)에 물들어지는 바가 되지 아니하며 구구(句句)가 드러나게 계합되어 무생(無生=태어남이 없는 이치)을 정각(正覺)하여 일념(一念)을 현해(玄解=깊이 깨침)하며 삼세(三世=과거 현재 미래)가 활연하여 모두 평등한 것이니 법도 아니며 율에 제압되는 바도 아니며 참으로 원성(圓成)의 경지에 들어가느니 이 사구(四句=有無不有不無)를 끊으며 백비(百非=백가지 잘못된 것)도 다 공(空) 같아서 지음도 없고 함도 없음이니라.

 

움직여 쓰는데 걸림이 없음(運用無得)

나는 이제 도도하고 자재하여 귀공자와 왕과 높은 벼슬자리가 부럽지 아니하며 사시(四時=語默動靜)에 마치 금강(金剛=더 없이 굳다)과 같으며 고와 락에 마음은 항상하여 다르게 고쳐지지 아니하며 법의 보배(法寶)가 저 수미산(須彌山=우주에서 제일 큰 산)에 비유되고 지혜는 저 강해(江海)와 같아서 팔풍(八風=이롭고,쇠퇴하고,명예롭게,훼손되고,칭찬받고,놀림받고,괴롭고,즐거운 여덟가지)에 거리낌이 되지 아니하며 또한 정진에 해태(懈怠=게으름)함이 없어서 마음대로 가라 앉았다 솟았다 하면서 뒤치고 솟아오르는 데에 종횡자재(縱橫自在)하며 도검(刀劍)이 머리에 닿아도 막을 생각 없을만치 스스로 편안하여 괴롭지 아니하리라.

 

미혹하고 깨침이 둘이 아님(迷悟不二)

미혹했을 때는 공(空)을 가지고 색(色)을 삼으나 깨달았을 때는 색(色)을 가지고 공을 삼는 것이니 미와 오가 본래 차별이 없으며 색과 공이 마침내는 같은데로 돌아 감이니 어리석은 사람은 남쪽을 불러 북쪽을 만들고 지혜한 자는 동서가 원래 없는 이치를 통달하고 여래(如來)의 묘리(妙理)를 찾고자 함인데 항상 일념 속에 있음이니 햇볕은 본래 물이 아니건만 목마른 사슴이 물인줄 알고 찾아가 헤매나니 자기의 몸은 헛된 가짜면서 실다운데가 없음이니 공(空) 가지고 다시 공을 찾고자 하리요. 세상 사람은 미망(迷妄) 전도(轉到)가 너무 심하여 마치 개가 번개불을 보고 짖어대는 것과 같음이로다.


미증유경(未曾有經)에 이르되 묘길상 보살이 말씀하되 어떤 한 사람이 울면서 이같은 말을 하였다. 나는 살생업(殺生業)을 지었으니 결정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어떻게 해야 구도(求度)가 될고 하는 것을 듣고 인하여 그가 인연이 순숙한 것을 봤고 교화(敎化)를 감당하여 곧 교화코자 한데 또 한 사람이 울면서 이르되 나는 살생업을 지었음이니 결정코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하니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말하되 나 또한 너와 같은데 이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구하시리라 하여 함께 가서 부처님을 뵈옵게 됨이라. 이들이 부처님께 말씀 사뢰되 저희들은 살생업을 지었음이라 지옥에 떨어질까봐 두려워 하오니 부처님께서 구해 주옵소서 하였다. 부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너의 말한 바와 같이 그 살생업이란 것은 너의 어떠한 마음으로부터 일어났는가? 또 죄의 모습은 과거 것이냐 미래 것이냐 현재 것이냐? 만약 과거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과거는 이미 없어진 것이니 그 마음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만약 미래심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미래는 이르지 못했으니 마음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만약 보는데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보는 것은 머물지 아니하여 마음을 또한 얻을 수 없음이니 삼세(三世=과거,현재,미래)를 함께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곧 기작(起作)함이 없으며 기작함이 없기 때문에 그 죄상(罪相=죄의 모습)이 어디에 사(邪)되게 보일 것이리요? 선남자(善男子=착한 남성)야 마음은 머무는 바가 없어서 안과 밖과 가운데에도 있지 아니하며 마음은 색상(色相)이 없음이라.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빛도 아니며 본래 진실한 연고로 마음은 변제(邊際=변두리)가 없으며 한량이 없는 고로 마음은 버리고 취하는 것이 없으며 선악(善惡)이 없는 고로 마음은 동전(動轉=움직이고 변하는 일)이 없으며 생멸(生滅)이 아닌고로 마음도 허공과 같으며 장애(障碍=걸리침)가 없는 고로 마음은 염정(染淨=추하고 깨끗한 것)이 아니며 일체의 수량을 여인 곳이니 선남자와 모든 지혜 있는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관(觀=마음으로 본다)할찌니 이러한 관을 짓는 자는 곧 저 일체법(一切法) 가운데 마음 구함을 가히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한 연고인고? 마음의 자성(自性)이란 곧 모든 법의 성품(性品)인 것이니 모든 법성(法性)이 공(空)한 것은 곧 진실한 성품인 것이라 이러한 뜻에 말미암아 너는 지금 뻑뻑히 망령되이 두려움을 내지 말지어다.

