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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설화

[단편소설] '탱자나무 울타리' - 유 금호 작

잠용(潛蓉) 2015. 1. 2. 09:38

 

[단편소설]
'탱자나무 울타리' / 유 금호 작
 

 

 

 

  그날 늦은 오후, 종로 5가에서 동대문 쪽, 꽃시장 길에 들어선 것은 친구, 백 만금(白萬金)의 전화 탓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백 만금은 내년 12월 대통령 선거야 말로 민족 장래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웅변조의 큰소리로 떠들어서 나는 수화기를 귀에서 거리를 두고 띄워야 했다. 웃기지도 않은 친구들이 어느 날 줄 한번 잘 서 있다가 국회의원 되고, 장차관에 국장 하고 하는 거여. 자리가 사람 만들지. 처음부터 그 자리 딱 맞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네도 알거여. 이 나라 정치풍토를 바꾸는 데, 이번 한 목숨을 내던지겠다고 한참 떠들던 그는 내 사무실에 일간 들르겠다며 워낙 바빠 전화를 끊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한 마디를 덧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


  “옛날 시골 과수원집 있었지 않어? 그 영감네도 여러 해 전 서울로 온 모양이더라고....”

 

  얼마나 가난이 사무쳐서 자식 이름을 ‘백 만금(白萬金)이라고 지어주었을까? 햇볕에 탄 볼과 손등에 돼지 비게 덩어리를 문지르고 학교에 나온 탓에 ‘돼지기름’ 별명이 하나 더 붙었던 친구 전화에 갑자기 동대문 꽃시장 생각이 났다. 신작로 등성이 너머 엎디어 있던 세 칸짜리 초가집 두 채. 우리 둘은 초등학교 때 별명이 ‘까마구 형제’였다. 얼굴과 손등의 때 때문이었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손등과 양쪽 볼에 돼지기름을 문지르고 나타난 뒤부터 그는 ‘왕 까마구’가 되고, 나는 ‘새끼 까마구’로 강등이 되었다. 손뿐 아니라 양쪽 볼까지 얼어 터져 피가 베어나자 제 어머니가 정육점에서 돼지기름을 얻어다 문질러 주었다는 거였다. 그 시절 기억들은 한 동안 내게 봉인된 퇴색한 흑백사진이었다. 5학년 때 시골을 떠나온 후, 나는 그곳에 가보지도 않았고, 그리워해 본 일 역시 없었다. ‘까마구 형제’로 불리던 유년이 싫었고, 부끄러웠다.


  10여년 저쪽 어느 날, 동대문 뒷골목 싸구려 소주집에서 생각지도 않게 그를 만났고, 그와의 재회 때문에, 색 바랜 유년의 조각들이 기억의 틈새를 비집고 떠올라왔다. "생각나지? 그 과수원 집 어른..." 험험험... 그 헛 기침소리, 나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 헛기침소리. 장 진수, 자네가 그때 얼마나 비겁했는지 거 알아? 기껏 같이 복숭아 서리하자고 맹세한 것은 언제고, 탱자나무 베어낼 톱 가지러 간 사이, 자네 혼자 도망간 거 생각이나 나는 거야? 그건 비열한 배신이었어... 그것만이 아녀. 단백질 보충 사건, 그때도 자네는 배신자였다고 그때 왜 우리들이 그리 시커멓고, 비쩍 말랐는가 하는 거, 그거 다 단백질 부족이었거든. 요새 아이들 봐. 너무 잘 먹여서 둥글둥글 풍선들이 되어 가는데... 생각하면 그때는 다 불쌍했지. 비아프라 난민들이 따로 있겠나? 못 먹으니 비쩍 말라 퀭하게 까마귀를 닮아간 것인데... 나, 지금도 형편이 과히 펴지 못했지만 아프리카 어린애들 굶어 죽어가는 사진 보고나서는 매달 유니세프에 돈을 보네. 자네도 얼마씩 보내 주라구."


