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일본에 있는 발해 비석의 반환을 요구'
↑ 일본 왕궁 정원에 있는 발해의 석비 '홍려정비(鴻臚井碑).
중국은 당(唐)나라와 발해가 군신(君臣)관계라고 주장한다 중국이 일본에 있는 발해의 비석을 중국으로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의 비석은 현재 일본 왕궁의 정원에 보관 중인 '홍려정비(鴻井碑)'다. 중국이 이 비석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이 비문의 내용이 발해를 자기네 역사의 일부로 규정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학계는 이 비석이 당나라와 발해가 군신(君臣)관계를 맺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유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중국 여순(旅順)에서 옮기기 직전에 찍은 사진인 듯 하다.
홍려정비(鴻臚井碑) 반환을 요구하는 중국 민간단체의 주장을 보도한 아사히 신문이 취재를 위해 궁내청을 접촉했으나 일본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궁내청은 "이 비석은 일본의 국유재산"이라며 "출입제한이 있어 일반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 라고 만 밝혔다. 아사히신문은 중국이 이 비석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발해 이전 이 지역에 존재했던 고구려 역사를 둘러싼 한.중 간 논쟁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이 '홍려정비'가 무엇이기에 중국의 민관이 열성적으로 반환에 매달리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비문의 내용 때문이다. 비문에는 "칙지절선로말갈사(勅持節宣勞靺鞨使) 홍려경최흔정량구영위(鴻卿崔井兩口永爲) 기험개원이년오월십팔일(記驗開元二年五月十八日)"이라고 기록돼 있다. 최흔(崔忻)은 713년 2월에 당(唐)나라 황제 현종(玄宗)의 명령을 받고 발해로 가서 발해 시조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員外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한 사람이다.
↑ 여순(旅順) 황금산(黃金山) 기슭의 우물 유적 ‘鸿胪井遗址’
조공도(朝貢道)는 발해의 국도 상경(上京)에서 당(唐)나라로 이어지는 교통로로서, 국도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敦化縣)를 거쳐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臨江鎭)로 나온다. 이어 압록강구에서 해로로 랴오둥반도[遼東半島]의 연안을 따라 뤼순[旅順]에 이르고, 여기에서 먀오산열도[廟山列島]의 섬들을 지나 보하이만[渤海灣]을 횡단하여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등주(登州)에 상륙한 뒤 육로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들어가게 된다.
↑ 일본으로 옮겨온 뒤의 홍려정비(鴻臚井碑).
현재 중국 측이 모두 29자에 불과한 이 비석(鴻井碑)의 반환을 강하게 요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국 정부 차원에서 200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상의 발해사 왜곡에 적극 활용하려는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은 발해를 국가가 아닌 '당나라 시기 하나의 지방정권'이라 규정하고, 이러한 논리를 펴는 데 홍려정비(鴻臚井碑)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중국 학계는 최흔(崔忻)의 직함에 있는 '말갈'이 발해의 국호라고 한다. 그러나 '말갈'은 최흔이 방문한 발해의 수도(오늘날 지린성 둔화시)가 말갈족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라는 의미이지, 발해의 국호는 아니었다. 발해인이 처음부터 국호를 스스로 '진국'(震國 혹은 振國으로 표기)이라고 했다는 것은 중국 측의 기록인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의 발해전뿐 아니라 '책부원귀'에도 언급돼 있다.
↑ 길림성 돈화(敦化) 육정산고분군(六頂山古墳群)의
돈화(敦化) 육정산고분군(六頂山古墳群)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길림성) 둔화현(敦化縣, 돈화성)에서 남쪽으로 약 5㎞ 떨어진 류딩산(六頂山, 육정산)에 있는 발해 초기의 고분군이다. 육정산(六頂山)은 높이 603m로 6개의 작은 산봉우리가 연결되면서 동서로 뻗어 있다. 서쪽지역의 고분은 1949년 8∼10월, 1959년 8월, 1963년 10월, 1964년 5∼6월에 조사하여 총 17기를 발굴하였으며, 동쪽지역의 고분은 1963년 10월, 1964년 5∼6월에 조사하여 15기의 고분을 발굴하였다. 이 고분군의 성격이 규명된 것은, 1949년에 정리한 고분 중 제3대 문왕의 2녀 정혜공주의 묘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 고분군이 발해 초기 왕실과 귀족의 무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근처에 발해 초기의 도읍지로 전해지는 오동산성(敖東山城)이 있다. 이곳은 오동성지(敖東城址)라고도 한다.
둘째, 최흔(崔忻)의 직함에 있는 '말갈'은 발해의 주체민족이 말갈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중국 학계는 해석하기도 한다. 발해에 관한 중요한 기록이 있는 '구당서' 발해전의 편명이 '발해말갈'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발해의 주민에 말갈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발해 사료 중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이고, 건국 과정에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참여했다는 기록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학계가 고구려 유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발해의 건국자나 주민이 말갈인이라고만 하는 것은 중국 측의 편향된 역사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홍려정비(鴻臚井碑)에서 최흔(崔忻)이 등장함으로써 그가 발해에 가서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됐으며, 그 결과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중국 학계는 주장한다. 그러나 발해가 당(唐)의 책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연호, 전왕에 대한 시호, 황제 칭호 등을 사용했다는 것은 당나라도 익히 알고 있었다. 무왕 때에는 당(唐) 황제의 잘못을 질책하고, 심지어 당의 본토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 측의 주장과 달리 발해가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국가였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 발해 무왕 때, 무신 장문휴(張文休)가 해군을 이끌고 당나라를 공격했다.
