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용의 타임머신...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세히보기

항일· 민주화

[YS서거] '3김시대' 주역들 차례차례 퇴장... 남은 과제는?

잠용(潛蓉) 2015. 11. 22. 08:05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빈소 준비 분주... "큰어른 잃었다"

뉴스1 | 권혜정 기자 | 입력 2015.11.22. 05:16 | 수정 2015.11.22. 05:27 

 

(서울=뉴스1) 권혜정 기자 = 22일 새벽,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을 취재하기 위한 취재진들의 발길로 북새통을 이뤘다. 빈소조차 차려지지 않은 장례식장에는 김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 위한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날 오전 2시가 가까워진 시간,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100여명에 이르는 취재진들이 하나둘씩 서울대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을 치료하던 서울대병원 역시 언론사에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달하고 새벽 2시 긴급브리핑을 여는 등 발빠르게 대응했다.

 

 

↑ 22일 새벽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되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문정수 김영삼 민주센터 상임이사(오른쪽, 전 부산시장)와 관계자들이 영정사진을 들고 빈소로 들어서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2일 새벽 0시22분 서울대병원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증으로 서거했다. /© News1 박세연 기자

 

김 전 대통령의 주치의인 오병희 병원장은 긴급브리핑을 통해 "새벽에 슬픈 소식을 전하게 돼 죄송하다"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취재진들에게 전달했다. 브리핑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시신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취재진들은 또 다시 장례식장으로 빠르게 몸을 옮겼다. 그러나 서울대병원 측은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지는 장례식장 1호실의 출입을 전면 통제하고 문을 걸어 잠궜다.

 

이따금씩 열리는 유리문 안에서는 침통한 표정의 김 전 대통령의 가족과 정계 관계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빈소에는 김 전 대통령의 임종을 함께 한 차남 현철씨가 자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지기도 전에 장례식장을 찾은 이는 김영삼기념사업회 이사장인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었다.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상도동계의 좌장 그룹을 형성하며 영욕을 같이 한 김 이사장은 "이렇게 급하게 가실 줄 몰랐다"며 "가족들이나 나나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고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김 전 대통령과의 기억이 산더미다"며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이른 새벽 한 걸음에 빈소를 찾은 시민들도 있었다. 새벽 3시가 가까운 시간 장례식장을 찾은 이모(54)씨는 눈가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평생 김 전 대통령을 존경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큰 어른이 돌아가셔 너무 안타깝다"며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분이지 않느냐"고 김 전 대통령을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지는 1호실은 새벽 5시가 가까운 시간에도 분주한 모습이다. 박스에 담긴 수백송이의 국화꽃들은 몇차례에 걸쳐 빈소 안으로 옮겨졌고, 오전 4시8분쯤에는 김영삼센터 상임이사인 문정수 전 부산시장이 영정을 들고 빈소를 찾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온화한 미소가 담긴 영정사진은 오전 6시쯤 국화꽃과 함께 빈소에 놓여질 예정이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장례식은 5일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26일이다. [jung9079@]

 

[YS서거] '3김시대' 주역들의 퇴장... 남긴 과제는?
머니투데이 | 김태은 기자  | 입력 2015.11.22. 03:38

 

김대중에 이어 김영삼 서거… 민주화·개혁 이끌었으나 사회통합 과제 남겨
'3김시대'를 이끌었던 세 주인공 중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김영삼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했다. 민주화와 개혁의 정치사가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삼김시대'의 주역들도 역사 속 인물로 사라지고 있다. '삼김시대'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정치계를 풍미한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활약한 시대를 일컫는다. 무려 30년 간, 한 세대를 아우르며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다.

 

 

↑ ↑1989년 3월 4일 평민·민주·공화 야3당의 총재가 여권의 중간평가조기강행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삼김은 일명 YS(김영삼), DJ(김대중), JP(김종필)란 애칭으로 불렸다. 각각의 지지 기반은 뚜렷하게 갈렸지만 국민적 관심과 애증의 대상이 된 정치인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행보는 비슷한 듯 다르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야당 정치인으로 국민들의 기대를 받았고 김종필은 박정희정권의 중심부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를 꿈꿨던 핵심 인물이었다.