  갑자기 백 만금이 술잔을 내려놓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그치지 못하자 옆 자리의 노동자들 둘이 우리를 힐끔거렸었다. "그때 꿩알 스무 개를 주어다가 삶아 먹으면서 모처럼 단백질 보충을 한 것까지는 좋지 않았나? 그 다음에 내가 다시 꿩 알이라고 주어다 삶은 것은 조금 문제가 있기는 했던 것 나도 인정하네" "그래, 알아. 나도 그 기억만은 너무 생생해"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플라스틱 바가지에 반 남아 무슨 알을 구해온 것은 좋았다. 또 알을 삶는 것까지도 그 애네 집 풍로에서 솔가지로 불로 익혔는데 꺼내놓고 보니 껍질이 좀 이상했던 것이다. 달걀이나 꿩 알은 껍데기가 바삭바삭 벗겨지는데 웬걸, 이건 가죽 같아서 가위로 잘라내듯 껍질을 잘라내야 했다. 껍질을 벗겨지자 속은 꿩 알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한 개를 먹었고, 훨씬 빠른 속도로 입 속으로 알을 가져가던 ‘돼지기름'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입 속에서 무엇인가 꺼냈던 것이다. "무슨 알 속에 뼈다귀가 다 들었냐?" 그가 알을 씹다가 이물감이 들어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을 본 순간, 나는 '꺄악'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를 뛰어 일어났다. "그 때도 자네는 비겁했다, 이거여. 뱀이란 게 영양가로 보아서 얼마나 사람한테 좋은 건데, 알 속에 새끼가 생긴 것은 그러니께 살모사(殺母蛇)였을 것이여. 그러니 그건 보통 뱀보다도 한 수 위지. 그런 것을 우리 처지에 어디서 구해다 먹어?"


  그는 20년이나 지난 첫 만남에서부터 내 비겁함을 조목조목 깨우쳐 주려는 듯 따졌다. 그 후 전화 통화도 하고, 틈을 내어 싸구려 선술집에서 소주잔을 놓고 그가 살아 온 나름대로의 영웅적인 삶의 갈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20여 년 전, K시에서 일어났던 민주 항쟁 와중에서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다리 하나가 부실해졌다는 이야기도 했다. "장 진수, 자네는 말여. 그때 자네가 K시에 있었다고 해도 방문 걸어 잠그고 이불 뒤집어 쓰고 있었을 것이구먼."


  그때 그가 건넨 명함에는 무슨 '민주화동지회 사무차장’이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5년 전 대통령선거 임박해서는 어느 후보자 선거요원이라는 명함을 건냈다. "자네 알지? 이번에는 다 바꾸어야 하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는 다 뒤집어 엎어야 해. 물이 고이면 썩듯이 이 사회가 안 썩은 곳이 어디 있는지 둘러보라고" 그의 말대로 그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 되었으면 그 역시 어떤 식이든 포상을 받았을 지도 몰랐다. 무슨 감투를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감투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가슴 한 가운데를 견딜 수 없이 웃음이 밀고 올라 왔다. 감투라니... 비가 부슬거리던 늦여름 한낮, 동네 고물상 앞에서 무쇠 솥을 모자처럼 뒤집어쓰고 앉아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름방학 끝나면서 방학 동안 모은 폐품을 모두 학교에 가져가야 되는 날, 동네 고물상에서 구멍 뚫린 무쇠 솥 한 개를 슬쩍 해 나오려다 벙어리 주인에게 덜컥 덜미를 잡혔던 것이다. 훔치려던 무쇠 솥을 모자처럼 머리에 얹고 한낮동안 고물상 앞 한길 가에 앉아 있어야 하는 벌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야, 그래도 덕택에 비는 안 맞았다.”