중국이 홍려정비의 반환을 통해 노리는 속셈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 지린(吉林)성 사회과학원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는 동북공정의 핵심 인물인 마다정(馬大正)이 참여하고 있는데, 최신호에 실린 발해 논문의 제목이 바로 <발해 국호 최초의 칭호인 '말갈' 고찰>이다. 중국 당국이 발해 유적을 정비, 2007년을 전후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것이라는 점도 중국의 동북공정이 중지 혹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며 방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북방 지역의 역사.문화적 실체를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발해(渤海, 699~926)는 어떤 나라인가?
↑ 대조영(大祚榮)은 699년 발해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발해는 668년 고구려가 망한 뒤 그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나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연해주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가진 복합민족국가였으며 고구려계가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다. 68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신라와 당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당의 영주(營州. 오늘날 랴오닝성 차오양,朝陽)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나라의 영주(營州)에 끌려와 살던 대조영(大祚榮)은 696년 랴오시(遼西) 지방(地方)에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 혼란이 일어나자 이 틈을 타 말갈족과 함께 탈출하여 동쪽으로 가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지린) 돈화(敦化, 둔화)시 부근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국(震國,大震國)’이라 했다.
↑ 길림성(吉林省, 지린) 돈화(敦化, 둔화)시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동모산(東牟山)을 중심으로 한 수도시기는 약 57년 정도였다. 수도를 옮긴 이유는 국력 신장과 인구증가에 따른 경제 문제가 가장 컸지 않았는가 한다. 그러나, 발해건국 초기의 동모산은 발해 건국과 적대세력의 방어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곳이다. 동모산(東牟山)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육정산(六頂山)에서 발해왕족과 평민들의 고분군이 발굴되었다.
그 후 대조영의 세력이 계속 커지자, 당(唐) 현종(玄宗)은 외교관계를 맺고 713년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함으로써 국호를 발해라 부르게 되었다. 당(唐)의 역사책인 '신당서(新唐書)'에는 713년 당나라가 관리 최흔(崔忻)을 파견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고, 이때부터 ‘말갈’이라는 호칭 대신 ‘발해’라고만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성터 유적.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을 실시한 것은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문화유산 신청에 자극받아 급작스럽게 수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발해 지역에 대한 '역사침탈' 작전은 이미 1980년부터 이미 진행되어 오던 것이었다. 이보다 우선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서남공정'과 신장지역에 대한 '서북공정' 등이 진행되었지만 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와 변강사지연구중심 등에서 소수민족 조선족의 고대사도 중국사화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첫 대상은 기록이 엉성한 발해였다.
↑ 발해 시대의 절터(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에 남아있는 석등과 돌사자상.
제4대부터 제9대 왕까지는 대혼란기로 불과 20여 년 동안에 6명의 왕이 바뀌는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제10대 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국의 황금시대를 맞았다. 발해는 대조영(고왕.高王)이 건국한 시기부터 문왕(文王)이 상경으로 천도해 멸망할 때까지 거대한 영토를 확장했다. 남으로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의 용흥강을 경계로 신라와 접하고, 동으로는 연해주에 걸친 동해안 지역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헤이룽(黑龍)강과 쑹화(松花)강의 중.하류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서쪽 경계는 초기에 압록강 하류에 이르렀다가 점차 확대해 9세기 전반부터 랴오둥(遼東)을 모두 차지했다.
↑ 발해의 행정구역. (녹색이 발해 영토)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5경 15부 62주로 전국을 나누어 통치하였으며, 그 번영이 당에서도 ‘해동성국(海東盛국)’이라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선왕이 죽은 후 다시 정치는 혼란을 거듭하여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간의 정치적 분쟁이 계속되었다. 결국은 거란족의 통합을 이룩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 926년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부흥을 위한 발해인들의 항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928~986년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속한 정안국(定安國), 1029~1030년 랴오냥(遼陽)을 중심으로 한 흥료국(興遼國)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멸망 후 무려 200년간이나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 후 발해 유민은 대부분 고려로 들어가 고려인이 되었다.
↑ 발해를 멸망시킨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당(唐) 말기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등장하면서 907년에 거란족을 통일하고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 후 거란은 국호를 요(遼)라 칭하고, 그 위세는 만주·화북(華北)·몽골[蒙古(몽고)]·신장(新疆, 신강) 방면에까지 미치어 북아시아에서 일대세력을 형성하였으나, 1125년 만주에서 일어난 금(金)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당시 그 일족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중앙아시아로 달아나 서요(西遼)를 세웠다. 거란은 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민족으로부터 키타이(Kitai)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멸망한 고구려의 영토와 주민, 그리고 역사 의식까지도 이어받았다. 발해의 왕은 스스로 '고려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고려(국)'라고도 했으며, 나라가 망한 뒤 발해의 유민들은 또 다른 고구려 계승국인 고려로 망명했다. 발해는 또 엄연히 한국사에 속한다는 점이다. 우리 역사는 고조선부터 시작해 삼국→남북국→고려→조선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발해는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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