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로 풀어보는 박 대통령 '불통 인사' 미스터리
한겨레ㅣ2016.11.04 08:56 수정 2016.11.04 09:06
되돌아보는 박근혜 정부 ‘인사 참사’
↑ ‘인사 참사’라는 말을 들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인선. 2014년 6월10일 박근혜 대통령은 문창극 후보자를 ‘깜짝 발탁’했다.
“이제서야 모든 미스터리가 풀렸다.”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박근혜 정부의 ‘불통 인사’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려가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류진룡 장관을 비롯해 노태강 국장·진재수 과장 등이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승마 문제로 경질·해임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지탄의 대상이었던 ‘인사 참사’의 책임이 최씨와 그의 측근들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 ‘최순실 국정농단’의 주무대,“문화 융성”
여당이 “사퇴” 요구한 김상률 ‘장수’ 미스터리
2014년 11월18일 청와대가 교육문화수석으로 김상률 숙명여대 교수를 전격 발탁했을 땐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2013년 2월 윤창중 발탁( ▶‘또 불통인사’…청와대 대변인에 윤창중 ), 2014년 6월 문창극 발탁 ( ▶[연합] ‘깜짝' 발탁 총리후보 문창극은 누구 ) 등으로 청와대가 ‘흙 속의 진주’를 발굴해내는 ‘깜짝 인사’엔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김상률 수석은 평소 대학 시장화 반대를 외치는 등, 박근혜 정권의 색깔과 사뭇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상률 교육수석, 결이 다른 발탁 배경은? )
하태경·이노근·김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반대 논평을 내고 “청와대 인사시스템의 심각한 난맥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청와대는 김상률 수석을 대통령께 추천한 사람을 즉각 공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뉴데일리> <미디어펜> 등 극우성향 인터넷 매체들도 연일 성토했습니다. 여당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발탁했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청와대 수석 인사의 최종결정권자는 대통령인데다, ‘코드’가 다른 김 수석을 감히 추천할 만한 인물이 있었겠냐는 논리였습니다. ( ▶“얼치기 반미주의자” 청와대 수석, 누가 발탁했나 )
↑ <뉴데일리> 인터넷 기사 화면 갈무리
격렬한 사퇴 요구를 받으면서도 청와대 ‘장수 수석’으로 남은 ‘김상률 미스터리’, 최순실 게이트 덕분에 비로소 풀렸습니다. 최씨의 최측근으로 미르재단 일을 도맡은 데다 문화계 전체를 좌지우지했다는 말을 듣고 있는 차은택 CF감독, 그의 외삼촌이 김상률 수석이었던 겁니다. 차씨는 최씨와 2014년께 만나 각별한 사이로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차은택 누구인가? 문화융복합 사업 주무른 ‘실세’…“대통령과 매달 한차례 회의”)
이제 와 되돌아보니 더욱 기막힌 것은, 김상률 수석의 선임이 2014년 11월 중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내각을 쇄신하겠다며 문창극씨 등을 발탁해 ‘인사 참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던 게 그해 6월이었고요, 그 인사 참사의 책임론을 둘러싸고 비선을 지목하는 ‘정윤회 게이트’가 터진 게 김상률 수석 선임 직후인 11월 말이었습니다. 정윤회씨의 전 부인인 최순실씨(2014년 5월 이혼)는 2015년 여름께부터 차씨 등과 함께 두 재단 준비 작업에 나섭니다. 비선 논란을 겪고도 큰 두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잘린 변추석·여명석
변추석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임기를 2년이나 남겨놓고 별안간 사임해 마찬가지로 궁금증을 자아냈던 인물입니다. ( ▶변추석 한국관광공사 사장 돌연 사의, 왜? ) 18대 대선 당시 새누리당 홍보본부장으로 뛰며 박 대통령의 초성인 ‘ㅂㄱㅎ’으로 웃는 얼굴을 고안한 시각디자인 전문가이고, 당선인 비서실 홍보팀장도 맡은 ‘개국공신’입니다. 대통령 임명직인 관광공사 사장으로 2014년 4월 임명됐는데, 밀라노엑스포 한국관 커미셔너이기도 한 그가 2015년 5월 예정된 밀라노 엑스포를 앞두고 3월27일 돌연 “건강상 이유”라며 사직한 겁니다.
‘개국공신 원조 친박’을 밀어낸 정황에도 최순실씨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지난 10월19일 변추석 전 사장은 <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밀라노 엑스포 총감독직을 차은택에게 맡기는 데 반대했었다’고 말했습니다. (▶“차은택 총감독 반대하자 나가라는 분위기” ) 차씨는 밀라노 엑스포 한국관 총감독을 맡으며 ‘문화계 황태자’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바 있습니다.