  그는 내게 그렇게 말했지만 뒷날 그 이야기를 꺼내면 벌컥 화를 내었다. 태풍에 엄청난 홍수가 나서 저수지와 바닷물까지 솟구쳐 올랐던 어느 해 여름, 아버지도 그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더러 큰물도 지고, 태풍이 불어 물속도 휘저어서 물을 뒤집어주어야 물이 안 썩고 고기도 살지, 그대로 두면 물도 썩어 고기도 못 산다." 아버지의 그 말이 "송곳 꽂을 땅 한 뙈기도 없는 신세에 고향은 무엇이고, 선산이 뭣이여?" 됫병 소주를 대접에 따라 비우면서 웅얼거리던 말과 어떻게 다른지 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밤새 됫병 소주를 거덜 낸 며칠 후, 우리는 세간을 꾸려 북적이는 서울 변두리로 시궁창 물처럼 스며들어 왔던 것이다. 오늘도 그의 전화를 끊고 나자 머릿속을 헤집으며 과수원집 탱자나무 울타리가 떠올라 왔다. 

 

  우리가 살던 등성이 너머 신작로를 건너면 탱자나무 울타리에 싸인 과수원이 있었다. 울타리는 불가침, 혹은 경계. 전유와 차단의 의미, 무언의 관습적 약속일 터였다. 집과 집의 확실한 경계선, 사유와 공유의 구획, 국경, 교도소 높다란 벽돌담이 가진 일반 사회와의 차단. 포로수용소의 전기 철조망, 생 울타리, 돌담, 중세의 성(城)을 싸고 있는 인공의 해자(垓子)... 그런데 그 많은 구획을 명칭한 상징들 속에서도 내게는 그 과수원을 둘러싸고 있던 탱자나무 울타리만큼의 완강한 경계를 떠올려 볼 수가 없었다.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골아이들이 복숭아나, 배, 참외나 수박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과수원 둘레에 탱자나무를 심었겠지만 그 울타리는 돌담이나 벽돌담과는 성격이 다른 경계였다. 탱자나무들은 살아 움직였고, 바람이 심하게 불 때는 물결치듯 출렁거리기까지 했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는 돌이나 벽돌담같이 사다리를 걸치고 넘어갈 수도 없는 연성(軟性)이었다. 그러면서도 촘촘하게 그물처럼 얽힌 날카로운 가시들 사이로 바람과 연기가 드나들었고, 작은 산새들의 왕래가 허락되었다.


  참고서를 살 수 없었고, 학교 보충 수업비와 수학 여행비도 내지 못해 과외는 상상해보지도 못한 채, 날마다 파김치가 된 아르바이트가 한때의 내 생활 전부였지만 대학졸업장은 받았다. 그러나 이력서를 받아주는 곳은 드물었다. 나는 3류대학 출신이었고 토플점수도 낮았다. 지금의 작은 출판사가 그래도 내 이력서를 받아주었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의 견고한 차단과 배척은 취업과 사회생활에서도 여전히 반복되어 나는 친구 말마따나 도전보다 체념, 모험보다 수용 쪽에 기우러졌을지도 모른다.

 

  날개까지 절반 정도가 새빨갛던 고추잠자리를 잡은 적이 있었다. 보통 고추잠자리는 꼬리만 빨갛고 날개는 투명한데 그날 오후, 그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조심스럽게 엄지와 검지로 꼬리를 쥐었던 녀석은 날개 끝부분만 빼고 짙은 빨간색이어서 꼬리를 잡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쿵쾅대었는지 그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야호! 소리라도 지르려던 참이었는데 그때 뒤통수 쪽이 이상하게 따가워져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수림이었나, 서림이었나, 그 애 이름이 확실하지 않지만 과수원집 딸아이였다.


  “무지 이쁘다. 그거. 나 줄래?”
  여자 아이는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고 내게로 다가왔다. 나보다 한 학년 아래에 그 애 오빠로 김 중혁이라는 아이가 있었고, 여자아이는 두어 해 더 아래 2학년쯤이었을까.

 “그림책에 있는 것 하고 똑 같다.”
  나는 얼떨결에 고추잠자리를 전해주며 그 아이의 희고 깨끗한 손을 본 순간 슬그머니 내 손을 뒤로 감추었다.
    "이거 너 가져라.”
   그 애가 뜯지 않은 캐러멜 갑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갖고 싶었다. 정말 그 캐러멜 갑을 받고 싶었는데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가져. 맛있어. 이거."