 

1970년대 제7대 대통령 선거와 유신 정권을 계기로 정치 전면에 나선 '삼김'은 1980년대 들어 나란히 신군부의 탄압을 받으며 정치권 전면에서 물러나있다가 1987년 민주화 이후 각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본격적으로 '삼김시대' 정치의 시작을 고했다.

 

1987년 대선 당시 셋으로 갈렸던 '삼김'은 각각 부산경남(PK)과 호남, 충청 등 지역을 기반으로 합종연횡에 의한 집권 모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노태우정부 말 김영삼은 김종필까지 함께 '3당 합당'을 이뤄 민주자유당이란 보수정권연합을 탄생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1993년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됐다. 5년 후 1997년에는 김대중이 김종필과 'DJP연합'을 이뤄 정권교체에 성공해 '삼김'에서 김영삼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삼김시대'가 꽃을 피운 이 시기는 군사정권의 잔재를 일소하고 민주화를 정착시키며 사회 전반적으로 각종 개혁조치가 단행된 개혁의 시대였다. 이와 함께 '삼김'이 각각 독자 세력으로 정권을 창출하지 못하고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 연대, 영남-호남-충청 등 지역 간 연합으로 집권하면서 사회 통합의 과제를 남긴 시대이기도 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이 각각 1998년, 2003년 퇴임하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김종필이 2004년 총선에서 10선 도전에 실패하며 정계를 은퇴하면서 '삼김시대'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 서거한 데 이어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눈을 감으면서 '삼김'의 자취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만 남게 됐다. [김태은 기자]


'긍지와 오욕', 현대사 대단원의 막을 내린 YS
[노컷뉴스] 2015-11-22 11:24

 

업적도 많지만 아쉬운 몇 가지

김영삼. 대한민국 현대사에 두툼한 페이지를 남긴 전직 대통령이라면 과찬일까? 논란이 있을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영문 이니셜 YS)은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만큼이나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빼놓고선 대한민국의 현대사, 특히 정치사를 논할 수 없다. 업적이 많다. YS의 가장 큰 공은 민주화운동이다. 경남 거제도 장목면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54년 정계에 입문했다. 무려 9선의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25세라는 최연소 당선과 의원직 제명과 가택연금 등 숱한 탄압과 질곡의 고난을 거치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그의 여정은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저항의 정치는 지난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의 38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사진] 22일 오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 김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호남이 지역적 기반인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부산·경남(PK)을 지역적 연고로 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민주화라는 대명제에서는 끊임없이 협력과 경쟁을 벌였다. 조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양김 씨만큼 기여한 정치인은 없다. YS는 민주화라는 단어를 입에 물고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979년 제1야당 당수로서 헌정사상 최초로 의원직 제명을 당할 때(당시 여당인 공화당과 유정회는 회의장을 옮겨 제명안을 처리)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다. 또 의원직 제명 당시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겠다"는 발언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뉴욕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지지했음에도 민중의 힘으로 무너졌다면서 미국도 박정희 독재정권을 지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1983년 서슬 퍼렇던 전두환 신군부를 향해서도 YS의 저항은 중단하지 않았다. 가택연금을 당해 상도동 집 대문을 열수조차 없었던 YS는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였다. 최장기 단식 투쟁이었다. YS의 단식은 정치권과 대학가에 전해지며 독재 타도 항거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당시에 DJ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교도소에 수감중이었다. YS는 민주화의 길은 고행의 길이라고 했다. 지난 1987년 민주화운동이 절정에 치달을 때 “산행 도중에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민주화도 이와 같다. 민주화의 길은 그만큼 고행의 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민주화 산행에 있어서 최종 고지의 200m 전방에 와 있는 셈이다”고 말했다. 87년 최루탄에 맞아 하늘나라로 간 고 이한열 열사와 그해 초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군 등의 희생 에 힘입어 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부터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특히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로부터 단기간에 민주화를 이룬 모범적인 국가로 칭송받은 것은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민주열사와 뒤에서나마 함께 한 민초들이 있었다면 정치 지도자들의 선두에는 YS와 DJ가 있었다. YS의 또 다른 업적들은 대통령이 된 이후 이뤄졌다. 공직자 재산공개와 하나회 척결을 비롯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군부독재 정권 시절의 누적된 적폐 청산작업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난 1993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재산공개를 선언했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라고 밝혔다. YS의 이런 선언으로 수십 명의 장·차관급 고위 공직자들과 국회의원들, 수 많은 공직자들이 부정한 축재 의혹으로 옷을 벗었다. 공직사회와 재계, 언론계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청렴의 분위기가 몰아쳤다. 공직자 재산공개법은 그해 9월에 입법화됐다. 현재 고위공직자 후보들이 청문회에서 호된 검증을 거치며 낙마를 밥 먹듯이 반복하는 것도 YS가 만들어놓은 공직자 재산공개 조치의 결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실제로 청와대 재직 시절 기업으로부터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지도자들이 권력운용 자금이라며 대기업들로부터 거액을 받아 측근이나 친인척들에게 나눠두고 권력을 관리하는데 쓰던 청와대의 정치자금 수수 관행을 근절했다. 1993년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으며 1993년 국가기강확립 보고대회에서는 “새 정부에 있어 국가기강 확립의 대도(大道)는 하나도 윗물 맑기요, 둘도 윗물 맑기다”라고 외쳤다. YS 정권 시절 아들인 현철씨의 부정부패가 적발되긴 했으나 YS는 검은 돈을 만지지 않았다. 그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대기업들로부터 금품을 받지 않았다. YS가 쌓은 금자탑이다.