여명석 게임물관리위원장은 문화창조융합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지 한 달 반 만에 경질됐습니다. 당시 정황을 두고, <조선일보>의 최보식 기자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임명 사흘 뒤 A씨는 자신을 발탁해준 김종덕 당시 문화부장관의 저녁 호출을 받았다. 호텔 음식점 방에는 장관 외에 차은택과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도 앉아 있었다. 이들끼리 숙의가 끝날 때까지 A씨는 바깥에서 한 시간 이상 기다렸다. 그런 뒤 들어가자 이런 지침을 받았다. “문화창조융합 일은 차은택이 시킨 대로 하면 된다. 그가 편하게 일하도록 명예단장 직을 주면 어떤가.” (조선일보, 9월 30일, ‘미르재단과 문화계 황태자를 둘러싼 미스터리’ )
여명석 위원장은 10월13일 열린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차씨에게 협조하라는 김종덕 문체부 장관의 지시를 받았다고 인정했습니다. 여 위원장은 시키는 대로 차씨에게 협조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결재나 집행 내역에 대한 감사를 하자고 제안했었다고 합니다. (▶‘차은택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사실로 드러나) 이처럼 유독 박근혜 정권 들어 문화·관광사업은 잦은 파열음을 냈습니다. 당시 ‘여권 관계자’의 하소연입니다. “도대체 (박근혜 정부는) 문화산업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 때는 그래도 대화는 됐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누구랑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말한들 합리적인 토론이 안 된다. 이대로 가면 문화 관광산업은 박살난다.” (주간경향, 2015년 6월9일, ‘박근혜 정부 문화정책은 문화예술계 길들이기?’)
■ 승마 뿐 아니라 올림픽까지?
조양호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사퇴 미스터리
지난 5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맡고 있던 2018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갑자기 떠난 것도 최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 5월3일, 조 전 위원장은 조직위를 “전격 사퇴”했는데요, 동계올림픽 준비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 ▶조양호 전격 사퇴, 평창 올림픽 비상 )와 함께 사퇴 사유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09년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을 맡으며 2011년 유치가 확정되기까지 22개월 간 34차례나 해외출장을 다녔을 정도로 발 벗고 뛰었던 조 전 위원장이었습니다. 국제스포츠 외교 무대에 설 것을 대비해 스피치 개인과외까지 따로 받았다는 이야기도 유명했습니다. 위원장 사임 소식이 알려진 날 박 대통령은 이란 순방 중이었는데, 그날 저녁 바로 후임자를 지명했습니다.
<경향신문>은 2일 조직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당시 사퇴 과정에 최순실이 연루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지난 5월2일 아침. 조양호 2018 평창 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사진)이 김종덕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마주앉았다. 김 장관은 조 위원장에게 “이만 물러나 주셔야겠습니다”라고 했다. 깜짝 놀란 조 위원장이 “이유가 뭡니까”라고 물었지만, “저도 모릅니다”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조 위원장은 다음날 전격 사퇴를 발표했다. 조직위는 보도자료를 통해 “조 위원장이 한진해운 경영 정상화에 전념하기 위해 위원장직을 내놓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시종 어두운 표정으로 회의를 진행하던 조 위원장은 임직원과 작별 인사를 하면서 끝내 눈물을 보였다. (경향신문, 11월2일, “이만 자리에서 물러나 주셔야겠습니다” 김종덕, 조양호 사퇴 강요)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조직위 관계자는 “조 위원장이 3억~5억원대의 용역 및 컨설팅 프로그램 결제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며 사인을 거부했는데 그게 결정적으로 ‘해고’로 이어진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자세한 정황을 알아보면 이렇습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문체부는 경기장 부속시설을 새로 지어야 한다며 스위스의 스포츠시설 전문 건설사인 누슬리 사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의 회의 발언이라며 누슬리를 검토해보라는 의견도 조직위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누슬리 사는 바로, 최씨가 실소유한 회사 ‘더블루케이’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회사입니다. 조 전 위원장이 누슬리 사를 거부하고 대림건설과 수의계약을 체결했는데, 덕분에 최씨에게 미운털이 박혀 조직위원장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겁니다. 지난 4월 평창 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를 ‘진돗개’로 밀어붙이려던 청와대가 마스코트 채택에 실패하자 “조 위원장이 무능해서 IOC를 설득하지 못했다”며 화를 냈다는 얘기(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평창 마스코트로 진돗개 고집” )도 있습니다. 진돗개는 박 대통령의 애완견입니다.
