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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공예·조각

[문화재 발굴] 러시아 연해주서 고대 부여 동검 첫 발견

잠용(潛蓉) 2016. 4. 28. 18:32

[단독] 러시아 연해주서 기원전 3∼4세기 부여 동검(銅劍) 첫 발견
동아일보 | 입력 2016.04.28. 03:06

 

고대 옥저의 영토.. 부여와 교역 증거, 中 위나라 희귀 동전도 출토돼
고대 국가 옥저의 영토인 러시아 연해주에서 기원전 3∼4세기 부여계 동검(銅劍)이 처음 발견됐다. 이 동검은 옥저와 부여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위서동이전 등 문헌상 확인되는 부여와 옥저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2세기인데 이보다 앞선 유물이 발견돼 주목된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고고학)에 따르면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주(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 부근에서 부여계 안테나식(촉각식) 동검과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화폐인 ‘칠원일근(칠垣一근)’이 현지 사학자들에 의해 최근 발견됐다. 동검은 손잡이 끝부분의 장식이 양옆으로 돌출돼 마치 안테나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부여의 대표적인 유물로 꼽힌다. 

 

 

[사진] 러시아 연해주 니콜라옙카 성터 부근에서 최근 발견된 ‘부여계 동검’ 조각들(아래 왼쪽 사진). 각 조각을 이어 붙인 뒤 빠진 부분을 컴퓨터그래픽으로 복원한 모습(위 사진). 전형적인 안테나식 동검이다. 이 동검 근처에서 위나라 동전(아래 오른쪽 사진)도 발견됐다. /강인욱 교수 제공

 

강 교수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총길이 약 40cm인 이 동검은 4개로 조각 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칼날 조각의 두께는 0.5∼0.9cm, 최대 너비는 2.2cm다. 칼날의 형태가 길쭉하게 떨어지는 전형적인 세형동검이다. 특이하게 손잡이 아랫부분에 T자형 홈이 파여 있다. 홈 아래로 돌출된 안테나 장식이 붙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새 두 마리가 부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는 모양이다.

 

동검은 곳곳에 닳은 흔적이 남아 있어 오랫동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 교수는 “조각들의 부러진 모습 등을 감안할 때 장례용으로 동검을 땅에 묻으면서 일부러 부러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동검 근처에서 발견된 칠원일근은 한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뚫린 직경 3.5cm의 동전. 기원전 3∼4세기에 통용된 이 화폐는 극히 적은 수량만 제작돼 지금껏 한반도나 주변 지역에선 출토된 전례가 없다.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사람을 위해 동검과 동전을 함께 묻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강 교수는 “위나라 화폐는 당시 매우 귀했으며 중원∼요동반도∼연해주로 이어지는 모피 무역 과정에서 거래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동검은 초기 옥저가 부여와 교역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30 t 심초석 들어올리자

생각도 못한 유물 3000점이 우르르
[동아일보] 입력 2016.04.28. 03:04 | 수정 2016.04.28. 08:46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7>

황룡사지의 비밀 캔 김동현 前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아이고마 보는 사람 심장이 다 떨어지겠습니더.”
1978년 7월 28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 터 발굴 현장. 포항제철의 크레인 기사가 최병현 조사원(현 숭실대 명예교수)에게 소리쳤다. 30t 무게의 목탑터 심초석(心礎石·목탑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의 주춧돌)을 대형 크레인으로 들어올리자마자 최병현과 동료가 그 아래로 들어간 것. 이들은 심초석 밑에 혹 유물이 묻혀 있는지 샅샅이 훑었다. 심초석을 옮겨서 내려놓을 때 잔존 유물이 파괴되는 걸 막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워낙 무겁다 보니 크레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릴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동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79)의 입술도 바싹 타들어 갔다.

