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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역사

[금석문] 울진 성류굴서 신라시대 금석문 발견

잠용(潛蓉) 2015. 12. 17. 16:56

성류굴서 신라시대 금석문 발견
경북도민일보ㅣ 2015.12.17

 

    
▲ 울진군에 있는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석문 탁본. 사진=위덕대박물관 제공

경주 위덕대 박물관장, 진흥왕 때 성류굴 찾은 관리 방문기로 추정


[경북도민일보 = 황용국기자] 울진군 근남면에 있는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에서 바위에 새겨진 신라시대 금석문이 발견돼 학계 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박홍국 경주 위덕대 박물관장은 성류굴 입구 위 바위에서 명문을 발견해 조사한 결과 543년(진흥왕 4년)에 새긴 것으로 추정했다. 가로 30㎝, 세로 20㎝ 석회암 면에 세로로 7행 38자가 새겨져 있다. 한 글자의 크기는 가로 3㎝, 세로 4㎝ 정도로 해서체로 음각됐다.

 

‘癸亥年三月/ 八日○丑付智/ 大奈麻未○○/ 此時我沂大思/ ○古(또는 右)五(?)持○/ 知人夫息(또는 見)信/ 刀○○咎○’

 

연대를 말해주는 첫 번째 행은 비교적 또렷하다. 읽을 수 있는 글자는 30자이고, 나머지는 석회암 종유가 흘러내려 글자 획의 일부를 덮거나 표면이 없어져 판독이 어렵다. 명문 후반부도 해석이 어렵다. 신라 진흥왕 4년(543년) 3월 8일에 ○축부(○丑付) 대나마(大奈麻, 신라시대 17관등 중 10번째에 해당하는 경위<京位>)가 성류굴에 왔다가 남긴 내용으로 보인다.

 

명문은 신라 중고기 금석문 기재 방식은 직명(職名)+부명(部名)+인명(人名)+관등명(官等名) 순인데, 직명과 출신 부명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나마라는 관등명이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와 같고, 간지(干支)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계해년이 543년일 가능성이 크다고 박 관장은 설명했다. 특히 신령한 경승지를 방문한 사실을 명문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 명문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추정했다. 박 관장은 “정밀조사를 통해 글자를 모두 판독해 내용을 해석하면 6세기 신라 관등과 지방통치 등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황용국기자 hyk@hidomin.com]

 

[울진] 성류굴 입구 암벽에서 삼국시대 신라 명문 발견!
연남타임즈ㅣ2015-12-17

 

 
울진군(군수 임광원)에서 또 다시 삼국시대 신라 금석문이 발견됐다. 명승지인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의 입구 바로 위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데,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에 고대의 금석문이 발견된 것은 국내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명문은 지난 6일 성류굴을 관람하던 박홍국(59세) 위덕대 박물관장(고고학)에 의해 발견됐는데, 이후 3차에 걸친 조사결과 543년(진흥왕 4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은 성류굴 출구의 위쪽 가로 30㎝, 세로 20㎝되는 석회암면에 세로 7행 38자가 새겨졌으며, 글자의 크기는 가로 3㎝, 세로 4㎝ 정도로 음각되어 있다. 글자는 예서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해서체이며, 새겨진 연대를 말해주는 첫째 줄은 비교적 또렷한 편이다. 그 밖의 명문들은 석회암 특유의 종유(鐘乳)가 흘러내려 새겨진 글자 획의 일부를 덮고 있거나, 표면 박락된 곳이 있어 판독을 어렵게 하는 가운데 현재까지 30여자가 읽혀진다.


명문의 후반부는 해석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신라 진흥왕 4년(543년) 3월 8일에 △축부(△丑付) 대나마(大奈麻, 신라 시대 17관등 중의 10번째에 해당하는 경위〈京位〉)가 울진 성류굴에 왔다가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울진 성류굴은 삼국시대부터 신성한 명승지였으며, 삼국시대 금석문, 통일신라시대(『삼국유사』의 내용), 고려시대 말기 탐방기(이곡의 「동유기」), 조선시대 전기의 김시습의 시(詩), 조선시대 후기 겸재 정선의 성류굴그림 등 각 시대의 사료(史料)를 모두 가진 국내 유일한 명승지였음이 밝혀졌다.