 

이때에 교화(敎化)를 받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베푸신 말씀의 진실한 법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부처님께 말씀 사뢰어 올리되 희유(希有)합니다 세존이시여. 법계자성(法界自性)이 청정함을 설하여 주시사 저희들이 지금 죄업(罪業)의 성품이 공(空)한 것을 깨달음을 얻고 두려움을 내지 아니하옵니다. 저희들이 지금 부처님 법 가운데 더욱 즐기고져 하여 출가(出家=집을 떠나 승이 됨)하여 수도하며 범행(梵行=청정한 생활)을 갖고져 하오니 원컨대 부처님께서 섭수(攝受=거두어 달라는 뜻)하옵소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착하다 하시다.

 

이때에 이들은 찰라 간에 머리가 깎여 그 털이 스스로 떨어지고 가사(袈裟=스님의 법의) 옷이 몸에 입혀지니 곧 부처님께 말씀사뢰되 지금 열반(涅槃)함은 부처님의 위력을 입었음이라. 하고 몸을 허공에 날려 불을 일으켜 스스로 타 버리니 이때에 실로 죄업을 지은 자들은 이 사람을 보고 우리와 같은 죄를 짓고도 출가(出家)하며 법문을 듣고 그가 먼저 해탈했으니 나도 이제 또한 마땅히 부처님의 제도하심을 구하리라 하고 나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 드리되 위와 같은 인연으로 원컨대 자비를 드리우사 고(苦)를 구해주옵소서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착하도다 하시고 너의 지은 바 업(業)은 어디서 일어났으며 죄업의 모습(罪業色相)은  어떠한고 하시니 이때에 이 사람의 선근(善根)이 성숙했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듣기를 다하고 나서 몸에 있는 모공(毛孔)에 큰 불덩이가 나오거늘 부처님이 금수(金手=부처님 손이 금빛 같음)를 내시사 그의 이마 위에 얹으시니 이 사람이 즉시 몸에 나타난 불이 꺼지고 그 고뇌(苦惱)를 여의고 크나큰 쾌락을 얻어 정신심(淨信心=청정하게 믿는 마음)으로 말씀 사뢰되 제가 먼저 부처님께서 널리 설하시는 법계(法界)의 상(相)을 여의시는 법(離相之法)을 듣자옵고 제가 이제 죄업성(罪業性)이 공(空)한 도리(道理)를 깨달아 다시 두려워 하는 생각을 내지 않게 되었사오며 몸을 던져 부처님께 출가귀의(出家歸依)하여 다시 사제의 법(四諸之法=苦集滅道)을 듣고 멀리 진구(塵垢=티끌과 때)를 여의고 무생법인(無生法忍=生이 없어져 死가 없는 법)을 증득하였습니다 하다.