또한 부동산·금융실명제다. YS는 금융실명제를 군사작전처럼 단행했다. 1993년 8월 12일 '긴급 재정경제 명령 제16호'를 발동해 당일 밤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전격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YS는 한 달 전 이경식 경제부총리에게 금융실명제 추진을 지시하고 철저히 보완하도록 했다. 비판론자들은 금융실명제를 군사작전하듯이 했다고 비아냥거렸으나 비밀 보완이 새지 않은 것도 YS의 철통보완 지시가 주효했다.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정치인을 비롯한 고위공직자들과 재벌 총수들, 기업주들은 관행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름(차명)으로 금융계좌를 갖고 비자금을 입출금하는데 악용했으며 전국의 땅을 차명으로 사두는 게 당시까지의 축재 방식이었다. YS가 이를 끊어버린 것이다.

 

YS는 이와 함께 군내 최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하나회 척결도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하룻밤 사이에 '별' 50개가 떨어졌다. YS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제거 한 이후 “이 땅에 군사 쿠데타를 절대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지금도 YS와 DJ를 비교하는 정치권 인사들이 많다. 그들 가운데 DJ가 YS를 절대 넘을 수 없는 한 가지는 결단력과 단호함이라고 말한다. YS가 아니었으면 하나회 척결은 없었을 것이라며 군의 정치 세력화를 막은 공은 YS라는 평가다.

 

YS만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은 두 전직 대통령 교도소 보내기였다. YS는 지난 1995년 11월 24일 당시 여당인 민자당 강삼재 사무총장을 시켜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한 5.18특별법 제정을 발표했다. 검찰에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지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1979년 12·12사태를 일으킨 신군부 핵심 인사들을 줄줄이 구속해 법정에 세웠다. 전·노 두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들, 측근들의 천문학적인 비리 사실까지 들춰냈다. 지금도 두 전직 대통령의 재산 추적과 숨기기는 계속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96년 4월 총선 전략으로 5.18특별법을 제정했다는 분석이 있었으나 그의 정치적 목적과는 별개로 YS가 아니고서는 결행하기 힘든 역사적 과제였다. YS가 이를 하지 않고 DJ에게로 넘겼다면 반발과 파장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DJ는 못 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고, 쇠말뚝뽑기·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이 이때 이뤄졌다. 지방자치제 실시를 포함한 크고 작은 YS의 공적이 많지만 과도 만만치 않다.

