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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불교·죽음

[스크랩] 선인의 예언과 마야부인의 죽음

잠용(潛蓉) 2015. 2. 14. 18:41






선인의 예언과 마야부인의 죽음

 

마야부인은
하늘같이 단정한 태자를 보고
그만 목숨 마치어
천상에 태어났네

<붓다차리타>

 

 <마야부인의 태몽.>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가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는 마야부인을 조각한 것.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소장.

마야부인은 룸비니동산에서 싯다르타를 낳은 지 7일 뒤 세상을 떠난다.

 




 

 

2626년전 네팔 타라이 지방 룸비니 동산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날 당시 석가족의 영토는 동으로 로히니강(현재의

코하나강), 서로는 수도 카필라바스투 서쪽, 남으로는 아노마강(지금의 라프티강), 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등으로 둘러

싸인 남북으로 길고 가느다란 모양의 지역이었다.

여기에 수도 카필라바스투, 코마두사, 메타르바 등의 도시와 촌락들이 산재해 있었다.

로히니 강의 동쪽에는 콜랴족이 있어, 물 때문에 석가족과 충돌했다는 기록이 불전(佛典)에 보인다.

서로 통혼(通婚)하는 사이였고, 콜랴족도 석가족과 동등한 정도의 부족국가로, 그다지 강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족 서쪽에는 강대한 코살라국이 버티고 있었다.

코살라국(프라세나지트 왕이 유명)은 당시 '16대국'의 하나로 마가다국(지금의 라즈기르 지역), 바트사국(현재 코삼비 지역),

아반티국(서인도 지역) 등과 비견될 강대국이었다.

코살라국은 후일 석가족을 병합하게 되지만, 마가다국(빔비사라왕이 유명)에 합병당하는 비운을 맛보게 된다.

석가족의 정치체제는 '전제적인 세습 군주제'를 취했지만, 공화제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파악

한다.

싯다르타 태자의 아버지 슛도다나(한역 정반왕)를 초기의 경전들은 보통 '라자'(왕)로 부르다,

후대로 가면서 '마하 라자'(대왕)로 기록하고 있고, 부족의 전체 의사는 '샤카 가나'(석가족의 집회)에서 결정되며, 카필라바

스투 거리에는 '산타카라'(공화당)가 있어 그곳에서 회의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불전에 의하면 샤캬 가나의 구성원들은 8만여를 헤아리는데, 이들은 석가족의 크샤트리아들로 구성되고, 그 중에서 라자가

선출되었다.

슛도다나왕 역시 이같은 절차를 거쳐 뽑힌 석가족의 대표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당시 석가족은 완전한 주권을 상실하고, 코살라의 군주국을 섬겨야 했다. 따라서 싯다르타의 아버지, 카필라바스투에서

선출된 공화국 통령인 슛도다나왕에게 지워진 책무는 삭감된 자치권에서 남겨진 직무, 짐작컨대 민정의 의장직이라든가 조세수

납·소송 등의 권한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이런 상황에 있던 석가족에게 싯다르타 태자의 탄생은 적지않은 기쁨이었다.

룸비니 동산에서 카필라바스투 성으로 옮겨진 태자는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좋은 일에는 마(魔)가 끼는 법인지, 슬픔도 찾아왔다. 태자가 태어난지 7일만에 어머니 마야데비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마야데비의 여동생 마하파자파티가 싯다르타 태자를 대신 양육해야만 됐다.

<불소행찬>에는 이렇게 나온다.

"그때에 마야부인은/ 그가 낳은 아들이/ 단정하기는 하늘 아기와 같고/ 온갖 아름다움 갖춘 것 보고

/ 크나큰 기쁨을 스스로 못 이기어/ 그만 목숨 마치고 천상에 태어났네. 대애(大愛) 고타미는/ 태자의 모습 하늘 아기와 같고/

덕스러운 풍채는 세상에 빼어나며/ 이미 친어머니는 목숨 마침을 보고/ 사랑하여 기르기 친아들같이 하고/ 아들 또한 공경하

기 친어머니같이 했네."

이에 앞서 싯다르타 태자 탄생 소식을 "신(神)들로부터 들은" 아시타 선인이 카필라바스투 성으로 찾아갔다.

"방금 태어난 왕자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왕자를 한번 보고 싶다"고 슛도다나왕에게 말했다.

태자를 본 아시타 선인은 "불꽃처럼, 허공을 가는 달처럼/ 그리고 구름을 헤치고 나온 가을 해처럼/ 그렇게 빛나는 저 왕자를

보면서/ 예언자는 기쁨으로 가슴이 마구 뛰었다.(수타니파타 687)"

관상과 운명학에 통달했던 아시타 선인은 석가족의 황소같이 늠름한 아이를 안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 태어났다"

고 외쳤다.

동시에 얼마 남지않은 자신의 생을 생각하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예언자가 우는 것을 본 석가족 사람들은 '이유'를 물었다. 아시타 선인은 말했다.

"왕자에게는 전혀 불길한 상(相)이 없습니다. 또 그의 앞길에는 아무런 장애도 없을 것입니다.