이 명문은 신라 중고기 금석문의 기재방식인 직명(職名)+부명(部名)+인명(人名)+관등명(官等名) 순에서 아직까지 출신 부명이 확인되지 않지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명이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 524년)와 동일한 글자로 돼 있는 점과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 명문을 조사한 학자들은 명문의 첫 부분인 ‘계해년(癸亥年)’이 543년과 603년(진평왕 25년) 및 663년(문무왕 3년) 중에서 543년에 해당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편 현재까지 판독(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심현용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 학예연구사 공동판독)된 글자는 다음과 같다.


“癸亥年三月/ 八日△丑付智/ 大奈麻未△△/ 此時我沂大思/
△古〔또는 右〕五(?)持△/ 知人夫息〔또는 見〕信/ 刀尒△咎△”


이 명문을 발견한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성류굴 입구 주변 암벽에는 이번에 발견된 명문 외에도 종유에 덮이거나 마모된 문자들이 보이는데, 이에 대한 추가정밀조사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성류굴 명문이 신령한 경승지를 방문한 사실을 새겼다는 점에서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의 명문들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이와 더불어 울주 천전리 각석은 경주 월성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5㎞정도 떨어져 있지만, 울진 성류굴 각석은 126㎞나 떨어진 경승지의 암벽에 새긴 연대를 알 수 있는 방문기가 발견된 것은 현재까지 이것이 유일하다. 이 명문에 대해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고대사)는 “당시 왕경의 관리가 성류굴에 왔다간 것은 이곳의 신성함과 관련시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울주 천전리 각석과 더불어 풍광 좋은 암벽에 새긴 삼국시대 명문은 매우 귀한 것으로 신라사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했다. 또한 이영호 경북대 교수(신라사)는 “최근에 성류굴 입구에서 명문이 발견됐다는 것은 충북 제천 점말동굴 입구에 각석들이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로 신라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라고 했다.


그리고 박광열 성림문화재연구원장(고고학)도 “울진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거점이었음은 신울진원전부지에서 발굴된 덕천리 신라고분군의 유물, 즉 6세기 중엽의 신라 왕경 귀족들이 착용했던 금동관, 환두대도, 금귀걸이 등의 출토 유물들이 증명하고 있으며,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더불어 이번에 발견된 성류굴 각석도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보았다. 또 심현용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 학예사는 “1988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발견된 이후 또 신라시대 금석문이 발견된 것은 앞으로 울진지역이 신라사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이제까지 울진 성류굴 명문을 조사해 온 학자들은 이 명문이 모두 판독되고 그 내용이 해석되면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비롯해 삼국시대를 보완할 수 있는 6세기 신라의 관등, 제사(?), 지방통치 등을 연구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영남타임즈.kr/ dcht7000@naver.com]


울진 성류굴 입구 암벽에서 삼국시대 신라 명문 발견!
국제i저널ㅣ2015년12월17일 13시30분 
 


▲ 명문 탁본(위덕대학교 박물관 제공) ⓒ 국제i저널 

 

[국제i저널=울진 이왕수기자]울진군(군수 임광원)에서 또 다시 삼국시대 신라 금석문이 발견되었다. 명승지인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의 입구 바로 위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데,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에 고대의 금석문이 발견된 것은 국내 처음 있는 일이다. 
 