능엄경(楞嚴經)에 이르시되 보는 것과 다 못 보이는 인연은 아울러 생각하는 상(相)이라 허공 중에 있는 꽃(空中花=없는 데서 있는 것이 보이는 헛것)과 같아서 본래 있는 바가 없음이니 이 보는 것과 인연이 본시 그대로가 보리(菩提=본래의 바탕)인지라 묘정(妙正)한 명체(明體)라 하시며 또 경(經)에 이르시되 만약에 한 사람이 참을 발해서 근원으로 돌아가면 시방(十方)의 허공이 모두 다 사라진다 하니 이른 바 미정(迷情=미망의 情)의 덮혀진 바이니 깨친 곳(覺處)은 공을 깨달아 함이니 진영(塵影=티끌 그림자)이 이미 녹아 없어지면 공(空)으로 원래의 각(覺)이 나타남이니 공이 없어지면 각(覺)이 현발(現發)한다 이름이요 망(妄)이 끝나면 마음이 열린다(開)고 이르는 것이니라. 경(經)에 이르되 안과 밖의 모든 법(內外諸法)을 모두 다 알되 사실답지 아니하여 식(識)을 쫓아서 변하는 바이니 모두 다 이 이름을 빌린 것이라 하며 또 식체(識體)는 본래 공(空)한 것이니 변하는 것이 어찌 사실다우리요? 기신론(起信論)에 이르되 일체경계(一切境界)가 오직 망념(妄念)에 의지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니 만약에 심념(心念)을 여읜다면 일체경계(一切境界)의 상(相)이 없음이니라. 또 논(論)에 이르되 말하는 바 각(覺)의 뜻이라는 것은 심체(心體)에서 념(念)을 여인 것을 이름이니 염상(念相)을 여의었다는 것은 허공계(虛空界)와 같음이니 곧 이것을 여래평등(如來平等)의 법신(法身)이라 함이니라.
 

◇ 동산양개화상 어버이 하직하는 글
(洞山良介和尙 辭親書)

 

“엎드려 듣자옵건대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에 다 부모를 의탁하여 생을 받으셨고 만류가 일어나 생성하는 것도 모두 천지(天地)의 덮고 실음(覆載)을 빌어서 한다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하고 천지가 아니면 자라나지 못하는 것이니 다 길러준 은혜를 입고 모두 덮고 실어주신 덕을 받았아옵니다. 아! 일체의 함령(含靈)과 만상의 모습이 다 무상함에 속하며 생과 멸을 여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젖을 먹여 기른 정이 중하고 길러준 은혜가 깊으니 만약 가지고 받들어 뫼신다 하더라도 마침내 보답하기 어렵고 만약 혈식(血食=고기 같은 영양분 음식)을 갖추어 시양(侍養=뫼시고 봉양함)하더라도 어찌 장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효경(孝經)에 이르기를 날마다 세 가지의 희생(犧牲=소,양,도야지)으로 봉양하더라도 오히려 불효(不孝)가 된다고 하였으니 서로 끌어당겨 침몰하면 길이 윤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망극(罔極)한 은혜를 갚고자 할진대 출가(出家=속세의 집을 떠나 입산하여 스님이 되는 것)하는 공덕만 같은게 없다고 했아오니 생사(生死)의 애하(愛河)를 끊고 번뇌의 고해(苦海)를 뛰어 넘으며 천생의 부모(天生父母)와 만겁의 자친(萬劫慈親)에 보답하여 삼유(三有=三界 즉 欲界,色界,無色界)와 사은(四恩=父母恩,國王恩,師長恩,朋友恩)을 갚지 아니함이 없음이리라.

 

그러므로 이르되 한 자식이 출가하면 구족(九族)이 천상(天上)에 태어난다고 하였으니 양개(良介)는 금생의 몸과 목숨을 버리도록 맹세코 집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영겁의 근진(根塵=몸과 마음)으로써 단박에 반야(般若=근본 지혜)를 밝히려 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부모님께서는 마음으로 들으시고 기꺼이 버리시와 뜻으로 반연(攀緣=인연에 조달림)하지 마시고 정반국왕(淨飯國王=석가모니의 아버님)을 배우시며 마야성후(摩耶聖后=부처님의 어머님)를 본받으소서. 다른 때 다른 날 부처님의 회상(會上=수행자가 많이 모여 정진하는 곳)에서 만날 것이오니 이날 지금은 잠시 서로 헤어지겠습니다.

 

양개(良介)는 오역(五逆=불효의 다섯 가지)으로 감지(甘旨=어버이 뫼시는 일)에 어기는 것이 아니옵고 대개 세월이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되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아니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하리요?) 엎드려 바라옵건대 마음에 기억을 두지 마옵소서. 송(頌=읊음을 이름)하여 가로되,

 

“심원(心源=마음의 근원)을 요달하지 못하고 몇 해를 보냈는가.

도리어 뜬 세상에 부질없이 머뭇거린 것을 슬퍼함이여

여러 사람이 공문(空門=佛門을 말함) 가운데서 도(道)를 체득했거늘

유독히 나만이 세상 티끌 속에 오래도록 머물렀도다.”