이 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분은 이제 깨달음의 정상에 이르러 진리의 바퀴를 굴리게 될 것입니다. 순수의 절정

(니르바나)을 체험한 다음 모든 인간의 행복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감화력은 넓고 깊게 퍼져 갈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얼마 살지 못합니다. 왕자가 깨달음을 얻는 그 중간에 나는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분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지금 내가 슬퍼하는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수타니파타 692·693·694)"

어머님의 죽음이 태자의 탄생을 잠시 우울하게 만들었지만, 태자는 별다른 걱정 없이 잘 자랐다. 카필라바스투 성에서 유복한

나날을 보내며 지냈다. "마치 해나 달이나 불의 광명이/ 조그맣게 시작하여 점점 넓어지는 것처럼/ 태자의 자라는 것 날로 새

롭고/ 덕스러운 모습 또한 그러했다.(불소행찬 2장 궁중생활)"

<네팔 니갈리사가르 아쇼카 석주.>

 저수지 둑에 버려져 있었으나 최근 보호각을 짓고 보호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종교적 차원이 아닌 고고학적 차원의 문제가 파생된다. 카필라바스투 성이, 싯다르타 태자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카필라바스투 성이 오늘날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네팔이 주장하는 곳은 '틸라우라코트'이고, 인도가 주장하는 지역은 '피프라하와·간와라야' 지역이다. 학자들의 주장도 서도

다르다. 인도 불교유적 발굴에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했던 법현스님의 <불국기>나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 역시 카필라바스

투 위치에 대해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5세기 인도를 방문했던 법현스님은 "중인도에 들어가 코살라국의 쉬라바스티(기원정사 유적이 있는 곳)를 거쳐, 크라쿳찬다

불(구류손불. 과거7불 가운데 네번째 부처님) 탄생지(네팔 코티하와)를 예배하고, 계속 북으로 나아가 코나카무니불(구나함모

니불. 과거7불 중 다섯번째 부처님) 탄생지(네팔 니갈리 사가르)를 참배하고, 동(東)으로 가 카필라바스투에 들어갔다"고 기록

하고 있다.

7세기 카필라바스투를 찾은 현장스님은 "쉬라바스티에서 카필라바스투로 직행한 다음, 남쪽으로 걸어 크라쿳찬다불 탄생지를

방문하고, 동북으로 나아가 코나카무니불 유적지에 이르렀다. 싯다르타가 활쏘기 경기를 한 '화살의 샘'을 지나, 동쪽으로 계속

나아가 룸비니에 도착했다"고 <대당서역기>에 기록하고 있다. 현장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룸비니 동산은 카필라바스투 동쪽

약 23km 지점이며, 코나카모니불 유적지는 법현스님의 기술과는 정반대 방향 즉 카필라바스투 동쪽에 위치한 셈이 된다.

어찌됐던 <대당서역기>(사무엘 빌이 1884년 영역) 등의 자료를 토대로 인도 고고국의 퓨러박사가 1895년 3월 틸라우라코트

동남쪽 3km 지점에 있는, 니갈리하와 마을 근방의 '니갈리 사가르' 못가에서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를 발견했고, 이듬해 룸비니

의 아쇼카 석주를 찾아내면서 '카필라바스투 유적 찾기'는 새 단계에 접어든다.

이것들을 근거로 1899년 인도 고고학자 무케르지는 틸라우라코트 근방을 발굴했다.

무케르지는 그러나 틸라우라코트가 카필라바스투임을 입증한 확실한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후 네팔 정부가 1966년부터 1971년에 걸쳐 틸라우라코트 유적의 서쪽 성벽을 발굴했고, 1967년부터 일본 잇쇼(立正)대학

고고학 조사단이 사업에 참여했다. 발굴결과 여러 가지 유물들이 발견됐고, 유물들은 지금 틸라우라코트 입구에 있는 박물관

에 보관돼 있다.

 

네팔 틸라우라코트 유적 
네팔 측이 카필라바수투 궁성 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곳.

사진은 동문 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퓨러박사가 발견한 '니갈리 사가르의 아쇼카 석주'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두 동강이 난 채로. 몇 년전만 해도 두 동강 가운데 윗 부분은 연못 가까이 버려졌고, 아랫 부분은 연못 둑에 깊이 박혀진 상태로

있었다. 올 3월19일 현지에서 확인한 결과 니갈리 사가르 아쇼카 석주의 윗 부분은 연못에서 발굴돼, 아랫부분과 함께 보호각

안에 보존돼 있었다. 두 동강의 석주 중 아랫부분에 4줄의 명문이 있는데, 글자모양은 룸비니 아쇼카 석주에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학자들은 명문(銘文)을 "천애희견왕(아쇼카왕)은 관정(灌頂. 즉위) 제14년을 지나 코나카무니 붓다의 탑을 두 배(혹은 두 번째)

로 늘렸다. 그리고 관정 20년 스스로 이곳에 와 친히 참배했다."로 해석했다.

명문에 있는, 코나카무니 붓다의 탑이야말로 법현스님과 현장스님이 참배한 바로 그 탑.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에 적혀있듯 아쇼

카왕은 즉위 20년만에 룸비니를 찾았는데, 당시 왕은 코나카무니 붓다의 탑도 참배한 것이다.

니갈리 사가르와 함께 눈길을 끄는 석주가 바로 '코티하와 아쇼카 석주'다.

아쇼카왕이 과거 7불 가운데 네번째 부처님인 크라쿳찬다불의 탄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석주가 바로 이것이다.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유적임에도 보존상태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중간이 부러진채 다른 석주보다 훨씬 땅속에 깊이 박혀있고, 바로 옆

에 민가(民家)들이 있다.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스투파는 석주 옆에 희미한 자취만 남기고 있을 뿐이다.

역사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모습을 코티하와 아쇼카 석주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고나 할까.


 







출처 : 선바우
글쓴이 : 정수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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