   그 애는 내 발 밑에 캐러멜을 내려놓고, 고추잠자리 날개를 접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깡충거리며 탱자나무 울타리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날 나는 해가 질 때까지 졸졸거리는 시내물가에 앉아 차가운 물에 손을 담구고 작은 돌멩이로 손등이 푸르딩딩해질 때까지 문질러댔다. 터진 손등에서 피가 베어나왔지만 나는 그때 어금니를 물면서 아픔을 참았다. 남의 집 일을 나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은 냉기어린 방구석에 엎디어 나는 그 애가 준 캐러멜 한 개를 꺼내 오래오래 아끼면서 녹여먹었다.  

 

  서울에서도 탱자나무가 살 수 있을까, 백 만금을 만나고 나서 엉뚱하게 그 생각이 들었다. 기온 상승으로 서울에서도 대나무를 정원에 심은 것을 보았으니까, 탱자나무도 서울에서 겨울을 날 수 있을지 몰랐다. 나는 꽃시장을 지날 때면 묘목이 아니더라도 화분에 심어진 탱자나무가 있는지 살피는 버릇이 생겼지만 화분에 탱자나무를 심어 파는 것은 발견하지를 못했다.
 
  종로 5가에서 동대문 가까이까지 인도 한쪽으로 오래전부터 서민적인 꽃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시민들은 대개 알고 있을 것이다. 리어카나 좌판, 때로 길 한쪽 바닥에 할미꽃이나 채송화, 붓꽃, 상사화, 원추리, 금낭화, 제비꽃 등속 야생화들이 자리를 잡기도 하고, 수선화나 아마릴리스 같은 여러 종류 구근, 분재, 동서양의 난, 관엽식물, 각종 과일나무들이 왕래하는 인파에 섞여있어 한가한 사람들에게는 꽤 눈요기가 되는 거리다. 


  봄철같이 과일묘목이나 온실에서 꺼내온 꽃망울 붙은 동백, 빨갛게 싹이 올라오기 시작한 작약, 붉은 잎이 돋기 시작한 단풍 분재, 남쪽 산골짜기에서 무더기로 채취해 온 춘란들은 없지만 여름에도 관엽식물과 중국 난, 잎이 무성해진 분재들이 여전히 리어카나 길 한 쪽 좌판을 차지해서 왕래가 불편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무나 꽃들 앞에 발걸음을 멈추거나 천천히 걸어갔다.

 

  화분에 탱자나무가 심어진 게 있을까, 또 그 생각을 했지만 탱자나무는 역시 없었다. 꽃시장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나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지나면서 보았던 빳빳하게 풀 먹인 흰 모시 두루마기에 눈썹이 하얗게 센 노인 때문이었다. 노인은 분재 몇 개를 앞에 두고 낚시 의자에 앉아 눈을 내려감고 있었는데 행인 몇 사람이 자기 앞에 서 있어도 눈을 뜨지 않은 채였다. 소나무, 단풍나무, 모과, 소사나무 등속의 열 개나 될까, 분재를 앞에 두고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영 그 바닥에 어울리지 않았다. 중년 남자 한 사람이 말을 걸었어도 노인은 대꾸할 기미가 없었다.


  “이건 얼마요?”
  다른 손님이 소나무 분재를 가리켰다.
  노인은 눈을 떴지만 대꾸가 없었다.

  “저 해송(海松)은 얼마짜리요?”
  “파는 것 아니오.”
  노인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그러더니 사과 궤짝에 분재들을 옮겨 넣기 시작했다. 중년 남자가 투덜거리며 그 앞을 떠나자 노인은 어흠흠흠... 헛기침을 했는데, 그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렸다. 그 헛기침소리에서 나는 아, 하고 짧게 신음을 했다. 열 살 전후에 들었던 헛기침소리가 생각나서였다. 낡았지만 정갈하게 손질한 모시두루마기에서 온 막연한 기시감(旣視感)같은 것이었을까. 노인이 사과 궤짝에 분재들을 차곡차곡 넣은 뒤 앉아있던 자리 뒤편 화분가게 안으로 궤짝을 다 옮기고 허리를 펼 때까지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30년이면 강산이 세 번 변한다는 긴 시간이고 공간적으로도 국토의 남쪽 끝자락과 서울을 연관짓는 것이 무리였지만 나는 노인이 물건을 맡기고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오늘 ‘돼지기름’의 전화 탓도 있었을 것이다. 