▲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 탁본 조사(위덕대학교 박물관 제공 ⓒ국제i저널

 

이 명문은 지난 12월 6일(일) 성류굴을 관람하던 박홍국(59세) 위덕대 박물관장(고고학)에 의하여 발견되었는데, 이후 3차에 걸친 조사결과 543년(진흥왕 4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은 성류굴 출구의 위쪽 가로 30㎝, 세로 20㎝되는 석회암면에 세로 7행 38자가 새겨졌으며, 글자의 크기는 가로 3㎝, 세로 4㎝ 정도로 음각되어 있다. 글자는 예서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해서체이며, 새겨진 연대를 말해주는 첫째 줄은 비교적 또렷한 편이다. 그 밖의 명문들은 석회암 특유의 종유(鐘乳)가 흘러내려 새겨진 글자 획의 일부를 덮고 있거나, 표면 박락된 곳이 있어 판독을 어렵게 하는 가운데 현재까지 30여자가 읽혀진다. 명문의 후반부는 해석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신라 진흥왕 4년(543년) 3월 8일에 △축부(△丑付) 대나마(大奈麻, 신라 시대 17관등 중의 10번째에 해당하는 경위〈京位〉)가 울진 성류굴에 왔다가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울진 성류굴은 삼국시대부터 신성한 명승지였으며, 삼국시대 금석문, 통일신라시대(『삼국유사』의 내용), 고려시대 말기 탐방기(이곡의 「동유기」), 조선시대 전기의 김시습의 시(詩), 조선시대 후기 겸재 정선의 성류굴그림 등 각 시대의 사료(史料)를 모두 가진 국내 유일한 명승지였음이 밝혀졌다. 이 명문은 신라 중고기 금석문의 기재방식인 직명(職名)+부명(部名)+인명(人名)+관등명(官等名) 순에서 아직까지 출신 부명이 확인되지 않지만, ‘대나마(大奈麻)’의 관등명이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 524년)와 동일한 글자로 되어 있는 점과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 명문을 조사한 학자들은 명문의 첫 부분인 ‘계해년(癸亥年)’이 543년과 603년(진평왕 25년) 및 663년(문무왕 3년) 중에서 543년에 해당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편 현재까지 판독(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심현용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 학예연구사 공동판독)된 글자는 다음과 같다.

 
“癸亥年三月/ 八日△丑付智/ 大奈麻未△△/ 此時我沂大思/ △古〔또는 右〕五(?)持△/ 知人夫息〔또는 見〕信/ 刀尒△咎△”

 
이 명문을 발견한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성류굴 입구 주변 암벽에는 이번에 발견된 명문 외에도 종유에 덮이거나 마모된 문자들이 보이는데, 이에 대한 추가정밀조사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류굴 명문이 신령한 경승지를 방문한 사실을 새겼다는 점에서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의 명문들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이와 더불어 울주 천전리 각석은 경주 월성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5㎞정도 떨어져 있지만, 울진 성류굴 각석은 126㎞나 떨어진 경승지의 암벽에 새긴 연대를 알 수 있는 방문기가 발견된 것은 현재까지 이것이 유일하다.

 

이 명문에 대하여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고대사)는 “당시 왕경의 관리가 성류굴에 왔다간 것은 이곳의 신성함과 관련시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울주 천전리 각석과 더불어 풍광 좋은 암벽에 새긴 삼국시대 명문은 매우 귀한 것으로 신라사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했다. 또한 이영호 경북대 교수(신라사)는 “최근에 성류굴 입구에서 명문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충북 제천 점말동굴 입구에 각석들이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로 신라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박광열 성림문화재연구원장(고고학)도 “울진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거점이었음은 신울진원전부지에서 발굴된 덕천리 신라고분군의 유물, 즉 6세기 중엽의 신라 왕경 귀족들이 착용하였던 금동관, 환두대도, 금귀걸이 등의 출토 유물들이 증명하고 있으며,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더불어 이번에 발견된 성류굴 각석도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보았다.
 
