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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법률·재판

[고수의 칼싸움] 두 칼장수 노인과 노파의 서글픈 칼싸움 사연

잠용(潛蓉) 2016. 1. 10. 12:39

"70대 칼장수, 옆집 칼장수 노파에 칼 휘두른 사연"
연합뉴스 | 입력 2016.01.10. 06:46

 


 

(서울=연합뉴스) 이효석 기자 = 8일 오전 서울 도봉구 서울북부지방법원의 한 법정 피고인석에 수의를 입은 백발노인 박모(74)씨가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주심 판사가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재판부는 징역형을…." 박씨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10일 법원에 따르면 박씨는 1942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고향 마을이 빨치산에 점령당해 피란길에 오른 박씨는 그 후로 교육을 받지 못해 지금도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휴전 후 고향에서 부잣집 머슴을 하던 박씨는 스무 살 되던 해 무작정 상경해 영등포시장에서 상인들의 칼을 갈아주는 '칼갈이'가 됐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평생 직업이 될 줄은 몰랐다.

 

20대 후반이 되던 1970년 즈음엔 동대문구의 한 시장으로 터전을 옮겼다. 독재 정권과 민주화 운동의 격랑이 휘몰아치는 동안에도, 금융 위기와 월드컵 열풍이 지나갈 때도 그는 묵묵히 시장 바닥에서 칼을 갈고 팔았다. 5만원 남짓 쥐어지는 하루 수입으로 수십 년 동안 모친을 봉양했다. 시장에서 도라지를 다듬던 처녀와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어느덧 70대 노인이 될 때까지 박씨는 매일 시장을 지켰다.

 

그러던 2010년께 A(68·여)씨가 시장에 등장해 칼을 팔기 시작했다. 박씨와 마찬가지로 A씨도 시장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영세 상인이었지만 박씨의 눈에는 A씨가 달라도 너무 달라 보였다. A씨는 40년 넘게 손수레 신세인 박씨와 달리 자릿세 5천만원을 내고 좌판 2개를 깔더니 외제 고급 칼을 팔기 시작했다. 얼마 후엔 한편에 3천만원짜리 칼갈이 기계까지 놓았다.

 

박씨는 자신이 동네 구멍가게라면 A씨는 대형마트로 느껴졌다. 금세 손님이 떨어져 나가 하루 수입이 2만∼3만원으로 줄었다. 박씨는 90대에 접어든 노모와 식당 일을 나가는 처를 볼 때마다 A씨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지난해 6월 초 박씨는 A씨가 새로 세운 입간판을 발견했다. '5일간 무료로 칼 갈아 드립니다.' 박씨에게 그 문장은 '이제 그만 시장을 떠나라'는 통보로 읽혔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박씨는 그달 10일 오후 4시께 결국 사고를 쳤다. 점심때 술을 많이 마신 박씨는 A씨를 보자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주변 상인들이 몰려와 제지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박씨가 칼을 빼앗기고서도 주먹을 휘둘러대는 바람에 A씨는 타박상을 입었다. 박씨는 현행범으로 체포돼 구속됐고 그해 6월 말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돼 법정에 섰다. 검찰은 박씨가 살인 의도가 명백했고 범행이 계획적이었다며 박씨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박씨는 최후 진술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제정신이 아니었다"면서 "아들이 구치소에 갇힌 줄도 모르는 94세 노모와 건강이 좋지 않은 처를 부양할 수 있도록 한 번만 기회를 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박씨의 하소연은 인용되지 않았다. 서울북부지법 형사13부(이효두 부장판사)는 박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도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일흔에 가까운 고령일뿐더러 시장에서 칼을 파는 영세상인에 불과한데 피고인은 상대적 박탈감에 휩싸여 극히 위험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박씨를 질타했다. 이어서 "피고가 당시 술에 취해 있었지만 의사 결정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보이지는 않는다"면서 "동기가 좋지 않아 실형이 불가피하지만 진심으로 깊이 반성하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hyo@yna.co.kr]

 

[사진: 무림영화 <칠검 七劍>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