 

  ‘돼지기름’과 통화가 있거나 술잔을 기우린 뒤에는 잊혔던 시골에 대한 기억들 사이로 과수원집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가 자주 떠올랐다. 우리로는 앞으로 내딛을 수 없는 경계선이었고, 범접할 수 없는 벽이었던 그 가시울타리. 그 울타리를 사이로 울타리 안에 사는 사람과 우리는 전혀 별종의 인간이었다.

 

  어느 날, 학급운영비를 못내 변소 청소 당번이 되어 혼자 늦게야 학교에서 돌아온 일이 있었다. 집으로 가려면 신작로를 건너야 하는데 나는 뉘엿거리는 저녁노을을 보면서 뒷산과 이어진 과수원집 탱자나무 울타리 위쪽으로 올라갔다. 잠자리들이 잠을 자러 올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질 때쯤 잠자리들은 떼로 날아와 대개 울타리 마른 가지 끝에 앉아 날개에 이슬을 적시며 밤을 지냈다. 같은 곳에서 밤을 지내는 왕잠자리가 어디에 자주 모여 자는지 전에 보아둔 곳이 있었다. 보통 잠자리는 어깨높이 나무 가지에서 많이 잠이 들지만 왕잠자리는 훨씬 높은 나무의 마른 가지를 자리로 정하는 일이 많았다.


  그날 나는 왕잠자리를 다섯 마리나 잡았는데 한꺼번에 왕잠자리를 그렇게 여러 마리 잡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녀석들의 날개를 가지런히 접어서 손가락 사이에 끼고 과수원집 대문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빨간 꽃무늬 원피스가 대문 밖에서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 애는 대문 밖 빈 터, 나무 밑동에 양쪽으로 고무줄을 묶어놓고 혼자 팔딱팔딱 고무줄놀이를 자주했다.

 

  아이는 그날도 해가 질 때까지 고무줄놀이에 빠져 있었다. 귀밑에서 자른 단발머리가 그 아이의 원피스에 새겨진 꽃들과 함께 고무줄 위에서 출렁거렸다. 놀이가 끝날 때까지 나는 키 작은 참나무 뒤에 쭈그리고 앉아 팔랑거리는 원피스 자락과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뒤섞이는 것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옷에 수놓인 꽃과 어울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가 나비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꽃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는 나비 생각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어흐흠’ 하는 과수원 집 어른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아마 외출에서 돌아오는 양, 중절모를 쓴 어른은 고무줄놀이에 빠져있는 딸아이를 한 손으로 번쩍 안아들더니 고무줄을 그대로 둔 채 곧장 울타리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얌전하게 날개를 접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있던 왕잠자리들을 하늘로 내던져 올린 것은 삐끄덕 닫히는 대문소리를 들은 직후였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벌겋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서인지 왕잠자리는 멀리 날아가지 않고 울타리의 꼭대기 쪽을 맴돌다가 그대로 탱자나무 가지 끝에 내려앉았고 고추잠자리는 붉은 꼬리를 흔들면서 저녁노을 속에 섞여버렸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이 드문 아버지가 그날 밤 늦게 들어와 마루에서 한 되들이 소주병을 기우려 대접에 따라 마시는 것을 보았다. "송곳하나 꽂을 내 땅만 있어도 말이여. 송곳 한 개 꽂을 땅도 없는데 어쩔 것이여? 그래, 어쩔 것이여..."