 


[사진] 김동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22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지 목탑 터에서 심초석 위에 놓여 있는 막음돌을 가리키고 있다. 막음돌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으로 황룡사가 불탄 뒤 심초석 내 사리가 들어 있는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경주=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22일 팔순에 가까운 김동현은 38년 만에 다시 그 자리에 섰다. 그는 지팡이를 짚은 채 약 8만 m²의 광활한 황룡사 터 한가운데 있는 9층 목탑 터로 서서히 걸어갔다. 심초석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이윽고 입을 뗐다. “들어올릴 때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갑자기 3년 전 월지(안압지) 목선 사고가 머릴 스치더군요. 머리카락이 쭈뼛 섰습니다.”

 


[사진] 1978년 황룡사지에서 발굴한 높이 2m의 대형 '치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975년 경주 월지 뻘층에서 인부들이 목선을 파낸 뒤 옮기는 과정에서 목선이 두 동강 나는 사고가 벌어졌다. 당시 현장을 지휘한 김동현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지만 곧 반려됐다. 그는 심초석을 옮기며 그때의 악몽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다행히 돌은 무사히 빈 땅에 안착했다.


사실 당시 누구도 탑의 심초석 아래를 발굴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석탑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를 수습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구태여 무거운 심초석을 들어내 발굴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이었다. 황룡사 터 심초석 발굴 때에도 일부 학자들은 사고 위험을 거론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건축공학을 전공한 김동현의 생각은 달랐다. 탑의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가장 아랫부분의 기초를 확인해야 한다고 봤다. “난 발굴에 들어갈 때 인문학적인 요소 이상으로 공학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졌어요. 천마총 발굴 땐 소요 인력이나 흙, 돌의 양을 수치로 계산해 봤습니다. 정통 고고학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 영역이죠.”

 

심초석 아래는 그의 예상대로 적심석(積心石·초석과 함께 건물 밑바닥에 까는 돌)이 설치돼 있었다. 평평하지 않은 자연 지형에서 거대한 하중을 지탱할 수 있는 구조였다. 신라인들의 지혜가 발휘된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의 존재였다. 심초석이 놓였던 자리를 10cm가량 파내자 청동거울과 금동 귀고리, 청동 그릇, 당나라 백자항아리 등 3000여 점의 유물이 한꺼번에 나왔다. 탑을 세울 때 귀족들이 사용하던 장신구를 부처에게 바친 공양품과 액땜을 위해 땅속에 묻는 예물인 진단구(鎭壇具)였다.

 

이것은 한국 고고학사에서 새로운 해석을 낳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금귀고리는 장례용 의례품이라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나 황룡사 공양품으로 발원자가 착용한 귀고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것이 신라시대 당시 실생활에도 쓰였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게다가 이 귀고리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 연도(645년)를 통해 시기가 확인되기 때문에 다른 신라 귀고리의 양식이나 편년을 비교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됐다.

 


[사진] 1978년 7월 28일 무게가 30t에 이르는 황룡사지 목탑 터 심초석을 당시 포항제철에서 빌린 크레인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무엇보다 고고학계가 꼽는 황룡사지 발굴의 최대 성과는 황룡사의 가람 배치가 1탑(塔) 3금당(金堂)식이라는 사실을 처음 규명한 것이다. 즉, 9층 목탑을 가운데 두고 북쪽에 3개의 금당을 나란히 세운 황룡사의 독특한 가람 배치를 알아낸 것이다. 1978년 이전까지 황룡사의 가람 배치는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 전 도쿄대 교수가 1930년 논문에서 주장한 ‘1탑 1금당’이 정설이었다. 광복 33년 만에 일제강점기의 부실한 발굴 성과를 우리 손으로 극복한 것이다.


“1980년 일본 도쿄대로 유학을 갔는데 지도교수에게서 ‘황룡사 발굴 현장에 압도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내가 최고로 치는 황룡사 출토 유물은 높이 2m짜리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입니다.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신라인들은 이 거대한 치미를 통째로 가마에서 구워 냈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 사찰은 나무로 짠 틀에 동판을 붙여 치미를 겨우 흉내 냈죠. 황룡사는 위대한 선조들이 남긴 압도적인 문화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