↑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10월4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한진해운 부실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던 중 물류대란을 일으켜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조 위원장이 최씨의 미움을 사 조직위원장 자리에서 밀려난 것은 물론 기업 운영에도 불이익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매출액과 비교해 적은 10억원을 미르재단에 냈는데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가게 된 것도 돈을 조금밖에 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3일치 보도에서 정부가 의도적으로 한진해운을 청산하는 쪽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했다는 노조위원장의 주장(▶조양호, 미르에 낸 돈 10억…괘씸죄로 한진해운 법정관리?)을 실었습니다. 구조조정 위기에 놓였던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두 회사 가운데, 올 초까지 생존 가능성이 큰 곳은 한진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현대상선은 KB금융지주가 시장예상가액(6000억원)보다 비싼 1조2500억원에 현대증권을 사가면서 자금 마련에 성공했고, 반면 한진해운은 정부에 3000억원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해운산업에 6조5000억원을 투입해 정상화하겠다고 지난 10월31일 밝힌 바 있습니다.
■ 잘려나간 공신들… 누구의 ‘역린’ 거슬렀나
풀리지 않은 최대석 미스터리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도 있습니다. “최대석 미스터리”로 정치권에 널리 회자된 최대석 이화여대 교수 사퇴 건입니다. 박 대통령과 10여년을 함께 해 온 최측근이자 대선 캠프의 핵심 브레인이었고 대통령의 신망도 두터워 차기 통일부 장관으로 확실시됐던 최대석 교수는, 박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12년 1월13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 직을 갑자기 사퇴합니다. 최 교수의 행적을 보면 더욱 묘합니다. 그는 사퇴 전날인 12일 오후 5시30분께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 사무실에서 김용준 인수위원장에게 사의를 표명했다는데, 이날 오전 10시엔 국가정보원 업무보고를 받았고 점심엔 남북관계 전문가를 만나 의견을 들었으며 오후 4시께까지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을 만나서 “앞으로 도와 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시간 전까지도 차기 정부의 일을 챙기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사의를 표명하고) 인수위 사무실을 나서는 최 교수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 쪽에선 아무런 해명도 내놓지 않아 온갖 설이 난무했습니다. 비서실 핵심 관계자까지도 대변인 발표를 보고 알았다고 할 정도로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인수위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인수위원들도 진짜 답을 몰라서 얘기를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기자들과, 윤창중 당시 인수위 대변인은 서로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도 했습니다. ( ▶최대석 사퇴 미스터리… “그렇게만 알아달라” 또 불통)
〈한겨레〉 그래픽 자료.
사상 초유 “빽도” 천해성 미스터리
다음에 일어난 일을 보면 ‘최대석 미스터리’ 정도는 약과입니다. 이미 청와대가 내정자로 발표했던 사람을 “도로 물리는” 사태, 2014년 2월3일 청와대 국가안보실 안보전략비서관으로 내정됐던 천해성 전 통일부 통일정책실장 이야기입니다. 통일부가 추천한 여러 비서관 후보 가운데 천 전 실장을 낙점해 발표까지 해놓고선, 돌연 들이지 않겠다고 하니 난리가 났습니다. 청와대는 “내정 철회” 사유로 “통일부의 필수 핵심 요원이어서 통일부 업무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고 보고 다시 돌려보냈다”라고 했지만, 통일부에선 후임 통일정책실장까지 이미 임명한 뒤라 천 전 실장은 본래 직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북회담본부 상근대표로 가야 했습니다. 최대석 교수 때처럼 또 다른 ‘인사 미스터리’가 추가됐다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 문제와 통일·외교안보 전문가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정부 관계자는 “본인조차 내정 철회 사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며 “청와대가 인사 번복을 해놓고 충분한 설명도 하지 않는 바람에 유능한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지난해 개성공단 재가동 문제를 북한과 협상하면서 남측 수석대표인 서호 남북협력지구지원단장을 경질할 때도 자세한 이유를 밝히지 않아 의구심을 키웠다. 이에 따라 외교안보 부처 관계자들은 이날 하루 종일 청와대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모습이었다. (동아일보, 2014년 2월13일)
이 밖에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에 내정됐다가 출근 하루 만인 대통령 취임식 날 오후에 “보따리를 쌌던” 이종원 전 <조선일보> 부국장 미스터리도 있습니다. ( 관련기사보기 ▶‘많이 알면 다치는’ 청와대 ) “그때 왜 그랬을까” 그간 폭증했던 인사 미스터리의 해답이 ‘최순실과 그의 사람들’이 등장하며 속속 밝혀지는 가운데, 나머지 미스터리도 풀릴 수 있을까요? 누리꾼들의 관심이 쏠리는 요즘입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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