 

  겨울이면 검게 염색한 군복에 방한모를 눌러 쓰고 백 만금네 아버지와 남의 집 인분 통을 나르던 아버지를 담벼락에 기대어 바라보던 유년은 늘 배가 고팠던 기억밖에 없다. 겨울철 골목 담벼락에서 해바라기를 하다가도 우리는 과수원 집 어른의 헛기침소리가 나면 한 쪽으로 비켜서서 절을 했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동네 어른들도 과수원 집 어른에게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고개를 숙였다.    


  "큰 일이고 작은 일이고 뭣 좀 할라하면 이것이 다 권력하고 상관이 있다, 그거여. 그런디 그 권력이란 것을 가질라면 돈이 있어야 하거든. 고 돈을 또 손에 쥘라고 하면 권력이 있어야 하고. 그 아래 위가 확 한번 뒤집어 지는 기회가 바로 선거판이여. 그 판세에 잘만 끼면 어저께 똥구멍 시꺼먼 것들도 언제 그랬느냐, 외제차에 비서가 딸리는 것이여. 국회의원들 봐. 당선만 되고나면 그날부터 다른 세상이지. 좃도 아닌 것들이 선거 때 줄 잘 서 있다가 한 자리씩 하는 것 못 보았어? 하기사 자네는 어려서도 도전정신이 없었고, 샌님이어서 지금도 종이하고 연필 쥐고, 그리 사는 것 아닌가? 그래, 요새는 컴퓨터가 있으니 쪼매 달라지긴 했나? 그래 보았자, 자네는 혁명과 도전에는 소질이 없는 것을 내 안다, 이거지. 말하자면 이런 선거판이나 투쟁에는 안 맞는다 이거여. 그리 살아 온 몸이니 거 뭔가? 예술계통 문화, 그래 문화관광부 그런 쪽에 한 자리 잡아주면 되겠네."


  소주잔을 앞에 놓고 그가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드는 모습을 멀겋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도깨비감투’ 생각이 나서 쿡 웃었다. 어느 때였던지 유난히 검은 얼굴에 손톱으로 할퀸 자국이 그득해서 그가 학교에 온 적이 있었다. 살아있는 고양이 수염을 뽑다가 고양이 발톱에 할퀴었다고 했다. ‘도깨비감투’ 이야기를 담임선생님이 들려 준 며칠 후였을 것이다.


  살아있는 호랑이 수염을 뽑아 그 수염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면 투명인간이 된다는 이야기에 호랑이야 실물을 본적도 없었지만 호랑이가 고양이과 동물이라는 말은 수업시간에 들은 적이 있어서 우선 고양이 수염으로 모자를 만들려고 했다고 했다. "그걸 쓰고 맨 처음 무얼 하려고 했는디?"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과수원집에 투명인간으로 들어가 과일을 따오려고 했다고 피식 웃었다. 도깨비감투 아니라도 옛날에 쓰고 앉았던 그 무쇠 솥단지를 쓰고 있으면 밤에는 까맣게 보여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일 것이라고 했더니 그날은 몹시 화를 냈다. 사실 그 역시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안쪽에 들어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탱자가시 울타리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바람이나 연기, 굴뚝새나 들쥐로 변신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그곳은 접근차단의 공간이었다. 굴뚝새들이 떼를 지어 탱자나무 가시 사이를 깡충대다가 후르륵 밖으로 날아오르고 다시 울타리 안으로 연기같이 빨려 들어가 콩콩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았던 것 같다. 굴뚝새만이 아니었다. 작은 몸집의 들쥐도 이쪽에서 안쪽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드나들었고, 벌겋게 서쪽 하늘이 물들어 갈 때 안마당 굴뚝에서 올라가던 연기 한 가닥도 탱자나무가시 사이를 스쳐 내 앞에서 흔들리다가 공중으로 흩어지기도 했다. 뱁새, 박새, 곤줄박이들도 드나들고, 바람과 연기도 왕래했지만 우리는 그 탱자가시 울타리 앞에서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가 될 것 같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난 참이었는데 여러 날 만에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모처럼 내가 자네한테 술값 좀 쓰겄다, 했는디, 사태가 여의치 않아 작전상 당분간 국외에 나가 엎어져 있다가 들어와야겠구먼. 그래서 일부러 전화도 지금 공중전화여. 자네 참. 뭘 몰라도 많이 몰라. 요새 우리 쓰는 전화들 말여, 집 전화고, 휴대폰이고 수화기에 다 확성기가 붙었다, 그리 알면 될 것이네." "나, 이장인디 동네 사람들 들으시오. 지난밤에 눈이 무지하게 와 부렀소. 우리 동네가 인자 잘못허먼 완전 좃 되야 불겄소. 싸게싸게 골목 치우고, 큰 길 치우고, 비니루 지붕 무너지기 전에 눈 치워야 쓴께 삽하고 당글개, 비찌락 다 들고 식구대로 다 어서 나오시오. 바로 이런 이장 확성기다, 이거여. 벽에도 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요새는 벽에 전봇대에 다 눈이 있다, 이 말일세. 지금 요 공중전화도 도청이 되고... 아마 내 말하는 쌍판때기도 동영상으로다 다 찍힐 것이구먼. 하기사 세옹지마여. 이번 12월 선거만 잘 끝나고 나면 훗날 요것도 증거가 되어서 우리 동지들 앞에서 내 투쟁 경력증명이 될 수도 있지 않겄냐? 그런 말이거등, 그냥 끊어야 쓰겄네. 선거 임박해서 들어와 가지고 우르르 표 몰아가게 딱 한껀 그때 터뜨릴라고 잠시 잠수한다, 이걸세."