또 심현용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 학예사는 “1988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발견된 이후 또 신라시대 금석문이 발견된 것은 앞으로 울진지역이 신라사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울진 성류굴 명문을 조사해 온 학자들은 이 명문이 모두 판독되고 그 내용이 해석되면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비롯하여 삼국시대를 보완할 수 있는 6세기 신라의 관등, 제사(?), 지방통치 등을 연구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종합) 울진 성류굴서 신라 금석문 발견..."신라시대 최고의 경승지"
아시아뉴스통신 2015년12월16일 17시43분

 

박홍국 교수 6일 최초 발견... 자연 석회암벽면에 7행38자 음각
(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지난 6일 울진 성류굴 출구 위 자연석 석회암벽면에서 박홍국 교수(59, 위덕대 박물관장)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공개된 '울진성류굴 신라 금석문'(사진제공=문화재전문 사진작가 오세윤)

 경북 울진이 한국 고대사 연구의 중심지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소재 성류굴(천연기념물제155호) 입구 자연 석회암면에서 543년(신라 진흥왕4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금석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신라 금석문'이 성류굴 출구 자연암석에서 발견됨에 따라 성류굴이 신라인들로부터 '신성공간'이나 '경승지'로 인식되었음을 추정케 하는 단초로 해석돼 성류굴의 문화사적 의의와 가치가 재조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16일 세상에 알려진 '(가칭) 울진성류굴 신라 금석문'은 지난 6일 박홍국 교수(59 위덕대 박물관장)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고 학계에 보고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신라 금석문 발견으로 울진지역은 지난 1988년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울진봉평리신라비(국보제242호)'에 이어 다시 "한국 고대사 연구의 중심이자 신라시대 중심지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가칭) 울진성류굴 신라 금석문'은 성류굴 출구 위쪽 석회암면 가로30㎝×세로20㎝ 면적에 세로로 7행 38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글자의 크기는 가로 3㎝×세로4㎝정도이며 에서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해서체이다.  제작시기를 알려주는 첫 행은 "癸亥年三月/ 八日△丑付智/"로 비교적 또렷하게 확인된다.

 
 지난 6일 울진 성류굴 출구 위 자연석 석회암벽면에서 박홍국 교수(59 위덕대 박물관장)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공개된 '울진성류굴 신라 금석문'에 음각된 명문.(사진제공=위덕대박물관)  박 교수는 이와 관련 '계해년'이 '543년(진흥왕4년)'과 '603년(진평왕25년)', '663년(문무왕3년)' 중 '543년'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은 배경으로 "금석문에서 확인된 관직등급인 '大奈麻'가 568년 이후에는 '大奈末'로 바뀌어 나타나는 점"을 들었다.

 

 또 박 교수는 신라 중고기 금석문의 기재방식인 '직명(職名)+부명(部名)+인명(人名)+관등명(官等名)' 순이라며 현재까지 부명이 확인되지 않지만 '大奈麻'의 관등명이 '울진봉평신라비(524년 법흥왕 11년)'와 동일한 점과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된 점을 제시했다.  박 교수는 "성류굴 입구 주변 암벽에는 이번에 발견된 명문 외에도 종유에 덮이거나 마모된 문자들이 보인다"며 "추가정밀조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지난 6일 박홍국 교수가 울진 성류굴 출구 위 자연석 석회암벽면에서 발견한 신라 금석문 탁본 조사작업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위덕대박물관)

 