 

삼가 척서(尺書=올리는 편지)를 갖추어 돌보아 사랑해 주심을 하직하고 대법(大法=부처님)을 밝혀 어머님께 보답하고자 하옵나니 모름지기 눈물을 뿌리면서 자주 생각지 마시고 애초부터 이 몸이 없었던 것 같이 비기어 주옵소서.”


후서(後書) 

“양개(良介)는 감지(甘旨=부모 봉양)에서 벗어남으로부터 지팡이를 짚고 남쪽을 유역(遊歷=가는대로 다니다)하며 세월이 어언 10년을 바꾸었고 기로(岐路=갈림길)는 문득 만리나 막혔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어머님께서는 마음을 거두어드려 도(道)를 사모하시고 뜻을 가다듬어 공(空)으로 돌아가서 헤어진 정(情)을 생각지 마옵시고 문에 의자하여 돌아오기를 바라보지 마옵소서. 한 집안의 일은 다만 연(緣)을 따르는 것이라 일을 만들면 만들수록 더욱 더 많아져서 나날이 번뇌만 더할 것입니다. 형은 부지런히 효순(孝順)을 행하여 모름지기 얼음 속에서 잉어를 구할 것이요(효자 王祥의 고사). 아우는 힘을 다하여 뜻을 받자와 또한 서리가 내린 가운데서 죽순이 나오라고(효자 老萊子의 고사) 울부짖어야 할 것입니다.


대저 사람이 세상에 거함에 몸을 닦고 (修身) 효를 행해야 천심(天心)에 합할 것이요. 승(僧)은 공문(空門)에 처하여 도(道)를 사모하고 선을 참구해야 자애로운 덕에 보답할 것입니다. 지금은 천산만수(千山萬水)에 묘연히 두 길(세속의 길과 출가의 길)이 막혀서 종이 한 장 여덟줄의 글로서 애로라지 짧막하게 심회(心懷)를 쓰옵니다. 송(頌)으로 이르되,

 

명리(名利)도 바라지 않고 선비(儒者)도 바라지 않으며

원컨대 공문을 좋아하여 속진(俗塵)을 버리고자 하나이다.

번뇌가 다할 때 수심의 불이 꺼질 것이요.

은정(恩情)이 끊어지는 곳에 애하(愛河)가 마를 것입니다.

 

육근(六根=눈,귀,코,혀,몸,뜻)이 공한 지혜는 향풍(香風)을 이끌어 오고 일념(一念)이 겨우 생겨나면 혜력(慧力=지혜의 힘)이 붙들어 줍니다. 어머님께 아뢰옵나니 슬퍼하지 마시옵고 죽은 자식 같이 없는 듯이 여기소서.”


어머니의 회답 글(娘廻書) 

“나와 너는 숙세(夙世=宿世, 전전 세상)에 인연이 있어서 비로소 모자간(母子間)의 정을 맺어 애정을 쏟아 왔다. 내가 너를 밴 뒤로부터 신불(神佛)과 하늘에 기도하여 아들 낳게 해달라고 원하였더니 포태(胞胎)하여 달이 차매 목숨이 마치 매달린 실낱 같았으나 바라던 마음이 이루어져서는 보배처럼 너를 아끼어 똥 오줌의 냄새가 나도 꺼리지 않았고 젖 먹이기가 괴로와도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며 점점 스스로 성인(成人; 어른)이 되어서는 보내어서 익히고 배우게 하되 혹 잠깐이라도 때가 지나 돌아오지 아니하면 문득 문(門)을 의지하여 기다렸드니 네가 보낸 편지에 굳이 출가(出家)를 바라고 있으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미는 늙었으며 형은 박정(薄情)하고 동생은 가난한지라 내가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너는 어미를 버릴 뜻이 있겠으나 어미는 너를 버릴 마음이 없다.


한 번 네가 타지(他地)로 떠난 뒤로부터 밤낮으로 항상 슬픈 눈물을 뿌리면서 괴로워하고 괴로워했다. 이미 고향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니 곧 너의 뜻을 따르려니와 네가 왕상(王祥=왕상은 효자로 얼음 위에서 통곡하니 고기가 뛰어나와 부모님께 봉양했다) 이 얼음 위에 눕고 정난(丁蘭=효자,정난은 어머님 타계한 뒤에 어머님을 조각해서 모시고 살았다)이 나무에 새기는 것 같이 함을 바라지 않고 다만 네가 목련존자(目連尊者=부처님 당시 16제자 중의 한 사람. 자기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아귀를 베풀어 먹이는 재를 지냈다. 이것이 오늘날 우란분 재의 유래가 됨)와 같이 나를 제도하여 침윤(沈淪=苦境에 빠짐)에서 해탈시켜 불과(佛果; 成佛과 같은 말)에 오르기를 바랄 뿐이다. 만일 그렇지 못할진대 깊은 허물이 있을 것이니 절실하게 모름지기 체달하여 알아야 할 것이니라.”
 