 

IMF외환위기다. 1997년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그 후폭풍으로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해체됐고, 금융기관들의 절반가량이 문을 닫았다. 백만 명이 넘는 실업자가 길거리로 나왔다. 한국이 신자유주의 경제 속으로 빨려들어간 계기가 IMF다. IMF 외환위기를 겪은 것이 YS 정권의 경제운용 실정이었다는 것이다. 국민의 뇌리 속에는 YS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박혀 있다. 상당수 경제학자들은 김영삼 정권이 금융과 노동개혁을 제때 하지 않고 OECD 가입과 외환자유화 조치를 너무 빨리 단행한 것 등이 원인이었다고 비판하면서도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부실이 IMF 사태로 드러났다는 입장을 견지하기도 한다. 특히 한국에 들어와 있던 미국과 일본의 투기자본들이 한국의 기업시장을 장악하고자 IMF 외환위기를 일으켰다는 의문도 설득력있다. 말년에는 김영삼 정부의 반부패·청렴화의 기치가 빛을 바랬다. 아들과 친인척 비리로 얼룩졌다. 1997년 2월에 터진 한보비리는 김영삼 정권이 그루터기부터 썩었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현철씨와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 등 YS정권 핵심 실세들이 줄줄이 영어의 신세로 전락했다.

 

19997년 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들 현철씨에 대한 구속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구속만이라도 막았으면 했다. 강인섭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의 전언에 따르면 “YS는 부인(영부인)이 현철이 문제로 인해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당신(YS)이 대통령이 안 됐으면 아들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 텐데라며 하소연을 했다”면서 “보고를 들어갈 때마다 현철이를 어떻게 해야겠노”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강 전 수석은 “구속 외에는 민심을 다독일 방법이 없겠다고 설득해 결국 현철씨가 구속됐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현철씨의 한보 사태 이권 개입 의혹에 대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현철씨는 한보 비리가 아닌 별건으로 구속됐다.

 

YS 대통령 재임 시의 아쉬움으로 지목되는 부분은 인사 문제였다. 문제가 불거졌다 하면 무조건 자르고부터 보는 일도양단식 인사 방식과 특정 지역(PK) 편중 인사 문제가 고질화됐다. 평생을 민주화와 국가 개혁에 매진한 대통령답게 탕평 인사를 했어야 함에도 지역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도 호남 우대 인사와 무관치 않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 우리나라에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이어진 군부 정권에 마침표를 찍고 첫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그렇지만 정권 창출 과정의 여진은 지금도 계속된다.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인 김대중을 버리고 독재정권의 주역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창당한 민정당과 손을 잡은 것이다.

 

YS는 1990년 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손을 맞잡고 3당 합당을 선언했다. 거대 민자당을 창당했다. YS는 평생 투쟁의 대상이었던 정치 세력과 손을 맞잡은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합당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당시 보수 언론들은 정치적 '승부사'라거나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옹호했을지라도 YS의 3당 ‘야합’으로 민주화 세력은 물론이고 민주화 운동 지역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정치·경제·사회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의 호남 대 비호남 구도를 만들어버렸다. 특히 산업화 세력으로 지칭되는 군부독재권력의 후예들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자심하다. 이제 역사의 준엄한 평가만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면의 길에 '길동무'가 될 것이다. [CBS노컷뉴스 김진오 기자]

 

한국 정치의 영욕 YS, 마지막 유언은 "통합과 화합"
노컷뉴스 | CBS노컷뉴스 김광일 기자  | 입력 2015.11.22. 11:53

 

한국정치 영욕의 역사를 이끌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지막 당부는 '통합과 화합'이었다. 22일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이 사실상 유언처럼 남겼던 메시지는 '통합과 화합'이었다고, 아들 현철 씨가 밝혔다. 현철 씨는 이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김종필 전 국무총리 등의 조문을 받으며 "2013년 입원하신 뒤에 말씀을 잘 하진 못하셨는데 붓글씨로 통합하고 화합을 딱 쓰시더라"고 말했다. 그 의미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은 채 글귀를 지적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처음으로 그런 말씀을 했다"고 현철씨는 전했다.

 

↑ (사진=자료사진/ 노컷뉴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대화는 물론 필담도 나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병상에서 '통합과 화합'을 강조했던 무렵은 박근혜 정부 1년차로, 현 정부의 국정 비전을 제시하던 때다. 현철씨와 대화를 나누던 김종필 전 총리는 "하신 말씀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것"이었다며 "유형 무형으로 어떻게 방해하더라도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신념을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김 전 총리는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얘기"라면서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었다"고 덧붙였다. [CBS노컷뉴스 김광일 기자]

 


◇ 이 나라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애쓰신 공적을 높이 기리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