 ◆ '성류굴 신라 금석문'의 문화사적 가치

 이번 박 교수에 의해 최초 발견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가칭) 울진성류굴 신라 금석문'은 신라 당시의 관등체계 등 정치.행정사적 의미도 각별하지만 문화사적 의미가 더 큰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금석문은 "자연석에 새겨진 명문"이어서 더욱 학술적 가치가 높다는 진단이다. 박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금석문의 가치를 "고대사회에서의 성류굴에 대한 인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박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성류굴 명문이 신령한 경승지를 방문한 사실을 새겼다는 점에서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제147호)'의 명문들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또 박 교수와 함께 최초 명문 판독에 참여한 심현용 박사(울진군 학예사)도 이번에 발견된 금석문의 가치를 "고대사회에서의 성류굴에 대한 인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심 학예사는 "1988년 울진봉평리신라비가 발견된 이후 또 신라시대 금석문이 발견된 것은 앞으로 울진지역이 신라사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곧 이번 금석문 발견으로 성류굴이 신라시대 등 한국 고대사회부터 "신성공간"이나 빼어난 경관을 지닌 "경승지"로 인식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와 관련 노중국 박사(계명대 명예교수)는 "성류굴을 고대사회 울진지방의 굴신신앙의 현장"으로 제시한 바 있다. 노 교수는 이번 성류굴 금석문 발견과 관련 "당시 왕경의 관리가 성류굴에 왔다간 것은 이곳의 신성함과 관련시켜 고찰할 필요가 있다"며 "울주 천전리 각석과 더불어 풍광 좋은 암벽에 새긴 삼국시대 명문은 매우 귀한 것으로 신라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또 발견된 금석문에서 확인되듯 당시의 중앙 공무원에 해당하는 경위(京位)인 '大奈麻'가 성류굴을 찾아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성류굴이 당시 신라시대 "국가 차원의 제례의식"을 치룬 현장으로도 추정된다. 이번 울진 성류굴의 자연 동굴석에서 신라 금석문이 발견됨에 따라 전문학계에서는 명문이 완전하게 해독되고 내용이 해석되면 "성류굴의 문화사적 가치"와 함께 울진봉평리신라비를 비롯 삼국시대를 보완할 수 있는 6세기 신라의 관등, 제사, 지방통치 등을 연구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울진 성류굴에서 6세기 신라 금석문 발견
한국일보ㅣ인현우 기자ㅣ수정 2015.12.17 15:26 등록 2015.12.17 15:26

 


신라 진흥왕 때 중앙 관리가 방문해 남긴 것으로 추정

경북 울진군 근남면 성류굴 입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석문. 울진군 제공
경북 울진군 근남면에 있는 천연 석회암동굴인 성류굴 입구 암벽에서 신라 진흥왕 때인 543년 적힌 것으로 추정되는 금석문(金石文ㆍ돌에 새긴 문장)이 발견됐다. 추정이 사실로 확인되면 지금까지 성류굴에 관한 가장 빠른 기록인 8세기 통일신라 대 기록보다 150년쯤 앞선 기록이 된다. 비슷한 시기에 적힌 다른 신라 금석문과도 비교연구가 가능해 신라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울진군에 따르면 지난 6일 고고학 전공자인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이 성류굴을 조사하다 이 금석문을 발견하고 심현용 울진봉평리신라비전시관 학예연구사와 공동으로 내용을 판독한 결과 “계해년 3월 8일 △△축부지(△△丑付智ㆍ사람 이름으로 추정) 대나마(大奈麻)”라는 글귀를 확인했다. 여기서 ‘대나마’는 신라의 17관등 중 10번째에 해당하는 관직명이다. 신라의 수도 금성(지금의 경주)에서 일하는 관리가 명승지인 성류굴을 방문해 벽에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심현용 학예연구사는 “글귀가 남겨진 시기인 계해년(癸亥年)은 543년, 603년, 663년 중 하나인데, 금석문에 나오는 ‘대나마’ ‘차시(此時)’ 등은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에도 등장하는 표현이기에 그와 가장 가까운 543년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했다”고 밝혔다. 

 


[사진]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이 성류굴 입구에 새겨진 금석문을 탁본하고 있다. /위덕대학교박물관 제공

 

