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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공예·조각

[천경자]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영혼의 꽃밭'으로 타계

잠용(潛蓉) 2015. 10. 22. 07:53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영혼의 꽃밭' 속으로
[조선일보] 2015.10.22 03:00

 

[천경자 91세로 타계… 그녀의 인생과 그림]

사랑했던 남편과 이혼, 여동생은 폐병으로 숨져
고통 잊으려 그린 '뱀 그림'… 화단이 주목하는 계기 돼
남태평양 타히티 여행후 꽃의 여인, 트레이드 마크로

"작업 잘되는 날은 '클로버', 뜻밖의 돈이 들어온 날은 '다이아몬드', 우울한 날엔 '스페이드'를 그려 넣어요. 지금까지는 끊임없는 시련이 계속된 인생이지만 앞으로는 가계부에 '클로버'가 많았으면 좋겠어요."(1996년 2월 1일자 본지 인터뷰 중) 쓰러지기 전 거실 소파 옆 손 닿는 곳엔 늘 가계부가 있었다. 금전 출납 기록용이 아니었다. 하루 일과를 자신만의 암호로 기록하는 일기장이었다.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화백이 '스페이드' 가득한 아흔한 해 슬픈 일생을 마감하고 '네 잎 클로버' 가득할 천국의 꽃밭으로 여행을 떠났다.

 

천경자는 주로 자화상과 자신이 만나거나 본 여성들의 모습을 화폭으로 옮겼다. 작가의 인물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로 그녀의 분신으로, 자신의 자아와 성찰을 그들의 모습에 투영해 그렸다. 사진은 1994년 본지 인터뷰 당시 찍은 사진이다. 천 화백의 딸은“어머니가 예쁘게 나온 사진을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큰 사진). 천경자 대표작‘청춘의 문(1968년·오른쪽 위)’과‘길례언니(1973년·오른쪽 아래)’. 1969년부터 해외여행을 다니며 여러 나라를 탐방한 천경자는 이후 본인의 작품에 노랑, 빨강 등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진] 천경자는 주로 자화상과 자신이 만나거나 본 여성들의 모습을 화폭으로 옮겼다. 작가의 인물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로 그녀의 분신으로, 자신의 자아와 성찰을 그들의 모습에 투영해 그렸다. 사진은 1994년 본지 인터뷰 당시 찍은 사진이다. 천 화백의 딸은“어머니가 예쁘게 나온 사진을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큰 사진). 천경자 대표작‘청춘의 문(1968년·오른쪽 위)’과‘길례언니(1973년·오른쪽 아래)’. 1969년부터 해외여행을 다니며 여러 나라를 탐방한 천경자는 이후 본인의 작품에 노랑, 빨강 등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DB
 
이혼, 불륜, 여동생의 급작스러운 죽음…

굴곡 많은 삶을 살아간 천 화백은 세상의 편견에 맞서 평생 화폭에 드라마틱한 장면을 담았다. 슬픔과 신비에 가득한 이국적 여인, 꿈과 환상의 세계 가득한 이국적 풍경화 등 원시적이면서 서정적인 그림으로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류 화가로 손꼽힌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1941년 의대에 가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 간다.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가 입선하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졸업 작품 '노부(老婦)'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가 즐겨 썼던 작품 제목처럼 '슬픈 전설'로 가득했다. 1944년 귀국해 동경 유학 시절 만난 이형식씨와 결혼해 남매를 뒀지만 시어머니의 구박을 못 참고 집을 나왔다. 이후 지방 신문기자인 김남중씨와 사랑에 빠져 그 사이에서도 남매를 낳았지만 그는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여동생마저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천경자 화백 연표
 
아픔을 견디지 못한 천 화백은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킬 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소재를 택해 화폭을 35마리의 뱀으로 가득 채운다.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그 뱀 그림 '생태(生態)'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일본적 채색화'로 폄하됐던 천 화백의 작업을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천경자는 당시로는 드물게 해외여행을 즐겼다.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남미 등 해외 스케치 기행을 12번이나 다니며 '천경자 풍물화'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여인 그림은 타히티 여행 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후 노란 옷을 입고 꽃이 가득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쓴 1973년작 '길례언니'를 시작으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 '황금의 비'(1982) 등을 그렸다.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1998년 11월 일시 귀국해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해 화제를 모

으기도 했다. 그해 맏딸 이혜선씨가 사는 뉴욕으로 간 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2003년 봄 뇌출혈로 병상에 누운 뒤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온몸 구석구석에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는다"던 여인. 이 여인의 '슬픈 전설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흔한 해를 끝으로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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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