  한 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가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저 혼자 떠들다가 전화가 끊긴 후 나는 사무실 복도에 나가 그 동안 거의 잊고 있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온 몸이 나른해 왔다. 장마가 한풀 꺾였나 했는데 아직 비가 남았는지 여전히 하늘이 잔뜩 흐려 있었다. 호랑이 수염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싶었던 친구, 백 만금은 구멍 뚫린 무쇠 솥 모자라도 쓰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마 쓰게 될지도 몰랐다.


  새끼가 부화를 시작한 살모사 알이라도 삶아 먹고 단백질 보충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뱀 알이라고 안 순간, 뛰어 일어나 흰 햇볕이 바늘처럼 정수리로 쏟아져 내리는 신작로 길을 혼자 내달리며 눈물이 고였던 아이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울타리까지 아니라 해도 그와 나 사이 역시 투명한 그물망이나 벽이 있었다. 사실 ‘왕 까마구’와 ‘새끼 까마구’의 간극, 탱자 울타리 밑동을 톱으로 잘라내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의 용기와 왕잠자리를 저녁노을 속에 날려버린 소심함 사이의 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던 일을 책상 안에 쓸어 담아 버리고 거리로 나섰다.


  흰 모시두루마기의 노인이 혹시 그 옛날 과수원 집 어른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송곳 꽂을 땅 한 뼘도 못 가졌던 아버지 영정 앞에 화분에 심어진 분재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버지, 보세요. 나무 심을 땅이 없을 때는 이렇게라도 나무를 키운답니다. 내려앉은 하늘에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꽃 시장은 다른 때보다 한산했다.  나는 분재 몇 개를 앞에 놓고 노인이 낚시 의자에 앉아 있던 장소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두루마기에 파나마 모자의 노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같은 자리에 노인 대신 허리가 완전히 90도로 꺾인 할머니가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열 개 정도 놓였던 분재 역시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야 벽 쪽에 바짝 붙여놓은 해송 한 그루와 모과나무 분재 한 개가 보였다.