지금까지 성류굴에 관한 가장 빠른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온 통일신라 때 기록이다. 신문왕(재위 681~692년)의 왕자 중 하나로 왕위를 거부하고 출가해 승려가 된 보천(寶川)이 이 굴에 머물렀다는 내용이다. 543년이라는 연도 비정이 사실이라면 신라가 첫번째 전성기를 맞았던 진흥왕 시대에 이미 성류굴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명승지로 알려졌다는 뜻이다. 이는 울진이 신라의 주요 지역거점이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박광열 성림문화재연구원장은 “덕천리 신라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나 금귀걸이와 더불어 울진 지역이 신라가 팽창하던 6세기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음을 뒷받침하는 발견”이라 설명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석문 중 제작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501년 제작으로 추정되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다. 그 뒤로 영월 냉수리비(503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 울주 천전리 각석(525년), 제천 점말동굴 금석문(603년) 등이 있다. 특히 울주 천전리 각석과 제천 점말동굴 금석문은 신라 화랑들이 명승지를 찾아 심신을 수련한 내용을 암벽에 새긴 것이기에 학계에서는 성류굴 금석문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석문에서 확인된 글자는 “癸亥年三月/ 八日△△丑付智/ 大奈麻未△△/ 此時我沂大思/ △古(또는 右)五十(?)持△/ 知人夫息(또는 見)信/ 刀?△咎△” 정도로 대부분의 의미는 아직 알 수 없으나 ‘△△丑付智’라는 인물이 543년 3월 8일 성류굴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석문의 정확한 의미를 확인하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신라 금석문은 한자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고대 한국어를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표현(차자ㆍ借字)한 것이기 때문에 해독이 어렵다. 빠진 글자를 판독하고 다양한 금석문과 비교연구해야 의미를 알 수 있다. 이영호 경북대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금석문은 동굴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일부나마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동굴 내 전체적으로 글자가 남아있는지 등 면밀한 현장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사진] 성류굴에서 발견된 금석문에서 해독된 한문은 다음과 같다. “癸亥年三月/ 八日△△丑付智/ 大奈麻未△△/ 此時我沂大思/ △古(또는 右)五十(?)持△/ 知人夫息(또는 見)信/ 刀尒△咎△”. 대부분의 의미는 아직 알 수 없으나 ‘△△丑付智’라는 인물이 543년 3월 8일 성류굴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덕대학교박물관 제공

 

울진 성류굴서 신라 진흥왕 때 금석문 발견... 7행 38자 음각
뉴스1 | 최창호 기자 | 입력 2015.12.17 14:18 즐겨찾기 추가

 


[사진] 경북 울진 성류굴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석문/사진제공=오세윤 문화제전문사진작가© News1

 

진흥왕 때 관리가 성류굴 들렀다가 남긴 글 추정

(울진=뉴스1) 최창호 기자 = 천연기념물 제155호인 경북 울진군 성류굴에서 543년(신라 진흥왕 4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금석문이 발견됐다. 17일 금석문을 최초로 발견한 경주 위덕대 박홍국 교수(박물관장)에 따르면 성류굴 출구 윗쪽 석회암면에 가로 30cm, 세로 20cm 크기의 금석문에 세로 7행 38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금석문에 새겨진 '癸亥年三月 八日Δ丑付智 大奈麻未ΔΔ 此時我沂大思 Δ古五持Δ 知人夫息 刀ΔΔ咎Δ'의 글자 중 30자는 식별이 가능하다. 박 교수는 "연대 등을 해독할 수 있는 첫번째 행은 비교적 또렷하지만 나머지는 석회암 종유가 흘러내려 글자 획의 일부를 덮거나 표면이 없어져 판독이 어렵고 명문 후반부도 해석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전체 명문의 내용은 신라 진흥왕 4년(서기 543년) 3월8일 축부(丑付) 대나마(大奈麻·신라시대 17관등 중 10번째에 해당하는 수도의 관리 경위(京位))가 성류굴에 들렀다가 남긴 글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사진] 경주 위덕대 박홍국 교수가 서기 543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울진 성류굴 금석문의 탁본을 뜨고 있다./사진제공=위덕대박물관 © News1

금석문의 시기를 543년으로 추정한 것에 대해 박 교수는 "금석문에서 확인된 관직등급인 대나마(大奈麻)가 568년 이후에는 '大奈末'로 사용된 점과 '大奈麻'의 관등명이 울진봉평신라비(524년 법흥왕 11년)와 같고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현재까지 부명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신라 중고기 금석문의 기재방식인 '직명(職名)+부명(部名)+인명(人名)+관등명(官等名)' 순으로 기재돼 있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금석문 발견은 큰 행운"이라는 박 교수는 "봉화에 있는 고적을 답사하기 위해 성류굴을 지나다 굴 내부에 들어갔으며, 관람을 마치고 나오던 중 우연히 출구 윗부분에 있는 금석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발견된 명문 외에도 종유에 덮혀있는 문자가 보여 정밀조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choi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