◇ 규봉밀선사 송(圭峯密禪師頌)

“본각진심(本覺眞心)이 망념(妄念)에 가리운 것이 마치 밝은 거울에 날아오는 먼지가 묻은 것 같도다. 이제 사마(奢摩=定에 드는 것)를 써서 망념을 맑히면 객진(客塵=客은 큰 번뇌. 塵은 미세한 번뇌)이 이미 멸해지고 곧 마음이 공(空)해지리라. 이것은 시방제불(十方諸佛)이 나타난 유래인 것이니 범부와 성인은 본래 둥글어(圓) 나의 마음의 뿌리거늘 불심(佛心) 속에 있으면서 어찌 내 마음에 부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의심하리요? 몸과 마음을 관방(寬放)해서 혈맥을 따르면 면면(綿綿)히 출입해도 적정(寂靜)해서 소리가 없으며 여기에서 자연히 마음이 쉽게 정해지면 이에 불조(佛祖)로 무생(無生)을 증득하리라.”


◇ 용아돈화상 송(龍牙遁和尙頌)

“한번 무심(無心)을 얻으면 문득 도정(道情)이 육문(六門=眼耳鼻舌身意)에서 휴흘(休歇)하기 때문에 형체(形體)가 수고롭지 아니하나니 연(緣)이 있는 것은 나의 벗이 되지 못하며 씀이 없는(無用) 쌍미(雙眉=모습)가 도리어 형제가 되는 것이네. 깨쳐서 다 알면 도리어 깨치지 못한 사람과 같으나니 무심(無心)으로 승부(勝負=지고 이기는 것)하면 스스로 마음이 편함인져. 종전(從前)에 고덕(古德)이 빈도(貧道)라고 자칭(自稱)했는데 이 문중(門中)을 향하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될 것인고?”


◇ 대법안선사 인승간경 송(大法眼禪師 因僧看經頌)
“지금의 사람들이(今人) 옛 가르침을 읽어보면서도 마음 속에 시끄러움을 면하고자 한다면 다만 옛 가르침을 읽어보는 것 뿐이로다. 고덕(古德)이 송(頌)해 가로되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하는 것을 조명(照明)하는 곳과 깊히 반야(般若)를 행하는 때에는 오직 고액(苦厄)을 벗어나진 못하나 결정코 무생(無生)을 증득하리라. 또한 만약 정성(正性)을 발견코자 할진대 먼저 아상(我相)을 꺾어 없애야 할찌니라. 형용(形容)이 어느 곳에 있느냐? 육혈(六穴=眼耳鼻舌身意의 六門)은 본래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 영명성(靈明性)이 활연해지면 소연히 세계가 달통해질 것이리라. 고덕(古德)이 송(頌)으로 가로되 불은 나무에 생겨나서 도리어 나무를 불사르며 지혜는 정(情)에서 일어나서 도리어 정(情)을 제(除)하는 것이니 정심(正心)으로 망(妄)을 관(觀=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함)하는 것을 지혜(智慧)라 이름하며 지혜는 능히 각(覺)의 불가사의(不可思議)에 들어가는 것이로다. 승고선사(承古禪師)께서 항상 모든 사람에게 권하시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게 가되 날타로운 근기를 가진 자는 하루 낮에 해탈(解脫=도를 깨친 상태)하고 둔한 근기는 3년 5년이거나 멀어도 10년을 넘지 못할 것이니라. 만약 그렇게 안 된다면 노승(승고스님 자신)이 너 대신 발설지옥(拔舌地獄=혀를 뽑아 밭을 가는 고통의 지옥)에 들어가리라.”
 

백운화상이 뽑아서 기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白雲和尙 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卷下)
선광 7년 정사년 7월 일 청주목 교외 흥덕사에서 주자로 인쇄하여 펴내다.
(宣光 七年(1377) 丁巳 七月 日 淸州牧外 興德寺 鑄字印施

 


(불교명상음악 '산사의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