  “며칠 전에 분재가 많았는데 다 파신 모양이지요?”
  “내가 다 팔아 치웠우. 꽃 집 하는 사람한테 한꺼번에... 영감이 치매가 심해져서 숫제 팔 생각을 해야지. 이것 두 개도 영감이 내 눈에 안 띄게 감추어둔 걸 내가 들고 나와 버렸우.”
  “어디 가신 모양이지요? 영감님이 오늘은 ”
  “가고 안 가고가 어딨우? 반 송장인데 뭐... 고집만 아직 남아가지고..."
  “자제 분들은..... ”
  “팔자 사나와서 일찍 새끼들 둘, 한꺼번에 망월동으로 보냈우... 망할 영감탱이 뭐 할라고 지집애까지 대처로 내 보낼 것이요? 일찍 농사나 가르쳐 시집, 장가보냈으면 늙은 것들 가슴에 대못은 안 박았지. 하느님도 무심하고 부처님도 무심하고... ”


  순간 머릿속으로 잠시 회오리가 일면서 갑자기 하얀 공동이 생겨버렸다. 뒤이어 그 하얀 공간 속에서 나풀거리는 단발머리가 나비로 변해 여자 애의 원피스 자락을 빠져 나와 여기저기 다투어 자태를 뽐내는 꽃 사이를 어지럽게 날았다. 혹시 옛날 저 남쪽 시골에서 과수 농사를 지은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는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수건으로 짓물러진 눈가를 훔치는 노파 앞에 차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저 소나무나 모과나무 중에 제가 한 개 가져갔으면 해서요. 얼마나 드려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우. 소나무는 쌀 칠, 팔 가마 폭은 된다고 하고, 모개나무도 쌀로 따져 서너 가마는 된다고 하든 디..”
  “제가 20만원을 드리고 모과나무를 가져가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 분재화분을 사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나는 10만 원권 수표 두 장을 노파 손에 쥐어주고 모과나무 분을 안아 들었다. 몸통의 묵은 껍질이 떨어져나가면서 만든 얼룩무늬가 예비군 군복과 위장막을 떠올리게 했다. 일종의 그물, 가시로 뒤덮인 가지와 잎들 사이의 공간으로 드나들던 바람과 저녁 연기, 굴뚝새 무리들. 나는 내 유년의 어느 한때 나를 가로막아 섯던 과수원집 탱자나무 울타리를 모과나무의 굵은 밑동과 뒤틀린 가지에서 발견하고 있었을까. "송곳 꽂을 땅뙈기도 없는 놈이다." 됫병 소주 한 병을 안주도 없이 다 비우면서 같은 소리를 여러 번 하던 아버지 영정 앞에 이 화분을 놓을까. "보세요. 송곳 꽂을 땅이 없으면 이렇게 화분에다가 나무를 심으면 됩니다." 네모 난 푸른색 자기 화분을 거의 채운 굵은 밑동과 뒤틀려 뻗어 오른 가지에 앙증스럽게 파란 열매까지 두 개가 달려 있었다.


  “영감이 30년도 더 들여다보던 것이었우.”
   택시라도 잡아 집으로 화분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귀에 익은 어흐흠, 하는 헛기침소리에 나는 그만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녀자가 체통 없이 어디 시장바닥에 나와 앉았어? ”
  언제 나타났는지 흰 모시두루마기 위의 형형한 눈빛이 노파를 쏘아보는가 하더니 노인은 내 손에서 잡아채듯 화분을 빼앗아 원래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이건 파는 게 아닌데 할망구가 치매가 와서 그렇소.”
  아내 손에서 수표를 빼내 내 양복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노인은 다시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졌다. 노인의 모습이 갑자기 거인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 뿐 아니라 두 개의 분재를 배경으로 선 노인의 그 흰 눈썹과 나 사이에 새 울타리가 생긴 기분이었다.


  “이거라도 팔아야지. 참말로 영감도...”
  “허허허, 거 체통 없이...”


  마침 낮게 깔려드는 저녁 어스름 속에 연기와 바람을 통과시키면서도 나에게만은 범접을 허락하지 않던 견고한 탱자가시 울타리를 나는 다시 보고 있었다. <끝>

 


Pachelbel's Canon - London Symphony Orchestra



◇ 유 금호 /소설가
출생: 1942년 2월 25일 (만 72세), 전남 고흥군
데뷔: 196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하늘을 색칠하라' 당선
학력: 경희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경력: 1996 제4회 후광문학상, 1998 24회 한국소설문학상, 1999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최우수예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